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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hat ng Kabanata ng 열녀, 상복을 찢다: Kabanata 151 - Kabanata 160

216 Kabanata

 제19부: 억눌린 불꽃 2

2. 바느질: 살을 찌르는 아찔한 환영미쳐버릴 것만 같은 낮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아랫배 깊은 곳을 후벼 파는 갈증을 잊기 위해, 그녀는 머리맡의 바느질고리를 끌어당겼다. 새하얀 명주 천 위에 붉은 매화를 수놓는 일. 숨통이 막힌 청상과부에게 허락된 유일한 소일거리였다.그녀는 가느다란 바늘을 두 손가락 끝으로 집어 들었다. 창호지를 투과해 들어온 희미한 낮빛을 받아 바늘 끝이 차갑게 번뜩였다. 그녀는 수틀에 팽팽하게 당겨진 하얀 명주 천 위로 바늘 끝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폭.팽팽하던 명주결이 갈라지며 바늘이 파고들었다. 아주 작고 날카로운 마찰음. 그 찰나, 정씨 부인의 가녀린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흐려진 그녀의 눈앞으로, 며칠 전 사랑채의 쏟아진 서책 위에서 겪었던 그 숨 막히고도 농밀했던 얽힘이 환영처럼 어른거렸다. 팽팽한 천이 뚫리며 바늘을 꽉 조여 무는 그 미세한 저항감이, 자신의 여린 살결이 다칠세라 애타게 조심하면서도, 한번 길을 열자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장 은밀한 속살 끝까지 묵직하게 파고들던 돌쇠의 뜨거운 열기를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찌르고, 당기고, 다시 깊숙이 밀어 넣고,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가쁘게 반복되는 바느질의 율동 속에서 등골을 타고 기묘한 열기가 번져 올랐다.하지만 텅 빈 단전을 남김없이 채워주던 사내의 태산 같은 하중에 비하면, 이 가느다란 바늘 끝의 자극은 굶주린 여인을 애태우는 고문에 불과했다. 달아오른 틈새를 헛되이 간지럽히며 속불만 더 거세게 지펴 올릴 뿐이었다."아윽!"짧은 신음이 터졌다.떨리던 손가락이 빗나가며 바늘 끝이 그녀의 연한 집게손가락 살갗을 깊숙이 찔렀다. 창백한 살결 위로 선홍빛 핏방울이 봉긋하게 솟아올랐다.이내 손끝에 고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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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부: 억눌린 불꽃 3

3. 언 땅의 노역: 살을 깎는 형벌같은 시각, 행랑채 헛간에서조차 내몰린 돌쇠는 종택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거친 산비탈 자갈밭으로 유배되어 있었다. 시어머니의 서릿발 같은 명이 떨어진 탓이었다."종놈의 머릿속에 요망한 잡생각이 싹트지 못하도록, 해가 질 때까지 언 자갈밭의 돌만 파내게 만들어라. 사지가 녹초가 되어야 감히 딴생각을 품지 못하는 법이다."입춘을 앞둔 매서운 산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불어닥쳤다. 그늘 한 점 없는 황량한 밭고랑 한가운데서, 돌쇠는 땀에 절은 삼베 적삼을 벗어 던진 채 묵묵히 곡괭이질을 이어가고 있었다.깡! 까앙!겨우내 얼어붙었던 자갈밭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곡괭이 날이 돌멩이에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며 둔탁한 쇳소리가 골짜기를 흔들었다.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서도 돌쇠의 구릿빛 등판에는 굵은 핏줄이 솟아올랐고, 단전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기 탓에 더운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마님을 향한 애타는 그리움과 주체할 길 없는 양기(陽氣)를 다스리지 못해, 제 기운을 깎아내며 버티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그는 언 땅을 내리찍을 때마다 어두운 방에 갇혀 있을 정씨 부인을 떠올렸다. 자신의 거친 굳은살이 스쳐 다칠세라 숨을 죽이며 조심스레 어루만질 때마다 파르르 떨리던 하얀 살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자신을 올려다보던 젖은 눈동자, 그리고 자신을 빈틈없이 감싸 안으며 촛농처럼 녹아내리던 그 뜨겁고 여린 속살.그는 발밑의 차갑고 딱딱한 언 땅을 마님의 숨통을 죄는 종택의 법도라 여겼다. 이 얼어붙은 껍데기를 기어이 파헤쳐, 그 아래 숨겨진 부드럽고 따뜻한 흙을 마주하겠다는 일념으로 쉼 없이 곡괭이를 휘둘렀다."으아아아..."돌쇠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낮고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턱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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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부: 억눌린 불꽃 4

4. 단전의 끈끈한 공명한 번 살과 피의 온기를 나눈 남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혈의 끈으로 묶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결핍을 고스란히 느끼는 법이다.매서운 바람이 창호지 문살을 흔들던 한낮의 미시(未時) 무렵. 차가운 안방에 앉아 있던 정씨 부인은 서늘하던 등줄기를 타고 돌연 화끈하게 치밀어 오르는 열감을 느꼈다. 마치 화로에서 갓 꺼낸 뜨거운 인두를 척추뼈 위에 바짝 가져다 댄 듯한 아찔한 열기였다.'그 사내가... 지금 피가 끓도록 애를 태우고 있구나.'팔뚝의 솜털이 곤두서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산비탈의 찬바람 속에서도 돌쇠의 등판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그의 억센 어깨가 한계에 다다라 거칠게 들썩이고 있음을. 사내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파동이 되어 그녀의 여린 명치끝을 묵직하게 울렸다.같은 순간, 산비탈 밭고랑에 서 있던 돌쇠 역시 허공에 쳐들었던 곡괭이를 멈추고 종택의 안채 방향을 돌아보았다. 불쑥 명치끝이 꽉 막혀오며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마님이... 어두운 방에서 피눈물을 삼키고 계신다.'단전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으로 그 사실이 전해졌다.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이 소나기를 기다리듯, 시어머니의 감시망에 눌린 그녀의 시린 몸이 자신의 더운 체온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담장과 방문을 부수고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으나, 사방에 그물이 쳐진 지금 섣불리 날뛰었다가는 연약한 그녀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들 뿐이었다.돌쇠는 치밀어 오르는 숨을 삼키며, 곡괭이를 높이 쳐들어 다시 언 대지를 힘껏 내리찍었다.콰앙!단단한 땅이 갈라지며 묵직하게 진동했다.'소인의 심장이 아직 이리 뛰고 있으니, 부디 약한 마음 먹지 마시고 버텨주십시오.'사내는 대지의 기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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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부: 억눌린 불꽃 5

5. 핏기 없는 양식과 처절한 단식땅거미가 내려앉자 저녁상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시어머니의 감시 아래 부엌 어멈이 조심스레 들여놓은 소반이었다. 희멀건 쌀밥, 기름기 하나 없는 맑은 뭇국, 고춧가루 한 점 쓰지 않은 하얀 백김치. 젊은 과부의 들끓는 기혈을 식히고 음심을 잠재운다는 명분으로 차려낸, 산 사람의 생기를 말리는 창백한 음식뿐이었다.정씨 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놋숟가락을 들었다. 밥알을 입에 넣었으나 모래알처럼 까슬거렸고 식도가 막혀 넘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눈을 감고 지난밤들의 기억을 떠올렸다. 속이 붉고 말랑하게 농익었던 곶감의 단맛, 사내의 손끝에 묻어 입안으로 밀려들던 끈적한 꿀의 향기, 그리고 어둠 속에서 맞닿았던 돌쇠의 입술과 땀 밴 살갗의 짭짤하고도 더운 맛. 식은 피를 돌게 하고 빈속을 채워주던 그 살아 있는 온기를 떠올리자 마른 혀 밑에 뜨거운 단침이 고였다."어찌 여태 수저를 들지 않느냐."창호지 문 너머 툇마루에서 시어머니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노파는 문을 열지 않고도 기척 하나만으로 며느리의 움직임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입맛이 도무지 돌지 않아... 삼키기가 버겁습니다, 어머님.""억지로라도 한 술 떠서 넘겨라. 뱃속에 곡기가 들어가야 가문에 내려질 열녀문(烈女門)의 지엄한 영광도 산 몸으로 받들 것이 아니냐. 제 몸뚱이를 함부로 축내어 사당의 조상님들께 불효를 저지를 셈이냐."정씨 부인은 어금니를 악물고 미지근한 국물을 한 모금 삼켰다.우욱.순간 식도가 뒤틀리며 시큼한 구역질이 명치끝에서 치밀어 올랐다. 뜨거운 생명을 맛본 그녀의 몸이 이 메마르고 차가운 음식을 완강히 거부하며 경련을 일으킨 것이다.그녀는 탁, 소리가 나게 숟가락을 소반 위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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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부: 억눌린 불꽃 6

6. 어둠 속의 열병: 빈자리가 남긴 고문밤이 깊어지자 방 안의 미미하던 온기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유폐된 여인의 숨통을 조이는 진짜 고문은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릴 때 시작되었다. 시야가 닫히자, 살갗에 스치는 감촉과 코끝에 맴도는 기억의 잔향만이 또렷하게 살아나 피를 말렸다.정씨 부인은 차가운 비단 이불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맨살을 감싸는 매끄러운 비단 감촉이 뱀의 허물처럼 서늘하고 낯설었다. 그녀는 이 차가운 비단이 아니라, 자신을 빈틈없이 덮어 누르던 사내의 묵직한 체중과 화로처럼 뜨거운 가슴팍, 그리고 거친 굳은살이 박인 그 투박한 손길을 애타게 갈구했다.눈을 질끈 감자 어둠 속에서 돌쇠의 떡 벌어진 어깨와 구릿빛 윤곽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의 거칠고 더운 숨소리가 귀밑 솜털을 스치며 귓바퀴를 적시는 듯했고, 짠 땀 냄새와 묵직한 흙냄새가 코끝을 아찔하게 스치고 지나갔다."돌쇠야... 아아..."그녀는 달뜬 숨을 몰아쉬며 허공을 향해 가녀린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끝에 닿는 것은 시린 밤공기뿐이었다. 목이 졸려 숨이 막혀가는 이가 한 모금의 공기를 찾듯, 사내의 온기가 사라진 빈자리는 그녀의 명치끝을 숨 막히게 조여 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땀에 젖은 제 가슴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손안에 잡혔으나, 돌쇠의 넓고 뜨거운 손바닥이 닿았을 때처럼 등골을 타고 번지는 전율은 일지 않았다. 그녀는 가쁜 숨을 삼키며, 타들어 가는 갈증을 달래보려 떨리는 손을 아랫배 아래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미끄러뜨렸다. 허벅지 사이의 뜨겁고 축축하게 젖어 든 틈새로 가느다란 손가락 끝을 가져갔다.살갗이 닿았다. 그 찰나, 그녀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몸을 굳히며 손을 멈췄다."흐윽... 아니야... 이것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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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부: 억눌린 불꽃 7

7. 담장 너머의 기척: 어둠을 가르는 조약돌같은 시각, 돌쇠 역시 헛간에서 눈을 붙이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기어 나왔다. 칼바람 아래 하루 종일 언 땅을 파헤친 몸은 지쳐 있었으나, 사내의 곤두선 신경은 밤의 어둠을 만난 맹수처럼 날카롭게 깨어 있었다.그는 종택의 그림자를 밟으며 안채 뒷담 너머에 가지를 드리운 늙은 감나무 위로 소리 없이 기어 올라갔다. 높다란 기와 담장 너머로 어둠에 잠긴 안채의 깊은 처마와 정씨 부인이 갇혀 있는 안방의 창호지 문이 아스라이 내려다보였다. 저 숨 막히는 백색의 무덤 속에 자신의 여인이 홀로 갇혀 피가 말라가고 있었다.그는 흙 묻은 주머니에서 낮에 밭고랑을 파다가 주워 간직해 둔 작은 조약돌 하나를 꺼냈다. 잠시 망설임이 스쳤다. 이 고요한 밤에 돌을 던졌다가 건넌방의 시어머니가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당장 멍석에 말려 매질을 당하거나 관아로 끌려가 목숨을 잃을 터였다.하지만 명치끝까지 차오르는 애타는 그리움을 더는 누를 길이 없었다. 자신이 이 담장 너머에 아직 살아 버티고 있다는 것, 마님의 부름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기척을 전하지 못한다면, 저 먹먹한 방 안에서 그녀가 제풀에 지쳐 스러져버릴 것만 같았다.그는 숨을 고르고 단단한 팔을 뒤로 힘껏 당겼다.슈욱.작은 조약돌이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안채 담장을 넘어 날아갔다.투둑, 탁.깊은 처마 아래, 정씨 부인의 방문 바로 앞 매끄러운 댓돌 모서리에 조약돌이 부딪혀 튕기며 마루 밑으로 구르는 소리가 났다. 밤바람 소리에 묻혀 스러질 만큼 짧은 마찰음이었으나, 온 신경을 문밖으로 곤두세우고 있던 정씨 부인의 귓가에는 마른하늘의 우레처럼 선명하게 내려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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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부: 억눌린 불꽃 8

8. 피의 신호: 어둠 속의 맹세정씨 부인은 비단 이불을 걷고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왔다.'가녀린 갈비뼈 아래서 심장이 쾅, 쾅, 쾅 거세게 방망이질을 쳤다. 그것은 바람에 구르는 돌소리가 아니었다. 담장 너머 어둠 속에서 자신을 향해 보내오는 돌쇠의 뜨거운 맥박 소리였다.그녀는 소리 없이 엎드려 굳게 닫힌 방문 쪽으로 기어갔다. 두 문짝의 좁은 틈새 사이로 시린 겨울 달빛이 실선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숨소리를 죽인 채 좁은 문틈에 눈을 바짝 대고 바깥의 어둠을 응시했다.칠흑 같은 밤의 장막에 가려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단전의 울림으로 저 담장 너머 고목의 그늘 위에서 이 방문만을 바라보고 있을 사내의 묵직한 기척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내 사내야, 조금만 더 기다려 다오..."그녀는 차가운 문살에 붉은 입술을 바짝 대고,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소리 없는 숨결로 속삭였다."시어머니의 감시가 문 앞을 가로막고 있어 당장 달려 나가지 못하나... 내 마음과 속살은 이미 저 담장을 넘어갔다. 내 껍데기는 이 차가운 방에 묶여 있으나, 내 뜨거운 혼백은 이미 그대의 넓은 가슴팍에 안겨 있다."그 가녀린 속삭임이 담장을 넘어 사내의 귀에 직접 닿았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나뭇가지 위에 웅크리고 있던 돌쇠는 바로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정수리까지 찌릿하게 뻗어 오르는 뜨거운 전율을 느꼈다. 마님이 잠들지 않고 자신의 기척을 들었다는 확신이 명치끝을 뜨겁게 달구었다. 종택의 두꺼운 담장도, 서로를 향해 뻗어가는 기혈의 얽힘만은 결코 막아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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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부: 억눌린 불꽃 9

9. 폭발의 전조: 밥그릇 밑의 한 글자다시 피를 말리는 며칠이 흘렀다.정씨 부인은 문갑 위에 놓인 놋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볼이 패도록 수척해졌고 눈 밑에는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았으나, 깊고 검은 두 눈동자만은 기이한 열기를 머금은 채 불꽃처럼 형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이대로 산 송장처럼 방 안에 갇혀 말라 죽을 수는 없다. 가문의 열녀문을 받들고 평생 차가운 돌비석으로 사느니, 차라리 오늘 밤 그 사내의 뜨거운 불길 속에 몸을 던져 한 줌의 재로 타버리는 편이 백번 낫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더 이상 방구석에 웅크린 채 사내가 담을 넘어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시어머니의 감시도, 발각되는 날 두 사람 모두 관아로 끌려가 능지처참을 당하고 가문이 멸문지화를 입을 것이라는 서슬 퍼런 강상(綱常)의 법도조차도, 지금 당장 목이 타들어 가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그녀의 갈증을 막아설 수는 없었다.그녀는 문갑의 가장 깊숙한 서랍을 열었다.그 안에는 며칠 전 사랑채에서 시어머니에게 발각되어 끌려 나올 때, 소복 치맛자락 속에 몰래 감추어 가져왔던 작은 붓 한 자루가 숨겨져 있었다.사랑채에서 돌쇠의 거친 손을 잡고 획을 그으며 살을 섞던 날, 사내의 땀과 두 사람의 숨결이 배어들어 굳어버린 바로 그 붓이었다.그녀는 작은 벼루에 물을 부어 먹을 진하게 갈고, 손바닥만 한 창호지 조각 위에 굵고 선명한 글자 하나를 온 기운을 실어 꾹꾹 눌러썼다.열 개(開).시어머니가 걸어 잠근 방문의 족쇄를 풀고 길을 열어두겠다는 결의이자, 굳게 닫힌 내 몸을 활짝 열어 그대를 받아들이겠다는 여인의 애타는 부름이었다.비록 돌쇠가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나, 지난번 사랑채에서 글자의 획을 사물의 생김새에 빗대어 일러주었듯, 양옆으로 마주 선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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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9부: 억눌린 불꽃 10

10. 폭풍 전야: 하얀 명주 천의 표식어스름이 깔린 부엌 뒤편 우물가에서, 마지막 물지게를 내려놓고 안방 소반의 남은 찬밥을 덜어내던 돌쇠는 놋밥그릇 밑바닥 굽 안쪽에 밥풀로 붙여진 낯선 종이 조각을 발견했다. 마님의 상에서 나온 그릇임을 직감한 그는 숨을 죽인 채 쪽지를 재빨리 떼어내어 주머니 깊숙이 감추었다.행랑채 헛간으로 돌아온 돌쇠는 어둠 속에서 땀 젖은 손가락으로 꼬깃꼬깃한 창호지를 조심스레 펴보았다. 문틈으로 스며든 희미한 달빛 아래, 짙은 먹물로 힘 있게 내리쓴 글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열 개(開).그는 무지한 머슴이라 어려운 글자 뜻은 알지 못했으나, 그의 뜨거운 핏줄과 눈동자는 그 먹선이 그리는 형상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양옆으로 굳게 버티고 선 두 짝의 문짝 한가운데, 가로막힌 무거운 빗장을 두 손으로 밀어 올려 활짝 열어젖히는 뚜렷한 모양새. 지난날 사랑채에서 그의 거친 손을 겹쳐 쥐고 획을 그어주던 마님의 뜨거운 숨결이 그 검은 획 위로 생생하게 겹쳐졌다."기어이... 마님께서 이 밤에 소인을 부르시는구나."돌쇠의 육중한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며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헛간 문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겨울 달빛이 두꺼운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추자, 종택 위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의 어둠이 내려앉았다.담장을 넘어 그녀의 품으로 스며들기에 더없이 좋은 밤이었다. 그는 종택 뒷담 밑을 뒤덮은 가시덤불을 소리 없이 쳐내고 길을 내기 위해, 흙벽에 걸려 있던 낫 자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같은 시각, 안방의 정씨 부인 역시 마지막 준비를 마쳤다. 그녀는 자신의 흰 명주 속치마 자락을 가늘고 길게 찢어내어, 밖에서 문고리에 놋숟가락이 걸려 있는 두 문짝 사이의 좁은 틈새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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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부: 위험한 초대 1

1. 아가리를 벌린 어둠: 백색의 표식입춘(立春)을 넘겼으나 밤공기는 여전히 살을 에듯 차가웠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가 서서히 녹으며 뿜어내는 축축하고 비릿한 흙내가 마당 가득 짙게 깔려 있었다. 만동 김씨 가문의 웅장한 기와지붕은 칠흑 같은 밤하늘을 향해 시커먼 이빨을 드러낸 채 무겁게 웅크리고 있었고, 그 아래 자리한 안채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주검처럼 깊은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세상의 숨결과 철저히 단절된 이 낡은 종택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엎드려 있는 거대한 요물과도 같았다.정씨 부인의 안방 문은 시어머니가 초저녁부터 바깥 문고리에 질러둔 놋숟가락 탓에 여전히 바위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대신 맞물린 두 문짝의 좁은 틈새 사이로, 그녀가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밀어 넣어둔 얇고 하얀 명주 천 조각만이 툇마루를 훑고 지나는 이른 봄바람에 위태롭게 나부끼고 있었다.저녁상을 물릴 때 빈 놋밥그릇 밑바닥에 밥풀로 몰래 붙여 보냈던 ‘열 개(開)’ 자의 부름이, 마침내 이 숨 막히는 법도의 성벽 밖으로 아슬아슬한 유혹의 표식을 내건 것이다. 어둠 속에서 파르르 흔들리는 그 얇은 명주 오라기는 창백한 죽음의 밀실에 갇힌 여인이 사내를 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밤공기 속으로 내민 가장 은밀한 손짓이었다.정씨 부인은 까슬하고 뻣뻣한 삼베 겉치마와 저고리를 벗어 머리맡에 내려놓고, 얇은 하얀 속적삼과 명주 속치마만 걸친 채 비단 이불 속에 웅크리고 앉아 굳게 닫힌 창호지 문틈을 응시했다. 갈비뼈 아래서 심장이 가슴팍을 두드리며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쿵, 쿵, 쿵.자신의 귓바퀴를 울리는 맥박 소리가 어찌나 크고 요란하게 느껴지는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방에서 잠들어 있는 시어머니가 이 고동 소리를 듣고 당장 문을 열어젖히지 않을까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급하게 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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