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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Autor: 월야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10-06 19:10:04

어젯밤부터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멍든 얼굴로도 저렇게 웃는구나.

가슴 한쪽이 묘하게 당겼다.

문득 저 얼굴이 다 나으면 어떤 표정으로 웃을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때도 자신이 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깊어졌다.

그는 먼저 시선을 내려 계약서로 돌렸다.

서아가 몇 장을 읽다가 종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사실 계약서 안 봐도 할 거예요.”

이헌이 눈을 들었다.

서아는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표님은 제가 싫다고 하면 멈춰 주잖아요. 그래서…… 믿어도 될 것 같아요.”

이헌의 표정에서 희미한 웃음기가 사라졌다.

믿는다는 말이 예상보다 무겁게 들어왔다.

그는 서아가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싫다고 했을 때 멈춰 주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그것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이 아이에게는 사람을 믿을 이유가 됐다.

그 사실이 다시 한번 이헌의 속을 뒤틀었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천천히 좁혀졌다.

서아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이헌의 손이 올라와 부어오른 뺨 가까이 다가갔다.

서아의 어깨가 아주 조금 굳었다.

손끝이 그대로 멈췄다.

이헌은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손을 내렸다.

“아직은 안 되겠네.”

“뭐가요?”

그는 대답하는 대신 서아가 들고 있던 계약서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니까 더 제대로 읽어. 네가 날 믿는 것하고 계약서를 확인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이헌이 한 걸음 물러나자 서아도 다시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책상 모서리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랑 결혼하면 네 아버지 일도, 학교 일도, 돈 문제도 더는 혼자 감당하지 마. 내가 할 거야.”

마치 이미 결정된 일처럼 단정한 말투였다.

서아의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대표님이 다 해 주시면 저는 뭐 해요?”

이헌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 아주 태연하게 대답했다.

“학교 다니고 하고 싶은 거 해. 그리고 다시는 맞지 말고.”

서아의 입술이 멎었다.

이헌의 시선이 아직 붓기가 남아 있는 뺨에 잠시 머물렀다.

“그 정도만 해.”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몸을 돌려 책상으로 돌아갔다.

서아는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계약서로 시선을 내렸다.

몇 줄을 읽어 내려가던 눈이 어느 조항에서 멈췄다.

배우자는 장기간 연락이 두절되거나 소재를 알 수 없는 상태를 만들지 않는다.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뭐예요? 제가 어디 도망갈까 봐요?”

이헌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다가 잠시 후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지 않았다.

“그러지 마.”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서아의 손가락이 계약서 위에서 멈췄다.

이헌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어디 가는 걸 막겠다는 게 아니라, 아무 말 없이 없어지지는 말라는 뜻이야. 사람 찾으러 다니는 거 싫어하니까.”

대수롭지 않은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 조항은 굳이 없어도 되는 것이었다.

변호사가 처음 작성해 보낸 계약서에도 없었다.

새벽에 계약서를 검토하다 자신이 넣으라고 한 문장이었다.

왜 그런 조항이 필요한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윤서아가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상황을 떠올리는 순간 기분이 나빠졌을 뿐이었다.

그래서 넣었다.

서아는 그런 속내를 알 리 없었다.

“안 도망가요.”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다시 서재를 채웠다.

그 순간 이헌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안 도망간다.

별것 아닌 대답인데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이헌은 천천히 펜을 굴리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서류를 내려다봤다.

스무 살의 윤서아는 아직 알지 못했다.

처음부터 자신이 차이헌의 눈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그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만 결혼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헌은 얼마든지 다른 집을 구해 줄 수 있었고, 사람을 붙여 보호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안전하게 만들어 준 뒤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고, 자신이 준비하게 한 옷을 입혔으며, 자신의 식탁에 앉혔다.

그리고 아내가 되라고 했다.

그때의 차이헌은 아직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상하게 눈에 밟혔고, 자꾸 신경이 쓰였으며, 한번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온 이 어린 여자를 다시 밖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서아 역시 몰랐다.

아무 생각 없이 넘긴 계약서의 한 문장이 언젠가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잔인한 약속이 되리라는 것을.

말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훗날 윤서아는 그 약속을 깨고 도망쳤다.

그리고 차이헌은 자신의 아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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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서아는 밀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이헌을 돌아보았다.“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이렇게 늦게까지 기다려주시고 직접 데리러 와주실 줄은 몰랐어요.”“다음부터는 늦어질 때 미리 연락해.”서아의 어깨가 움츠러들자 이헌은 그녀가 무릎 위에서 두 손을 꼭 맞잡는 것을 보고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혼내려는 게 아니야. 기사가 기다리고 있으니 일정을 알려달라는 뜻이지. 과제 때문에 늦는 건 아무 문제없어. 대학생이 공부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서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끝에 들어간 힘은 풀리지 않았다.창밖으로 가로등이 스쳐 지나가자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 학원 수업이 늦어져 이십 분 늦게 귀가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가방을 내던지며 소리쳤던 날이었다. 그날 이후 서아는 귀가 시간이 가까워지면 공부도 중단한 채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가곤 했다.“저는…… 늦으면 당연히 혼나는 줄 알았어요.”이헌은 신호등 앞에 차를 세우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서아야, 여기는 네가 늦었다고 벌을 받는 곳이 아니야. 넌 내 아내야.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네 일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공부든 친구든 네가 하고 싶은 일은 해. 다만 늦어질 때는 연락해 줘. 내가 걱정하지 않게.”서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사랑이 아닌 계약으로 시작된 결혼이었지만, 이헌은 그녀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자유까지 당연한 권리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네. 다음부터는 꼭 연락드릴게요.”그제야 서아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이헌은 차를 출발시키다가 선재가 서아의 가방을 챙겨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점심을 거른 사실까지 알고 있던 남자였다. 정작 자신은 그녀가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평소에도 식사를 자주 거르나?”“아니요. 오늘은 작업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요.”“앞으로는 아무리 바빠도 챙겨 먹어. 학교에서 필요한 게 있으면 이야기하고.”“지금도 충분해요.”서아가 웃으며 대답하자 이헌은 더 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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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어린 아내가 도망쳤다   28화

    26화. 늦어진 귀가작업실 창밖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야 윤서아는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오후 여덟 시 사십 분.낮부터 모형 작업에 매달리느라 시간이 이렇게 늦어진 줄도 몰랐다. 책상 위에는 잘라낸 우드락과 색색의 마커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여러 번 수정하면서 버린 구조물들이 쌓여 있었다.서아는 커터칼을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자 기사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 두 통과 한 시간 전에 도착한 메시지가 떠 있었다.'사모님, 작업이 늦어지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메시지를 읽는 순간 서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원래 약속한 귀가 시간은 오후 여섯 시였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내려가겠다고 아침에 말해두었는데, 교수의 갑작스러운 수정 지시로 작업이 길어지면서 귀가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문제는 기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차이헌에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서아는 메시지 창을 열었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과제 때문에 늦었다고 하면 믿어줄까. 미리 연락하지 않은 것을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맞은편에서 모형을 조립하던 조원이 고개를 들었다.“서아야, 왜 그래? 어디 안 좋아?”“아니…… 시간이 너무 늦어서.”“이제 아홉 시도 안 됐는데 뭘. 우리 오늘 열 시까지는 달려야 할 것 같은데?”조원은 아무렇지 않게 글루건을 집어 들었다. 다른 학생들도 비슷했다. 삼각김밥을 먹으며 도면을 수정하는 사람도 있었고, 음악을 틀어놓은 채 모니터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었다.그들에게 늦은 귀가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과제가 많으면 밤늦게까지 남아 작업하는 것이 대학생의 평범한 일상이었다.하지만 서아에게는 달랐다. 늦게 들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들었다.“서아야.”옆에서 폼보드를 재단하던 강선재가 그녀를 불렀다. 선재는 서아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한 번 보더니 작업대 위에 자를 내려놓았다.“집에 연락

  • 나의 어린 아내가 도망쳤다   27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서아가 방으로 올라가자 이헌은 수행비서를 다시 불렀다.“강선재에 대해서 추가로 확인된 건?”“서아 아가씨와 같은 학과이며, 이번 학기에는 두 과목의 강의 시간이 겹칩니다.”이헌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강선재의 학적 정보와 복학 일정, 학교에서의 활동 내역이 정리되어 있었다.“서아랑 같은 조였던 과제도 확인했나?”“네. 군 입대 전 두 차례 같은 조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과제 진행을 위해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이헌은 서류를 내려놓았다.“그 가능성 말고, 실제로 얼마나 가까웠는지가 궁금한 거야.”수행비서는 잠시 말을 멈췄다.이헌은 서류에 적힌 강선재의 이름을 바라봤다.“오늘 서아한테 내일 점심을 먹자고 했다더군. 그런데 그 남자는 서아가 결혼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아.”“학교에는 아직 결혼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이헌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서아가 결혼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수행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이헌도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강선재가 서아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친한 후배라서 챙기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감정이 있는 것인지.그리고 만약 후자라면 자신이 어디까지 개입해야 할지도.“내일 학교 경호팀에 이야기해. 강선재가 서아에게 다시 접근하면 보고하라고.”“대표님,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경우에도 말씀입니까?”이헌은 고개를 들었다.“서아가 불편해하는지 확인하려는 거야.”수행비서는 더 묻지 않았다.이헌은 잠시 후 덧붙였다.“서아에게는 말하지 마. 괜히 신경 쓰게 할 필요 없으니까.”***그날 밤, 서아는 침대에 앉아 선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미안해. 내일 점심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못 먹을 것 같아. 다음에 같이 먹자.]잠시 후 답장이 도착했다.[괜찮아. 다음에 먹으면 되지. 그런데 서아야, 아까 너 좀 이상해 보였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서아는 화면을 바라보다 손가락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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