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Chapter 21 - Chapter 30

47 Chapters

21화. 인생을 망쳐놓은 사람

카세트테이프는 그 한마디를 끝으로 멈췄다. 2009년 그날 밤, 해린을 살린 사람은 강정호가 아니었으니까. 이후 정적. 해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준 역시 마찬가지였다.한참 후. 해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다시 틀어봐요.”태준이 카세트를 되감았다. 지직거리는 소리. 같은 부분. 같은 목소리. 하지만 이번에는 끝부분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숨소리. 그리고 아주 작게.“……태준아.”해린의 얼굴이 굳었다.“방금.”“네.”태준이 재생을 멈췄다.“내 이름을 불렀어요.”해린이 카세트를 바라봤다.“당신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에요.”“그런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요?”해린이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당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태준의 표정이 변했다.“……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지워진 거죠.”“그렇다면.”태준이 해린을 바라봤다.“당신은 왜 기억하고 있어요?”해린이 멈칫했다.“……나도 모르겠어요.”“정말?”“네.”태준이 그녀를 오래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해린의 눈빛이 흔들렸다.“잠깐.”“왜요?”“나도 희미하지만 이상한 기억이 하나 있어요.”“뭔데요?”해린이 눈을 감았다.“어릴 때.”희미한 장면 하나. 하얀 복도. 비 냄새.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누군가가 나를 데리고 뛰었어요.”태준이 숨을 멈췄다.“누구였어요?”“얼굴은 안 보여요.”해린이 미간을 좁혔다.“그런데 손이…….”잠시 침묵.“따뜻했어요.”태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해린.”“응?”“왼손이었어요?”해린이 그를 바라봤다.“……네.”태준이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손목 안쪽에 있는 작은 흉터를 보여줬다.“나도 어릴 때부터 이 흉터가 있어요.”해린의 표정이 굳었다.“그게 왜?”“기억은 없는데.”태준이 손목을 만졌다.“항상 이 흉터만 보면 누군가를 잡고 뛰었던 느낌이 들어요.”해린이 숨을 삼켰다. 두 사람은 동시에 깨달았다. 2009년의 만남이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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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서도현

사진 뒷면에 적힌 이름. 서도현. 그 이름 하나가 별장 안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태준은 사진을 뒤집었다.“우리 아버지 밑에서 일했던 변호사.”해린이 물었다.“그 사람이 왜 우리를 떼어놓은 거죠?”“모르겠어요.”태준은 사진을 내려다봤다.“하지만 하나는 확실해요.”“뭔데요?”“아버지가 그 사람을 믿지 않았어요.”해린이 고개를 갸웃했다.“그걸 어떻게 알아요?”태준이 사진 한쪽을 가리켰다. 사진에는 세 사람이 찍혀 있었다. 어린 태준. 어린 해린.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서도현. 그런데 서도현의 얼굴만 검은 펜으로 여러 번 지워져 있었다.“이건 누군가 일부러 지운 거예요.”해린이 사진을 받아들었다.“그리고 사진 뒷면에는 ‘이 아이들을 떼어놓은 사람’이라고 적혀 있고.”“네.”“그런데 왜 굳이 이름을 남겼을까요?”태준이 그녀를 바라봤다.“누군가가 우리가 찾길 원했던 거겠죠.”“그럼 서도현이 남긴 건 아닐 수도 있겠네요.”해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누군가 서도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을 수도 있어요.”태준이 웃었다.“역시.”“뭐가요?”“당신은 사건 볼 때 눈이 달라져요.”“변호사니까요.”“아니.”태준이 그녀를 바라봤다.“원래 눈이 예뻐서 더 위험해요.”해린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지금 그 얘기를 해요?”“긴장 풀려고.”“안 풀렸거든요.”“그럼 내가 더 노력해야겠네요.”해린이 그를 째려봤다.“됐어요.”“아쉽네.”다음 날 오전. 두 사람은 서도현의 마지막 기록을 찾아냈다. 2009년. 그가 마지막으로 출근한 날. 그리고 그날 작성된 내부 문서 하나.‘차해린 관련 자료 전부 폐기.’해린의 표정이 굳었다.“전부?”“네.”“그런데 원본은 남아 있었어요.”“그러니까 누군가 일부러 폐기한 척한 거죠.”태준이 문서를 넘겼다.“그리고 여기.”문서 하단. 서명. 강정호. 그 아래 작은 필체로 적힌 메모가 있었다.‘도현에게 맡기지 말 것.’해린이 숨을 삼켰다.“당신 아버지는 서도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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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살아있어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호텔.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3년 전과 똑같은 복도. 똑같은 카펫. 그리고 1703호. 태준이 카드키를 들었다.“열게요.”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삑. 철컥.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안으로 들어갔다. 해린의 걸음이 멈췄다.“…이상해.”“뭐가요?”“익숙해요.”태준이 그녀를 바라봤다.“여기가?”“네.”해린은 천천히 방 안을 둘러봤다. 침대. 창문. 작은 테이블.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 그 순간 해린의 머릿속에 짧은 장면이 스쳤다. 어린 자신이 이 방 안에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태준 씨.”“왜요?”“나 여기 와본 적 있어요.”태준의 얼굴이 굳었다.“2009년 말고?”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더 어렸을 때.”태준이 방 안을 살폈다.“그럼 우리 둘 다 이곳을 알고 있었던 거네요.”“아마도.”해린이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그림의 액자 아래쪽에 작은 홈이 있었다. 손가락을 넣어 당기자. 찰칵. 액자가 열렸다. 안쪽에 작은 USB 포트와 메모리카드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해린이 웃었다.“누군가 일부러 숨겼어요.”태준이 말했다.“그리고 우리가 찾길 기다렸고.”해린이 메모리카드를 꺼냈다. 노트북에 연결했다. 폴더 하나가 나타났다. 1703. 그 안에는 사진 수십 장이 있었다.해린의 어린 시절. 태준의 어린 시절.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 해린이 사진을 넘기다 멈췄다.“잠깐.”한 사진에 세 사람이 찍혀 있었다. 어린 해린. 어린 태준. 그리고 한 여자. 태준의 얼굴이 굳었다.“……이 사람.”“알아요?”“우리 어머니예요.”해린이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그럼 이 사진은…….”“우리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태준이 사진을 확대했다. 사진 뒷면에 날짜가 있었다. 2005. 08. 17. 그리고 짧은 문장.‘두 아이를 처음 만난 날.’해린이 숨을 삼켰다.“2005년.”“내가 당신을 처음 찾았던 해.”“그럼.”해린이 사진을 내려놓았다.“우리는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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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재회

“지금도 살아 있어.”서도현의 말이 떨어진 순간. 1703호 안의 공기가 완전히 굳었다. 해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버지가?”“그래.”“거짓말하지 마요.”처음으로 해린의 목소리가 떨렸다.“제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누가 그렇게 말했지?”해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도현이 태준을 바라봤다.“강정호.”태준의 표정이 굳었다.“우리 아버지가?”“네 아버지는 해린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믿게 만들었어.”“왜?”“그 사람이 살아 있으면 모든 게 드러나니까.”해린이 한 걸음 다가갔다.“뭐가 드러나는데요?”서도현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네 아버지는 강정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었어.”“무슨 걸?”“그룹의 비자금.”해린의 표정이 굳었다.“……뭐?”“정확히는 돈이 아니야.”서도현이 말했다.“사람들이야.”“사람?”“강정호가 법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태준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게 무슨 뜻이지?”“협박.”서도현이 짧게 말했다.“증거 조작. 불법적인 합의. 그리고 증인을 사라지게 만드는 일.”해린이 숨을 삼켰다.“내 아버지가 그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죽어야 했어.”태준이 한 걸음 다가갔다.“그런데 살아 있다고?”“살려둔 사람이 있었으니까.”“누구?”서도현이 잠시 해린을 바라봤다.“네 어머니.”해린의 눈이 커졌다.“우리 엄마는……”“죽은 게 아니야.”이번에는 해린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졌다.“잠깐.”그녀가 고개를 저었다.“엄마도 죽었다고 했어요.”서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린이 그에게 다가갔다.“당신.”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지금 나한테 뭘 숨기고 있어?”“…….”“내 부모님이 살아 있다면 왜 17년 동안 아무도 나한테 말하지 않았죠?”“널 살리기 위해서였어.”“누구로부터?”서도현의 시선이 태준에게 향했다.“강정호로부터.”태준의 얼굴이 굳었다.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서도현의 표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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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또 다른 진실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는 네 어머니처럼 잃게 될 거다.”통화가 끊겼다. 태준은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해린은 그의 표정을 바라봤다.“태준 씨.”대답이 없었다.“강정호가 뭐라고 했어요?”태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당장 여기서 나가래요.”“왜?”“아버지가 우리를 보고 있어요.”해린의 얼굴이 굳었다. 그때. 뒤에서 해린의 아버지가 말했다.“아니.”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봤다.“그 정도가 아니야.”남자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잠금장치를 하나씩 걸었다. 철컥. 철컥.“이미 알고 있었어.”해린이 물었다.“뭘요?”“너희가 올 거라는 것.”“그럼 왜 기다리고 있었어요?”남자는 한참 해린을 바라봤다.“네가 직접 찾아오길 기다렸으니까.”해린의 눈가가 붉어졌다.“17년 동안?”“……그래.”“어떻게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어요?”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해린이 다시 물었다.“하나뿐인 딸이 궁금하지도 않았아요?”그제야 남자가 낮게 말했다.“가면 네가 죽을 수도 있었어.”“그래서 날 버렸어요?”“버린 게 아니야.”“그럼 뭔데요!”해린의 목소리가 터졌다.“내가 혼자 울고 있을 때도?”“…….”“엄마가 죽었다고 들었을 때도?”남자의 눈이 흔들렸다.“그때도 살아 있었어요?”대답이 없었다. 해린은 눈물을 닦았다.“알겠어요.”그리고 돌아섰다. 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해린.”“나가요.”“잠깐.”“싫어요.”해린의 목소리가 떨렸다.“지금은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요.”태준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집을 나온 뒤. 차 안. 한참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해린은 창밖만 바라봤다. 태준이 조용히 물었다.“울어도 돼요.”“안 울 거예요.”“왜요?”“울면 내가 진 것 같아서.”태준이 차를 세웠다.“해린.”“왜요?”그가 그녀를 바라봤다.“지금은 변호사 하지 마요.”해린의 눈이 흔들렸다.“…….”“나한테는 그냥 해린이면 돼요.”그 말에 해린의 눈에서 결국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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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끝나지 않은 사건

“해린이가 처음부터 너를 살리기 위해 선택된 아이였다는 거다.”강정호의 목소리가 지하 보관실을 울렸다. 해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뜻이지?”“그대로야.”“해린이 우리 집에 들어온 이유가 그거였다는 겁니까?”강정호는 웃었다.“네가 너무 많은 걸 기억하기 시작했거든.”태준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기억?”“네 어머니가 죽기 전에 네게 남긴 것.”“…….”“그리고 네가 열 살 때 봤던 것.”해린이 물었다.“뭘 봤는데요?”강정호는 그녀를 바라봤다.“네 아버지가 숨겨놓은 장부.”해린의 눈빛이 흔들렸다.“그게 왜 태준과 관련이 있어요?”“관련이 있지.”강정호가 천천히 다가왔다.“네 아버지는 그 장부를 없애지 않았어.”“…….”“대신 누구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겼지.”태준이 물었다.“어디에?”강정호가 웃었다.“그걸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해린이었으니까.”해린의 표정이 굳었다.“왜 나예요?”“네가 기억하고 있으니까.”“무슨 기억을요?”강정호가 대답하려는 순간 태준이 해린의 손을 잡았다.“대답하지 마.”강정호가 피식 웃었다.“여전히 똑같군.”태준이 그를 노려봤다.“뭐가.”“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먼저 반응해.”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그 아이가 아니라 해린이야.”강정호의 눈빛이 잠시 변했다.“그래.”그가 고개를 끄덕였다.“이제는 정말 그렇게 됐구나.”해린은 그 말을 듣고 태준을 바라봤다. 태준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강정호가 말했다.“그런데 한 가지는 틀렸어.”“뭐가요?”“내가 둘을 다시 만나게 만든 게 아니야.”강정호가 해린을 바라봤다.“둘은 원래부터 서로를 찾아가도록 되어 있었으니까.”그 순간. 해린의 머릿속에 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열 살의 자신. 비가 내리던 밤. 어두운 복도. 그리고 어린 태준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해린아.””…….”“무서워?”어린 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 손 잡아.”작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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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좋아한다고

탕! 총성이 울렸다. 해린의 몸이 순간 굳었다.“태준 씨!”어둠 속에서 태준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나 여기 있어.”낮고 차분한 목소리. 해린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다쳤어요?”“아니.”“확실해요?”“응.”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가져갔다.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느껴져요?”해린이 숨을 삼켰다.“……네.”“살아 있잖아요.”그 말에 해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당신이 갑자기 없어질까 봐 무서웠어요.”태준이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안 없어져요.”“약속할 수 있어요?”“응.”“또 나 혼자 두고 가지 않을 거죠?”“이번에는 절대.”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았다. 숨결이 가까워졌다. 태준이 낮게 말했다.“해린.”“응.”“나 사실 아까부터 계속 참았어요.”“뭘?”“당신 안고 싶은 거.”해린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왜 참았는데요?”“당신이 너무 불안해 보여서.”“지금은?”태준의 시선이 그녀의 눈에 머물렀다.“지금도 불안해 보여요.”“그럼 안아줘요.”태준은 더 묻지 않았다.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해린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조금만.”“얼마든지.”“오늘은 그냥 이렇게 있어요.”“그래요.”한참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건도. 비밀도. 17년의 진실도. 잠시만 잊은 채. 둘만 있었다.얼마 후 비상등이 켜졌다. 희미한 불빛 아래. 해린은 여전히 태준의 품 안에 있었다. 태준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괜찮아요?”“응.”“정말?”“네.”해린이 고개를 들었다.“근데 하나는 싫어요.”“뭔데요?”“당신이 나를 계속 지키려고만 하는 거.”태준이 웃었다.“왜요?”“나도 당신 지킬 수 있어요.”“알아요.”“그런데 왜 웃어요?”“귀여워서.”해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지금 나 놀려요?”“아니.”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좋아서.”“뭐가?”“내가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잠시 멈췄다.“나를 지켜주겠다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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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과거는 끝났다.

해린은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서진. 자신의 엄마. 죽었다고 믿었던 사람. 태준이 조용히 물었다.“해린아.”“…엄마가 살아 있다고?”“아직 확실한 건 아니에요.”“아니.”해린이 고개를 저었다.“있어.”그녀는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사진 뒷면. 최근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해린에게 직접 말하고 싶다.’해린의 손끝이 떨렸다.“엄마가 나한테 남긴 거야.”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준비할 때까지 기다렸다.다음 날 새벽. 두 사람이 찾아간 곳은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작은 바닷가 마을이었다. 낡은 주택. 낮은 담장. 그리고 열린 대문. 해린은 문 앞에 선 채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태준 씨.”“네.”“나 무서워요.”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같이 들어갈게요.”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실 끝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희끗해진 머리카락. 조금 야윈 얼굴. 하지만 해린은 단번에 알아봤다.“…엄마.”여자의 눈이 흔들렸다.“해린아.”그 한마디. 17년 동안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해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엄마….”그녀가 천천히 걸어갔다. 한서진은 두 팔을 벌렸다. 해린이 품에 안겼다. 17년 동안 참았던 울음이 한꺼번에 터졌다.“왜…….”해린의 목소리가 떨렸다.“왜 나한테 안 왔어?”한서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가고 싶었어.”“그런데 왜 안 왔어?”“너를 살리려면.”해린이 고개를 들었다.“뭐?”“강정호는 네 아버지가 가진 자료를 빼앗으려고 했어.”한서진은 천천히 설명했다.“우리가 경찰에 알리려고 했을 때 이미 주변 사람들이 매수되어 있었어.”“그래서?”“내가 죽은 것처럼 만들어야 했어.”“…”“너무 잘 컸다 우리 딸.”궁금한게 많았지만 해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엄마를 다시 끌어안았다.그날 오후. 태준은 한서진에게서 마지막 자료를 넘겨받았다.“이게 전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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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배우 이도하

다음날 아침. 차해린 법률사무소. 17년 동안 이어졌던 사건이 끝난 뒤 처음 맞는 평범한 출근이었다. 해린은 커피를 들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새로운 사건 의뢰서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연애 시작하자마자 일복 터졌네.”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첫 번째 서류를 집었다. 그때였다.똑똑.“변호사님.”“네.”사무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손님 오셨는데요.”“누구예요?”“직접 보시면 아실 것 같아요.”“누군데요?”사무원이 작게 말했다.“이도하 씨요.”해린의 손이 멈췄다.“……이도하?”“네.”“배우 이도하?”“네.”해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왜 여기까지 왔대요?”“본인이 꼭 변호사님을 만나야 한다고 하던데요.”“무슨 사건인데?”“그건 본인이 직접 말씀드리겠다고…….”해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들어오시라고 해주세요.”잠시 후. 문이 열렸다. 검은 모자와 마스크. 그리고 선글라스. 누가 봐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완벽하게 가린 차림이었다.남자가 들어와 문을 닫았다. 해린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이도하 씨 맞죠?”“네.”그가 마스크를 벗었다. 익숙한 얼굴. 아이돌 시절부터 수많은 광고와 드라마를 장식했던 얼굴이었다. 최근 배우로 전향하면서 더욱 유명해진 사람. 그런 사람이 해린의 맞은편에 앉았다.“처음 뵙겠습니다.”“저도요.”도하가 웃었다.“그런데…….”“네?”“생각보다 안 놀라시네요.”“놀라야 하나요?”“보통은 좀 놀라던데.”해린이 서류를 꺼냈다.“유명인이 의뢰인으로 오는 게 처음은 아니라서요.”“아.”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시구나.”“사건부터 말씀해주세요.”도하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웃었다.“진짜 그대로네요.”해린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뭐가요?”“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더 차갑네요.”“그게 사건과 무슨 상관이죠?”“없어요.”도하가 웃었다.“그냥 궁금해서.”해린이 서류를 내려놓았다.“이도하 씨.”“네.”“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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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내가 좀 더 잘할게요.

“저 차.”도하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한 달 전부터 계속 제 뒤를 따라다니던 차예요.”해린은 사진을 다시 확대했다.“그럼 더더욱 혼자 움직이면 안 돼요.”“변호사님이 같이 다녀주실 건가요?”“경호업체 알아봐드릴게요.”“아.”도하가 웃었다.“역시 단호하시네요.”“당연한 말을 하는 건데요.”“저는 조금 기대했는데.”“뭘요?”“변호사님이 직접 보호해주시는 줄 알았어요.”해린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도하 씨.”“네.”“저는 경호원이 아니에요.”“알아요.”“그리고 당신은 의뢰인입니다.”“그것도 알아요.”“그럼 이상한 소리좀 하지 마세요.”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네. 알겠습니다.”잠시 뒤 도하가 덧붙였다.“그래도 변호사님이 직접 옆에 있으면 제일 안심될 것 같은데.”“경호원보다 제가 더 무서워서요?”“그 반대예요.”“…….”“예쁘니까.”해린이 눈을 감았다.“전화 끊을게요.”“잠깐만요.”“왜요?”“저녁은 드셨어요?”“먹었어요.”“뭐 드셨어요?”“그걸 왜 물어봐요?”“궁금해서.”“의뢰인이 변호사 식사 메뉴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는데요.”“그럼 의뢰인이 아니라 이도하 개인적으로 물어보면요?”해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래도 안 돼요.”“왜요?”“남자친구 있어요.”도하가 잠시 조용해졌다.“아.”“그러니까 적당히 하세요.”“네.”도하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런데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그 남자친구분이 부럽네요.”“…….”“이런 예쁘고 멋진 여자가 여자친구라니.”“이도하 씨.”“네.”“진짜 끊습니다.”“알겠습니다.”통화가 끊겼다. 해린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저 사람 진짜.”다음 날. 해린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사무원님이 작은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변호사님, 이거 아침에 왔어요.”“누가 보냈어요?”“이도하 씨요.”해린의 표정이 굳었다.“왜요?”“커피랑 샌드위치라고 하던데요.”해린이 쇼핑백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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