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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배덕한 여름: Chapter 11 - Chapter 20

61 Chapters

11

월요일 오전, J&J에는 개업 축하 화분 주문이 한꺼번에 들어왔다.재희가 주문서를 확인하는 동안 여름은 창고와 매장을 오가며 화분에 리본을 달았다. 평소라면 중간중간 수다라도 떨었겠지만 오늘은 배송 시간이 빠듯해 손을 쉬지 않았다.“여름아, 이거 주소 다시 확인해.”“네.”여름은 주문서를 받아 주소를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CH건설?”“왜?”“아는 데라서요.”재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네가 건설회사를 어떻게 알아?”“그 아저씨 회사잖아요.”“배덕배 씨?”“네.”재희는 주문서를 다시 확인했다.“본사에 신규 본부가 생겼나 봐. 개업 화분 세 개.”여름은 별다른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과 덕배를 만나러 가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배송 기사님 언제 오세요?”“오늘 한 분 쉬어서 늦는대.”재희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좁혔다.“이거 먼저 나가야 하는데.”여름이 리본을 묶으며 말했다.“제가 다녀올까요?”“세 개인데?”“택시 타면 되죠.”결국 화분 세 개는 택시 트렁크와 뒷좌석에 나눠 실렸다.CH건설 본사는 여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높은 건물을 올려다보던 여름은 화분 하나를 안고 로비로 들어갔다. 나머지는 경비 직원이 카트를 가져와 함께 옮겨줬다.“감사합니다.”안내데스크에서 배송 확인을 마치고 지정된 층으로 올라가자 직원 한 명이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여기 두시면 됩니다.”“네. 리본 방향만 맞춰드릴게요.”여름은 화분을 하나씩 살피며 위치를 잡았다. 잎이 뒤집힌 곳을 펴고 배송 중 눌린 리본도 다시 매만졌다. 그냥 내려놓고 가도 되는 일이었지만 자기 손을 떠나는 순간까지 보기 좋았으면 했다.마지막 화분을 돌려놓는 순간 뒤쪽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발주업체는 오늘 안으로 정리해서 올려.”익숙한 목소리였다.여름이 돌아봤다.덕배가 복도 끝에서 직원 둘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꽃집이나 호텔에서 보던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짙은 정장 차림에 넥타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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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햇살이 J&J의 통유리를 비스듬히 지나 작업대까지 들어왔다.여름은 오전에 들어온 장미의 겉잎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 송이씩 줄기를 돌려가며 상한 부분을 떼어내고 길이를 맞추는 손이 제법 능숙했다.재희는 거래처와 통화 중이었다.문에 달린 종이 맑게 울린 건 그때였다.“어서 오세요.”여름이 습관처럼 밝게 인사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크게 떴다.며칠 전 가게 앞에서 자동차 흠집 때문에 곤란을 겪었던 할머니였다.“어?”할머니도 여름을 알아보고 환하게 웃었다.“학생, 있었네.”“안녕하세요, 할머니.”여름은 손에 들고 있던 가위를 내려놓고 작업대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의 양손에는 무언가 묵직하게 든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이건 뭐예요?”“별거 아니야.”할머니는 봉지를 작업대 위에 올렸다. 안에는 작은 병에 든 음료수가 가득 들어 있었다.“저번에 너무 고마워서.”“이걸 왜 이렇게 많이 사오셨어요.”“학생이랑 사장님하고 나눠 먹어.”여름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안 그러셔도 되는데.”“내 마음이 그래.”“그래도 너무 많아요.”할머니는 봉지를 다시 들려는 여름의 손등을 가볍게 쳤다.“그날 학생 없었으면 내가 꼼짝없이 돈 물어줄 뻔했어.”그 말을 들은 여름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할머니는 당시에도 자신이 부딪쳤다고 확신한 게 아니었다. 상대가 워낙 큰소리를 치니 겁부터 먹고 자기가 잘못했나 보다 생각했을 뿐이었다.“그래도 CCTV 확인해서 다행이었잖아요.”“그걸 학생이 해줬지.”“저 아니어도 누가 해줬을 거예요.”“요즘 누가 남의 일에 그렇게 나서.”할머니가 웃으며 여름의 손을 잡았다.“고마웠어.”여름은 잠깐 말이 없었다.괜히 쑥스러워졌다.“그럼 음료수는 잘 먹을게요.”“그래.”“대신 잠깐만 기다리세요.”여름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왜?”“잠깐만요.”그녀는 냉장고 앞으로 가더니 꽃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연한 분홍빛 장미 몇 송이에 작은 흰 꽃과 초록 소재를 조금 곁들였다.재희가 통화를 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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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수요일 오후, 덕배는 호텔 스위트룸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평일 한낮이었다.오전에 CH건설 거래처 미팅을 끝낸 뒤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비었고, 마침 근처에 있다는 연락을 해온 여자와 점심을 먹었다. 식사가 술 한잔으로 이어졌고 그 뒤는 굳이 복잡하게 설명할 것도 없었다.덕배에게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오빠.”뒤따라 나온 여자가 그의 팔을 잡았다. 채아와는 전혀 다른 여자였다. 긴 웨이브 머리에 짧은 원피스, 덕배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기대는 모습에서도 어색함이 없었다.“오늘 저녁에도 시간 돼?”덕배는 재킷을 걸치며 시계를 확인했다.“안 돼. 회사 들어가야 돼.”“저녁인데도?”“회의 있어.”“맨날 바빠.”“그러니까 낮에 봤잖아.”여자가 입술을 삐죽이자 덕배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한번 헝클었다.“다음에 봐.”“오빠가 먼저 연락해.”“생각나면.”“진짜 얄미워.”“알아.”둘은 나란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복도 반대편에서는 여름이 작은 꽃다발 상자를 들고 객실 번호를 확인하고 있었다.이번 주문은 생일을 맞은 투숙객에게 보내는 꽃이었다. 여름은 상자 위에 놓인 카드가 구겨지지 않았는지 한번 확인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앞쪽에서 사람이 오는 기척에 자연스럽게 옆으로 비켜섰다.그러다 익숙한 체격이 눈에 들어왔다.여름의 걸음이 멈췄다.“어?”덕배도 거의 동시에 여름을 발견했다.“또 너냐?”여름이 꽃 상자를 품에 안은 채 눈을 깜빡였다.“그러게요.”덕배가 여름의 앞치마부터 꽃 상자까지 한번 훑었다.“너 이 호텔 전담이냐?”“아니요. 주문이 들어오니까 오는 거죠.”“며칠 전에도 왔잖아.”“호텔에 꽃 선물하는 사람이 많나 봐요.”여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그때 덕배 옆에 있던 여자가 팔짱을 조금 더 깊게 끼며 물었다.“오빠, 누구야?”“꽃집 직원.”“아.”여자가 여름을 한번 바라봤다.여름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인사를 마친 여름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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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오후, 덕배는 현장에서 예상보다 오래 붙잡혔다.자재 반입 과정에서 작업자들 사이에 실랑이가 있었고, 말로 끝났어야 할 일이 몸싸움까지 번졌다. 덕배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쪽이 멱살을 잡고 있었고, 뜯어말리는 과정에서 튀어나온 철제 모서리에 팔을 길게 긁혔다.큰 상처는 아니었다.셔츠 소매가 찢어지고 팔뚝에 피가 조금 흐르는 정도였다.덕배는 싸움을 벌인 사람들을 현장사무실에 앉혀놓고 상황부터 정리했다. 누가 먼저 손을 댔는지, 왜 싸움이 시작됐는지 확인한 뒤 책임자에게 필요한 조치를 지시했다.“오늘 둘 다 작업 빼.”“예, 이사님.”“다시 싸우면 둘 다 현장에서 빼버린다고 전하고.”덕배는 찢어진 소매를 걷어 올렸다. 피가 말라붙은 팔을 한번 보고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그리고 이거 보고서 올려. 싸웠다는 것만 쓰지 말고 원인까지.”일을 끝내고 나온 건 네 시가 가까워진 뒤였다.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가던 덕배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걷어 올린 셔츠 아래로 난 상처가 바람에 닿을 때마다 따끔했지만 그 정도 통증은 신경 쓸 축에도 못 들었다.그때 반대편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걸어왔다.여름이었다.J&J 앞치마는 없었고 얇은 가디건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양손에는 포장재가 든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신호가 바뀌었다.여름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오다 덕배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어?”덕배도 알아봤다.“또 만나네.”“그러게요.”여름이 가볍게 웃으며 지나가려다가 멈췄다.시선이 덕배의 팔에 박혔다.찢어진 셔츠 사이로 길게 긁힌 상처와 말라붙은 피가 그대로 보였다.여름의 표정이 바로 달라졌다.“팔 왜 그래요?”덕배가 자기 팔을 내려다봤다.“이거?”“다쳤잖아요.”“긁힌 거야.”“병원 안 가요?”덕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이걸로?”너무 당연한 대답이라 여름이 잠시 그를 쳐다봤다.“피 나는데요.”“멈췄어.”“상처도 더러워졌잖아요.”“안 죽어.”여름의 눈썹이 조금씩 좁아졌다.“누가 죽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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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배는 차에 올라탄 뒤에도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운전대에 왼손을 얹은 채 오른팔을 한번 내려다봤다. 흰 붕대는 그의 구릿빛 피부와 묘하게 안 어울렸다. 싸움판에서 찢어지고 베이는 일에 익숙한 몸이라 이 정도 상처에 붕대를 감아본 기억도 드물었다.약봉투는 조수석에 던져져 있었다.저녁에 한 번 더 소독하세요.그 말까지 떠오르자 덕배가 코웃음을 쳤다.“잔소리는 존나게 해.”시동을 걸자마자 휴대전화가 울렸다.정민이었다.“왜.”- 어디야?“가는 중.”- 회장님 기다리셔.“알아. 십 분이면 가.”덕배는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차강수의 집무실에는 정민이 먼저 와 있었다. 서쪽 업장 관련 자료가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었고, 강수는 안쪽에서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었다.덕배가 들어서자 정민이 자료를 집어 들다 말고 그의 팔을 봤다.시선이 정확히 붕대에서 멈췄다.“뭐냐.”“뭐가.”“팔.”덕배는 소파에 앉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현장에서 긁혔어.”정민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긁힌 걸 누가 저렇게 정성스럽게 감아줬냐?”“약국에서.”“약국에서 리본까지 묶어줘?”덕배가 자기 팔을 내려다봤다.붕대 끝에 작은 매듭이 하나 있었다. 여름이 풀리지 말라고 묶어놓은 것이었다.“이게 무슨 리본이야. 붕대지.”“누가 봐도 직접 감아준 건데.”“너 오늘 존나 한가하냐?”덕배가 바로 받아치자 정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여자?”“여자면 왜.”“채아?”덕배가 물병을 집다가 멈췄다.“아니.”정민은 더 묻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거슬렸다.덕배가 먼저 눈을 흘겼다.“왜 아무 말 안 해.”“하면 지랄할 거잖아.”“잘 아네.”“그래서 안 하려고.”덕배가 코웃음을 치는 사이 강수가 보고서를 덮었다.“시작해.”두 사람의 장난기가 동시에 사라졌다.정민이 확보한 계좌와 인물 관계를 설명했고, 덕배는 현장에서 확인한 내용을 붙였다. 돈이 빠져나간 경로는 어느 정도 잡혔지만 아직 윗선까지 연결할 증거가 부족했다.덕배가 자료 한 장을 밀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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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덕배는 거래처 미팅을 마치고 본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차 안에는 아직 여름이 감아준 붕대가 그대로였다. 아침에 풀어버릴까 하다가 상처가 옷에 쓸리는 게 귀찮아 그냥 둔 것이었다. 적어도 덕배는 그렇게 생각했다.신호를 기다리던 중 앞쪽 도로가 막혔다.“뭐야.”덕배는 창문 밖을 보다가 익숙한 간판을 발견했다.J&J.며칠 전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곳이었다.그런데 꽃집 앞에 승용차 한 대가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서 작은 체구 하나가 남자를 올려다보며 손으로 차를 가리키고 있었다.덕배의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다.또 차냐.창문을 조금 내리는 순간 여름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저기요, 아저씨 차 빼라니까요!!”덕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쟤는 차랑 원수졌냐.”처음 자기와 만났던 날이 그대로 겹쳐 보였다.다만 상황은 조금 달랐다.여름의 얼굴에는 처음부터 화가 나 있었다. 남자의 차가 꽃집 입구를 완전히 막고 있었고, 옆에는 꽃을 가득 실은 배송 차량이 오도 가도 못한 채 서 있었다.남자는 차를 빼기는커녕 담배를 피우며 여름을 내려다봤다.“잠깐 세웠다니까 왜 이렇게 지랄이야.”여름의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잠깐이 벌써 이십 분이에요. 기사님 기다리고 계시잖아요.”“기다리라 그래.”“왜요? 아저씨가 잘못 세웠는데 왜 다른 사람이 기다려야 돼요?”덕배는 무심히 보던 자세를 조금 바로잡았다.낯익은 장면이었다.자기한테도 저랬다.무서워하면서도 차를 빼기 전에는 한 발도 안 물러섰다.그런데 이번 남자는 덕배와 달랐다.“어린 년이 진짜 말 많네.”남자가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덕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 가셨다.여름의 눈썹도 치켜올라갔다.“욕하지 마세요.”“뭐?”“제가 아저씨한테 욕했어요? 차 빼달라고 했잖아요.”“가게 직원이면 가게나 처보고 있어.”“차를 빼주시면 들어갈게요.”“싫다면?”여름이 남자를 똑바로 봤다.“신고할게요.”남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뭘 신고해.”“영업 방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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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집 앞에 몰려든 시선이 순식간에 늘어났다.덕배는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한 손으로 남자의 멱살을 틀어쥔 채 붉게 달아오른 여름의 왼쪽 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손바닥 자국이 선명했다.그 순간 속에서 열이 확 치밀었다.“차 빼달라는데 애 얼굴을 후려?”“애가 먼저 욕하고 사람을 물었잖아!”“물기 전에 때렸잖아, 이 새끼야.”덕배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남자의 목이 셔츠 깃에 졸렸다.“그리고 아까부터 봤는데 먼저 욕한 것도 너고, 휴대전화 처낸 것도 너야.”남자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봤어?”“어. 존나 잘 봤어.”덕배는 웃음기 하나 없이 남자를 내려다봤다. 현장에서 사람을 찍어 누를 때 나오는 얼굴이었다.“차 불법으로 처세워놓고 영업 막은 것도 모자라 여자애 팔 잡고 뺨까지 후려갈겼으면 입이라도 닥치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당신이 뭔데 끼어들어!”“지나가던 사람.”덕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근데 내가 오지랖이 좀 넓어.”그때 뒤에서 여름이 씩씩거리며 앞으로 나왔다.“아저씨, 놔주세요.”덕배가 고개만 돌렸다.“왜.”“제가 경찰 부를 거예요.”분노가 조금도 가라앉지 않은 얼굴이었다.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였지만 말은 의외로 정확했다.덕배는 남자의 멱살을 놓았다.남자가 뒤로 비틀거리며 물린 팔부터 확인했다. 선명한 이 자국에 피까지 조금 배어 있었다.“경찰? 좋아. 불러! 나도 이거 고소할 테니까!”여름이 바로 휴대전화를 찾았다.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먼저 주운 건 덕배였다. 액정 한쪽이 깨져 있었다.그걸 본 여름의 얼굴이 또 달아올랐다.“내 폰!”덕배가 먼저 팔을 뻗어 막았다.“야. 가만있어.”“저것도 저 아저씨가 그런 거예요!”“알아.”“산 지 얼마 안 됐는데!”“알았다고.”“진짜 저 인간이—”여름이 다시 앞으로 나가려 하자 덕배가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어 세웠다.“가만있으라고.”“놔요!”“너 지금 가면 또 물 거잖아.”“안 물어요!”덕배가 팔짱을 꼈다.“진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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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돌아간 뒤에도 꽃집 앞은 한동안 어수선했다.문제를 일으킨 남자는 경찰과 함께 자리를 옮겼고, 입구를 막고 있던 차도 빠졌다. 기다리던 배송 차량이 들어오면서 밀려 있던 꽃 상자들이 하나씩 내려졌다.여름은 차가운 캔을 뺨에 댄 채 그쪽으로 걸어갔다.덕배가 바로 팔을 잡았다.“어디 가.”“꽃 받아야죠.”“사장이 있잖아.”“사장님 혼자 어떻게 다 해요.”여름은 너무 당연하게 대답하고 팔을 빼려 했다. 덕배가 놓지 않자 눈이 가늘어졌다.“놔주세요.”“너 방금 경찰한테 병원 가라는 말 들었어.”“뺨 맞았는데 꽃을 못 들어요?”“넌 처맞고도 일을 하냐?”“손은 멀쩡하잖아요.”덕배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그 논리라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진짜 독하다.”“제가 뭘요.”여름은 팔을 빼고 꽃 상자 쪽으로 향했다.덕배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혀를 찼다. 그냥 가면 됐다. 경찰한테 본 것도 말했고, 상대 남자도 치웠고, 차까지 빠졌다.자기가 여기 더 있을 이유는 없었다.그런데 발이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재희가 상자를 받다가 덕배와 눈이 마주쳤다.“아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별거 아닙니다.”“여름이 혼자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덕배가 코웃음을 쳤다.“혼자서도 팔 하나는 씹어먹겠던데요.”재희가 결국 웃었다.“원래 저러진 않아요.”“저도 압니다.”말하고 나서 덕배가 잠깐 멈췄다.재희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덕배는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몇 번 봤으니까.”그 사이 여름은 배송 기사와 함께 꽃 상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뺨을 맞고 사람 팔을 물었던 애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손은 조심스러웠다.“이쪽 상자 조금 젖었는데 안에 괜찮을까요?”“열어볼까요?”“네. 잠깐만요.”여름은 차가운 캔을 작업대 위에 내려놓고 상자를 열었다. 꽃을 하나씩 살펴보던 얼굴이 금세 진지해졌다.덕배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성질이 터질 때는 앞뒤 없이 달려들더니 꽃 앞에서는 사람이 딴판이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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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강수의 집무실에 들어선 덕배는 재킷부터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었다.테이블에는 정민이 확보한 사진과 계좌 내역이 펼쳐져 있었다. 며칠 동안 지켜보던 서쪽 업장 책임자가 움직였고, 그가 만난 사람이 예상 밖이었다.덕배는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이 새끼가 왜 붙어.”정민이 맞은편에 앉으며 태블릿을 밀었다.“돈이 여기까지 흘렀어. 중간 계좌 두 개 더 찾았고.”덕배는 화면을 빠르게 넘겼다. CH건설 현장에서 발견한 자재 수량 문제와 사뇌파 쪽 돈 흐름은 별개의 일이었지만, 최근 두 건이 동시에 터진 탓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강수는 가장 마지막에 나온 이름을 확인한 뒤 짧게 물었다.“확실해?”“예.”정민이 대답했다.덕배는 사진을 내려놓으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제가 만나보겠습니다.”강수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아직.”“더 기다리면 꼬리 자를 수도 있습니다.”“그래도 기다려.”덕배의 턱이 잠깐 굳었다. 성질대로라면 당장 찾아가 멱살부터 잡고 싶은 상대였지만, 강수가 멈추라고 하면 멈췄다. 그 선은 오래전부터 분명했다.“예, 형님.”“사람만 붙여.”“알겠습니다.”회의는 그 뒤로 길지 않았다.강수가 자리를 뜬 뒤 덕배는 소파에 깊숙이 기대며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조금 전까지 눌러두었던 짜증이 얼굴에 그대로 올라왔다.“씨발, 기다리는 게 제일 좆같아.”정민은 자료를 정리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네가 기다리는 걸 잘했으면 진작 성인군자 됐겠지.”“내가 성인군자면 네가 제일 먼저 굶어 죽어.”“왜?”“입 잘못 놀려서.”정민이 피식 웃었다.그때 덕배가 걷어 올린 셔츠 아래로 흰 붕대가 드러났다.정민의 시선이 잠깐 그쪽에 머물렀다.“아직도 하고 있냐?”덕배도 팔을 내려다봤다.“옷에 쓸려.”“그래.”이번에는 정민이 더 묻지 않았다.덕배는 오히려 그게 이상해 눈을 가늘게 떴다.“왜.”“뭐가.”“왜 아무 말 안 해.”“뭘 해야 되는데.”“……됐다.”정민이 입꼬리를 올렸다.“꽃집 애가 감아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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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후, 덕배는 CH건설 현장 두 곳을 연달아 돌았다.자재 수량 문제는 거래업체 내부까지 확인해야 할 단계로 넘어갔고, 사뇌파 서쪽 건도 아직 강수의 지시대로 사람만 붙여둔 상태였다. 어느 쪽도 당장 손을 댈 수 없다는 게 덕배 성질에는 가장 맞지 않았다.마지막 현장에서 나온 그는 차에 올라타며 넥타이를 풀었다.조수석에는 어제부터 그대로 놓여 있던 작은 약국 봉투가 있었다.덕배는 그걸 한번 보고 시동을 걸었다.본사로 돌아가는 길, 차는 익숙한 사거리에서 신호에 걸렸다. 오른쪽으로 몇 블록만 들어가면 J&J가 있었다.덕배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두드렸다.연고값.지난번 여름이 돈을 받지 않았다. 꽃이나 사라고 했던 말도 기억났다.그 정도면 이유는 충분했다.“그래. 꽃이나 하나 사지.”누구에게 줄지는 정하지 않았다. 채아에게 줘도 됐고 회사에 가져다놔도 됐다.덕배는 방향지시등을 켰다.J&J 앞에 도착한 그는 이번에는 입구에서 한참 떨어진 빈자리에 차를 댔다. 처음처럼 차 때문에 바락거리는 소리를 또 들을 생각은 없었다.문을 열자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어서 오세요.”작업대 뒤에 있던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덕배는 가게 안을 한번 훑었다.냉장고 앞에도 없고, 안쪽 작업대에도 없었다.평소라면 먼저 튀어나왔을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재희가 그를 알아봤다.“배덕배 씨?”“예.”“여름이 찾으세요?”질문이 너무 정확하게 들어오자 덕배의 눈썹이 꿈틀했다.“아뇨.”대답은 즉시 나왔다.재희의 입꼬리가 조금 움직였다.덕배가 덧붙였다.“꽃 사러 왔습니다.”“아.”재희는 더 묻지 않고 작업대 앞으로 나왔다.“어떤 꽃 찾으세요?”덕배가 꽃 냉장고를 봤다.장미 말고는 이름을 아는 게 거의 없었다.“그냥 아무거나 하나 주십시오.”“선물하실 거예요?”“아마도요.”“받으실 분이 여자분이세요?”덕배가 잠깐 생각했다.“그것도 아직 모르겠는데.”재희가 결국 웃었다.“꽃을 먼저 사시고 줄 사람은 나중에 정하시려고요?”“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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