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른 이름으로 그를 다시 만났다: Chapter 71 - Chapter 80

93 Chapters

71화_그만 하시죠

동석이 먼저 숨을 내뱉었다.참았던 것을 내보내는 숨이었다.그러고 나서 소은을 봤다."은아.""알아."소은이 짧게 끊었다.루루미의 그 눈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눈인지.확인할 방법이 없었다.또 한 번의 경고.소은은 핀을 원단에 꽂으며 눈을 내리깔았다.푸른 보육원이라는 단어를 저 사람이 꺼냈다.알고 있거나, 의심하고 있거나.둘 중 하나였다.그리고 어느 쪽이든 소은에게는 같은 무게였다.***사흘 뒤, 오후 세 시.이룸 그룹 본사.협업 프로젝트 관련 서류를 전달하러 소은이 이룸에 들른 날이었다.루루미가 떠난 뒤로 며칠, 소은은 더 조심해졌다.한태풍에게 서류를 넘기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복도는 한산했다.이 시간대에 이 층을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딩ㅡ.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소은이 막 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이었다."백 팀장님."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이영돈 본부장이었다.복도 끝에서 걸어오고 있었다.소은은 돌아서며 고개를 숙였다."이 본부장님.""딱 마주치네요. 잠깐 얘기 좀 할까요?"소은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봤다.다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네, 무슨 일이세요.""딱딱하게. 업무 얘기가 아니에요."이영돈이 가까이 다가오며 목소리를 낮췄다."지난번에 제가 연락처 드렸는데, 확인은 하셨어요?""못 본 것 같네요.""못 본 게 아니라 안 본 거겠죠."이영돈이 피식 웃었다."그렇게 쌀쌀맞게 굴 거 없잖아요. 이 팀장이랑은 어차피 파혼한 사이고. 좋은 사람 소개도 해드릴 수 있는데."소은은 대답하지 않았다."백 팀장님처럼 능력 있는 분이 묶여 있는 게 아깝지 않아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거든요. 자리도, 인맥도."이영돈이 한 발 더 좁혔다.소은이 반 발 뒤로 물러섰다.뒤에 엘리베이터 문이 있었다.더 물러설 공간이 없었다.이영돈이 소은의 손목으로 손을 뻗었다."이 본부장님ㅡ"소은이 입을 열었다."본부장님."그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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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_그 스케치, 가져도 됩니까

소은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꺼낼 말을 찾지 못했다.태현이 소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런 상황에서는 그냥 때려도 됩니다.""...네?""나한테 말하던가."소은은 그 말을 받지 못했다.받아야 할 말인데 어디에 어떻게 얹어야 하는지 몰랐다.고마워요, 라고 하면 됐다.그 세 글자면 됐다.근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태현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가시죠."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딩ㅡ.문이 열렸다.소은이 안으로 들어섰다.태현은 들어오지 않았다.닫히는 문 사이로 그의 옆얼굴이 보였다.복도를 향한 채로, 이미 다음 걸음을 뗄 준비를 하는 사람의 얼굴.문이 완전히 닫혔다.소은은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기댔다.나한테 말하던가.그 말이 내려가는 내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소은은 눈을 감았다.그리고 감은 채로 한 박자 있다가 떴다.고마워요, 를 못 했다.다음번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바로 다음에, 다음번을 생각하는 자신이 마음에 걸렸다.엘리베이터가 로비층에 멈췄다.딩ㅡ.문이 열렸다.소은은 발을 뗐다.이 사람한테 이러면 안 됐다.누군가에게 지켜지는 게 익숙해지면 안 됐다.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면 더더욱 안 됐다.발걸음이 무거웠다.***이틀 뒤, 저녁 아홉 시.백제 그룹 팀장실.불이 꺼진 층에서 팀장실 조명만 켜져 있었다.소은은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원단 샘플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 프로젝트 서류가 쌓여 있었다.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분명히 있었다.펼쳐진 스케치북이 앞에 있었다.언제부터 그리고 있었는지 기억이 없었다.업무용 도면을 그리다가, 어느 순간 선이 달라졌다.딱딱한 패턴선이 아니었다.사람의 윤곽이었다.소은의 연필이 멈췄다.완성된 얼굴이 종이 위에 있었다.미간에 힘이 들어간 채 서류를 보는 눈.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기는 손.작업실에서 소파에 기대 앉았을 때의 각도.소은이 실눈을 뜨고 그것을 들여다봤다.이걸 왜 그렸는지 깨닫기도 전에,노크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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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_저번에 줬던 그림

이룸 그룹 25층 작업실.오후 일곱 시.형광등 불빛이 낮게 울었다.소은은 연필을 쥔 채 고개를 기울였다.드레이프 라인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선이 시작되는 지점은 맞는데 끝에서 흐르는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지우고, 다시 긋고, 또 지웠다.같은 자리를 세 번 넘기자 종이가 조금씩 얇아지기 시작했다.거기서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손목에서 힘을 빼는 것, 그게 먼저였다.포장된 음식이 작업대 옆에 조용히 내려앉았다.소은이 고개를 들었다.태현이었다.넥타이를 조금 풀었을 뿐, 오전과 같은 정장 차림이었다.코트를 팔에 걸친 채로 소은을 내려다봤다.딱히 표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그냥 거기 있었다.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럽게."또 왔어요?""네.""또 근처에 미팅이 있었어요?""아니요."짧고 건조한 대답이었다.소은이 연필을 내려놓으며 봉투를 봤다.오늘은 돈가스.어젯밤에는 스시.그저께도 그랬다.하루 한 번씩, 시간이 좀 다를 뿐이었다.언제부터였는지 기억하려다 그만뒀다.기억해봤자 달라질 게 없는 일이었다."​이 팀장님."태현이 소파 쪽으로 걷다가 멈췄다."왜 자꾸 챙겨주세요?"방 안이 조용해졌다.태현이 코트를 소파 등받이에 걸면서 그 시선을 받았다.대답을 고르는 것인지 고르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소은은 기다렸다."​모르겠습니다.""그게 대답이에요?""솔직한 겁니다."피식.소은이 먼저 웃었다.어이없다는 웃음이었는데 나쁘지 않았다.이상하게도.태현의 입매도 아주 조금 풀렸다.별것 아닌 것처럼.티 나지 않게.그래서 오히려 이상했다.소은은 시선을 봉투로 내리며 포장을 깠다.돈가스 냄새가 작업실 공기 속으로 번졌다.이 사람 앞에서 웃는 게 점점 어색하지 않아지는 일이, 오히려 더 어색했다.그 사실을 외면하기 위해 숟가락을 들었다.태현이 서류를 펼치며 소파에 앉았다.시선이 같은 줄에 오래 머물렀다.넘기는 속도가 일정하지 않았다.한참이 지나서야 태현이 서류에서 눈을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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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_디자이너 S라는 이름으로

각자의 소리만 낮게 깔렸다.숟가락 소리, 서류 넘기는 소리, 형광등 소리.대화가 없는데 어색하지 않은 시간이었다.소은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눈을 도면에 고정했다.이 안정감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숨이 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밖에서 바람이 유리창을 건드렸다가 물러났다.***다음 날 오전 열한 시.이룸 그룹 아트홀.오전부터 업계 관계자들과 미디어가 자리를 채웠다.이룸 그룹의 차기 프로젝트 콘셉트 발표 자리였다.오늘 이 무대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 있었다.디자이너 S.발표가 시작됐다.스크린에 도면들이 하나씩 올라왔다.소은이 그린 것들이었다.소은의 손끝에서 나온 선들이 디자이너 S라는 이름을 달고 처음으로 이 공간에 서 있었다.소은은 관계자석 한쪽에 앉아 그것을 바라봤다.백가은의 이름으로.화면 위에 드레이프 라인이 펼쳐졌다.소은이 열두 번은 지우고 다시 그은 어깨선이었다.밤을 꼬박 넘긴 각도였다.아무도 그 과정을 몰랐다.이 홀 안에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소은은 그 선을 처음 보는 것처럼,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바라봤다.발표가 진행되는 내내 객석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소곤거리는 소리들.기자들이 휴대폰을 들었다.소은은 무릎 위에 손을 포개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숨을 고르게 유지했다.자신의 것인데,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봐야 하는 시간이었다.이름 없이 이 공간을 채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처음 이 이름을 쓰기 시작했을 때와 지금이 달리 느껴졌다.시선이 느껴졌다.소은이 고개를 돌렸다.태현이었다.무대 오른쪽에 서서 스크린과 소은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도면을 보다가, 소은을 보다가.규칙 없이.그런데 계속.눈이 마주치는 순간 태현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마치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확인받으려는 것처럼.소은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박자를 잃은 게 아니라 스스로 다른 박자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소은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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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_어디까지 와 있는 건지

태현이었다.방으로 들어서며 소은을 한 번 봤다가 맞은편으로 걸었다."오늘 발표 반응 좋더군요.""다행이네요."태현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서류를 꺼냈다."디자이너 S의 작품 앞에서 멈추는 사람이 많았습니다."소은은 연필을 원단 위에 얹으며 각도를 재는 척했다."좋아하겠어요, 디자이너 S가.""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고맙습니다.""...제 프로젝트이기도 하니까요. 감사 인사는 됐어요."소은이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태현도 서류에 시선을 두고 간간이 펜을 움직였다.그리고 한참이 지났다.소은의 손이 저도 모르게 느려졌다.원단 표면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결의 방향을 읽는 손이었다.경위사 비율을 가늠하는 감각, 오래된 것이 먼저 깨어나는 순간이었다.생각이 지워지고, 보이는 것들이 하나씩 배경으로 밀려났다.필요한 것들만 눈 안에 남는 순간.손가락이 뺨을 콕 찔렀다.태현의 시선이 따라갔다.이번엔 그냥 봤다.손끝이 소은의 뺨을 찌르는 것을.집중이 풀리지 않은 채 계속되는 것을."...백 팀장님."대답이 없었다.태현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겼다.발소리를 낮추지 않았는데도 소은은 듣지 못했다.작업대 옆에 섰다.소은은 여전히 원단을 보고 있었다.태현이 그녀의 반대쪽 뺨을 콕 찔렀다.이내 소은의 눈이 동그래진 채 그를 올려다봤다.놀람이 얼굴에 그대로 박혔다.심장이 한 박자 쉬었다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흔들리는 태현의 눈과 마주쳤다.서늘하던 눈빛이 아니었다.방금 자신이 무언가를 저질렀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돌아서지 않는 눈이었다."...이 팀장님?""......""무슨 일 있어요?""​불러도 못 듣길래."낮은 목소리였다.그것만 말하고 태현은 제 자리로 돌아갔다.소은은 닿았던 자리를 손끝으로 짚었다.온기 같은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기분 탓이었다.틀림없이.그렇게 생각했다.태현이 펜을 들었다.서류를 보는 채로 말을 꺼냈다.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푸른 보육원 사람들과 친하던데."소은의 어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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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_들켜버린 흔적

소은의 대답에 태현이 한 발 물러섰다."그런가요."소은이 모르는 척 원단을 만졌다."푸른 보육원 화재 사건 생존자들 말입니다."소은이 눈을 올렸다.잠깐 그 말의 의미를 가늠했다.태현의 목소리는 낮았다.담담했다.그런데 그 담담함이 오히려 무게가 있었다."20년 동안 찾았는데. 명단도, 기록도, 다 뒤졌는데.""......""못 찾았거든요. 누군가 숨기고 있는 것처럼."소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상하지 않습니까."태현이 소은을 똑바로 봤다."당신 주변에서는 자꾸 만나게 되는데."심장이 한 박자 조여들었다."​...우연이겠죠.""그러네요. 당신 옆에선 우연도 참 많아."짧고 낮은 말이었다.반박이 아니었다.확인이었다.태현은 그 말을 남기고 소은을 한 번 더 보다가 먼저 몸을 돌렸다.소은은 그 뒷모습을 보며 서 있었다.어디서도 나타나지 않더니.당신 주변에서는 자꾸 만나게 된다.그 말이 귓속에서 빠지지 않았다.그 말이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는 걸 소은은 알았다.그 짧은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쌓여 있을지.얼마나 오래 바라보고 있었을지.***주말, 오전 열 시.소은의 공방.동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뒤이어 승아가 들어왔다.두 사람이 소은을 봤다.소은은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원단을 손에 쥔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동석이 문을 닫았다.승아가 먼저 소은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동석은 뒤에 서서 팔짱을 꼈다.소은이 그들을 바라봤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게 전부였다.소은은 원단을 내려놓으며 두 사람을 차례로 봤다.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그냥 봤다.그것이 더 무서운 일이었다.승아가 허벅지 위에 손을 포개며 무릎을 봤다.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무언가 말을 찾고 있는 것 같았지만 찾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동석은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 소은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소은이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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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_잠든 얼굴

소은의 물음에 동석이 움찔한다.승아가 소은의 눈치를 본다.소은이 크게 한숨을 내쉰다."너 진짜ㅡ""일단 아니라고 우겼는데...""그걸 믿겠어?"소은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눈을 질끈 감는다.동석이 들켰다면, 순서대로 드러나는 건 시간 문제였다."두 사람은 들켰으니까 더는 숨지마."소은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든다.소은은 머리가 하얘졌지만 애써 입을 연다."숨기면 더 의심받아. 이미 들킨 거, 그냥 뻔뻔하게 나가.""어?""나랑은 비서랑 팀장으로 만나서 인연 생긴 걸로. 나랑 절대 엮이게 하지 마. 알아들어?"동석과 승아가 고개를 끄덕인다.소은이 숨을 내쉬고 창밖을 바라본다.목 뒤쪽이 조금 무거웠다.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소은은 그 감각을 이름 붙이지 않았다.이름을 붙이면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었다.원단을 다시 집어 들었다.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사흘 뒤 저녁.이룸 그룹 25층.엘리베이터가 열렸다.소은이 포장봉투를 들고 나왔다.복도가 조용했다.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다.바닥 불빛이 낮게 깔린 통로를 따라 디자인팀 쪽으로 걸었다.발소리가 낮게 울렸다.태현의 사무실 불이 켜져 있었다.소은이 문 앞에서 멈췄다.노크를 할까 하다가,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가.그러다 가볍게 두드렸다.대답이 없었다.소은이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책상 위에 서류가 펼쳐진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펜이 그 옆에 있었다.열린 노트북 화면이 절전 상태로 어두워져 있었다.태현은 거기 없었다.소은이 안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살폈다.소파였다.사무실 한쪽에 놓인 소파.태현이 눈을 감은 채 거기 누워 있었다.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재킷은 소파 등받이에 걸쳐진 채 흘러내려 있었다.태현은 자고 있었다.소은은 움직이지 않았다.이 사람이 잠든 걸 본 게 처음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어떤 자리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이었다.회의실에서도, 작업실에서도, 늦은 밤 서류를 보던 때에도.언제나 반듯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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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_놓지 않는 손

봉투를 작업대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소리를 최대한 줄였다.이 사람을 깨우는 것이 맞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왜인지 모르게.그냥 잠깐.자신도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면서 소은은 소파 앞에 웅크려 앉았다.그냥 잠깐만.소파에서 태현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자세가 조금 더 무너졌다.잠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이상하게 선명하게 보였다.생각이 스쳤다.태현이 몇 살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29살.백가은과 동갑.김소은과는 2살 차이.그 시절 그 아이의 얼굴을 소은은 기억했다.오래된 일이었지만.불길 이전의 것들은 더 그랬다.보육원에서의 시간들은 가끔 선명하게 떠올랐다가도, 다음 순간엔 다시 연기처럼 흩어졌다.특히 얼굴들이 그랬다.이름보다 얼굴이 먼저 지워졌다.그런데.지금 저 얼굴이.잠든 얼굴이 어려 보이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였다.보육원이 생각난 건 요즘 그쪽으로 자꾸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었다.당신 주변에서 자꾸 만난다는 말이 머릿속에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그것뿐이었다.그뿐일 테니까.소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가방을 집어 들었다.봉투는 작업대 위에 그대로 두었다.최대한 소리 없이.최대한 조심스럽게.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소파에서 소리가 났다.소은이 멈췄다.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태현이 눈을 뜨고 있었다.잠에서 완전히 깬 것인지 아직 경계 어딘가에 있는 것인지, 눈이 조금 멍했다.소은을 봤다.소은이 거기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직 꿈인지 현실인지 가리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소은은 말을 찾으려 했다."​...저녁 가져왔어요. 항상 챙겨줘서, 그냥."태현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소은도 같이 움직이려 했다.그 순간.손목이 잡혔다.소은이 그에게로 당겨졌다.태현의 손이 소은의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꽉 쥔 게 아니었다.그냥 거기 있었다.잠든 사람이 뻗은 손처럼, 혹은 무언가를 붙들려는 사람의 손처럼.태현 자신도 의도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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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_막힘없는 답

소은은 손목을 빼지 않았다.빼야 한다는 건 알았다.그런데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태현의 손이 소은의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꽉 쥔 것도, 당기는 것도 아니었다.그냥 거기 있었다.그 온기가 이상하게 선명했다.태현이 천천히 눈을 맞췄다.조금 전까지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던 얼굴이, 지금은 완전히 깨어 있었다.소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손목."태현이 소은의 손목을 내려다봤다.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거뒀다."미안합니다."미안하다는 말과 달리, 태현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잠이 덜 깨서."소은이 태현을 똑바로 봤다."거짓말.""​...​....""잠 다 깼잖아요."태현의 입매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웃은 건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운, 딱 그 경계였다."잠이 원래 늦게 깨는 편입니다.""저 봤잖아요, 분명히.""잠결에 착각한 겁니다."소은이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어이가 없었다.그런데 기이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이 상황이 황당한데, 그 황당함 안에 날이 없었다."​​지금 얼마나 뻔뻔한지 알아요?""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그게 더 뻔뻔한 거예요."태현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넥타이 매듭을 자연스럽게 정리하면서 소은을 한 번 봤다.재킷을 집어 걸치는 손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이 상황에서 이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게 이 사람의 제일 얄미운 점이었다."저녁이에요.""감사합니다.""감사 인사 필요 없어요. 보답이니까.""그래도 합니다."소은이 입을 다물었다.그는 봉투를 여는 동작조차 흐트러짐이 없었다.소은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눈을 내렸다.봉투를 여는 소리가 났다.태현이 안에 든 걸 확인하고 있었다.무심해 보여도, 확인은 빼먹지 않는 사람이었다.소은은 가방을 챙겨 들었다.나가야 했다.그런데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손목에 아직 온기 같은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기분 탓이었다.분명히.***다음 날 오전.이룸 그룹 25층 복도.소은과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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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_디자이너 S의 기사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그럼에도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그런데 그 안에 뭔가가 있었다.소은은 앞을 보면서 귀만 열었다.동석이 태현을 봤다."디자인팀에 계실 때부터 뵀습니다. 비서 맡으면서 가까워졌고요.""그전에는 모르셨습니까.""그전엔 기회가 없었죠."짧고 명확했다.뒤따라올 그 어떤 질문도 막을 만큼.태현이 동석을 한 박자 더 봤다.가늠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확인하는 것 같기도 한 눈이었다.소은은 태현이 이렇게 사람을 볼 때의 감각을 알고 있었다.결론이 없는 채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진 무언가를 대조하면서 보는 눈이었다.그래서 더 아무렇지 않게 있기가 어려웠다."그렇군요."그것으로 끝이었다.태현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어깨 너머로 한마디가 떨어졌다."백 팀장님, 열두 시 검수 때 뵙겠습니다."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졌다.소은이 숨을 내쉬었다."잘했어."낮게, 앞을 보면서 말했다.동석이 파일을 고쳐 끼었다."​...처음부터 이렇게 할걸."소은이 대답하지 않고 먼저 걸었다.동석은 다시 반 보 뒤로 물러난 채 소은을 따랐다.한 층을 지나치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동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 형 예전부터 이상했어. 뭘 다 보는 것 같은 눈을 하고선.""알아."소은이 걸으면서 대답했다.맞는 말이었다.이태현은 성급하게 치고 나오는 사람이 아니었다.조용히 쌓아두는 사람이었다.그게 더 까다로웠다."결국 들키려나."동석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아, 몰라. 진짜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동석의 대답에 소은이 피식 웃었다."바보 같네."소은은 웃음을 거두며 앞을 봤다.그때 가서.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그때가 언제일지, 얼마나 남았을지.알 수 없었다.***오후 네 시.이룸 그룹 25층 작업실.원단 위에 초크 선이 늘어났다.소은이 자를 대고 각도를 재면서 선을 그었다.맞은편 소파에서 태현이 노트북을 열고 앉아 있었다.일정은 끝났는데도, 같이 일하는 게 자연스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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