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가 붙여준 도련님과 불륜 중입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21 챕터

11. 파장

아침 일곱 시.윤서는 호텔 방 커튼을 걷었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뉴욕의 아침이었다.오늘 오전에는 실사팀과의 마지막 미팅이 잡혀 있었다. 그것만 끝내면 오후 일정은 비교적 여유로웠다.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비서실 장 대리였다.“상무님,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기사 하나가 났습니다. 링크 보내드렸는데 먼저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윤서의 손이 멈췄다.“무슨 기사인데요?”장 대리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배도혁 씨 관련 기사입니다.”윤서는 통화를 끊고 문자메시지함을 열었다.방금 도착한 링크를 눌렀다.[톱배우 배도혁, 뉴욕 호텔서 재벌가 며느리와 밀회]제목 아래로 사진 여러 장이 붙어 있었다.호텔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아 있는 모습,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 입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까지.윤서의 얼굴은 흐리게 처리돼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입었던 옷과 가방까지 그대로 찍혀 있었다.기사를 아래로 내렸다.[배도혁과 함께 식사한 여성은 국내 유통 대기업 H유통 오너가의 일원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 유력 정치인 집안과 혼인한 인물로 전해져 논란이 예상된다.]H유통.최근 정치인 집안과 혼인한 여자.이 정도면 이름만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윤서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장 대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지금 얼마나 퍼졌어요?”“최초 기사는 오늘 아침 일찍 올라왔습니다. 지금은 다른 매체에서도 받아쓰고 있습니다.”“회사 이름까지 나온 곳도 있어요?”“아직 한성유통이라고 직접 쓴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댓글에서는 이미 상무님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윤서는 입술을 다물었다.“회사에서는요?”“홍보팀에서 대응 중입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생활 보도라서 일단 별도 입장은 내지 않는 쪽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아버지는요?”“사장님께도 보고가 들어갔습니다.”역시 모를 리 없었다.“알겠어요. 오전 미팅은 예정대로 진행할게요.”“괜찮으시겠습니까?”“여기까지 와서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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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재회

열네 시간의 비행 끝에 윤서는 인천공항에 내렸다.입국장을 빠져나오자마자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태호에게서는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회사 단체 채팅방에는 기사 관련 대응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기사가 터진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며칠은 지난 것처럼 피곤했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현관문을 열자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태호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술은 마시지 않은 듯했다."왔어?"윤서는 캐리어를 현관에 세워두고 거실로 들어갔다."얘기하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 하세요."태호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기사 봤어.""저도 봤어요.""그게 다야?""무슨 말을 듣고 싶은데요?""그냥 밥만 먹었다?""사실이니까요."태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사실이든 아니든 온 세상이 내 아내랑 그 자식을 엮어놨어.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아?"윤서는 대답하지 않았다."회사에서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나 보는지 알아? 다들 대놓고 말만 안 하지, 속으로는 내가 병신 같겠지.""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애초에 그 자식이랑 왜 밥을 먹었냐고.""같은 학교를 나왔어요. 뉴욕에서 우연히 만났고, 궁금한 게 있어서 같이 밥 먹은 거예요.""뭐가 그렇게 궁금했는데."윤서는 입을 다물었다.갤러리에서 도혁을 본 순간 굳었던 최미연의 얼굴. 그와 달리 도혁을 반갑게 맞았던 남성구. 그리고 홍익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기를 배웠다는 기사까지.몇 가지가 마음에 걸렸지만, 아직 윤서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말 못 해?""확실하지도 않은 얘기를 당신한테 할 필요는 없잖아요."태호의 표정이 굳었다."나한테는 말 못 할 얘기를 그 자식하고는 했다?""또 그렇게 몰고 가지 마요.""내가 뭘 몰아가. 사진까지 찍혔는데.""그러니까 지금 얘기해봤자 똑같은 말만 반복한다고요."태호가 한 걸음 다가왔다.그때 현관문이 열렸다.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최미연이었다.그녀는 거실 분위기를 한 번 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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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경고

윤서는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회사로 출근했다.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배도혁과 남성구.두 이름을 붙여 검색해봤지만 새롭게 나온 건 없었다.갤러리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단순히 재단 이사장과 지원받은 배우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미연의 반응이 그랬다.한성유통 상무실 앞에 도착하자 장 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밤새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장님이 출근하시면 바로 들르라고 하셨습니다.”“오늘 일정은요?”“오전 미팅 두 건 있습니다. 하나는 오후로 미뤄도 된다고 연락 왔고요.”“그대로 할게요. 미팅 전에 아버지부터 뵙고 올게요.”“네.”윤서는 가방만 내려놓고 채명수의 집무실로 향했다.채명수는 이미 출근해 있었다.“앉아라.”윤서가 맞은편에 앉자 채명수가 서류를 덮었다.“기사 건은 홍보팀에서 대응하고 있다. 회사에서는 따로 입장 내지 않을 거야.”“네.”“배우 쪽에서도 별말 없고?”“같이 식사한 건 맞으니까요. 그 이상은 사실도 아니고요.”채명수는 잠시 윤서를 바라봤다.“그 배우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냐.”“뉴욕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얘기하다 보니 같은 학교를 나왔더라고요. 저보다 후배였어요.”“한국에서도 만난 적 있고?”“얼마 전에 갤러리에서 처음 봤어요.”채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됐다.”윤서는 오히려 그 대답이 뜻밖이었다.“안 물어보세요?”채명수가 안경을 벗었다.“내 딸이 바람피울 애인지 아닌지는 내가 안다.”윤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그럼 뭘 걱정하세요?”“기사에 네 이름이 오르내리는 거.”채명수는 안경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그리고 남 의원 쪽에서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역시 그쪽이었다.“아버지는 그 집안이 그렇게 중요해요?”“중요하지.”대답은 빨랐다.“결혼은 너 혼자 한 게 아니야. 한성과 그쪽 집안이 사돈이 된 거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런 기사가 났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어.”윤서는 아버지를 바라봤다.결혼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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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트리거

그날 저녁, 태호는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을 만났다. 겔러리 앞 술집이었다.처음엔 그저 평범한 술자리였다. 다들 요즘 사는 얘기, 회사 얘기를 주고받으며 웃었다.술잔이 몇 번 오가자 누군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야, 이거 니네 와이프 얘기 아니야?"기사 캡처 화면이었다."장난하냐, 지워.""그 배우 실물 봤어? 완전 부럽다, 니 와이프 취향인가 보네."옆에 있던 다른 친구도 거들었다."근데 진짜 아무 사이 아니야? 사진 보니까 분위기 심상치 않던데.""그니까. 나란히 앉아서 뭘 그렇게 심각하게 얘기해."웃음이 터졌다. 태호의 얼굴이 굳었다."닥쳐.""왜 화를 내. 농담이지.""몇 번을 말해. 아무 사이 아니라고.""그니까 그게 더 이상하다는 거야. 아무 사이도 아닌데 기사가 왜 나."태호는 대답 대신 술잔을 들이켰다.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병으로 바뀌었다. 동기들이 하나둘 자리를 뜬 뒤에도 그는 혼자 남아 술을 더 시켰다.혼자가 되자 오히려 생각이 더 선명해졌다. 사진 속 도혁의 얼굴, 그 여유로운 표정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윤서는 거실에서 그를 맞았다."이제 와요?"태호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내려다봤다."오늘 하루 종일 니 얘기만 들었어.""무슨 얘기요.""몰라서 물어? 내 와이프가 딴 놈이랑 뉴욕에서 뭐 했냐고, 다들 그거만 물어보더라. 웃으면서.""아무 일도 없었다고 몇 번을 말해요.""몇 번을 말하면 믿을 줄 알아?"술 냄새가 훅 끼쳤다."오늘 어머니도 왔다 가셨잖아요. 이제 그만하세요.""어머니가 오셨든 말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직 안 끝났어."윤서는 뒷걸음질 쳤지만 늦었다. 태호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놔요."태호는 윤서의 팔목을 움켜쥔 채 그대로 거실 안쪽으로 끌고 갔다.바닥을 딛는 발가락 끝이 꺾이고 슬리퍼가 거실 구석으로 날아갔다.버티려는 몸짓은 무거운 체중에 밀려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단단한 대리석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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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여진

아침 햇살이 거실 대리석 바닥을 하얗게 비추었다.욕실에서 물소리가 멈추고, 샤워 가운을 걸친 태호가 머리를 털며 나왔다.그의 얼굴에는 어젯밤의 난폭함이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윤서는 입술이 제대로 다물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찢어진 안쪽이 따끔거렸다. 양치를 하다 다시 피가 배어나와 한참 찬물로 입안을 헹궈야 했다.손목도 마찬가지였다.넥타이에 묶였던 자리는 군데군데 피멍이 들었고, 팔에는 태호의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윤서는 출근하지 않았다.회사에는 몸이 좋지 않다고만 했다. 장 대리는 더 묻지 않고 오늘 일정을 전부 미뤘다.태호는 아침 일찍 출근했다.어젯밤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오후가 조금 지났을 무렵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최미연이었다.그녀의 손에는 익숙한 한약 상자가 들려 있었다.“집에 있었네.”최미연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회사 안 갔다며.”“네.”“몸이 안 좋아?”윤서는 대답하지 않았다.거실로 들어오던 최미연의 시선이 윤서의 얼굴에 멈췄다.화장을 하지 않아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한쪽 입꼬리는 찢어져 딱지가 앉았고, 주변까지 붉게 부어 있었다.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긴소매 아래로 손목의 검붉은 자국이 드러나 있었다.최미연은 아무 말 없이 한약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약 새로 지어놨어. 오늘부터 다시 챙겨 먹어.”윤서는 그녀를 바라봤다.얼굴도, 손목도 봤다.그런데 처음 꺼낸 말이 한약이었다.“어머니.”“왜.”“저희 지금 이런 얘기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이런 얘기가 아니면 무슨 얘기를 해.”최미연이 약봉지 하나를 꺼냈다.“기사까지 났잖아. 지금 집안 체면이 말이 아닌데 하루라도 빨리 좋은 소식이 있어야 사람들 관심도 다른 데로 돌아가지.”“좋은 소식이요?”“아이 말이야.”윤서는 천천히 물었다.“애가 생기는 거랑 이번 일이랑 무슨 상관이에요?”“왜 상관이 없어.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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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우연

도혁은 매니저의 연락을 받고 소속사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매니저가 기다렸다는 듯 서류를 내려놓았다."어제 최미연 관장이 회사에 직접 왔었어."도혁은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알아요. 연락받았습니다."매니저의 표정이 달라졌다."직접?""네.""뭐라고 하던데.""채윤서 씨랑 다시 만나지 말라고요."매니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회사에 와서 한 얘기도 똑같아. 두 사람 다시 엮이는 일 없게 해달라고.""제가 알아서 할게요.""너만 알아서 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야. 광고주 쪽에서도 문의 들어오고 있어. 사실이냐, 추가 기사 나올 가능성 있냐.""없어요.""확실해?"도혁이 매니저를 바라봤다."아무 사이도 아닙니다.""그럼 됐고."매니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도혁 쪽으로 밀었다."이번 주 인터뷰 하나는 다음 주로 미뤘어. 괜히 기자들한테 먹잇감 줄 필요 없으니까. 나머지 일정은 예정대로 하고.""네.""온라인 반응은 나쁘지 않아. 그냥 지인끼리 밥 먹은 걸 가지고 기사까지 냈냐는 쪽이 많고."도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매니저가 그런 그를 잠시 바라봤다."근데 너.""왜요.""진짜 아무것도 없어?""없다니까요.""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매니저는 더 묻지 않았다. 도혁은 회의실을 나와 휴대폰을 확인했다.연락은 여러 개 와 있었지만 찾는 이름은 없었다.채윤서.연락처를 열었다가 그대로 화면을 껐다. 먼저 연락해서 좋을 건 없었다. 기사도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고, 최미연이 소속사까지 찾아온 상황이었다.무엇보다 윤서는 태호의 아내였다. 그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그날 저녁에는 남성구에게서 전화가 왔다."기사 봤다.""네.""괜찮냐."도혁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괜찮아요.""소속사에서는 뭐래.""조심하래요.""당분간은 그러는 게 좋겠다.""저도 알아요."짧은 침묵이 흘렀다. 남성구가 다시 입을 열었다."최미연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다."도혁의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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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남편의 의심

윤서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열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구두를 벗다가 윤서는 잠시 멈췄다. 태호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반쯤 비운 술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며칠 전 일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손목을 감쌌다가 곧 손을 내렸다.그대로 지나치려는데 태호가 불렀다."오늘 행사 갔다 왔어?""네.""배도혁도 왔다며."윤서의 걸음이 멈췄다. 태호가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행사장에서 찍힌 사진이 벌써 인터넷에 올라와 있었다."기사 터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같이 있냐.""같이 있었던 게 아니에요. 한성유통이 후원한 행사고, 배도혁 씨는 홍보대사였어요.""우연히?""섭외는 석 달 전에 끝났대요."태호는 대답 대신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윤서는 그 얼굴을 살폈다.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할 말 없으면 올라갈게요.""둘이 얘기했어?""인사는 했어요.""그게 끝이야?""네."태호가 피식 웃었다."왜 웃어요?""둘이 참 자주 우연히 만나네."윤서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하고 있잖아요, 지금."태호가 술잔을 내려놓았다."기사까지 났으면 알아서 피해야 하는 거 아니야?""오늘은 제가 빠질 수 없는 행사였어요. 배도혁 씨도 마찬가지였고요.""그러니까 네가 빠졌어야지.""왜 저예요?""뭐?""제가 왜 제 회사 행사에서 빠져야 하는데요?"태호의 눈썹이 꿈틀했다."내 와이프가 다른 남자랑 기사 났어. 그것도 내 동생이랑. 그래서 내가 회사 일까지 접고 숨어 있어야 해?""동생이요?"태호가 헛웃음을 쳤다."누가 그 새끼를 내 동생이래."윤서는 잠깐 멈칫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 오늘도 마찬가지고요.""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못 믿겠으면 믿지 마세요. 제가 설명했잖아요. 그것도 못 믿겠으면 더 설명할 것도 없어요."윤서가 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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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화해의 탈

최미연에게 연락이 온 건 오후였다. 오늘 저녁 시간 비워둬. 윤서는 결재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무슨 일인데요?"네 부모님하고 저녁 먹기로 했어. 태호한테도 얘기해뒀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갑자기요?"가족끼리 밥 먹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니? 최미연은 장소와 시간만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저녁 약속은 시내 한정식집이었다. 윤서가 도착했을 때는 채명수 부부와 최미연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태호도 잠시 뒤 들어왔다."우리 며느리 왔네."최미연이 반갑게 윤서를 맞았다. 며칠 전 집에서 봤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앉아. 회사 끝나고 오느라 힘들었지?"윤서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식사가 시작되자 최미연은 분위기를 주도했다."결혼식 끝나고 진작에 식사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늦었네요. 애들 때문에 걱정이 많으셨죠?"윤서의 어머니가 난처하게 웃었다."부부가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는 거죠."최미연은 그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사돈 내외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던 눈치였다."그럼요. 태호도 요즘 많이 반성하고 있어요."윤서의 시선이 태호에게 향했다. 태호는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정작 윤서에게는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다 지난 일이니 이제 좋은 것만 생각해야죠."최미연이 웃으며 태호의 잔을 채웠다. 채명수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애들이 알아서 잘하겠지.""사돈어른 말씀이 맞아요. 우리 윤서가 워낙 똑 부러지는 애라 제가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우리 윤서.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최미연은 사람들 앞에서 윤서의 손까지 잡았다."내가 딸이 없어서 그런가, 윤서가 들어오고 집안이 얼마나 환해졌는지 몰라요."윤서는 손을 빼지 않았다. 대신 웃지도 않았다.식사가 끝나갈 무렵, 최미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윤서야. 잠깐 나 좀 보자."윤서도 뒤따라 복도로 나왔다. 문이 닫히자 최미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다음 주 화요일 비워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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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오래된 이름

다음 날 오전, 윤서는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사장실로 올라갔다. 채명수는 다음 달 유통사업부 투자 계획서를 훑어본 뒤 몇 군데를 지적했다."이건 다시 잡아. 수익률이 너무 보수적이야.""시장 상황 반영한 거예요.""그러니까 더 공격적으로 가야지. 요즘 경쟁사들 확장 속도 봤잖아."윤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채명수는 회사 일에서만큼은 늘 이런 식이었다. 사적인 이야기는 최대한 미루고, 숫자와 계획부터 확인했다.일 얘기가 한참 이어졌다. 어젯밤 식사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윤서가 서류를 정리하다 먼저 물었다."아버지. 어제 어머니가 무슨 말씀 안 하셨어요?"채명수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무슨 말.""그냥요. 저희 일 관련해서요.""부부끼리 싸웠으면 둘이 풀어. 부모들까지 끼어들 일 만들지 말고."역시 그게 전부였다. 윤서는 더 묻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이런 식으로 선을 그었다. 딸의 결혼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는데 책상 한쪽에 놓인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한빛정책연구소 후원의 밤]걸음이 멈췄다. 처음 보는 이름이 아니었다. 결혼 당시 지참금 사용처를 확인하면서 봤던 곳이었다. 얼마 전 최미연이 가져온 한약의 거래명세표에도 같은 이름이 찍혀 있었다. 서로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두 장의 서류에, 같은 이름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왜 안 가?"채명수의 목소리에 윤서가 시선을 거뒀다."아니에요. 서류 가지고 갈게요."밖으로 나오자 비서가 서류를 받으러 다가왔다. 윤서는 자연스럽게 물었다."아버지 다음 주 일정에 한빛정책연구소 행사가 있던데요.""네. 후원의 밤 말씀하시는 거죠?""매년 참석하세요?""네. 제가 입사했을 때도 이미 후원하고 계셨어요.""그게 언젠데요?""5년은 넘었죠."결혼 전이었다. 그것도 한참 전. 시댁과 얽히기도 전부터, 아버지는 이미 그 이름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아버지가 거길 왜 후원하시는지 아세요?""정확한 건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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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번엔 당신도

최미연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며칠 뒤였다. 점심 약속이 있다는 말에 나갔지만, 막상 도착한 곳은 진성갤러리 근처 호텔 라운지였다. 윤서가 자리에 앉자 최미연은 차부터 권했다."요즘 회사 많이 바쁘니?""네. 뉴욕 건도 정리해야 하고요.""그래도 몸은 챙겨야지."말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 것 같았다. 윤서는 찻잔을 내려놓았다."무슨 말씀 하시려고요?"최미연이 잠시 윤서를 바라봤다."병원 한번 더 가자."역시나였다."지난번에 검사받았잖아요.""그건 기본적인 것만 본 거고. 이번에는 제대로 확인해보자고.""특별한 문제 없다고 했어요.""그때는 그때고."최미연은 이미 알아본 게 있는 듯 병원 이름까지 꺼냈다."난임 쪽으로 잘 보는 선생님이 있대. 예약 잡기 어려운데 내가 부탁해놨어."윤서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에게 묻기도 전에 알아보고, 부탁하고, 이제는 통보하고 있었다."어머니. 왜 자꾸 저만 검사받아야 해요?"최미연의 손이 멈췄다."무슨 말이니?""아이 가지려고 검사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저만 해요?"최미연의 표정이 조금씩 굳었다. 윤서는 그대로 물었다."태호 씨는요? 태호 씨도 같이 검사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최미연이 황당하다는 듯 윤서를 바라봤다."멀쩡한 애가 무슨 검사를 받아.""저도 멀쩡해요.""여자는 겉으로 멀쩡해도 모르는 거야.""남자는 안 그래요?""윤서야."목소리가 낮아졌다."괜히 말 이상하게 만들지 마. 내가 너한테 문제가 있다고 했니?""그럼 확인은 왜 저만 하는데요?"최미연이 입을 다물었다. 윤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저도 검사받을 수 있어요. 필요한 검사라면 받을게요. 대신 이번에도 아무 문제 없으면 태호 씨도 검사받게 해주세요.""그건 나중에 생각해. 일단 너부터 제대로 확인하고."또 그 말이었다. 윤서는 더 실랑이하지 않았다."알겠어요."최미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래. 괜히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마. 다 너희 생각해서 그러는 거니까."윤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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