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촬영장에 들어선 도하는 걸음을 멈췄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오갔고, 조명팀은 다음 장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대본을 외우고 있었고, 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장난을 쳤다.그 평범한 소란 속에서 도하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도하야.”남자가 먼저 웃으며 다가왔다.“오랜만이다.”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때는 그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놓였다. 촬영장에서 실수해 혼나고 돌아온 날이면 괜찮다고 등을 두드려 주던 사람. 신인 시절,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 유일하게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 주었던 사람. 한때 도하에게 연기를 계속할 이유를 만들어 주었던 사람.서인우.그의 첫 작품을 함께했던 전직 매니저이자, 데뷔 초반 누구 보다 가까웠던 사람이었다.몇 년 전, 갑작스럽게 업계를 떠나며 연락이 끊겼던 사람. 도하는 그가 왜 떠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저 더 좋은 기회를 찾아 떠났으리라 생각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원망하지는 않았다.오히려 언젠가 다시 만나면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여긴 어떻게 오셨어요?”도하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인우는 잠깐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웃었다.“네 복귀 소식 들었어. 축하해 주고 싶어서 왔지.”그는 손에 든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네가 예전에 좋아하던 커피도 사 왔어. 기억나지?”도하는 쇼핑백을 바라봤다. 기억났다. 새벽 촬영이 끝나면 둘이 편의점 앞에 앉아 마시던 커피였다. 데뷔 초 돈이 부족했을 때도 인우는 늘 그 커피를 사 주었다.그 사소한 기억이 지금은 끔찍할 만큼 선명했다.“고맙습니다.”도하는 쇼핑백을 받지 않았다.“그런데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인우의 웃음이 조금씩 굳었다.“무슨 말?”“외부 협력사 계약 건이요.”주변의 소음이 잠시 멀어진 것 같았다. 인우는 도하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짧은 반응만으로도 도하는 알 수 있었다. 인우는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여기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도 태준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해린은 그런 태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코트의 단추를 잠갔다.태준은 가만히 도하에 대해서 곱씹었다. 해린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남자. 자신의 연애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도, 해린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숨기지 못하는 남자.솔직히 말하면, 마음에 들지 않았다.“우리도 가요, 해린 씨.”태준이 해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기분이 더러웠다. 자신은 해린의 남자친구였다. 해린이 누구를 사랑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해린 역시 자신을 사랑했다.그런데도 다른 남자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는 게 우스웠다.‘진짜 많이 좋아하나 보네.’도하가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요.’태준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로 좋아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마음을 키워 온 걸까.그리고 그 마음을 알고 나니, 해린이 도하에게 건네는 사소한 친절 하나까지 전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태준 씨?”“응?”“무슨 생각 해요? 아까부터 말이 없네.”해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태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를 단단히 얽었다.“그냥.”“그냥?”“해린 씨랑 조금 더 있고 싶어서.”해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었잖아요.”“그래도.”“….”“헤어지기 싫은데.”너무나 태연하게 나오는 말에 해린의 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태준 씨, 밖이에요.”“알아.”“사람들 다 보잖아요.”“그것도 알아.”“그런데 왜…….”“내 여자친구 손잡는 건데 뭐 어때서.”해린은 결국 입술을 꾹 다물었다. 태준이 작게 웃었다. 평소라면 여기서 장난스럽게 한마디 더 했을 것이다. 해린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으니까.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태준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걸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가 얼마나 소중한지, 누군가가 그녀를 얼마나
이도하는 달라져 있었다. 해린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도하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은 뒤 조금 어색해하면서도 평소처럼 농담을 건넸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연락은 필요한 이야기만 짧게 남겼고, 상담 일정도 혼자 소화했다. 해린이 괜찮냐고 물으면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예전처럼 웃으며 얼버무리지는 않았다.오히려 담담했다. 마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정리한 사람처럼. 그런데 그 담담함이 해린은 조금 걱정스러웠다.[오늘 상담은 잘 받고 오셨어요?][네. 잘 받고 왔습니다.][다행이에요. 식사는 하셨고요?][했습니다. 변호사님도 식사 잘 챙기세요.]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예전 같았으면 분명 한마디쯤 더 붙였을 것이다.‘변호사님은 제가 없으니까 심심하시죠?’혹은.‘오늘도 칭찬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됩니까?’그런 식으로 사람을 웃게 만들었을 텐데. 해린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도하가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물론 그 허전함이 사랑은 아니었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갑자기 멀어진 것 같은 아쉬움에 가까웠다. 해린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준이었다.[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아요?][네. 무슨 일이에요?][해린 씨 좋아하는 식당 예약했어요. 그런데 한 명 더 같이 가도 괜찮아요?]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누구요?]잠시 뒤 답장이 도착했다.[이도하 씨요.]해린은 화면을 바라보다 눈을 깜빡였다. 도하와 태준이 함께 저녁을 먹는다니. 두 사람이 따로 만날 만한 일이 있었나?[두 분 무슨 일 있어요?][사건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다고 하네요. 해린 씨도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해린은 잠시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알겠어요. 그럼 이따 봐요.]그녀는 몰랐다. 태준이 먼저 도하에게 연락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태준이 이번 약속을 잡은 이유가 사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도.***저녁 일곱 시.레스토랑에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이도하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어젯밤 해린에게서 받은 메시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오늘은 꼭 쉬세요.]짧은 문장이었다. 그런데 도하는 그걸 몇 번이나 읽었다. 어제도 그랬다. 그저 자신을 걱정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다른 의미를 찾게 됐다.혹시 자신이 정말 괜찮은지 궁금한 걸까.혹시 오늘도 연락해도 되는 걸까.혹시…“미쳤지.”도하는 헛웃음을 흘리며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그만해야 했다. 해린은 자신의 마음을 모른다. 그리고 모르기를 바랐다.그녀가 부담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는 건 싫었다. 지금처럼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뒤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는 건 더 싫었다.그런데도 어젯밤 태준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는 해린의 말을 떠올리면 속이 쓰렸다.그녀가 행복한 건 좋았다. 정말로 좋았다.그런데 그 행복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아팠다.도하는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해린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가 멈췄다.대신 회사에서 전달받은 자료를 확인했다. 폐업한 외부 협력사의 실질적인 운영자에 대한 정보였다.이름을 확인한 도하의 눈빛이 굳었다. 그가 예상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보자마자, 왜 윤정식 전무가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도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감정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이 일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나면. 자신은 해린을 더는 만날 이유가 없어지는 걸까.그녀가 걱정해 줄 이유도, 자신이 그녀에게 연락할 이유도. 도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생각이 싫었다.생각보다 훨씬 많이.***오후 네 시.해린은 사무실에서 마지막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이도하였다.[변호사님. 지금 잠깐 뵐 수 있을까요?]해린은 메시지를 읽고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무슨 일이세요?]이번에는
오후 세 시 십 분.해린은 도하가 보내 준 주소 앞에 도착했다.소속사 건물도, 경찰서도 아니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공유 오피스였다. 출입문 옆 안내판에는 여러 회사의 이름이 작게 적혀 있었지만, 도하가 만나자고 한 곳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해린이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보내려던 순간이었다.“변호사님.”고개를 들자 검은 모자를 눌러쓴 도하가 건물 입구에 서 있었다.평소 촬영장에서 보던 화려한 모습과는 달랐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조금 수척했고,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해린은 그를 가만히 살폈다.“잠은 좀 주무셨어요?”“네. 뭐… 조금요.”“조금이라는 게 몇 시간인데요?”도하가 웃었다.“변호사님은 꼭 그런 걸 물어보시더라.”“잠을 제대로 못 자면 판단력이 떨어지니까요.”“그럼 오늘은 판단력 좋은 사람을 데려왔어야 했는데.”“이도하 씨.”“네. 잘 잤습니다.”그제야 해린이 작게 웃었다. 도하는 그 웃음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젯밤, 자신을 안아 주던 사람. 오늘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안부를 물어 주는 사람.그녀가 자신을 걱정하는 건 당연히 변호사로서의 책임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도하는 그 다정함 앞에서 자꾸만 기대를 품으려 했다.그는 시선을 돌렸다.“안으로 들어가시죠.”작은 회의실에는 노트북과 서류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도하는 문을 닫은 뒤 해린에게 의자를 권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오늘 전무님을 만나고 왔습니다.”“윤정식 전무님이요?”“네. 제 일정 관리 시스템을 변경한 건 전무님이 승인한 일이더군요.”해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변경 이유는요?”“해외 제작사와 협업하기 위해 일정 공유 범위를 넓혔다고 합니다.”도하는 화면을 해린 쪽으로 돌렸다.“그런데 여기 보시면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해린은 화면을 자세히 살폈다. 일정 공유 요청서. 승인 기록. 외부 협력사 담당자 목록.서류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요청서에 기재된 담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었다. 해린은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있는 얼굴을 발견했다.“…태준 씨?”“일어났어요?”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태준은 이미 깨어 있었다.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누운 채, 해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조금 됐어요.”“왜 안 깨웠어요?”“자는 얼굴이 예뻐서.”해린이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아침부터 그런 말 하지 마요.”“왜요. 사실인데.”태준이 웃으며 이불 위로 드러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해린은 이불 속에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툭 쳤다. 그러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까지 감추지는 못했다.“오늘 출근해야 하잖아요.”“알아요.”“그럼 일어나요.”“5분만 더요.”“어제도 그런 말 했어요.”“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죠.”태준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해린은 못 이기는 척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평범한 아침을 함께 맞이하는 일이 좋았다. 누군가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특별한 사건 없이도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태준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오늘 저녁에도 같이 먹어요.”“약속 있어요?”“없어요. 그러니까 약속 잡는 거죠.”“제가 늦으면요?”“기다릴게요.”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해린은 그 말이 좋으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어제 도하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태준은 자신을 기다려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꼬치꼬치 캐묻기보다 먼저 안아 주었고, 힘들었겠다는 말로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자신은 그 다정함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태준 씨.”“네.”“고마워요.”태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갑자기요?”“그냥요.”“그럼 저도 고마워요.”“뭐가요?”“제 옆에 있어 줘서.”그는 해린의 이마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그러니까 오늘도 무사히 다녀와요. 저녁에 봐요.”해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