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녀, 상복을 찢다: Chapter 161 - Chapter 170

216 Chapters

제20부: 위험한 초대 2

2. 그림자의 침입: 담장을 넘은 사내스스슥, 바스락.얼었던 땅이 녹아 축축해진 진흙과 마른 낙엽이 무거운 발바닥에 밟히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밤바람 소리에 묻혀 흔적 없이 사라질 만큼 미세한 마찰음이었으나, 벼랑 끝에 선 듯 팽팽하게 당겨진 정씨 부인의 귀는 그 발기척을 단번에 낚아챘다. 수백 년 세월 동안 과부의 정절과 가문의 체면을 삼엄하게 가두어 두던 그 높고 두꺼운 기와 담장을, 그가 기어이 목숨을 걸고 넘어온 것이다.잠시 후, 툇마루 위로 올라선 커다란 그림자가 안방 창호지 문 앞에 드리워졌다. 문풍지에 어리던 희미한 밤하늘의 미광마저 온전히 집어삼키는 짙고 어두운 그림자였다. 이불 자락을 쥔 정씨 부인의 숨이 턱 멈췄다. 가슴속에 고여 있던 공기가 단숨에 하얗게 타버릴 것만 같은 벅찬 긴장감이 명치끝을 뻐근하게 조여 왔다.문밖 어둠 속에서 돌쇠의 형형한 시선이 두 문짝 틈새로 삐져나와 바람에 떨리고 있는 하얀 명주 천 조각에 가 닿았다. 마님이 일러둔 덫의 위치를 확인한 그는 거친 숨을 삼킨 채 손을 뻗었다. 그리고 두 문고리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질러진 차가운 놋숟가락을 굳은살 박인 손가락 끝으로 감싸 쥐어, 쇳소리 하나 내지 않고 천천히 빼낸 뒤 툇마루 바닥에 내려놓았다.이내 바위처럼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아주 느리게 스르륵 열렸다. 기름기가 말라붙은 낡은 무쇠 경첩이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사내의 아귀힘이 문짝 전체를 허공으로 살짝 들어 올리듯 받쳐 쥐며 그 위험한 마찰음을 눌러 삼켰다.돌쇠였다.그가 방 안의 짙은 어둠 속으로 먹물이 번지듯 들어섰다. 댓돌 위에 발소리를 남기지 않기 위해 거친 짚신조차 벗어 던지고 온 맨발이었다. 종택 뒷담의 억센 가시덤불을 헤치고 넘어오느라 군데군데 해지고 뜯겨 나간 낡은 삼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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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부: 위험한 초대 3

3. 문가의 낫과 맞닿은 체온정씨 부인은 비단 요 위에서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발각될지 모른다는 서늘한 두려움과, 서로를 품에 안고 싶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던 그리움이 동시에 밀려와 그녀의 두 다리에 힘을 풀리게 만들었다.그녀의 물기 어린 시선이 창호지 너머 스며든 희미한 밤빛에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낸 문가 구석의 낫을 스쳐, 사내의 넓은 가슴팍으로 옮겨갔다. 문가에 내려놓은 저 날 선 연장은, 그가 이 방에 당도하기 위해 뒷담의 가시덤불을 베어내고 길을 열었듯 그녀의 숨통을 옭아매던 가문의 완고한 법도마저 베어버리고 오직 한 사내로서 맨몸으로 들어왔다는 무언의 다짐처럼 보였다."마님..."돌쇠가 장판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목이 멘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소인 당도했습니다요. 불바다 같은 밤을 건너서... 기어이 마님 앞에 닿았습니다."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벼랑 끝의 밤이었다. 하지만 제 목숨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품기 위해 어둠을 뚫고 온 이 사내의 우직한 진심이, 정씨 부인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주저함마저 허물어뜨렸다.평온하고 정갈한 이부자리 위에서 예법을 갖추어 나누는 점잖은 교접은 죽은 자들의 마른 치레에 불과했다. 문가에 서늘한 낫을 내려놓은 채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파국을 기꺼이 끌어안고 서로의 생기를 확인하는 이 절박한 밤이야말로, 메말라 죽어가던 여인의 혼백을 태워 살려낼 진짜 불꽃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몸을 덮고 있던 비단 이불을 천천히 걷어냈다. 얇은 하얀 속적삼과 명주 속치마만 걸친 몸매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밭은숨을 몰아쉬며, 어둠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이리 오너라..."갈라진 그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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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부: 위험한 초대 4

4. 숨죽인 애무, 눈물 섞인 숨결"마님..."돌쇠가 그녀의 하얀 쇄골에 땀 젖은 얼굴을 깊이 묻은 채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너른 등판을 감싸 안은 정씨 부인의 손가락이 탄탄한 등 근육을 파고들며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살과 살을 맞댄 이 먹먹하고도 깊은 포옹은 그 어떤 거친 애무보다 더 강하게 두 사람의 혼백을 옭아매고 있었다. 며칠 동안 주검처럼 숨죽여 견뎌야 했던 백색의 감옥 속에서, 비로소 살아 뛰는 생명수를 온몸으로 들이마시는 듯한 벅찬 위로였다.한참 동안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던 정씨 부인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젖은 눈동자로 돌쇠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땀 밴 그의 거친 뺨을 감싸 쥐며 시선을 얽어맸다. 그녀는 돌쇠의 두꺼운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고, 비릿하고도 더운 숨결을 깊숙이 나누어 삼켰다. 말로 다 쏟아내지 못한 그리움과 갈증이 타액에 섞여 서로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돌쇠는 평생 낫과 쟁기를 쥐어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그녀의 속적삼 고름을 쥐었다. 그리고 단단히 묶인 매듭을 천천히 잡아당겼다.스르륵.얇은 명주 자락이 스치며 고름이 풀리는 소리가 팽팽한 적막을 갈랐다. 하얀 속적삼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고, 가쁜 숨결에 따라 오르내리는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어둠 속에 고스란히 드러났다.돌쇠는 굶주린 짐승처럼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아니, 서두를 수가 없었다. 벽 하나 너머에 시어머니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과 아주 작은 마찰음 하나에도 모든 것이 일순간에 끝장날 수 있다는 벼랑 끝의 긴장감이, 감히 하늘 같은 상전을 품는 그의 손길을 한없이 조심스럽게 만들었다.그의 거친 손바닥이 행여나 부드러운 살결을 할퀴어 상처라도 낼세라 숨을 죽이며, 그녀의 하얀 명주 속치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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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부: 위험한 초대 5

5. 깊은 결합, 침묵 속의 열기길고도 숨 막히는 애무 끝에, 두 사람의 몸은 이미 터질 듯한 한계까지 데워져 있었다. 서로를 안고 싶어 오장육부가 새까맣게 타들어 갔던 두 남녀에게 더 이상의 지체나 기다림은 살을 에듯 아픈 고문과도 같았다.무릎을 세워 고쳐 앉은 돌쇠는 거친 삼베 바지춤을 풀어 내리고, 오랜 인내와 굶주림으로 핏대를 세우며 부풀어 오른 기둥을 어둠 속에 드러냈다. 칠흑 같은 방 안에서도 대지의 뿌리처럼 솟구친 그 윤곽은 뚜렷했다. 그는 정씨 부인의 떨리는 두 다리를 벌려 잡고는, 이미 맑은 수액으로 흠뻑 젖어든 은밀한 틈새를 향해 천천히, 그러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읍...!"정씨 부인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꽉 틀어막았다.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아찔한 신음을 억지로 삼키느라 관자놀이가 뻐근하게 조여들었다.며칠 동안 굳게 닫혀 비어 있던 속살을 비집고 들어와, 아랫배 가장 깊은 끝벽까지 그득하게 들어차는 사내의 부피감이 그녀의 허리를 절로 들썩이게 만들었다. 사내가 마침내 자신의 몸 안에 온전히 닿았다는 그 실감과 충만감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핏줄을 다시 화로 속 불길처럼 끓어오르게 했다. 그제야 돌쇠는 상체를 낮추어 내려오며, 자신을 숨 막히게 짓누르던 사대부가의 헛된 법도와 체통의 무게를 밀어내듯 산비탈을 일구던 체중으로 그녀의 몸을 깊숙이 덮어 눌렀다.돌쇠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천천히, 그리고 힘 있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깊고 집요하면서도 한없이 신중했다. 행여나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갈세라, 그는 몸을 밖으로 빼내지 않고 가장 깊은 곳까지 단단히 밀어 넣은 채 느릿하고 끈끈하게 살결을 맞비벼 돌렸다. 요란하게 살이 부딪히는 마찰음 대신, 칠흑 같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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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부: 위험한 초대 6

6. 위기의 찰나: 얼어붙은 숨, 끓어오르는 속살허리 위로 걷어 올려진 하얀 명주 속치마와 비단 요가 두 사람이 흘린 땀방울과 수액에 젖어 축축하게 구겨졌다. 시어머니가 밤낮없는 감시로 쌓아 올린 사대부가의 잿빛 위선과 규율은 이미 이부자리 아래로 팽개쳐진 지 오래였다. 오직 서로의 체온에 굶주렸던 사내와 여인만이 어둠 속에서 한 몸처럼 뒤엉켜 헐떡이고 있을 뿐이었다.바로 그때였다.덜컹.문밖 툇마루 끝에서 매서운 밤바람에 문살이 흔들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바람이 창호지를 때린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마루에 발을 디딘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내 얇은 벽 너머 시어머니의 방에서 마른기침 소리가 적막을 비수처럼 가르고 넘어왔다."콜록... 크흠..."뒤이어 잠결에 시어머니가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몸을 뒤척이는 부스럭거림이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이어졌다.돌쇠와 정씨 부인은 들이마시던 숨을 멈춘 채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서 동작을 멈췄다. 두 사람의 몸은 가장 깊숙한 곳까지 맞물린 상태 그대로, 미세한 근육과 핏줄의 떨림조차 죽이며 차가운 바윗돌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돌쇠는 숨통을 조여 막았고, 정씨 부인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을 크게 뜬 채 돌쇠의 땀 맺힌 어깨를 손톱이 파고들도록 꽉 움켜쥐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며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듯한 아찔한 공포였다. 만약 지금 시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 문을 열어젖힌다면, 두 사람은 이대로 서로의 알몸을 맞댄 채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그 숨이 멎을 듯한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머릿속의 서늘한 이성을 배반하듯 몸 안 깊은 곳에서 기이한 열기가 역류했다. 당장 발각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벼랑 끝의 두려움이 두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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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부: 위험한 초대 7

7. 어둠의 심연: 소리 없는 해일피를 말리는 듯한 침묵 끝에, 벽 너머 시어머니의 마른기침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다시금 깊고 규칙적인 코 고는 소리가 탁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숨통을 조여 오던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슬아슬하게 비켜간 것이다. 그리고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서로를 조이며 버텨야 했던 그 짧은 정적은, 한계까지 치달은 두 사람이 마지막 남은 인내의 끈을 놓아버리게 만드는 거센 불씨가 되었다.돌쇠가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기 이전보다 훨씬 깊고 거침없는 맹렬한 율동이었다. 차마 밖으로 소리를 낼 수 없는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두 팔에 핏대가 솟도록 힘을 주었다. 흐르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뺨을 맞비비며, 살갗이 맞닿아 비벼지는 곳마다 불길처럼 피어오르는 열락에 온몸을 송두리째 내맡겼다."으으읍...!""흐으윽...!"숨이 턱끝까지 거칠게 차올랐다. 머릿속을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정씨 부인의 눈앞이 하얗게 아득해졌다.아랫배 가장 깊고 어두운 단전의 심연에서부터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쾌락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 올라와 온몸을 집어삼켰다. 사대부가의 고상한 체면도, 죽음에 대한 서늘한 두려움도 태워버리는 까마득한 절정이었다. 오랫동안 얼어붙어 닫혀 있던 그녀의 몸과 마음이 사내가 뿜어내는 대지의 열기에 촛농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며, 그의 넓은 품속으로 속절없이 허물어져 내렸다.돌쇠 역시 숨이 멎을 듯한 극한의 절정에 도달했다. 그는 경련하며 휘어지는 정씨 부인의 어깨뼈를 두 팔로 감싸 안으며, 그녀의 가장 깊은 끝벽까지 허리를 벼락처럼 깊숙이 파고들었다. 굵은 척추를 타고 찌릿한 전율이 정수리까지 거세게 치솟아 올랐다. 그는 터져 나오는 밭은숨을 어금니로 삼키며, 그동안 억눌러왔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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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부: 위험한 초대 8

8. 새벽의 불씨, 남겨진 온기거친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방 안에는 깊고 나른한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헝클어진 비단 이불과 구겨진 속치마 자락 사이로, 땀방울에 흠뻑 젖은 두 남녀가 한 덩어리의 진흙처럼 엉겨 붙어 서로의 가쁜 숨결을 나누며 고르고 있었다. 어떠한 얄팍한 언어도 필요하지 않았다. 축축하게 맞닿은 살결의 온기와 나란히 맞물려 뛰는 심장 박동만이, 그간 생이별 속에서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던 기다림의 깊이를 뼛속 깊이 대변해 주고 있었다.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굳게 닫힌 창호지 문풍지의 빛깔이 새벽을 맞아 아주 미미하게 옅어지기 직전, 돌쇠가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도 사내의 구릿빛 등판은 땀으로 촉촉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방바닥에 일어서며 풀어진 삼베 바지춤을 추켜입고, 문가 바닥에 벗어두었던 낡은 적삼을 주워 걸쳤다. 방금 전 마님의 속살 깊은 곳까지 자신의 모든 기운을 쏟아낸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아, 옷고름을 여미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이제 물러가야 합니다요."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그가 미련이 짙게 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동이... 부옇게 터 오르기 전에 담을 넘어야 마님께서 무사하십니다."정씨 부인은 흐트러진 속적삼과 비단 이불을 끌어당겨 여미며, 어둠 속에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애써 사내의 소맷자락을 붙잡아 만류하지 않았다. 오늘 밤 목숨을 내던지고 나눈 이 깊은 교감이 결코 하룻밤의 덧없는 불장난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오히려 이 종택의 법도를 집어삼킬 질기고도 깊은 연모의 진정한 시작임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얀 손을 뻗어 사내의 거친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가거라..."그녀가 눈물이 맺힌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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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부: 붉은 치마 1

1. 태양 아래의 유령: 백색의 고립이른 봄, 안방 문고리의 놋숟가락을 남몰래 거두어내고 숨죽여 몸을 섞었던 그 아슬아슬한 밤 이후로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단오(端午)가 밝았다. 그사이 시어머니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몇 차례나 더 어둠 속에서 사내의 체온을 훔쳐 마셨건만, 대낮의 태양 아래로 불려 나온 정씨 부인의 겉모습은 여전히 핏기 없는 겨울에 묶여 있었다.초여름의 태양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게 만동 땅을 내리쬐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창공 아래, 김 대감 댁의 솟을대문 너머로 펼쳐진 저잣거리와 들판은 오색찬란한 빛깔이 춤을 추듯 활기차게 들썩였다. 창포물에 머리를 감은 여인네들의 푸른 치마폭이 초여름의 더운 바람에 나부끼고, 멀리 모래판과 그네터에서 울려오는 꽹과리와 장구 소리가 대기를 웅웅거리며 메아리쳤다.긴 겨울의 잠을 털고 나온 대지가 터뜨리는 환호성이자, 움츠렸던 생명들이 일제히 깨어나 뛰노는 계절의 맥박이었다. 땅속에 숨어 있던 미물들조차 짝을 찾아 헤매고, 만물이 온기를 나누며 뒤엉키는 녹음의 절기가 당도한 것이다.하지만 정씨 부인은 그 생명의 축제 한가운데서 홀로 동떨어진 창백한 섬과도 같았다.그녀는 오늘도 거친 소복 차림이었다. 쪽진 머리에는 흰 백각잠을 꽂고, 몸에는 뻣뻣한 삼베와 흰 명주를 겹겹이 둘렀다. 온 세상이 꽃과 푸른 잎으로 치장하고 대지의 열기를 나눌 때, 그녀만이 홀로 죽음을 상징하는 수의(壽衣) 같은 옷을 걸친 채 걸어가고 있었다.길가의 아낙들이 흙먼지가 닿을세라 치마폭을 여미며 그녀를 곁눈질하고 수군거렸다."저분이 조만간 열녀문을 하사받는다는 김 대감 댁 청상 며느리인가 보네.""아이고, 낯빛도 고우셔라. 저리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삼 년이나 빈방을 지켰다니, 쯧쯧... 나 같으면 찬 방이 시려 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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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부: 붉은 치마 2

2. 남몰래 꾸미는 반란: 숨겨진 진홍빛 진실정씨 부인은 사내들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씨름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상석, 양반가 부인들을 위해 따로 쳐둔 그늘진 차일(遮日)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흙먼지가 치맛자락에 닿지 않도록 두꺼운 화문석이 깔려 있었고, 시원한 수정과와 정갈한 다과상이 앞에 놓였다. 먼저 자리하고 있던 부인들은 부채 너머로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며 그녀에게 목례를 건넸다.정씨 부인이 등줄기를 꼿꼿이 펴고 앉자, 소복 치마폭이 흰 꽃잎처럼 넓게 퍼져 내렸다. 그녀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주변의 기척을 살피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미세한 손놀림으로 무릎 언저리의 겉치마 자락을 살짝 들추어 보았다.바깥에 두른 겉치마는 거칠고 희끗한 삼베였으나, 그 아래 가장 내밀한 살결을 감싸고 있는 속치마는... 잘 익어 터진 석류알처럼 선명하고 매혹적인 진홍빛 명주였다.가문의 체통을 단숨에 진흙탕에 처박을 위험천만한 일탈이었다. 만일 거센 바람에 겉치마라도 뒤집혀 이 붉은 비단 자락이 사람들의 눈에 띄기라도 하는 날에는, 코앞에 다가온 열녀문의 영광은 물거품이 될 것이고 김 대감 댁은 씻을 수 없는 수치를 뒤집어쓸 터였다. 세상은 그녀를 정숙한 과부가 아니라 상복 속에 음심(淫心)을 품은 여인이라 손가락질할 것이며, 가문의 명예에 목숨을 건 시어머니는 그날 밤으로 며느리를 사당 앞에 끌어내어 사약을 내리고도 남을 냉혹한 노파였다.그럼에도 그녀는 오늘 아침, 장롱 가장 깊숙한 밑바닥에 숨겨두었던 이 붉은 명주 속치마를 홀린 듯 꺼내 입었다. 혼례를 올릴 때 해 왔으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단 한 번도 살에 대보지 못했던 옷이었다. 옷고름을 매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으나, 안쪽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망을 누를 수는 없었다. 세상의 차가운 시선으로부터 제 살아 있는 숨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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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부: 붉은 치마 3

3. 모래판의 열기와 엇갈린 시선"으라차차!"땅을 뒤흔드는 사내들의 기합 소리와 함께, 둥근 모래판 위로 누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초여름 볕 아래 달궈진 모래판 위에서는 웃통을 벗어 던진 건장한 사내들이 서로의 샅바를 움켜쥐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비 오듯 쏟아진 땀방울과 흙먼지가 뒤섞인 구릿빛 근육들이 햇살을 받아 번들거렸다. 짠 땀 냄새와 더운 흙냄새가 바람을 타고 차일 아래까지 훅 끼쳐왔다.양반가 부인들은 화려한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얇은 부챗살 너머로 모래판의 사내들에게 은밀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정씨 부인의 시선이 문득 맞은편 자리에 앉은 한 여인에게 닿았다. 최 대감 댁의 윤씨 부인이었다. 그 점잖고 우아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정씨 부인은 지난겨울 물레방앗간의 차가운 흙바닥에서 홀아비 박 생원의 허리를 두 다리로 감아 안고 자지러지던 그녀의 흐트러진 자태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뺨이 달아올랐다.그런데 모래판을 향한 윤씨 부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부채 너머로 사내들의 몸짓을 좇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점잖은 구경꾼의 호기심이 아니라, 주린 짐승이 먹잇감을 훑는 듯한 노골적인 탐욕이 서려 있었다.그때 행수(行首)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다음 판! 만동 김 대감 댁의 범 같은 장사, 돌쇠가오!"구경꾼들의 함성 사이로 돌쇠가 거친 숨을 고르며 모래판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모진 산비탈 노역이 다져놓은 탄탄한 구릿빛 등판과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단단하게 솟은 허벅지 근육이 수백 명의 시선 앞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햇볕에 달궈진 몸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구릿빛 살갗을 따라 길게 흘러내렸다.그 건장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맞은편에 앉은 윤씨 부인의 눈빛이 한층 더 짙게 번들거렸다.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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