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소은의 숨구멍인 낡은 공방.그곳에서 소은은 언제나처럼 디자인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었다.책상 위에는 수백 장의 도면이 파도처럼 밀려와 쌓여 있었고, 연필이 종이를 긁는 서걱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지직거리는 모니터 화면에는 이룸 그룹에서 개최했던 지난 공모전의 수상작이 띄워져 있었다.그리고 화면 속 작품과 똑같은 실물 드레스가 공방 한쪽 마네킹에 걸려 있었다.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이름 없는 천재 디자이너 S의 진면목.소은은 스케치를 멈추고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백가은이라는 이름으로 살며 그녀는 화려한 껍데기를 얻었지만, 정작 소은으로서의 재능은 이 어두운 공방 안에 유폐시켜야만 했다.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보았다.어느새 밤은 깊어 하늘은 먹물을 풀어놓은 듯 검었다.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백동우라는 괴물이 기다리는 그 지옥 같은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짐을 챙기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정적을 깨고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이태현]화면에 뜬 세 글자에 소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이 인간이 왜 또 전화를.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항복하듯 전화를 받았다."네."[몸은 괜찮습니까.]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태현의 목소리는 낮고 감미로웠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감은 상당했다."덕분에요.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네요."[다행이군요. 그럼 좀 만나죠, 우리.]"무슨 일로요? 용건이 남았나요?"[결혼할 사이라며 기사까지 났는데, 만나는 데 이유가 더 필요합니까?]태현의 여유로운 말투에 소은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기사, 제가 낸 거 아닌 거 아시잖아요. 결혼 안 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난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줄 것도 있고요.]"줄 거라니요?"[어제 내 차에 립스틱을 두고 내렸더군요. 꽤 고가인 것 같은데.]소은은 아차 싶었다.어제 정신없이 내리느라 소지품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그거 그냥 가지세요. 안 돌려받아도 되니까."[이걸 제가 어디다
Huling Na-update : 2026-10-15 Magbasa 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