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이 나를 버린 밤, 그의 비서가 내게 왔다: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11화. 벗겨진 가면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 50층. 블랙록 아시아(BlackRock Asia) 서울 총괄 본부의 광활한 메인 트레이딩 룸 안에는 숨조차 편히 쉴 수 없을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수십 대의 블룸버그 터미널 모니터가 푸른빛과 붉은빛의 차트 곡선을 뿜어내고 있었고, 수십 명의 글로벌 펀드매니저들과 수석 금융 애널리스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일사불란하게 허리를 90도로 숙였다.“안녕하십니까, 총괄 전무님.”통유리창을 따라 난 복도를 가로질러 태하가 걸어 들어왔다. 더 이상 강진우의 뒤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온갖 더러운 뒤처리를 도맡던 비루한 수행비서 권태하가 아니었다.남자의 탄탄한 체격에 완벽하게 감겨드는 이탈리아 최고급 수제 다크 네이비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 서늘하게 번뜩이는 은빛 무테안경, 그리고 상대를 단숨에 굴복시키는 절대적 지배자의 살기가 공간을 압도했다. 남자의 걸음걸이마다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의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태하가 거대한 버건디 가죽 체어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묵직한 서류철을 열었다.“해성물산 부실채권 및 전환사채(CB) 1,500억 원 매집 현황은?”“현재 시장에 유통된 전환사채 물량의 85%를 사모펀드 명의로 확보했습니다. 오늘 정오를 기점으로 담보 지분을 포함한 해성물산 우호 지분 35%의 확보 절차가 마무리됩니다.”수석 트레이더의 정갈한 보고에 태하의 입꼬리가 차갑게 휘어졌다. 강진우와 그의 모친 조영숙이 난잡한 사생활과 불법 비자금으로 탕진하던 해성물산의 목줄이 마침내 완벽하게 그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었다. 수년 동안 비서의 가면을 쓰고 숨죽여 기다려온 완벽한 사냥의 순간이었다.남자는 안경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차가운 명령을 내렸다.“좋아. 차량 대기시켜. 서류 챙겨서 해성물산 본사로 간다.”***정오가 지난 뒤, 서울 테헤란로 해성물산 본사 사옥. 로비 회전문이 열리며 한서경이 걸어 들어왔다. 단정한 화이트 실크 블라우스 위에 짙은 감청색 슬랙스 정장을 차려입은 서경의 자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12화. 닫힌 집무실

“한서경! 당장 문 열어! 너 권태하 그 새끼랑 안에 있는 거 다 알아!”20층 대표 집무실 복도를 뒤흔드는 강진우의 광기 어린 고함. 남자는 사설 경호원 대여섯 명을 대동하고 쳐들어와 문고리를 부서질 듯 흔들어대고 있었다. 남자의 거친 발길질이 둔탁한 굉음을 내며 집무실 문짝을 사정없이 때렸다.문틈 너머로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침 튀기는 욕설이 들려왔다. 서경의 차가운 얼굴에 일순 팽팽한 긴장감이 어렸지만, 태하는 단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북극의 빙하처럼 침착했다. 남자는 리모컨을 들어 집무실 전면 통유리의 블라인드를 차르륵— 끝까지 내려 바깥의 시선을 완벽하게 차단했다.그리고 벽면의 이중 디지털 잠금장치를 철컥 잠가버렸다. 스마트폰 모니터 화면에는 복도 상황이 고화질로 비쳤다.서경은 문고리와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당장 문을 열고 사과해야 할 것 같은 버릇이 몸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손잡이를 향해 내딛던 발을 거뒀다. 지금 저 문을 부수려 드는 사람의 잘못까지 자신이 떠안을 이유는 없었다.블랙록 전담 특수 경호팀 요원들이 들이닥쳐, 강진우가 끌고 온 사설 용역들의 팔을 꺾고 바닥에 순식간에 내리누르고 있었다. 진우는 홀로 문에 매달려 짐승처럼 문짝을 주먹으로 쥐어박고 있었다.쿵, 쿵, 쿵—!닫힌 문 너머로 남편의 거친 욕설과 발버둥 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그 바로 한 뼘 너머의 거리감.서경의 심장이 숨 막히는 배덕감과 아찔한 스릴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자신을 3년간 짓밟았던 남편이 문밖에서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다는 사실이 기이한 쾌감을 안겨주었다. 숨결이 가빠지며 서경의 가슴팍이 요동쳤다.태하가 서경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남자는 서경의 굳어 있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집무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이탈리아산 천연 가죽 소파 위로 그녀를 이끌었다. 강진우가 매일 다리를 꼬고 앉아 거만을 떨며 비서와 여직원들에게 폭언을 퍼붓던 바로 그 권력의 상징 같은 소파였다.“태하 씨…… 밖에서 진우가 저러고 있는데…….”“듣지 않으셔도 됩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13화. 폭로의 역풍

오후 3시, 테헤란로 해성물산 20층 대표이사 집무실. 20층 대표 집무실의 육중한 체리목 양문이 노크도 없이 거칠고 무례하게 벌컥 열렸다. 명품 샤넬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거만하게 얹고 핏빛 립스틱을 짙게 바른 유채은이 하이힐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청담동 모 고급 갤러리의 관장이자, 남편 강진우가 수억 원의 법인카드를 쥐여주며 총애하던 오랜 내연녀였다.“어머, 한서경 씨. 남편을 감옥에 쳐넣고 대표실 가죽 의자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꽤 좋은가 봐요?”유채은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비열하게 비틀며 서경의 맞은편 의자에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털썩 앉았다. 여자의 몸에서는 싸구려 단내를 풍기는 짙은 바닐라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여자는 악어가죽 에르메스 버킨백에서 하얀색 병원 봉투 하나를 꺼내 대리석 책상 위에 툭 던졌다.봉투가 미끄러지며 서경의 노트북 모서리에 부딪혔다.“본론만 말할게요. 나 진우 씨 아이 가졌어요.”봉투 안에서 흘러나온 것은 유명 대학병원의 산부인과 초음파 사진과 임신 8주 차 진단서였다. 유채은은 턱을 치켜들며 오만방자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3년 동안 남편 침대에서 시체처럼 목석같이 굴며 애 하나 못 낳은 여자가 뻔뻔하게 안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이유 없잖아요? 진우 씨 출소하면 우리 세 식구 새 출발 할 거니까, 순순히 이혼 도장 찍고 깨끗하게 나가줘요. 위자료는 진우 씨가 섭섭지 않게 몇 억 챙겨줄 테니까.”남편의 뻔뻔한 상간녀가 본처의 면전에 임신 진단서를 내밀며 안주인 자리를 내놓으라고 도발하는 기가 막힌 상황. 과거의 서경이었다면 죄책감과 깊은 수치심에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삼켰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서경의 깊고 서늘한 흑안에는 단 한 점의 동요도 없었다.오히려 붉은 입술 끝에 먹잇감을 완전히 찢어발기려는 포식자의 조소가 차갑게 번져나갔다.“유채은 씨.”서경이 책상 서랍을 열고 묵직한 벨벳 서류철 하나를 꺼내 들었다.병원 봉투가 손등에 닿았다. 서경은 봉투를 밀어내고 자기 앞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14화. 시어머니의 멸시

“어디서 천한 며느리 년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내 아들을 감옥에 처넣어?!”집무실 문을 거칠게 박차고 들어온 해성그룹 안주인, 시어머니 조영숙 여사. 은빛 백옥 지팡이를 대리석 바닥에 쾅쾅 내리치며 들어선 노부인의 두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등 뒤에는 해성 본가의 비서실 직원들과 사설 경호원들이 험악한 기세로 도열해 있었다.남편 강진우의 오만방자함과 잔혹함이 어디서 물려받은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안하무인의 태도였다.“네년이 명진그룹에서 쫓겨나듯 우리 해성가에 시집와서 재벌가 사모님 소리 들으며 밥을 처먹었으면, 은혜를 알고 개처럼 엎드려 기어야지! 감히 제 남편을 경찰에 넘기고 대표이사 자리를 꿰차?!”조 여사가 노여움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서경의 뺨을 향해 사정없이 날아드는 매서운 손바닥. 지난 3년 동안 시댁 제사와 가족 모임 때마다 서경의 자존감을 짓밟고 폭언과 인격 모독을 일삼던 그 폭력적인 손길이었다.‘애 못 낳은 암탉’이라며 친척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던 시어머니의 독기 어린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착—!허공을 가르던 시어머니의 마른 손목이 서경의 손아귀에 단단하게 붙잡혔다. 서경은 두 발을 버티고 손목을 놓지 않았다.“이, 이게 무슨 짓이야?! 감히 시어미 손목을 잡아?!”조 여사가 경악하며 손을 빼내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서경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서늘하고 오만한 눈빛으로 시어머니의 앙상한 손목을 차갑게 비틀어 내렸다. 서경이 붙든 팔을 아래로 내리자 노부인의 어깨가 기우뚱 꺾였다.“어머님, 제게 다시 손대지 마세요. 오늘은 피하지 않겠습니다.”서경은 붙잡은 손목을 옆으로 밀어내고 책상과 조 여사 사이에 섰다. 뒤로 물러나면 또 뺨을 내주게 될 것 같았다. 손바닥에 남은 떨림은 책상 모서리를 짚어 눌렀다. 목소리만큼은 낮추고, 시어머니의 눈을 끝까지 마주 보았다.서경의 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집무실 안을 얼음장처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들의 폭력과 외도를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15화. 숨겨진 지분

다음 날 오전 10시, 테헤란로 해성물산 본사 사옥 25층 대회의실.해성물산의 긴급 임시 이사회가 소집된 대회의실 안은 살얼음판 같은 적막과 팽팽한 살기가 교차하고 있었다. 강진우 상무의 체포 소식에 흥분한 시댁 방계 친족들과 원로 사외이사들이 원형 오크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그들의 시선은 상석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한서경 대표이사를 향해 비수처럼 꽂혀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명진그룹 출신 며느리를 향한 오랜 멸시와 가문의 알짜 회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천박한 탐욕이 번들거렸다.“한서경 대표, 오늘 안건이 뭔지는 알겠지? 이사회가 당신을 계속 두겠다는 보장은 없어.”강진우의 숙부이자 해성그룹 총괄 부회장인 강치선이 육중한 오크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일어났다. 노회한 이마에 핏대가 굵게 솟구쳐 올랐다. 남자의 손가락질이 서경의 콧등을 찌를 듯 다가왔다.“오늘 이사회에 긴급 해임 안건을 상정합니다! 한서경 대표이사는 경영 능력 부재 및 가문과의 불화를 이유로 오늘부로 대표직에서 즉각 해임하고, 강진우 상무의 대리인을 총괄 대표로 임명한다!”시댁 일가에 동조하던 이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고 탁자를 두드렸다. 회의실 안은 마치 마녀사냥을 벌이는 광기의 도살장 같았다. 하지만 상석에 다리를 꼬고 단정하게 앉은 서경은 따뜻한 홍차 잔을 천천히 짚으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 따윈 한 톨도 없었다. 오히려 벌레들의 발악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여왕의 여유가 흘러넘쳤다.“어디 한번 표결에 부쳐보시죠, 숙부님. 과연 당신들 뜻대로 될지 참 궁금하네요.”“빌어먹을, 아직도 상황을 몰라? 찬성 이사들이 과반이야. 경비원 불러!”강 부회장이 핏대를 세우며 경비원들을 부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달칵.대회의실의 묵직한 마호가니 양문이 열리며, 완벽한 다크 그레이 수트를 차려입은 권태하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남자의 등 뒤에는 블랙록 아시아 전담 대형 로펌 변호인단 10여 명이 두툼한 서류 가방을 든 채 일사불란하게 도열했다. 공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16화. 도청 파일

새벽 1시, 청담동 최고급 럭셔리 부티크 호텔 최고층 펜트하우스 스위트룸.밀폐된 방 안에는 짙은 시가 연기와 진한 양주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테이블에는 코카인 가루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보석으로 풀려난 강진우는 셔츠를 풀어헤친 채 룸살롱 접대부 셋을 양옆에 끼고 비틀거리며 양주를 병째 들이켜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은 광기와 마약의 취기에 젖어 흐리멍덩했다.바닥에는 빈 샴페인 병들과 속옷들이 쓰레기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그 개 같은 년…… 한서경……! 내 재판이 끝나기만 해봐라! 네년이랑 권태하 그 비서 새끼, 내 손으로 칼로 찔러 죽일 테니까!”진우가 미친놈처럼 낄낄대며 테이블 위의 백색 가루를 코로 깊게 들이마셨다. 남자의 동공은 마약의 환각에 취해 허얗게 뒤집혀 있었고, 온몸은 취기와 흥분으로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죗값 따윈 안중에도 없고, 오직 아내를 향한 뒤틀린 복수심만이 남자의 뇌수를 지배하고 있었다.자신이 아직도 무소불위의 재벌 3세라는 헛된 망상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같은 시각, 호텔 지하 3층 VIP 주차장에 대기 중이던 블랙 롤스로이스 뒷좌석. 차 안의 대형 모니터에는 스위트룸 천장에 은밀하게 설치된 초소형 몰래카메라 영상과 실시간 도청 오디오가 적나라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피커 너머로 쏟아지는 남편의 역겨운 신음과 살해 협박.서경은 창밖 주차장의 출입구를 한 번 돌아보았다. 화면 속 남자가 당장 차 문을 열 것처럼 어깨가 굳었다. 자신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 확인한 뒤에야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무릎 위에 얹은 손이 떨리자 다른 손으로 겹쳐 눌렀다.“화면을 끄겠습니다, 사모님. 필요한 장면은 확보했습니다.”태하가 영상을 끄고 서경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었다. 남자의 손끝은 화상이라도 입을 듯 뜨겁지만, 서경의 눈동자는 북극의 얼음처럼 시리도록 차가웠다. 3년간 자신에게 쏟아부었던 폭언과 학대의 대가가 저토록 추악한 구더기들의 파티였다는 사실에, 서경에게는 한 톨의 연민도 남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17화. 복수의 설계

새벽 3시, 서울 성수동 트리마제 47층 최고층 펜트하우스.파노라마 통유리창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검푸른 물결과 잠들지 않는 서울 도심의 고요한 불빛들이 거대한 보석의 바다처럼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조금 전 청담동 호텔 스위트룸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경찰 호송차에 수갑을 찬 채 실려 가던 남편 강진우의 비참한 얼굴이 서경의 뇌리에서 선명하게 맴돌았다. 하지만 그것은 죄책감이나 동정이 아닌, 지옥 같던 3년의 족쇄에서 마침내 벗어났다는 형언할 수 없는 전율과 카타르시스였다.수갑이 잠기던 소리가 떠오를 때마다 서경은 잠긴 현관문을 돌아보았다. 살결을 스치는 밤공기가 생전 처음으로 달콤하게 느껴졌다.달칵.뒤편에서 조용한 발소리와 함께 권태하가 다가왔다. 남자의 손에는 빈티지 돔 페리뇽을 담은 크리스털 플루트 글라스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연노란빛의 미세한 기포가 투명한 잔을 타고 끊임없이 피어올랐다.“한 잔 드시겠습니까, 사모님. 오늘은 여기까지 왔습니다.”태하가 서경의 잔에 가볍게 부딪히며 맑은 공명을 울렸다.챙—.차가운 최고급 스파클링 와인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서경의 메마른 속을 뜨겁게 덥혔다. 샴페인의 달콤 쌉싸름한 산미가 온몸의 긴장을 사르르 녹여내렸다.“고마워요, 권 전무님…… 아니, 태하 씨.”서경의 긴 속눈썹 끝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지난 3년 동안 ‘침대에서 목석같다’며 남편에게 뺨을 맞고 모욕을 당하며, 매주 상간녀들의 립스틱을 세면대에서 닦아야 했던 그 지옥 같은 나날들. ‘애 못 낳은 불임녀’라며 시댁 친척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뼈아픈 세월들.그 악몽이 비로소 완전히 끝났다는 벅찬 안도감에 여린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왔다.서경은 입을 열었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손에 남은 유리잔의 냉기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감사하다는 말만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마음이 목에 걸렸다. 그동안 누군가 앞에서 울 때마다 변명부터 해야 했지만, 태하는 재촉하지 않았다. 시선을 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 났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18화. 이혼 소장

며칠 뒤, 서울 구로구 천왕동의 서울남부구치소 접견실.두꺼운 아크릴 가림막과 쇠창살 너머의 철제 의자에 웅크려 앉은 강진우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갈색 미결수 수의를 입은 남자의 얼굴은 면도도 하지 않아 거친 수염이 덥수룩했고, 핏발 선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쏟아낼 듯 충혈되어 있었다.하루아침에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 3세에서 마약 사범 미결수로 전락한 남자의 흉물스러운 몰골이었다. 온몸은 마약 금단현상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고, 수갑이 채워진 손목에는 시퍼런 피멍이 들어 있었다.철컥.접견실 문이 열리고, 한서경이 걸어 들어왔다. 완벽하게 재단된 명품 블랙 펜슬 스커트 정장에 순백의 화이트 실크 블라우스를 단정하게 받쳐 입은 서경의 자태는, 세상을 발밑에 둔 한 나라의 여왕처럼 차갑고 눈부셨다.그녀의 등 뒤에는 블랙록 아시아 총괄 전무 권태하가 팔짱을 낀 채 서늘한 눈빛으로 진우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완벽하고 기품 있는 모습에 진우의 열등감과 나르시시즘이 극에 달했다.덜컹—!진우가 미친놈처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아크릴 창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한서경! 권태하! 네놈들이 날 함정에 빠뜨렸어! 당장 합의서 써주고 탄원서 넣어! 나 여기서 당장 꺼내라고!”인터폰 수화기 너머로 쏟아지는 남편의 역겨운 고함과 발악. 서경은 인터폰 수화기를 천천히 귀에 대며 차가운 조소를 흘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일말의 연민도, 죄책감도 없었다.“당신이 저지른 일은 내가 시킨 게 아니에요. 내게 탄원서를 요구하지 마세요, 강진우 씨.”서경이 가방에서 서류 두 뭉치를 꺼내 접견을 관리하는 교도관에게 건넸다.[이혼 및 재산관계 합의서]와 [재산 및 경영권 포기 각서]였다.“서류를 읽고 결정해요. 당신 대답을 들으러 왔어요.”서경은 합의서 마지막 장을 가리켰다. 유리 너머의 진우가 무엇을 집어 던질지 살피던 시선은 이제 서명란에 머물렀다. 남편의 고함 때문에 손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수화기를 조금 느슨하게 쥐었다. 그를 달래러 온 것이 아니라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19화. 무너지는 본가

다음 날 오전, 대한민국 경제지와 포털 사이트 메인 뉴스는 해성그룹의 전면적인 몰락을 알리는 호외로 뒤덮였다.[특종: 해성그룹 강진우 상무 구속 및 이혼 소송 접수…… 전 재산 및 경영권 영구 포기][단독: 블랙록 아시아-명진그룹 연합, 해성그룹 지주사 담보권 전격 실행…… 본가 자산 일제 강제 경매 돌입]남편 강진우가 서울남부구치소 접견실에서 피눈물로 찍어 누른 이혼 합의서와 재산 포기 각서를 확보한 뒤에도 채권 회수 절차는 별도로 이어졌다. 블랙록 아시아와 한서경 대표의 연합 펀드는 해성그룹 본가가 맡겨두었던 2,000억 원 규모의 담보 대출 만기 연장을 일제히 거부하고 전액 상환을 청구했다.코스닥 증권 시장에서 해성그룹 관련주들은 개장과 동시에 가격제한폭까지 폭락하며 하한가로 직행했고, 채권단의 대규모 매도 물량이 쏟아져 나왔다.***그로부터 몇 주 뒤, 오후 2시. 서울 성북동 해성그룹 본가 대저택. 수십 년간 대한민국 정재계를 쥐락펴락하며 철옹성처럼 높게 솟아 있던 거대한 저택 대문 앞에 서울중앙지방법원 집행관 차량 넉 대가 멈추어 섰다.“압류 집행을 시작합니다.”푸른 유니폼을 입은 법원 집행관들과 사설 보안 요원들이 마당으로 거침없이 들이닥쳤다. 100년 된 앤틱 가구, 수억 원대 고서화, 그리고 시어머니 조 여사의 최고급 다이아몬드 금고마다 선명한 붉은색 법원 압류 딱지가 가차 없이 나붙었다.“이놈들! 이게 누구 집인 줄 알고 이따위 더러운 빨간 딱지를 붙여?! 당장 손 떼지 못해?!”백옥 지팡이를 짚은 조 여사가 마당으로 뛰쳐나와 악다구니를 쓰며 바닥을 굴렀지만, 집행관들은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그때, 저택 정문을 통과해 들어온 칠흑 같은 최고급 롤스로이스 한 대가 마당 중앙에 미끄러지듯 멈추어 섰다. 수행기사가 뒷좌석 문을 정중히 열자, 새하얀 올 화이트 팬츠 수트를 차려입은 한서경이 우아한 자태로 내렸다.그녀의 곁에는 다크 네이비 수트에 무테안경을 쓴 권태하 총괄 전무가 거대한 그림자처럼 호위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20화. 완전한 해방

펜트하우스 45층 마스터 침실.지난 3년 동안 남편 강진우의 역겨운 싸구려 술 냄새와 상간녀들의 저열한 인공 바닐라 향수 냄새가 배어 있던 트라우마의 공간. 서경은 침실 문가에 멈추어 선 채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하지만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남편의 흔적이 아닌 서늘하고 짙은 시더우드와 은은한 베르가못 향이었다. 더 이상 과거의 지옥 같은 악취와 상처의 잔향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간 전체가 새로운 주인의 체취로 완벽하게 정화되어 있었다.서경의 발끝에서부터 전율이 차올랐다.서경은 익숙한 협탁과 커튼을 차례로 보았다. 가구의 위치는 같은데 문을 닫는 소리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한동안 문턱에 머물던 발을 안으로 옮겼다.오늘 이 방에 들어오기로 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 생각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침대 머리맡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던 권태하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남자는 낮의 완벽했던 스리피스 수트 재킷과 넥타이를 벗어 던진 채, 화이트 실크 셔츠의 단추를 가슴팍까지 풀어헤치고 있었다. 탄탄하게 갈라진 흉근과 짙은 쇄골선이 침실의 간접 조명 아래서 매혹적인 음영을 드리웠다.남자의 은빛 무테안경 너머 칠흑 같은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맹수의 갈망과 절대적인 소유욕이 이글거렸다. 그 서늘하고도 뜨거운 시선이 서경의 온몸을 옭아맸다.“여기가 아직도 두려우십니까, 사모님.”태하가 성큼성큼 다가와 서경의 차갑게 굳어 있던 손을 제 크고 따뜻한 손바닥으로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 남자의 깊고 서늘한 흑안이 서경의 눈동자를 깊숙이 파고들었다.“그 사람이 떠오르면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여기 있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서경은 침대보다 문 쪽을 먼저 보았다. 열린 문을 닫지 않은 채 태하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고 싶어지면 말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태하가 서경의 가느다란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침대 중앙으로 이끌었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서경이 걸치고 있던 실크 가운의 허리끈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PREV
12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