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상간녀를 택한 남편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Chapter 11 - Chapter 20

39 Chapters

011화 가장 천박한 하녀(1)

  숨 막히는 정적이 차 안을 짓눌렀다.파티장에서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연우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유리 파편에 찢긴 손바닥에서는 끊임없이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드레스 자락을 찢어 대충 감싸두었지만, 상처가 깊은지 피는 금세 천을 적시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더럽게."어둠 속에서 태오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차에 그 더러운 피 묻히지 마."연우는 화들짝 놀라며 상처 난 손을 가슴팍으로 숨겼다."죄,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입 다물어. 네 목소리 듣는 것도 역겨우니까."태오의 시선은 끝내 연우를 향하지 않았다. 그는 창밖의 야경만 응시하며, 마치 옆에 벌레 한 마리가 타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연우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파티장에서 겪은 수모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 쏟아지던 와인, 바닥에 엎드려 닦아내던 구두, 그리고 유리를 줍던 끔찍한 시간.하지만 이 지옥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태오의 경고가 연우의 뼈를 시리게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저택의 거대한 철문을 통과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태오는 연우의 손목을 짐짝처럼 낚아채어 저택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아앗! 손, 손이……!"다친 손이 거칠게 당겨지자 연우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태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거실에는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저택의 모든 고용인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집사를 비롯해 수십 명에 달하는 메이드와 경호원들이었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태오를 기다리고 있었다.태오가 연우를 거실 한가운데로 거칠게 내팽개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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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화 가장 천박한 하녀(2)

  철문이 닫히고, 지하실은 짙은 어둠에 잠겼다.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는 얇은 돗자리 하나조차 깔려 있지 않았다. 옆방 보일러실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기계음만이 지독하게 울려 퍼졌다."흐윽…… 흑……"연우는 무릎을 끌어안고 숨죽여 울었다. 유리에 베인 손바닥은 불로 지지는 것처럼 아팠고,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왼손 약지에 억지로 끼워진 반지는 부어오른 피부를 짓눌러 검붉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도망치고 싶어…… 차라리 죽어버릴까……'극단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이내 병상에 누워 있을 동생 지후의 마른 얼굴이 떠올랐다.'안 돼. 내가 죽으면 지후도 죽어. 버텨야 해…… 어떻게든 버텨야 해……'연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피 묻은 드레스를 벗어 내렸다. 추위가 뼈를 파고들었다. 차가운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하녀복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지옥 같은 밤이 길게 이어졌다.다음 날 새벽.쏴아아-!"아악!"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연우의 얼굴로 쏟아졌다. 연우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흐릿한 가운데, 빈 양동이를 들고 서 있는 김 메이드장의 얼굴이 보였다."일어나, 이 게으른 년아! 감히 살인마 주제에 늦잠을 자?"김 메이드장이 연우의 눈앞에 손목시계를 들이밀었다. 시침과 분침은 정확히 새벽 4시 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작 1분 늦었을 뿐인데 물벼락을 맞은 것이다."죄, 죄송합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연우는 젖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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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화 가장 천박한 하녀(3)

  '참아. 지후를 생각해서라도 참아야 해.'그때였다. 계단 위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뚜벅. 뚜벅.저택 전체를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강태오였다.완벽한 핏의 맞춤 정장을 입은 그는, 얼음조각 같은 차가운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메이드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이사님."태오는 인사도 받지 않고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오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연우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시선이 교차했다. 태오의 구두 끝자락과, 걸레를 쥐고 있는 연우의 피투성이 손이 대비되었다."아침부터 집안 꼴이 왜 이렇지?"태오의 목소리는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릴 만큼 차가웠다."내 집 바닥에 웬 역겨운 핏자국이 묻어 있는데. 청소를 이따위로 하나?""죄, 죄송합니다. 바로 닦겠습니다……"연우가 서둘러 피 묻은 바닥을 걸레로 닦으려 했다. 하지만 태오가 연우의 손등 위로 자신의 구두를 보란 듯이 올려놓았다."악!"육중한 체중이 실린 구두가 상처 난 손을 짓눌렀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연우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더러운 피로 내 집을 오염시키지 마."태오가 연우를 내려다보며 잔혹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그리고 넌 아직 네 주제를 파악 못 한 모양이군. 내 눈앞에서 고개를 들고 말을 대꾸해? 누가 하녀보고 그렇게 가르치지?"태오의 시선이 뒤에 서 있던 김 메이드장에게 향했다. 김 메이드장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죄송합니다, 이사님! 제가 교육을 똑바로 시키지 못했습니다. 야, 이년아! 당장 머리 안 숙여?!"김 메이드장이 연우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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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화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1)

  새벽 네 시부터 다시 시작된 하녀 일은 아침까지 끝나지 않았다.연우는 로비 한쪽에 무릎을 꿇고 마지막으로 남은 물기를 훔쳐냈다. 이틀 전 유리 조각에 베인 손바닥은 제대로 아물 틈이 없었다. 걸레를 쥘 때마다 상처가 벌어졌지만, 이제 그 통증 자체가 새롭지는 않았다."거기만 닦고 끝인 줄 알아?"김 메이드장이 지나가며 연우의 옆에 양동이를 밀어 놓았다."현관 앞까지 마저 해. 얼룩 남기면 처음부터 다시 시킬 거야.""……네."연우는 짧게 대답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손바닥을 바닥에 짚는 순간 따끔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이번에는 그대로 참았다. 어제와 같은 모욕을 하나씩 세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자신을 살인자로 믿는 태오와 병원에 홀로 있는 지후뿐이었다.그 순간 현관 쪽에서 초인종이 울렸다.딩동-"어머! 오셨나 보다. 빨리 문 열어드려!"김 메이드장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부드럽게 변했다. 저택 안에서 일하던 메이드들이 일제히 현관 쪽으로 모여들며 소란스러워졌다."어서 오세요, 채희 아가씨!""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현관문이 열리고,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들어섰다.풍성하게 웨이브 진 머리칼, 가녀린 몸매, 그리고 티 없이 맑은 미소. 죽은 윤지아의 오랜 절친이자, 태오의 동생이나 다름없는 여자. 태성그룹에서는 상무 직함으로 불리는 정채희였다. 이 집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채희 아가씨라고 불렀다.그녀의 양손에는 하얀 백합이 한 다발 들려 있었다. 지아의 영정 앞에 바칠 꽃이었다."다들 잘 지냈어요? 오빠는요?"채희의 목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듯 청아하고 상냥했다."이사님은 아직 2층에 계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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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화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2)

  태오가 차가운 구두 발소리를 내며 현관을 빠져나갔다. 그가 완전히 저택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채희는 현관문 쪽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현관문이 닫히고, 저택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김 메이드장님."채희가 뒤를 돌며 불렀다. 아까의 울음 섞인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네, 아가씨.""저, 연우 씨랑 단둘이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아…… 그러시면 지아 아가씨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저년은 제가 끌고 올라가겠습니다.""아니에요. 제가 부축할게요. 다들 하던 일 보세요."채희가 생긋 웃으며 고용인들을 물렸다. 고용인들이 눈치를 보며 뿔뿔이 흩어지자, 채희는 연우의 팔을 부축하는 척 붙잡았다."연우 씨. 여기서는 사람들 눈도 많으니까, 안쪽에서 약부터 발라줄게요."채희가 연우를 데려간 곳은 로비 옆 복도 끝의 작은 개인 응접실이었다. 지아가 생전에 외부 시선과 녹화를 싫어해 사적인 손님을 만날 때만 쓰던 방으로, 저택의 다른 공용 공간과 달리 내부 보안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은 곳이었다. 채희는 복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문을 닫았다.찰칵.문이 닫히자 넓은 저택의 기척이 한 겹 멀어졌다.채희가 천천히 연우에게 다가왔다."연우 씨."그녀가 아까처럼 무릎을 굽혀 연우와 시선을 맞췄다."여기 앉아요. 약부터 발라줄게요."연우는 채희의 다정한 목소리에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자신을 인간으로 대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채, 채희 씨…… 흐윽…… 고맙습니다…… 저 정말…… 저 지아 안 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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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화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3)

  "아, 맞다. 네가 병원비 대주는 남동생 하나 있다고 했지?"채희가 붉은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결정타를 날렸다."태오 오빠가 그 병원비 대주고 있다며? 네가 만약 입방정을 떨면…… 그 병원비가 끊기는 건 둘째 치고, 네 동생 산소호흡기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어?""안 돼…… 지후는 안 돼…… 건드리지 마……""내가 허풍 떠는 것 같아?"채희가 연우의 귓가로 입술을 가까이했다."이지후. 심장내과랑 혈액종양내과 같이 보고 있지? 어제 오후 검사 끝났고, 오늘은 결과 확인 뒤 다음 처치 동의가 필요하다던데."연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제 검사 일정과 오늘 이어질 절차는 병원과 자신 사이에서만 오간 내용이었다. 저택 사람들에게 자세히 설명한 적도 없었다."어떻게…… 그걸…….""그러니까 얌전히 있으라는 거야. 병원비만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연우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채희는 지후가 어느 병원에서 어떤 진료를 받는지, 적어도 내부 일정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유일한 아킬레스건을 찔린 연우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그럼 알아서 기어. 내가 이 저택의 진짜 안주인이 될 때까지, 넌 닥치고 내 샌드백 역할이나 충실히 해."채희가 연우의 머리채를 놔주며 바닥으로 밀쳐냈다."기억해, 이연우. 넌 내 발밑의 개야. 짖으라면 짖고, 기라면 기어야 하는 개."채희는 손수건을 꺼내 연우의 머리카락을 잡았던 자신의 손을 벅벅 닦아냈다. 마치 더러운 오물이라도 만진 듯한 표정이었다.손수건을 연우의 얼굴 위로 툭 던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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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화 목숨의 값, 그리고 완벽한 복종(1)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화장실 밖에서 전화벨이 울렸다.연우는 세제를 묻힌 수세미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손바닥의 상처는 여전히 벌어져 있었지만 오늘은 그 통증보다 앞서 채희가 남긴 협박이 더 선명했다.지후의 병원 일정까지 알고 있던 여자.연우는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마지막 타일을 닦았다. 증거 없이 채희를 고발했다가 지후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살아남고, 동생을 지켜야 했다."야, 이연우!"김 메이드장이 문을 열었다."네년 동생 입원해 있다는 병원이다. 빨리 받아."병원이라는 말에 연우는 곧바로 수세미를 놓고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떨리는 양손으로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여, 여보세요? 지후 보호자입니다."[이연우 씨 되십니까? 여기 태성병원 원무과입니다.]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직원의 목소리는 사무적이고 차가웠다.[다름이 아니라, 이지후 환자분 병원비 문제로 연락드렸습니다. 오늘이 무균실 유지 및 항암 치료비 납부 마감일인 건 알고 계시죠?]"아…… 네, 네. 알고 있습니다. 강태오 이사님 측에서 치료비를 지원하기로……"[강태오 이사님 비서실에서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부로 이지후 환자에 대한 모든 의료비 지원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하시더군요.]"네……? 지, 지원을 중단한다고요?"연우의 눈동자가 극도로 커졌다. 호흡이 가빠지며 눈앞이 핑 돌았다."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다시, 다시 한 번만 확인해 주세요. 분명히 지원해 주신다고 하셨단 말이에요!"[저희도 비서실장님과 직접 통화했습니다. 중단이 맞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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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화 목숨의 값, 그리고 완벽한 복종(2)

  "나와. 이사님 돌아오셨다."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연우는 바닥을 기듯 지하실을 빠져나갔다.시간은 오후 5시 30분. 마감 시간까지 고작 30분 남은 상황이었다.숫자를 확인하는 순간 다리의 힘이 빠질 뻔했다. 지하실에서 얼마나 오래 갇혀 있었는지 처음으로 정확해졌다. 삼십 분. 계단을 오르고, 태오를 만나고, 지원을 되돌리고, 병원에 송금 지시가 전달되기까지 남은 전부였다.연우는 비틀거리는 몸을 벽에 한 번 부딪치고도 멈추지 않았다. 지나가던 하녀가 놀라 비켜섰고, 손바닥을 감싼 치맛자락에서는 다시 피가 배어 나왔다. 지금은 닦을 시간조차 없었다.연우는 숨을 헐떡이며 2층 태오의 서재로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다. 육중한 마호가니 문 앞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 두 명이 서 있었다."비켜주세요! 이사님! 강태오 이사님!!""물러서십시오."경호원들이 연우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냈다. 하지만 연우는 좀비처럼 다시 일어나 문손잡이에 매달렸다."이사님!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저 연우예요. 잘못했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요!"목이 찢어지라 소리치며 문을 두드렸다. 피 묻은 주먹으로 쾅쾅 마호가니 문을 때리자 문짝에 붉은 핏자국이 번졌다.달칵.안에서 묵직한 소리가 나며 서재 문이 열렸다.서재 한가운데,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에 기대어 앉은 태오가 보였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 한 손에는 크리스털 글라스에 담긴 위스키를 들고 있었다."시끄러워서 서류를 읽을 수가 없군."태오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평온했다.연우는 경호원들을 뿌리치고 서재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태오의 발밑에 엎드려 그의 바짓단을 생명줄처럼 꽉 부여잡았다."이사님…&he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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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화 목숨의 값, 그리고 완벽한 복종(3)

  연우는 종이 위 문장을 다시 내려다봤다. 머릿속에는 오후 여섯 시 마감과 지후의 마른 손목이 겹쳤다. 돈이 필요했다.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지금 자신의 입으로 읽는 문장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연우는 마음속에서만 선을 그었다.'나는 지아를 죽이지 않았어.' 소리 내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 사실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태오가 요구하는 복종의 문장을 읽는 것과 자신의 기억까지 넘겨주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지후를 살리기 위해 몸을 낮추더라도, 진실까지 태오의 소유물로 만들지는 않겠다고 버텼다.종이 끝을 쥔 손이 떨렸다. 피가 마른 손바닥이 다시 벌어졌지만 연우는 계약서를 놓지 않았다. 이 굴욕을 선택해서가 아니라 다른 선택지가 막혀 있기 때문에 읽는 것이라고 스스로 확인했다. 그 짧은 확인이 끝나자 그녀는 다시 첫 문장을 입에 올렸다."나, 이연우는!"연우가 악을 쓰듯 목소리를 높였다."아무 죄도 없는 윤지아를 난간에서 밀어 죽인…… 끔찍한 살인마이며……"거짓말. 자신은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살기 위해, 아니 동생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살인마라는 낙인을 입에 담아야 했다. 심장이 칼에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천박하고…… 더러운 탐욕에 눈이 멀어…… 윤지아의 자리를 빼앗은…… 쓰레기만도 못한 년이다……"연우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투두둑 떨어져 서류를 적셨다."울지 마."태오의 서늘한 경고가 떨어졌다."내가 언제 네년한테 눈물을 흘려도 좋다고 허락했지? 감정도 사치라고 했을 텐데.""흐윽…… 읍……"연우는 황급히 소매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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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화 끓어오르는 열병, 그리고 잔혹한 환영(1)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가 뜨겁게 타들어 갔다.연우는 대리석 계단 중간에서 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았다. 새벽부터 몸이 이상했다.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운데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시야 가장자리가 검게 좁아졌다.상처 난 손은 전날보다 더 심하게 부어 있었다. 특히 피로 지장을 찍느라 다시 벌어진 엄지 주변은 붉게 달아올라 손가락을 굽힐 때마다 욱신거렸다."하아……."한 계단을 오르자 심장이 과하게 뛰었다. 연우는 양동이를 내려놓고 숨을 삼켰다. 걸레질이 힘든 게 아니었다. 몸이 더 이상 명령을 따라오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단 한 번이라도 반항하거나 억울한 기색을 내비친다면, 네 동생은 길거리에 버려질 거다.]어제 태오가 내뱉은 말이 머릿속을 때렸다.지후.그 이름 하나가 휘청이는 몸을 다시 세웠다. 연우는 청소를 잘해 인정받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늘도 쓰러지지 않고 시간을 넘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계단 위에서 김 메이드장의 목소리가 떨어졌다."2층 복도 아직 손도 안 댔잖아!""지금…… 올라가겠습니다."연우가 양동이 손잡이를 들었다. 팔에 힘이 들어가자 손바닥 상처가 당겼고 양동이가 크게 흔들렸다. 물이 계단에 쏟아질 뻔한 순간, 옆을 지나던 막내 하녀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언니, 제가—""민지야."김 메이드장의 싸늘한 한마디에 어린 하녀의 손이 멈췄다."쟤 일 도와주고 싶으면 오늘 네 몫까지 같이 해."민지는 입술을 깨물며 손을 거뒀다. 연우는 잠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다른 하녀들과 달리 민지의 얼굴에는 비웃음보다 걱정이 먼저 떠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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