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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배덕한 여름: Chapter 21 - Chapter 30

61 Chapters

21

덕배가 CH건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운 건 오후 다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시동을 끄고 재킷을 챙기려다 조수석에 놓인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연한 주황빛과 흰색이 섞인 작은 꽃다발은 검은 가죽 시트 위에서 지나치게 튀었다.덕배는 잠시 바라보다 꽃을 집어 들었다.회사에 들고 올라가기도 우스웠다.그렇다고 차 안에 처박아두면 금방 시들 것 같았다.“씨발, 이걸 왜 샀지.”사놓고 할 소리는 아니었다.덕배는 결국 꽃을 든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상층부에서 내리자 비서실 직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꽃으로 향했다. 덕배가 눈을 흘기자 다들 재빨리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뭘 봐.”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차강수의 집무실 앞에는 정민이 먼저 와 있었다.덕배를 발견한 정민이 입을 열려다 멈췄다.시선이 꽃다발에 박혔다.덕배가 먼저 경고했다.“아무 말 하지 마.”“아직 안 했는데.”“네 면상이 했어.”정민은 웃음을 삼키며 문을 열었다.강수는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덕배는 들어가다 손에 든 꽃을 보고 잠깐 멈췄다가 소파 한쪽에 아무렇게나 내려놨다.강수의 시선도 꽃에 한 번 닿았다.그뿐이었다.“앉아.”“예, 형님.”업무가 시작되자 꽃은 금세 세 사람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서쪽 업장에서 돈을 빼돌리던 쪽이 예상보다 빨리 움직였다. 붙여둔 사람이 찍어온 사진과 이동 경로를 정민이 정리했고, 덕배는 현장에서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을 짚었다.“오늘 밤에 한 번 더 만날 것 같습니다.”정민이 사진을 넘겼다.덕배가 팔짱을 낀 채 화면을 살폈다.“장소 바뀔 가능성은.”“있어.”“사람 더 붙이면 눈치챈다.”강수가 짧게 말했다.“덕배.”“예.”“네가 가.”덕배의 눈빛이 즉시 달라졌다.“알겠습니다.”“확인만 해.”“예, 형님.”“사고 치지 말고.”덕배가 헛웃음을 흘렸다.“제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그러십니까.”정민이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많이.”덕배가 고개를 돌렸다.“너는 닥쳐.”강수는 더 말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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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시골에 내려온 건 전날 오후였다.버스에서 내리자 서울보다 한결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정류장 너머로 낮은 집과 밭이 이어졌고, 익숙한 산자락 아래로 듬성듬성 자리 잡은 집들도 예전 그대로였다.여름은 커다란 가방을 고쳐 메고 마을 안쪽으로 걸었다.대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누구야?”“할머니!”여름이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마당에서 고추를 다듬던 김꽃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름을 알아본 순간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아이고, 우리 강아지 왔어?”“응!”여름은 가방부터 내려놓고 꽃분에게 달려가 안겼다. 꽃분은 손녀의 등을 몇 번이나 두드리다가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왜 또 살 빠졌어.”“안 빠졌어.”“볼이 홀쭉하잖아.”“원래 이래.”“밥은 제대로 먹고 다녀?”“그럼.”“뭘 먹는데.”“밥.”꽃분의 눈이 가늘어졌다.여름이 바로 웃었다.“진짜 잘 먹는다니까.”안쪽에서 슬리퍼를 끌며 나온 서양춘이 두 사람을 보고 혀를 찼다.“왔으면 들어오지, 마당에서 검문받냐?”여름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삼촌!”“내 선물은?”“인사보다 선물이 먼저야?”“서울에서 돈 버는 조카가 내려오면 삼촌 선물 하나는 있어야지.”여름은 잠깐 양춘을 보다가 가방 옆주머니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 던졌다.양춘이 얼떨결에 받아냈다.“이게 끝이야?”“응.”“정 없다.”“그럼 줘.”여름이 손을 내밀자 양춘은 바로 초콜릿을 주머니에 넣었다.“누가 싫대?”여름이 깔깔 웃었다.집 안에는 꽃분이 아침부터 준비한 음식이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여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찬부터 국까지 한 바퀴 훑었다.“할머니, 이걸 누가 다 먹어?”“네가.”“나 조금 먹잖아.”“시골 내려오면 많이 먹혀.”“그런 법이 어디 있어.”“우리 집 법.”여름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얌전히 밥상 앞에 앉았다. 꽃분이 밥을 더 퍼주려 할 때마다 숟가락으로 자기 그릇을 필사적으로 막았고, 옆에서는 양춘이 반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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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의 사흘은 여름이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지나갔다.서울로 올라가는 날 아침부터 꽃분은 부엌을 몇 번이나 오갔다. 여름은 자기 가방보다 커진 보따리를 보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할머니.”“왜.”“나 이거 못 들고 가.”“뭐가 무거워.”“김치에 반찬에 참외까지 있잖아.”꽃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작은 통 하나를 더 넣었다.“이건 장아찌.”“할머니!”“서울 가면 이런 거 못 먹어.”“마트에 다 있어.”“내가 한 건 없잖아.”그 말에는 여름도 더 반박하지 못했다.옆에서 구경하던 양춘이 보따리를 들어봤다가 바로 내려놓았다.“이건 조카 보내는 짐이 아니라 이삿짐인데?”“너도 뭐 좀 보태.”“내가 뭘.”“돈.”양춘의 얼굴이 굳었다.여름이 웃음을 터뜨렸다.“됐어. 삼촌 돈 없어.”“야, 나 돈 있어.”“그럼 줘.”“버스 놓치겠다. 빨리 가자.”양춘이 먼저 보따리를 들고 도망치듯 대문을 나갔다.여름은 꽃분을 꼭 안았다.“또 올게.”“밥 잘 먹고.”“응.”“아프면 바로 병원 가고.”“응.”“늦게 혼자 다니지 말고.”“알았어.”꽃분의 잔소리는 대문을 나설 때까지 이어졌다.마을길을 걷던 여름은 며칠 전 진숙을 만났던 밭 앞을 지나갔다. 오늘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여름은 별생각 없이 걸음을 옮겼다.정류장에 도착하자 양춘이 짐을 내려놓으며 허리를 폈다.“서울 가서 이거 혼자 들 수 있겠냐?”“택시 타야지.”“돈 아깝다고 버스 타지 말고.”“알았어.”“진짜?”여름이 눈을 가늘게 떴다.“왜 다들 내가 말을 안 듣는다고 생각하지?”양춘이 대답 대신 헛웃음을 흘렸다.“왜 웃어?”“모르면 됐다.”버스가 들어왔다.여름은 양춘에게 손을 흔든 뒤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익숙한 마을이 천천히 멀어졌다.사흘 동안 꽃집도, 서울 생활도 잠시 잊고 있었다.휴대전화를 확인하자 J&J 단체방에는 재희가 보내놓은 사진이 잔뜩 쌓여 있었다. 새로 들어온 꽃과 예약 주문표, 그리고 마지막에는 짧은 메시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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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배가 서쪽 애들의 위치를 넘겨받은 건 오후 여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퇴근 차량이 몰리기 시작한 도로를 빠져나와 도착한 곳은 상가와 오래된 건물이 뒤섞인 골목이었다. 덕배는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한정민: 회색 SUV. 세 명. 아직 접촉하지 마.]덕배는 짧게 답했다.[알아.]강수의 지시는 확인이었다.먼저 건드리지 않는다. 누구를 만나고 어디로 움직이는지 본다.성질대로 들이받는 것과 명령을 어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덕배는 차에서 내려 골목 건너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회색 SUV 주변에 남자 셋이 보였다. 며칠째 사진으로 확인한 얼굴들이었다.담배를 꺼내 문 순간 놈들이 움직였다.덕배의 눈빛도 곧바로 가라앉았다.그 시각 여름은 골목 반대편에서 죽을 맛이었다.“할머니, 진짜…….”양손에 든 보따리가 무거웠다.집까지 택시를 타고 왔지만 냉장고에 반찬을 넣다가 재희 몫으로 챙겨온 것들을 발견했다. 내일까지 두면 김치 냄새가 더 밸 것 같아 J&J에 가져다놓으러 나온 길이었다.김치에 장아찌, 꽃분이 직접 만든 반찬 몇 가지까지.여름은 보따리를 고쳐 들었다.“사장님 안 먹으면 진짜 혼나야 돼.”큰길로 나가는 지름길이라 골목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앞쪽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여름은 걸음을 늦췄다.남자 셋.분위기가 좋지 않았다.그중 한 명이 뒤를 자꾸 확인하고 있었다.여름은 바로 반대편으로 비켜섰다.괜히 엮이지 않는 게 맞았다.시선을 내린 채 지나가려는데 남자 하나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뒤를 살피느라 여름을 제대로 보지 못한 몸이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아!”여름이 휘청했다.손에서 보따리 하나가 떨어졌다.툭.뚜껑이 제대로 잠기지 않았던 김치통이 바닥을 구르며 열렸다.붉은 김치가 아스팔트 위로 쏟아졌다.장아찌 통도 뒤집혔다.꽃분이 하나하나 싸준 반찬들이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여름은 그대로 굳었다.남자는 한번 돌아봤다.“아, 씨발.”사과가 아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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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배는 남자의 팔부터 붙잡아 움직임을 막았다.여름의 작은 몸이 팔에 매달린 채 흔들리는 꼴을 더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한 손으로 남자의 손목을 틀어 고정한 뒤 다른 팔로 여름의 허리를 감아 뒤로 떼어냈다.“읍!”여름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야, 놔!”덕배가 힘을 줘 끌어내자 그제야 입이 떨어졌다.남자가 물린 팔을 움켜쥐며 욕설을 내뱉었다.“이 미친년이!”덕배의 눈빛이 단번에 식었다.“입.”“뭐?”“닥치라고.”남자가 덕배를 알아본 순간 표정이 굳었다.“……배덕배?”여름이 씩씩거리다 고개를 들었다.남자가 덕배를 알고 있었다.덕배는 그 반응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름을 자기 등 뒤로 밀어놓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바쁜 놈들이 왜 여기서 여자애랑 처싸우고 있어.”“저년이 먼저 물었잖아!”“그 전에 네가 밀었고.”덕배는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여름이 먼저 길을 피한 것도, 남자가 부딪쳐 반찬을 쏟은 것도, 사과는커녕 욕을 하고 두 번이나 밀어낸 것도 전부.옆에 있던 남자 둘이 상황을 살피며 조금씩 움직였다.덕배의 시선이 곧바로 돌아갔다.“가만있어.”짧은 말이었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세 남자의 움직임이 멎었다.여름은 덕배의 등 뒤에서 그 모습을 올려다봤다.이상했다.꽃집 앞에서 자기와 유치하게 아저씨냐 아니냐로 싸우던 남자도, 호텔에서 여자와 나오다 마주치면 능글거리던 남자도 아니었다.남자들이 덕배를 보는 눈부터 달랐다.“배 이사, 이건 우리 일하고 상관없어.”“알아.”덕배는 낮게 대답했다.“그러니까 더 좆같지. 일도 아닌 걸로 사람 건드리고 처다니니까.”“우리가 먼저 그런 게 아니라—”“내가 봤다고 했지.”말이 잘렸다.덕배는 물린 남자의 팔을 한번 내려다봤다.선명한 이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너.”남자가 움찔했다.“반찬값 물어줘.”“뭐?”덕배의 얼굴이 구겨졌다.“귀먹었냐?”등 뒤에서 여름이 불쑥 끼어들었다.“통값도요.”덕배가 돌아봤다.여름은 아직 화가 덜 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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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깨진 반찬통을 안고 두 걸음쯤 갔을 때 덕배가 뒤에서 불렀다.그녀는 못 들은 척 계속 걸었다. 방금 전까지 할머니 생각에 울컥했던 것도 창피한데, 사람을 두 번밖에 안 물었다는 말을 제 입으로 해버린 건 더 창피했다.덕배가 금세 따라붙었다.“야, 어디 가.”“꽃집이요.”“그걸 들고?”“버릴 거 버리고 통은 씻어야죠.”덕배는 여름의 품에 안긴 봉투를 내려다봤다. 깨진 플라스틱 틈으로 양념이 새어 옷자락까지 붉게 묻고 있었다.“줘.”“싫어요.”“차에 실어.”“아저씨 차 더러워져요.”“이미 네가 들고 걸어가면서 다 흘리고 있어.”여름이 아래를 내려다봤다.정말이었다.몇 방울씩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덕배가 봉투를 빼앗듯 받아 들었다.“아.”“뭘 아야. 손 놔.”“제가 들 수 있는데.”“알아. 근데 존나 지저분하잖아.”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덕배는 봉투가 정장에 닿지 않도록 한쪽으로 들어 올렸다. 여름은 빈손이 된 채 그를 따라가다가 문득 걸음을 늦췄다.조금 전 남자들이 사라진 방향이 눈에 들어왔다.“아저씨.”“왜.”“아까 그 사람들이 아저씨 알아보던데요.”덕배의 걸음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그래서.”“아저씨도 그 사람들 아는 것 같았고.”“일하다 보면 별놈 다 알아.”대답은 자연스러웠다.여름은 잠시 생각했다.“건설회사 일이 원래 그래요?”덕배가 옆을 봤다.동그란 눈에는 의심보다 순수한 궁금증이 더 많았다.“뭐가.”“아까처럼 무서운 사람들도 만나고 그래요?”“가끔.”“회사원도 힘드네요.”덕배가 헛웃음을 흘렸다.“결론이 그거냐?”“그럼 뭐예요?”“됐다.”굳이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여름이 알아서 좋을 것도 없는 세계였다.주차된 차 앞에 도착한 덕배가 트렁크를 열어 봉투를 넣었다. 여름은 그제야 멈칫했다.“잠깐만요.”“왜.”“저 차 안 타는데요.”덕배가 트렁크를 닫았다.“네 반찬은 탔는데.”“아저씨!”“그럼 뛰어와.”덕배는 운전석으로 향했다.여름이 황당한 얼굴로 뒤따라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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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재희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굳이 지금, 굳이 저 사람 앞에서 말할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이미 덕배는 제대로 흥미가 붙은 얼굴이었다.“뭐야.”여름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또 물었다며.”“가끔.”덕배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뭐, 가끔?”“진짜 가끔이요.”“사람을?”여름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네.”덕배가 어이가 없어 웃었다.“야, 사람 무는 게 어떻게 가끔 할 일이야.”“맨날 무는 건 아니잖아요.”“그럼 다행이라고 해야 되냐?”재희가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쟤 진짜 열받으면 그래요.”“사장님.”“왜. 사실이잖아.”덕배는 깨진 반찬통이 든 봉투를 작업대 옆에 내려놓으며 여름을 위아래로 한번 훑었다.작고 가벼운 체격이었다.저 몸으로 덤벼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 이를 쓰는 건가 싶다가도, 사람 팔에 매달려 눈을 부릅뜨던 모습이 떠오르자 웃음이 났다.“다른 건.”여름이 경계하는 얼굴로 돌아봤다.“뭐가요?”“물기 말고 또 뭐 하냐고.”“없어요.”재희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헤딩.”여름이 눈을 질끈 감았다.덕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뭐?”재희가 이번에는 정말 웃었다.“여름이 헤딩도 잘해요.”덕배가 천천히 여름을 봤다.여름은 이미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사장님, 그만 말해요.”“왜. 잘하잖아.”“그걸 왜 잘한다고 해요!”덕배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잠깐만. 헤딩이 내가 아는 그 헤딩이냐?”“몰라도 돼요.”“머리로 사람 들이받는 거?”여름은 입을 다물었다.그 침묵으로 대답은 충분했다.덕배는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까지 숙여가며 웃었다.“와, 씨발. 너 진짜 별거 다 하는구나.”“웃지 마세요.”“안 웃게 생겼냐?”“저도 아무한테나 그러는 거 아니거든요.”덕배가 웃음을 겨우 멈추고 물었다.“그럼 누구한테 하는데.”“진짜 화나게 하는 사람.”“얼마나 화나야 머리까지 써?”여름은 잠시 생각했다.“물어도 안 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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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집을 나온 뒤에도 덕배의 입가에는 웃음이 남아 있었다.주차된 차까지 걸어가며 가슴을 한번 문질렀다. 아프다기보다 얼얼했다. 여름은 제 이마를 먼저 붙잡고 주저앉을 뻔했지만, 작은 몸에서 나온 것치고 충격은 제법 묵직했다.“헤딩을 잘한다며.”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사람 팔을 물고, 머리까지 들이받고.그런데 평소에는 꽃 한 송이 상할까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만지는 애였다.덕배는 차에 올라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정민에게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었다.[한정민: 셋 이동 끝.][한정민: 회장님 들어오심.][한정민: 너 어디냐.]덕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르게 가셨다.전화를 걸었다.“나 지금 간다.”- 어디 있었는데?“볼일.”- 아까 위치에서 왜 반대로 갔어?덕배는 시동을 걸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여름을 J&J까지 데려다주느라 본사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 기록이 남은 모양이었다.“사람 하나 데려다줬어.”- 누구.“경찰이냐?”- 아니.“그럼 끊어.”- 서여름?덕배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너 씨발, 내 차에 위치추적기 달았냐?”전화기 너머로 정민이 웃었다.- 맞네.“한정민.”- 빨리 와. 회장님 기다리셔.전화가 끊겼다.덕배는 욕을 한번 내뱉고 차를 출발시켰다.본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차강수의 집무실 안에는 정민과 강수만 남아 있었다. 덕배는 재킷을 벗지도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셋 다 확인했습니다.”정민이 사진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오늘 만난 사람은 예상했던 쪽이 아닙니다.”덕배가 사진을 집어 들었다.처음 보는 얼굴이었다.“이 새끼 뭐 하는 놈이야.”“사채 쪽.”덕배의 표정이 굳었다.“서쪽 돈이 왜 사채 쪽으로 흘러.”“아직 확인 중이야.”강수가 짧게 말했다.“덕배.”“예, 형님.”“오늘 봤지.”“예.”“눈치챈 것 같아?”덕배는 잠시 생각했다.골목에서 여름과 일이 터지면서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 역시 자신을 알아봤다.“저는 알아봤습니다.”정민의 시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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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여덟 시가 조금 넘었을 때 덕배는 현장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하루 종일 자재업체 사람들을 붙잡고 확인하느라 점심도 대충 때운 뒤였다. 맞은편에는 현장소장이 앉아 있었고, 테이블 한쪽에는 식사 중에도 확인해야 할 서류가 놓여 있었다.“내일까지 원본 전부 받을 수 있죠?”“예, 이사님.”“업체 쪽에서 또 말 바꾸면 바로 연락해요. 이제 와서 숫자 맞춘다고 서류 손대면 그때는—”탁자 위 휴대전화가 울렸다.덕배는 말을 멈추고 화면을 봤다.[서여름]눈썹이 살짝 올라갔다.며칠 전 골목 사건 이후 연락한 적은 없었다.“잠깐만요.”덕배는 전화를 받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왜.”- 아저씨.들어오자마자 또 아저씨였다.“전화까지 처해서 아저씨 찾냐?”- 그럼 뭐라고 해요?“오빠.”- 끊을게요.덕배가 바로 웃었다.“야, 잠깐.”전화기 너머로 여름이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저쪽도 이제 덕배가 일부러 저러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왜 전화했어.”잠시 뜸이 생겼다.- 아저씨 내일 시간 있어요?덕배의 젓가락이 멈췄다.맞은편의 현장소장은 괜히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덕배는 시간을 확인했다.“내일?”- 네.“몇 시.”- 오전이요.덕배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갔다.여름이 먼저 시간을 묻는 건 처음이었다.그동안 우연히 마주친 적은 많아도 따로 약속을 잡은 적은 없었다. 더구나 여름은 호텔에서 덕배가 여자들과 나오는 모습을 두 번이나 봤고, 여자친구가 없다는 말에는 대놓고 이상한 얼굴까지 했던 애였다.그런 애가 먼저 전화를 했다.덕배가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시간은 있는데.”- 진짜요?목소리가 바로 밝아졌다.덕배의 입가에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왜.”- 그럼 내일 새벽 다섯 시에 꽃집 앞으로 오세요.덕배의 표정이 멈췄다.“몇 시?”- 다섯 시요.“새벽?”- 네.덕배는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 시간을 한번 확인했다.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야, 서여름.”- 네?“너 데이트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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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덕배는 차에서 내린 뒤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새벽 다섯 시의 거리는 아직 어두웠고, 문을 연 가게라고는 편의점 몇 곳이 전부였다. 그 한가운데 불을 환하게 밝힌 J&J 앞에는 꽃집 하나를 통째로 옮기기라도 할 것처럼 짐이 쌓여 있었다.접이식 테이블 두 개에 의자, 꽃이 든 양동이 여러 개, 길쭉한 상자와 포장재까지.덕배의 시선이 천천히 여름에게 돌아왔다.여름은 청바지에 운동화, 품이 넉넉한 후드티 차림이었다. 긴 머리까지 하나로 질끈 묶고 있으니 평소보다 더 어려 보였다.“설명해.”여름이 방긋 웃었다.“일단 좋은 아침이에요.”“지금 이 꼴을 보고 좋은 아침이 나오냐?”“저는 네 시부터 일어났는데요.”“나는 네 전화 때문에 네 시에 일어났어.”덕배는 잠이 덜 깬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새벽 다섯 시에 꽃집 앞으로 부른 이유를 끝까지 말하지 않더니, 설마 저걸 전부 자기한테 들라는 건가 싶었다.불길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여름이 꽃집 앞에 쌓인 짐을 가리켰다.“이것 좀 실어주세요.”덕배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뭐?”“무거워요.”“……그래서?”“아저씨 힘세잖아요.”새벽 공기 속으로 짧은 정적이 떨어졌다.덕배는 제 몸을 한번 내려다본 뒤 여름을 봤다. 185센티미터에 90킬로그램. 싸움과 현장에서 만들어진 두꺼운 몸을 이런 식으로 써먹겠다는 인간은 처음이었다.“야, 서여름.”“네.”“너 나 짐꾼으로 불렀냐?”여름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덕배의 입이 벌어졌다.조금의 죄책감도 없는 얼굴이었다.어젯밤 전화를 받았을 때 순간적으로 떠올렸던 생각까지 겹치자 기가 막혔다.애도 결국 똑같은 줄 알았다.호텔에서 마주쳤던 여자들처럼 자신에게 관심이라도 생겨 먼저 만나자고 하는 줄 알았더니, 이 여자애에게 필요했던 건 남자 배덕배가 아니라 힘 좋은 인간 하나였다.“씨발, 내가 뭔 생각을 한 거냐.”“네?”“아무것도 아니다.”덕배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그래서 저걸 어디까지 처나르는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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