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los capítulos de 다른 이름으로 그를 다시 만났다: Capítulo 111 - Capítulo 120

127 Capítulos

111화_연기 너머에 남은 목소리

병실 안이 조용했다.처음에는 소리였다.어디서인지 모를 곳에서 기계 소리가 들렸다.낮고 규칙적이었다.그 소리를 들으면서 소은은 자신이 어딘가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의식이 먼저 돌아왔다.몸이 따라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눈꺼풀이 무거웠다.소은이 눈을 떴다.천장이었다.흰 천장.소은이 눈을 깜빡였다.연기 냄새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코 안쪽에 아직 있는 것 같았다.실제인지 기억인지 알 수 없었다.목이 칼칼했다.그때 손에 감각이 왔다.손등 위에 무언가 있었다.소은이 고개를 돌렸다.동석이 있었다.의자를 끌어당겨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팔꿈치를 무릎에 올리고 상체를 기울인 채로.그 자세로 소은의 손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잠들어 있었다.소은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잠이 든 것 같았다.지쳐 있었다.소은이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20년 전에.그날 밤 밖에서 울던 얼굴이 저랬다.소은이 목을 가다듬으려다 멈췄다.깨우면 안 될 것 같았다.그냥 가만히 있었다.천장을 봤다가 동석을 봤다가 다시 천장을 봤다.공방이 생각났다.불빛이 생각났다.오렌지빛.연기 냄새.발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바닥에 주저앉았던 것.그리고.태현의 목소리가 생각났다.소은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소은의 움직이는 소리에 동석이 움찔했다.잠이 깬 것 같았다."...깼어?"낮은 목소리였다.동석이 상체를 일으키며 소은을 내려다봤다.눈이 충혈되어 있었다."목 아파?"소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동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따랐다.소은이 물을 받아 마셨다.차가웠다.목 안으로 내려가면서 조금 나아졌다."...몇 시야.""새벽 두 시."소은이 컵을 내렸다.동석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소은을 봤다.소은도 동석을 봤다.잠깐 아무 말도 없었다."불은."소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꺼졌어. 빠르게 진화됐는데 공방 안은 많이 탔어."소은이 입을 꾹 다물었다."작품들은."동석이 잠깐 말을 멈췄다."...다 타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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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_잠깐만 이렇게 있어줘요

병원 복도는 조용했다.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간간이 지나쳤다.저 멀리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누군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소은은 복도 끝 창문을 보고 있었다.창밖엔 아직 밤이 있었다.옆에 사람이 앉았다.이태현이었다.소파 끝에.고개를 조금 숙인 채.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어떻게 됐는지.많이 다쳤는지.연기를 얼마나 들이켰는지도.그냥 거기 있었다.그것만.소은은 벽에 등을 기댔다.폐 안쪽이 아직 따끔거렸다.왼쪽 다리가 무거웠다.오래된 흉터가 있는 쪽이었다.불 냄새가 났다고 생각했던 순간, 몸이 그날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그리고 쓰러졌다.연기 때문이 아니라, 기억 때문에.서러웠다.20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그 냄새 하나에 무너진다는 사실이.소은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오늘은 여기까지였다.더 있으면 안 됐다.이 사람 옆에 이렇게 있으면 안 됐다.손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손목이 잡혔다.소은이 굳었다.정말, 이 사람은 항상 이렇게 잡았다.꽉 쥔 것도 아니고, 억지로 당기는 것도 아니었다.그냥 거기에 있는 것처럼.소은이 숨을 한 번 내쉬었다."...또 잠결이에요?"태현이 고개를 들었다.소은을 봤다."아니."변명이 없었다.그냥 아니라고만 했다.눈을 피하지도 않고.소은이 굳은 채 그 눈을 봤다.뭔가를 말해야 했다.손을 빼야 했다.그런데 입도,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태현의 손이 여전히 소은의 손목 위에 있었다.소은이 시선을 창 쪽으로 돌렸다.밤이 창에 박혀 있었다.저 밖 어딘가에서 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가 사라졌다."...왜 잡아요."태현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생각하는 것인지, 고르는 것인지."잠깐만,"낮은 목소리였다."잠깐만 이렇게 있어줘요."소은은 대답하지 못했다.손을 빼지 않았다.빼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알고 있었는데.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냥 그렇게, 복도 벤치에 나란히.그게 전부였다.그런데 이상하게.그것만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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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_싸늘한 목소리

소은은 이미 알고 있었다.연기 속에서 들어온 사람이 누구였는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얼굴을 봤던 눈이 누구의 것이었는지.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를.의식이 가물거리던 그 순간에도 알고 있었다."알고 있었어?""...응."동석이 소은을 봤다.소은은 탄 외벽을 바라봤다.꺼진 창.그을음이 올라간 벽.그리고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동석은 더 묻지 않았다.소은의 옆얼굴을 잠깐 보다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두 사람은 한참 더 거기 서 있었다.골목 끝에서 바람이 한 번 불어왔다가 지나갔다.***다섯 시가 됐다.또 다시 비가 내리는 오후.연락이 되지 않는 태현에 소은이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태풍과 소은이 조용히 통화를 이어갔다.소은이 이룸 계열 호텔 이름을 들은 건, 태현이 오후 내내 거기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였다.팀장님 연락은 잠깐 어렵다고 했다.태풍의 목소리가 조금 무거웠다.소은은 전화를 끊었다.감사 인사였다.그것만 하면 됐다.어제 구해줬으니까.그 말 하나 하면 됐다.거기까지였다.소은은 코트를 집어 들었다.***이룸 계열 호텔.22층.오후 여덟 시.복도는 조용했다.소은이 안내를 받아 복도를 걷는데, 저 쪽 끝 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문이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태현의 목소리였다.소은이 걸음을 늦췄다."처음부터 거짓말이었어."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화가 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화를 눌러담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그래서 더 무거웠다.루루미의 목소리가 들렸다.떨리고 있었다."오빠, 들어봐. 난 거기 있었어. 난 진짜...""그 말을 믿으란 거야?""오빠,""푸른 보육원 생존자라는 것도, 그 화재 때문에 일상 생활이 힘들다는 것도. 전부 꾸며낸 거였어."정적이 흘렀다."내가 무슨 생각으로 널 데리고 있었는데. 나한테 푸른 보육원이,"태현이 말을 멈추고 이를 바득 갈았다.소은이 문 앞에서 멈췄다.심장이 조용히 내려앉았다.그 이름.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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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_빗속에서 부른 이름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소은과 태현의 눈이 마주쳤다.태현의 눈이 커졌다.소은이 몸을 돌렸다."가은 씨ㅡ"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소은은 걸었다.엘리베이터 쪽으로.빠르게.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소은은 걷는 속도를 높였다.엘리베이터 문을 급하게 닫았다."잠깐만!"손을 뻗는 태현을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소은이 천천히 주저앉았다.숨이 조금 가빠져 있었다.왜 도망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소은은 앞을 봤다.엘리베이터 숫자가 천천히 내려갔다.22, 21, 20.폐 안쪽이 다시 따끔거렸다.연기 때문이 아니었다.다른 이유였다.로비로 나오자마자 소은은 걸었다.자동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그리고 멈췄다.비가 내리고 있었다.우산이 없었다.아까 두고 와버렸다.소은이 처마 아래에 서서 빗속을 봤다.굵은 비였다.골목 바닥에 빗물이 튀었다.처마 끝에서 물이 줄기를 이루며 떨어졌다.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소은은 그대로 빗속으로 뛰어들었다."가은 씨!!"태현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빗속을 내달렸다.옷이 젖어들고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빗소리가 모든 소리를 눌렀다.이내 소은의 손목이 잡힌 채 돌려세워졌다."김소은!!"그 안에서, 그 이름이 들렸다.그리고 숨을 몰아쉬는 소리와 함께."은아."소은의 숨이 멎었다.소은이 천천히 올려다봤다.태현이 거기 있었다.비를 맞으며.코트도 없이.나올 때 챙기지 못한 것이었다.빗물이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그 눈이 소은을 보고 있었다."...지금, 뭐라고 했어요."목소리가 낮게 나왔다.태현이 한 걸음 다가왔다.소은이 뒤로 물러섰다.소은이 입술을 깨물었다.빗소리가 골목을 채웠다.태현의 어깨가 흠뻑 젖어가고 있었다.소은이 그것을 보면서 시선을 피했다.빗소리 속에서 태현을 봤다.눈이 젖어 있었다.비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소은 스스로도 몰랐다."...가지 마, 제발."소은은 목이 막힌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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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_또 다른 약점

백동우의 호출은 언제나 예고가 없었다.오전 열 시.소은이 서류를 펼치려던 참이었다.동석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눈짓 하나를 던졌다.말이 없어도 알았다.회장실의 호출이었다.소은은 서류를 덮었다.코트 단추를 잠그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동석이 뒤따라오려는 것을 눈빛으로 막았다.혼자 가야 했다.동석을 데리고 가면 그 사람이 동석을 먼저 건드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복도가 길게 이어졌다.회장실 문 앞에서 소은은 한 번 숨을 내쉬었다.일부러 느리게.공기를 폐 깊숙이 채웠다가 천천히 내보냈다.그리고 문을 열었다.백동우는 창가에 서 있었다.뒷짐을 진 채로.도심을 내려다보는 자세로.소은이 들어와도 돌아보지 않았다.그냥 거기 있었다.그 여유가 협박보다 더 서늘했다."부르셨어요.""앉아."소은이 소파에 앉았다.등을 기대지 않았다.등을 기대는 순간, 이 사람은 그것을 틈으로 읽는다.이 사람은 틈을 반드시 파고들었다.백동우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소은을 봤다.위에서 아래로.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는 시선이었다.소은은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흔들리지 않았다.흔들리면 안 됐다."공방에 불이 났다더구나."소은이 굳었다."그 낡은 공방. 내가 모를 것 같았어?"백동우가 잔을 내려놓았다.백동우가 소파 맞은편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여유로운 자세였다.화가 난 사람의 자세가 아니었다.다 알고 있는 사람의 자세였다.질문이 아니었다."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나?"소은은 대답하지 않았다.대답이 필요한 말이 아니었다.이 사람의 말에는 항상 답이 정해져 있었다.소은이 무슨 말을 해도 그 답은 바뀌지 않았다.소은은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백동우가 소은을 바라봤다.그러다 아주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요즘 얼굴이 좋아 보였는데. 그렇지?"심장이 한 박자 내려앉았다.소은은 표정을 움직이지 않았다."...모르겠습니다.""그래? 내 눈엔 보이는데."백동우가 잔을 들었다.천천히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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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_없던 일로 해요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소은은 태현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처음엔 한 번, 두 번.나중엔 아예 핸드폰을 뒤집어 놨다.미팅이 있는 날엔 나타났다.정확히 시간에 맞춰 들어와서, 필요한 말만 했다.눈을 마주치지 않았다.서류만 봤다.태현이 모를 리 없었다.사흘째 되는 날, 결국 태현이 먼저 움직였다.소은이 미팅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태현이 먼저 일어섰다.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문 앞에 섰다.나가는 것이 아니었다.태현은 문을 막아섰지만, 소은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회의실이 조용해졌다.소은이 먼저 잘랐다."바빠요.""5분.""1분도 없어요.""가은 씨.""비켜요."소은이 파일을 집어 들었다.태현이 옆으로 비키지 않았다."왜 피해요.""피하는 거 아니에요.""3일 동안 연락 안 받은 거, 피하는 거 아닙니까."소은이 고개를 들었다.태현을 봤다.이 사람을 보면 안 됐다.보는 순간 흔들렸다.그래서 보지 않으려 했는데."그날 밤 일은 제가 잠깐 이상했던 거예요."차갑게 나왔다.일부러 차갑게.태현이 굳었다."...이상했다고.""비도 맞고 감정이 격해져서. 그냥 그런 거예요."소은은 시선을 피했다."그러니까 그냥 없던 일로 하죠. 프로젝트는 마무리해야 하니까.""없던 일?""네."태현의 턱이 천천히 굳었다."그걸 내가,"태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어떻게 없던 일로 해."소은이 손에 힘을 줬다.파일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렀다."몰라요. 알아서 해요.""가은 씨."소은이 정면을 봤다.목소리를 가다듬었다."저 피곤해요. 진짜로. 이런 거 감당할 여유가 없어요. 할 생각도 없고요. 그러니까 그냥, 이전으로 돌아가요.""이전이 어딘데요.""파혼한 사이요. 프로젝트 파트너일 뿐인. 당신이 원하던 관계잖아."태현이 소은을 봤다.그 눈이 뭔가를 읽으려 하고 있었다.소은은 눈을 내리깔았다.읽히면 안 됐다.소은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비켜달라고요."낮고 단단한 목소리였다.태현이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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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_괜찮냐는 한마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사무실로 돌아갈 수도, 집으로 갈 수도 없었다.걷다 보니 익숙한 골목이었다.고개를 들었다.공방이었다.그을음으로 얼룩진 외벽.판자로 막힌 창.폴리스 라인이 아직 쳐져 있었다.거리엔 아무도 없었다.저녁이 내려앉은 골목에 가로등만 하나 켜져 있었다.소은이 그 앞에 섰다.봤다.오래.스케치북이 있었다.공방 첫날 처음 그린 드레스 도면이 있었다.보육원 친구들이랑 같이 마신 커피잔이 아직 선반에 있었을 것이었다.서툰 자수틀이 구석에 있었을 것이었다.그 모든 것들이 거기 있었다.소은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 했다.느끼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래서 그냥 봤다.감정을 목 아래로 밀어 넣었다.꾹,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혔다.20년 동안 해온 방식이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동석이었다.소은이 전화를 받았다.[어디야.]"...그냥 좀 걷고 있어."짧은 침묵이 흘렀다.[괜찮아?]그 한마디였다.별게 아닌 말이었다.매일 듣는 말이었다.그런데 이 타이밍에, 이 목소리로, 이 질문이 들어오는 순간.소은이 대답하려 했다.입을 열었다.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은아.]동석이 다시 불렀다.[너, 괜찮아?]수화기 너머로 다른 목소리들이 겹쳐졌다.보육원 친구들이었다.소은이 입술을 깨물었다.눈이 뜨거워졌다.안 된다고 생각했다.지금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골목 한복판이었다.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그런데 핸드폰 너머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은아, 괜찮아?][지금 어디야?][밥 먹으러 와. 데리러 갈까?]마지막으로 동석의 목소리가 들렸다.[지금 애들이랑 같이 있어. 왜 대답이 없어. 너 괜찮냐고.]소은이 잠자코 들었다.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공방 일도, 태현 일도, 백동우 일도.그냥 괜찮냐고만 했다.그것만.손등으로 닦으려 했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한 번 시작되니까 멈출 수 없었다.쌓아두면 언젠가 이렇게 됐다.소은은 그을음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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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_스페이스 블랑

스페이스 블랑.이름을 정한 건 소은이었다.몇 주 전, 태현이 이번 쇼 이름을 뭘로 할 거냐고 물었을 때 소은이 그 공간을 한 번 둘러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스페이스 블랑."태현이 그 말을 받아 적었다.토를 달지 않았다.그렇게 됐다.비어 있는 공간.아직 무엇도 채워지지 않은 이름.스페이스 블랑.그리고 그곳에서 디자이너 S의 첫 번째 쇼가 열린다.***사흘 뒤였다.오전 열한 시.스페이스 블랑은 전날까지 들어온 조명 장비들로 반쯤 채워져 있었다.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소은이 런웨이 끝에 서서 전체 동선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손에는 메모지.발끝으로 바닥 간격을 재며 뭔가를 적었다.여기 처음 왔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콘크리트 바닥이었다.지금은 달랐다.런웨이가 깔렸고, 조명 구조물이 천장에 매달렸고, 곧 이 공간이 완성될 것이었다.태현이 들어왔다.소은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조명 셋업 오늘 오전 끝납니다. 오후 두 시부터 최종 동선 확인 가능해요.""원단 납품은요.""오후 세 시로 조정됐습니다.""늦어요.""최대한 당겼습니다."소은이 메모지에 뭔가를 적으며 몸을 돌렸다.무대 뒤쪽으로 향했다.태현이 따라붙었다.소은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태현도 속도를 맞췄다.좁은 대기 공간.소은이 벽 쪽으로 바짝 붙어 행거 간격을 쟀다."행거 두 개 더 필요해요.""넣겠습니다.""여기 바닥 마감이 안 됐어요. 모델 동선에 걸릴 수 있어요.""오늘 오후까지 처리하겠습니다."소은이 메모를 마치고 바로 몸을 돌렸다.태현이 바로 뒤에 있었다.소은이 한 발 물러서려는 순간 뒤가 벽이었다.소은이 굳었다.태현의 눈이 소은을 봤다.소은이 시선을 내렸다."비켜요."태현이 잠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옆으로 비켰다.소은이 빠르게 빠져나갔다.태현이 그 뒷모습을 봤다.소은은 다시 무대 앞쪽으로 나와 런웨이 중앙에 섰다.텅 빈 공간을 정면으로 봤다.조명이 완전히 설치되면 이 공간이 달라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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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_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같은 날 오후.늦은 시간.이룸 그룹 회장실.이남국이 태현을 봤다.서류를 들고 들어왔는데 그게 형식이라는 걸 알았다.눈 아래가 어두웠다.넥타이 매듭이 평소보다 조금 헐렁했다.이남국이 오래 사람을 봐온 눈으로 금방 읽었다."앉아."태현이 앉았다.서류를 펼치려는 것을 이남국이 손짓으로 막았다."오늘은 그거 말고."태현이 굳었다."할 말 있잖아."이남국이 기다렸다.서두르지 않았다.이 사람은 준비가 됐을 때 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창밖으로 노을이 비스듬하게 들어왔다.한참이 흘렀다."...그 사람이 자꾸 밀어냅니다."이남국이 반응하지 않았다."다가가면 피하고. 잡으면 놓으라 하고."태현이 말을 하면서 시선을 아래에 뒀다.이남국을 보지 않았다.이남국을 보면서 이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이유는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말이 끊겼다.이남국이 조용히 물었다."그래서?"태현이 이남국을 봤다."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고."태현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답이 없어서가 아니었다.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다.포기하지 않겠다는 것도.그래도 이게 맞는 건지도.자신이 다가갈수록 소은이 더 위험해지는 건 아닌지도.그것들이 전부 뒤엉켜 있었다.이남국이 태현을 봤다.흔들리는 눈이었다.이 사람이 이런 눈을 하는 걸 이남국은 많이 본 적이 없었다."태현아.""네."이남국이 천천히 말했다."아비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해?"태현이 그 말을 받았다.소파에 앉은 채로.오래."놓치면 다음은 없어."태현이 그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가보겠습니다."이남국이 고개를 끄덕였다.태현이 회장실을 나갔다.문이 닫혔다.복도가 조용했다.태현이 멈춰 섰다.핸드폰을 꺼냈다.연락처를 열었다.소은이었다.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이 올라갔다.멈췄다.지금 전화하면 받지 않을 것이었다.받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걸고 싶었다.목소리를 듣고 싶었다.어디에 있는지.밥은 먹었는지.그런 말이라도.다시 통화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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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_놓지 않은 손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도 자꾸 멀어졌다.소은이 왜 밀어내는지 알면서도.알기 때문에 더.그게 더 무거웠다.태현이 사진을 덮었다.눈을 감았다.어두운 방 안에서.코트도 벗지 않은 채.야경이 창 너머에서 납작하게 빛났다.한참 그렇게 있었다.***패션쇼 전날.밤 아홉 시.이룸 그룹 작업실.소은이 마지막 드레스의 어깨 선을 손끝으로 짚었다.조금 틀어진 것 같았다.아니, 사실 완벽했다.하지만 다시 잡았다.또 짚었다.또 잡았다.손이 멈추지 않았다.내일이 패션쇼였다.소은은 그 사실을 아침부터 알고 있었다.내일이 끝나면 이 작업실에 올 이유가 없어진다.이 공간에 있을 이유가.이 사람 옆에 있을 이유가.소은이 결국 손을 내렸다.코트를 집어 들었다.가방을 어깨에 걸쳤다.문 쪽으로 걸었다."가은 씨."소은이 멈췄다.작업대 앞에 앉아 있던 태현이었다.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소은을 보고 있었는지 몰랐다.소은이 돌아보지 않았다."잠깐만요."소은이 문손잡이를 잡은 채 굳었다.태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리.발소리가 가까워졌다.소은이 문을 열었다.태현의 손이 손잡이를 잡은 소은의 손 위에 얹혔다.문이 도로 닫혔다.오늘만은 참으려 했다.내일 쇼가 끝날 때까지만.그런데 소은이 문을 잡는 순간, 그 생각이 무너졌다."놔요."소은이 단호하게 말했다.하지만 말끝이 흔들렸다.태현이 대답하지 않았다.소은이 몸을 돌렸다.태현이 바로 뒤에 있었다.거리가 가까웠다.소은이 눈을 들었다.태현을 봤다."놓으라고요."태현이 고개를 숙였다.소은이 굳었다.거부도 항복도 아닌 얼굴이었다.오래 무거운 것을 들고 있다가 더는 버티지 못한 사람처럼.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싫다는 듯.소은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말이 나오지 않았다."...내일이 끝나면."태현이 고개를 들었다.목소리가 낮았다."내일 패션쇼 끝나면, 진짜로 끝입니다."소은이 눈을 내리깔았다."패션쇼가 끝나면, 프로젝트도 끝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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