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다른 이름으로 그를 다시 만났다: Kapitel 81 – Kapitel 90

120 Kapitel

81화_처음 보는 웃음

태풍이 태블릿을 내밀었다.태현이 받아서 화면을 훑었다.소은의 손이 멈췄다.고개를 들지 않았다.듣고 있었다.숨을 고르게 유지했다."백 팀장님도 보시죠."태현이 소은 쪽으로 몸을 틀었다.태블릿을 내밀었다.소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대를 돌아 태현 옆으로 갔다.나란히 앉아 화면을 봤다.[이룸 그룹 차기 프로젝트 콘셉트 공개 '디자이너 S' 누구?​... 업계 반응 뜨거워]콘셉트 발표 직후부터 패션 업계 안팎으로 반응이 쏟아졌다.이름을 밝히지 않은 익명의 디자이너 S의 작품이 공개되자마자 주요 패션 매거진과 SNS를 중심으로 관련 언급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선 하나에 담긴 밀도가 다르다"는 평부터, "이룸이 이 카드를 꺼내들 줄 몰랐다"는 업계 관계자 코멘트까지.익명이라는 설정이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끌었다.발표 당일 이룸 그룹 주가도 강세를 보였다.증권가에서는 이번 프로젝트를 이룸 그룹 패션 사업부 도약의 신호탄으로 읽고 있다.소은이 화면을 봤다.선 하나에 담긴 밀도가 다르다.그 문장이 눈에 걸렸다.소은이 열두 번 지우고 다시 그은 어깨선.밤을 꼬박 넘긴 각도.아무도 그 과정을 몰랐다.이 기사 안에서도, 디자이너 S라는 이름 뒤에서도.그런데 결과는 저 문장이 됐다.숨을 천천히 들이켰다.가슴 한구석에 무언가가 조용히 차올랐다.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각이었다.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그냥 가득 찬 것 같은.이 이름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디자이너 S.세상에 내어줄 수 없는 이름 대신, 내어줄 수 있는 이름.그것으로 이 작업들이 세상에 서 있었다.소은의 것이면서, 소은의 것이 아닌 것처럼.그렇게 여기까지 왔다.저 문장이, 그 모든 밤의 대답인 것 같았다.옆에서 태현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읽는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한 줄씩, 천천히.한태풍은 두 사람을 한 번 보고는 말없이 물러났다.문이 닫혔다.두 사람 사이로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그 침묵이 길지 않았다.소은이 화면에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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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_계산적인 웃음

오전 열 시.백제 그룹 로비.자동문이 열렸다.태현이 들어왔다.코트를 걸친 채, 손에는 서류 파일 하나.로비를 가로지르는 걸음이 느리지 않았다.이 건물이 낯선 사람의 속도가 아니었다.안내 데스크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방문 목적이 어떻게 되십니까.""이룸 그룹의 이태현입니다. 백 팀장님과 약속이 있어서요."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직원이 내선 전화를 집어 드는 사이, 태현은 로비를 한 바퀴 훑었다.깔끔했다.압도적이었다.묵직하고 오래된 것들이 쌓인 자리였다.인간보다 권력이 먼저 느껴지는 공간.태현의 시선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이태현 씨."낮고 유연한 목소리였다.태현이 고개를 돌렸다.백동우였다.뒷짐을 지고 걸어오는 그 걸음이, 건물 전체를 자신의 것처럼 딛고 있었다.회색 정장.넥타이를 매지 않은 셔츠 단추 하나가 열려 있었다.이 건물 안에서 가장 편안한 사람처럼."반갑네. 오늘 온다는 얘기를 들어서."태현이 고개를 숙였다."백 회장님이시군요. 안녕하십니까.""이쪽으로 오게."요청이 아니었다.백동우는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회장실이었다.통창 너머로 도심이 내려다보였다.좋은 자리였다.모든 것을 내려다보기 위한 자리.백동우가 소파에 앉으며 손짓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태현이 앉았다."가은이, 다루기 쉽진 않지. 제 애미를 닮아서. 성격이 차갑고 거칠어."태현은 잠시 멈칫 했지만 반응하지 않았다."그래도 하나는 확실해. 내 회사를 관리할 그릇으로는, 저 아이가 맞지.""​...​....""이태현 씨. 두 사람의 결혼 엎어졌다지?"태현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프로젝트라도 같이 하니, 잘 되었어. 이룸은 백제의 디자인 망을 얻고, 우리는 이룸의 자본과 이름을 얻는 거지."태현이 잔을 들었다.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가은이한테 허물이 있어도 이해해. 아이가 가끔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말이야."허물.태현은 그 말을 흘리지 않았다.백동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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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_노란 원피스

32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복도로 나서는 순간, 소은이 보였다.서류를 끼고 반대 방향에서 걷고 있었다.태현을 발견하자 걸음이 한 박자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왔어요?""네.""...회장실 들렸다가 왔다면서요."태현이 짧게 대답했다."로비에서 마주쳤습니다."소은은 더 묻지 않았다."회의실 이쪽이에요."소은이 먼저 걸었다.***회의실은 넓었다.창가 쪽으로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소은이 서류를 펼치고 태현이 맞은편에 앉았다.함께 도착한 한태풍이 옆 자리에서 노트를 펼쳤다.프로젝트 진행 상황이었다.런웨이 동선, 협력 업체 일정, 조명 설계 초안.소은이 말하면 태현이 받았다.속도가 일정했다.둘이 일하는 리듬은 이미 맞춰져 있었다."조명 셋업은 공간 확정 이후에 최종 설계할게요. 오늘 오후에 현장 한 번 더 봐야 할 것 같아서요.""같이 가죠.""네."소은이 다음 서류를 폈다.그때였다.동석이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소은 앞에 먼저 믹스 커피, 그 다음 태현 앞에 아메리카노.태현이 잔을 들었다.동석이 나가려던 발걸음을 돌렸다.서명이 빠진 서류가 떠올랐다.소은에게 건네려다 테이블 위 서류 더미에 걸렸다.커피 잔이 쏟아졌다.정확하게, 소은의 재킷 앞섶으로."앗, 뜨거!"태현이 벌떡 일어났다.동석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소은의 연한 베이지 재킷 위로 갈색 얼룩이 번지고 있었다.소은의 시선이 잠깐 올라갔다.동석이 그걸 피했다.동석이 급히 티슈를 집어 들었다."죄송합니다, 제가 닦아—""됐어. 괜찮아."소은이 조용히 막았다.티슈를 받아 앞섶을 몇 번 눌렀다.소용없었다.이미 번진 자리였다.태현 또한 티슈를 내밀었다.소은이 받아 닦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죄송합니다. 잠시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자리에서 일어났다.***팀장실로 돌아왔다.재킷을 벗었다.거울을 봤다.안쪽까지 스며 있었다.이 재킷은 오늘 더 입기 어려웠다.소은이 팀장실 한쪽 옷장을 열었다.보이는 게 있었다.화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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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_자신이 부른 이름

입었다.거울을 봤다.원피스는 예상보다 잘 맞았다.치마가 발목까지 내려왔다.흉터가 덮였다.그게 유일한 장점이었다.가디건을 걸쳤다.함께 들어 있던 스틸레토까지 신을 생각은 없었다.구두는 원래 것을 그대로 신었다.소은이 거울 앞에서 잠깐 멈췄다.이 옷을 입는 순간, 내가 누구인지 더 애매해졌다.백가은답게 입히려는 계산이 보이는 옷이었다.그런데 지금 이것 말고는 없었다.어이없는 일들은 항상 이렇게 쌓였다.그래도 나가야 했다.***회의실 문을 열었다.동석이 먼저 봤다.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소은이 눈빛으로 동석을 다그쳤다.태현이 서류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태현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말이 없었다.소은이 자리에 앉으며 서류를 다시 끌어당겼다."계속하죠.""​...네."태현이 시선을 내렸다."조명 설계 이야기 이어서 하면—""그 원피스."태현이 서류를 보면서 말했다.소은이 멈췄다."...잘 어울립니다."담담했다.칭찬이라고 하기엔 온도가 낮고, 지나치는 말이라고 하기엔 무게가 있었다.소은이 서류 끝을 손끝으로 짚었다."​...고마워요. 계속해요."동석의 입 끝이 아주 잠깐 올라가는 게 보였다.소은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오후 세 시.차가 도심 외곽 골목으로 들어섰다.낡은 외벽.거칠게 드러난 시멘트.소은은 조수석에서 차창 너머를 봤다.이 공간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문을 열고 들어서던 순간, 발이 멈췄던 것.차에서 내렸다.태현이 먼저 문을 열었다.소은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발이 멈췄다.두 번째인데도.오후의 빛이 달라졌다.이번엔 각도가 조금 낮았다.그래서 그림자가 더 길게 늘어졌다.그 그림자가 바닥을 가르는 방식이, 지난번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소은이 천천히 걸었다.이번엔 런웨이를 눈으로 짚었다.발끝으로 선을 그었다.저번보다 각도를 조금 바꿨다.더 나았다.빛이 정확하게 닿는 자리가 달라졌다.태현은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그는 반대편 끝에 서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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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_겹쳐지는 두 얼굴

밤 열한 시.이룸 그룹 펜트하우스.태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넥타이는 이미 풀었다.재킷은 등받이에 걸쳐져 있었다.야경이 통창 너머로 펼쳐져 있었지만 그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핸드폰을 들고 있었다.사진이었다.오늘 오후, 그 공간에서 찍은 것.빛이 닿는 바닥.기울어진 각도.그리고 그리고 그 안에 서 있는 여자.빛 참고용이라고 했다.맞는 말이었다.조명 셋업을 위한 기록이었다.논리적으로 맞았다.그런데 열어볼 때마다.빛보다 그녀가 먼저 보였다.원피스 자락이 조금 흔들려 있었다.막 돌아선 직후였는지, 아직 방향을 잡기 전이었는지.머리카락이 한 올 흘러내려 있었다.그걸 모르는 채로 공간을 보고 있는 옆얼굴이었다.태현이 핸드폰을 뒤집었다.화면이 꺼졌다.잠시 그대로 있던 그는, 다시 화면을 켰다가 또 뒤집었다.태현 씨.그 이름이 아직도 귓속에 있었다.팀장도 아니고, 성을 붙인 것도 아닌.처음 듣는 호칭이었다.그런데 낯설지 않았다.그게 더 이상했다.낯선 것은 금방 사라지지만, 익숙한 것은 오래 남는다.태현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천장을 봤다.가은 씨.자신이 그렇게 받아쳤을 때, 그녀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하고 있었다.잠깐 굳었다가 다시 평평해진 얼굴.그 찰나가 자꾸 눈앞에 걸렸다.그녀는 당황했다.그 당황한 얼굴이 꽤나 기억에 남았다.태현은 눈을 감았다.지갑을 꺼냈다.안쪽 가장 깊은 곳.낡고 빛바랜 사진 한 장.보육원에서 함께 있던 아이들.다시 보니 보였다.김동석, 김승아.지금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모습.그 속에서, 제 손을 꼭 잡고 있던 어린 소은.태현이 사진을 한참 봤다.그리고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오늘 찍은 사진을 열었다.노란 원피스를 입고 빛 안에 서 있는 여자.두 개를 번갈아 봤다.겹쳐지다가 흩어졌다.흩어졌다가 다시 겹쳐졌다.눈매였다.집중할 때 손끝이 뺨으로 향하는 그 습관이었다.거기에 더해서 김동석, 김승아.푸른 보육원 사람들이 자꾸 그녀의 주변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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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_확인을 위한 연락

동석이 멈췄다.그가 태현을 향해 눈을 흘겼다.태현이 트레이에서 컵 두 개를 집어 들었다.소은 앞에 하나를 내려놓고, 자기 앞에 하나를 가져갔다.소은이 패턴 위에서 손을 멈추고 태현을 봤다."​...뭐예요?""커피입니다.""그건 아는데요.""저번에 쟤가 쏟았으니까요."무심하게 말하고 태현이 제자리로 돌아갔다.소은이 동석을 봤다.동석이 빈 트레이를 들고 어이없다는 듯 눈이 동그래졌다.소은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김 비서, 할 일 빼앗겼네."소은의 말에 동석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태현이 컵을 들었다.한 모금 마셨다.달았다.설탕이 두 스푼은 들어간 맛이었다.동석은 찡그린 태현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저희 팀장님 거랑 컵이 바뀌었네요.""...같은 거 아니었어?""저희 팀장님은 커피 달게 드십니다. 달달하게요. 설탕 두 스푼에 프림도 넉넉히. 피곤하실 땐 세 스푼까지도 가시고요."소은이 당황한 얼굴로 동석을 봤다.동석이 소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태현이 입을 열었다."에스프레소 마시잖아요."소은이 당황했다.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태현이 모든 걸 파악한 듯 짧은 헛웃음을 뱉은 채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동석은 트레이를 들고 나가면서 문을 조용히 닫았다.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복도 쪽에서 동석의 어깨가 아주 약간 들썩이는 게 소은에게 보였다.소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썼다.짧은 침묵이 흘렀다."다음부터는 달달한 커피로 사 오겠습니다.""네..."소은이 컵을 내려다봤다.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발그레해졌다.***오후 일곱 시.작업이 이어졌다.소은이 패턴을 자르고 태현이 서류를 봤다.종이가 잘리는 소리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낮게 섞였다.간간이 소은이 치수를 물으면 태현이 수치를 확인해서 답했다.그것 말고는 말이 없었다.태현이 서류를 넘기다 말고 소은을 잠깐 봤다가, 곧 시선을 거뒀다.그렇게 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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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_그만 찾아

태현이 동석을 찾아 탕비실로 들어왔다.탕비실은 작았다.정수기 하나, 전자레인지 하나.창문이 없었다.동석이 컵을 씻다가 태현이 들어서는 걸 보고 멈췄다.동석이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태현을 봤다.태현이 문을 닫았다.좁은 공간이었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짧았다.동석은 물러서지 않았다.태현도 더 들어오지 않았다."사적인 질문 해도 됩니까."동석이 수건을 내려놓았다."​...들어보고 대답하겠습니다."태현이 동석을 봤다.동석은 피하지 않았다.태현이 그 눈을 읽으려 했다.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알면서 버티는 눈이었다.태현은 말을 고르지 않았다."소은이."동석의 손이 멈췄다.태현이 시선을 내리지 않은 채 물었다."살아있어?"탕비실 안이 조용해졌다.동석이 움직이지 않았다.태현의 시선을 받으면서 동석의 눈이 흔들렸다.아주 잠깐이었다.그 질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동석은 알았다.동석이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태현은 기다렸다.다그치지 않았다.답을 강요하는 시선은 아니었다.그저 오래 쌓아두었던 것을 겨우 꺼낸 사람의 얼굴이었다.2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가 거기에 있었다.동석은 알고 있었다.태현이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까지 왔는지."......"동석이 입을 열려다 닫았다.다시 열었다."죽었어."낮고 단단한 목소리였다.태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죽었다고.""...어. 죽었어. 그 날. 거기에서."동석이 선택한 대답이었다.모른다고 했다면, 이렇게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태현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태현이 몸을 돌렸다.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동석이 낮게 말했다."형."태현이 멈췄다."...그만 찾아."태현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그냥 거기 서 있었다.문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동석에게 보였다.그 손이 떨리지 않는데, 그 손의 힘이 말하고 있었다."......"태현이 문을 열고 나갔다.복도가 조용했다.동석은 그 닫힌 문을 한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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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_무거운 말

밤 열두 시.태현의 펜트하우스.태현이 들어왔다.코트를 벗지 않은 채로 소파에 앉았다.불을 켜지 않았다.도심의 야경이 통창으로 쏟아졌지만 그쪽을 보지 않았다.죽었어.동석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빠지지 않았다.태현은 한참 그 자리에 있었다.코트를 벗을 생각도, 불을 켤 생각도 없었다.그냥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야경이 번지고, 시간이 흘렀다.그것만이 분명했다.바 캐비닛에서 위스키를 꺼낸 건 얼마나 지나서였는지 몰랐다.잔은 꺼내지 않았다.병째 들었다.한 모금.두 모금.소파에 다시 앉았다.죽었어.그 말이 왜 이렇게 무거운지, 태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20년 전에도 그 말을 들었다.사망 처리.공식 기록.그런데 이번엔 달랐다.동석이 한 말이었다.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사람.소은의 진짜 가족.그 사람이 직접, 눈을 피하지 않고, 죽었다고 했다.그만 찾아.그 말이 더 무거웠다.태현은 병을 다시 들었다.창밖의 불빛들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흔들리는 건 불빛이 아니었다.지갑을 꺼냈다.낡은 사진을 꺼냈다.어둠 속에서도 보였다.손때가 탄 모서리.웃고 있는 얼굴들.소은아.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보지 않았다.그냥 속에서만 불렀다.기다리겠다고 했었다.그 시절의 소녀는 그렇게 약속했다.어른이 되면 찾아가겠다고.아무 데도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보육원 대문 앞에서 손을 꼭 잡고 한 말이었다.그런데 돌아왔을 때 소은은 없었다.불길 속에서.태현은 그 사실을 평생 믿지 않았다.믿을 수 없었다.그래서 찾았다.20년 동안.그런데 오늘, 동석이.태현이 병을 다시 들었다.오래 마셨다.멈추지 않았다.이 무게를 오늘 밤만큼은 어딘가에 내려놓고 싶었다.불빛이 번지기 시작했다.머리가 무거워졌다.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사진이 손 안에 있었다.그것만 쥔 채로 눈을 감았다.***아침 여덟 시.이룸 그룹 25층.한태풍이 복도를 빠르게 걸어왔다.동석이 서류를 끼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태풍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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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_안부 전화의 이유

소은이 작업실에서 원단을 펼치고 있을 때 동석이 들어왔다."팀장님.""응.""이 팀장님이 오늘 출근을 못 하신대요. 몸이 안 좋으시다고."소은의 손이 잠깐 멈췄다."...많이 안 좋대?""열이 있으신 것 같다고요."소은이 원단 위에 손을 올린 채 잠깐 있었다."알겠어. 오늘 일정 조율해줘.""네."동석이 나갔다.소은은 원단을 계속 폈다.패턴을 올렸다.핀을 꽂았다.손이 움직이는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어제 작업실을 나가던 태현의 뒷모습이 떠올랐다.복도에서 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던 것.한참 있다가 돌아왔을 때 얼굴이 평소랑 달랐던 것.그 달라진 게 뭔지 소은은 끝내 짚지 못했다.소은이 핀을 내려놓았다.핸드폰을 들었다.태현의 번호를 찾았다.전화를 걸려다 멈췄다.용건이 없었다.몸이 안 좋다고 했는데 업무 전화를 하는 건 이상했다.그렇다고 안부 전화는 더 이상했다.소은과 태현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아니어야 했다.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했다.그런데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통화 버튼이 눌렸다.스스로도 몰랐다.신호음이 갔다.한 번.두 번.세 번.'끊을까.'그 생각이 올라올 때였다."​...네."목소리가 나왔다.평소보다 낮고 쉬었다.열이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소은이 말을 찾았다."저 백가은이에요.""​알아요."짧은 침묵이 흘렀다.소은이 뭔가를 말해야 했다.용건이 있어야 했다."몸 많이 안 좋아요?""...괜찮습니다.""괜찮은 목소리가 아닌데요.""​...​...."태현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핸드폰 너머로 열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오늘 일정은 태풍 씨한테 정리시켰습니다.""네, 들었어요.""​...그럼, 왜 전화한 겁니까."태현의 말에 소은이 멈칫한다."​...쉬어요."그게 전부였다.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네."통화가 끊겼다.소은이 핸드폰을 내려다봤다.화면이 꺼졌다.손끝이 조금 떨렸다.그냥 쉬어요, 그 말 하나 하려고 전화를 건 건지.아니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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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_잊히지 않은 이름

소은이 잠깐 이남국을 봤다.거절할 이유는 많았다.단순한 프로젝트 파트너가 병문안을 가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하지만 더 이상한 건 소은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가고 싶다는 것.그 마음이 이미 거기 있다는 것."​네, 알겠습니다."이남국이 소은을 봤다."고마워요."그 말이 단순한 인사처럼 들리지 않았다.소은은 그 무게를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오후 일곱 시.태현의 펜트하우스 앞.소은이 현관 앞에 섰다.손에는 포장봉투가 들려 있었다.오는 길에 죽을 샀다.죽이랑 이온음료.그것 말고 뭘 사야 할지 몰랐다.벨을 눌렀다.대답이 없었다.다시 눌렀다.잠시 후,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문이 열렸다.태현이었다.넥타이도, 재킷도 없었다.얇은 티 한 장만 걸친 채였다.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충혈된 눈으로 소은을 봤다.소은은 태현의 얼굴을 한 번 훑었다.잠시 숨을 삼켰다."​...​가은 씨?"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회장님이 부탁하셨어요."소은이 봉투를 들었다.태현이 문을 더 열었다.소은이 안으로 들어갔다.넓은 공간이었다.불이 반쯤 꺼져 있었다.커튼이 쳐져 있었다.소파 위에 코트가 그대로 걸쳐져 있었다.테이블 위에 빈 병이 있었다.소은은 그것을 보고 태현을 봤다.태현은 소파에 앉았다.앉는다기보다 무너지는 것에 가까웠다."됐습니다. 거기 놓고 가면—""죽 데울게요."소은이 봉투를 들고 주방 쪽으로 갔다.태현은 말리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소은이 죽을 그릇에 옮겨 담아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동안, 거실 쪽이 조용했다.소은이 슬쩍 돌아봤다.태현이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잠든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은은 몰랐다.알 수 없었다.그런데 저 빈 병이 말하고 있었다.혼자 이 공간에서 어떤 밤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소은이 죽을 꺼냈다.이온음료를 옆에 뒀다.테이블로 가져갔다.태현 앞에 내려놓으며 낮게 불렀다."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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