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hat ng Kabanata ng 다른 이름으로 그를 다시 만났다: Kabanata 21 - Kabanata 30

79 Kabanata

21화_다시 걸려온 전화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소은의 숨구멍인 낡은 공방.그곳에서 소은은 언제나처럼 디자인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었다.책상 위에는 수백 장의 도면이 파도처럼 밀려와 쌓여 있었고, 연필이 종이를 긁는 서걱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지직거리는 모니터 화면에는 이룸 그룹에서 개최했던 지난 공모전의 수상작이 띄워져 있었다.그리고 화면 속 작품과 똑같은 실물 드레스가 공방 한쪽 마네킹에 걸려 있었다.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이름 없는 천재 디자이너 S의 진면목.소은은 스케치를 멈추고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백가은이라는 이름으로 살며 그녀는 화려한 껍데기를 얻었지만, 정작 소은으로서의 재능은 이 어두운 공방 안에 유폐시켜야만 했다.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보았다.어느새 밤은 깊어 하늘은 먹물을 풀어놓은 듯 검었다.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백동우라는 괴물이 기다리는 그 지옥 같은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짐을 챙기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정적을 깨고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이태현]화면에 뜬 세 글자에 소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이 인간이 왜 또 전화를.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항복하듯 전화를 받았다."네."[몸은 괜찮습니까.]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태현의 목소리는 낮고 감미로웠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감은 상당했다."덕분에요.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네요."[다행이군요. 그럼 좀 만나죠, 우리.]"무슨 일로요? 용건이 남았나요?"[결혼할 사이라며 기사까지 났는데, 만나는 데 이유가 더 필요합니까?]태현의 여유로운 말투에 소은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기사, 제가 낸 거 아닌 거 아시잖아요. 결혼 안 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난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줄 것도 있고요.]"줄 거라니요?"[어제 내 차에 립스틱을 두고 내렸더군요. 꽤 고가인 것 같은데.]소은은 아차 싶었다.어제 정신없이 내리느라 소지품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그거 그냥 가지세요. 안 돌려받아도 되니까."[이걸 제가 어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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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_화려한 죄수복

오후 5시.백제 그룹 팀장실.하늘은 어느새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소은은 집중한 채 디자인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그때, 김동석이 묵직한 명품 백화점 종이가방을 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팀장님, 회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서류에 고정되어 있던 소은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향했다.동석의 손에 들린 화려한 로고의 종이가방.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백회장이 보냈다니.또 무슨 짓을 하려는건지."그게 뭔데?""상견례 때 입으시랍니다. 회장님께서 직접 고르셨다고 하셨습니다."동석의 말에 소은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그녀는 거칠게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진짜 끝까지 막무가내네. 본인이 정한 각본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시는 건가?"소은이 억지로 짓누르던 한숨을 내뱉으며 종이가방에서 박스를 꺼냈다.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지나치게 화사하고 여성스러운 노란색 롱 원피스와 순백의 가디건, 그리고 아찔한 높이의 화이트 스틸레토 구두가 들어있었다.누가 봐도 ‘사랑받고 자란 온실 속의 화초’처럼 보일 수 있는 옷차림.하지만 소은에게 그것은 화려한 죄수복이나 다름없었다.그녀는 거칠게 박스를 닫아버렸다.역시 백 회장은 변하지 않는다."치워. 당장 가져가.""하지만 팀장님, 이번에도 거부하시면... 회장님 성미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시지 않습니까."동석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도 소은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내가 알아서 해. 스타일도 구려. 오리야, 뭐야. 내가 저런 거 입는 거 봤어?"동석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박스를 도로 챙겼다.그러다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투를 바꾼다.동석은 원피스를 꺼내 그녀의 몸 앞에 대보았다."너랑 잘 어울리겠는데? 이거 입으면 이태현 팀장, 눈 못 떼겠네.""뭐?""치마도 길어서 네 흉터도 가려질테고. 좋네.""지금 나랑 장난해? 당장 안 치워?"소은의 서늘한 눈빛에 동석이 짐짓 겁먹은 척하며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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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_새우 알레르기

오후 6시 20분.약속 장소인 회사 정문 앞에는 태현의 검은색 세단이 위압적으로 서 있었다.태현은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손가락으로 까닥이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차 문이 열리고 소은이 오르자,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왔어요?""네."소은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더 날카롭고 차가웠다.태현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저녁 먹을래요? 예약해 둔 곳이 있는데.""생각 없어요.""그러지 말고 같이 먹어요. 나 배고픈데.""싫어요. 립스틱이나 줘요."얼음처럼 차가워진 소은의 태도에 태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립스틱을 꺼냈지만, 소은이 손을 뻗자 가볍게 뒤로 물리며 손을 접어버렸다."뭐 하는 거예요?""오늘 할말 있댔잖아요.""난 없어요. 립스틱 안줄거면 난 가볼게요."소은이 고개를 돌리고 차 문을 열려한다."그날 말이에요. 당신 얼굴 엉망이었던 날."소은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태현이 낮게 읊조렸다."내가 좀 알아봤는데, 당신이 계단에서 굴렀다느니 하는 상황은 전혀 없었거든. 당신 집 들어가기 전까지 멀쩡했잖아.""왜 당신 마음대로 내 뒷조사를 해요?"소은이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소리를 높였다.하지만 태현의 눈동자는 더욱 깊고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럼 내가 내 약혼녀 얼굴이 터져서 길거리에 주저앉아 있는데 그냥 넘어갈 줄 알았어?""누가 약혼녀에요?""결혼 기사도 났고, 상견례도 코앞인데 약혼 관계 맞죠."소은이 그에게 더 대꾸하려다 지친다는 듯 숨을 푹 내쉰다."그만하죠. 이 팀장님이 관여할 일 아니에요.""내 생각이 맞는거죠? 때린 사람이 당신 집 안에 있는 거."태현의 날카로운 추궁에 소은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 문손잡이를 잡았다."당신이 뭔데 참견이야. 적당히 좀 해요."소은이 태현을 무시하고 내리려던 찰나, 태현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저녁 사요.""네?""당신 말대로 난 당신 도울 필요도 없는데 도와줬잖아.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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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_원하던 결과

태현은 새우를 제외한 코스 요리와 신선한 샐러드, 스테이크를 주문했다.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테이블 위에는 다시 지독한 정적이 내려앉았다."나랑 결혼하기가 그렇게 싫습니까."정적을 깬 건 태현이었다.와인잔을 만지는 그의 긴 손가락이 불편하다는 듯 톡톡 움직인다.소은은 그 시선을 피하며 단호하게 답했다."네, 싫어요.""그 이유가 단순히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입니까?""이유가 뭐든 그냥 싫어요. 그리고 진짜 이유가 있다고 해도 당신한테 설명할 이유 없구요.""......""그러니까 이 팀장님이 좀 끝내주시면 안 되나요, 이 관계? 당신이라면 아버지 설득할 명분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잖아요."소은의 목소리엔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제발 이 지옥 같은 연극에서 나를 좀 놓아달라는 비명이었다.하지만 태현은 냉소적인 대답을 할 뿐이었다."본인이 끝낼 수 없기 때문입니까?""......"소은의 침묵은 긍정보다 무거웠다.그녀의 눈동자에 스친 찰나의 공포를 태현은 놓치지 않았다.그때 본 그 멍 자국, 그리고 오늘 그녀가 보여주는 이 처절한 거부.이내 음식이 서빙되었다.태현은 말없이 샐러드를 덜어 소은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일단 먹어요. 나한테 독설을 퍼부으려면 어쨌든 힘이 있어야 하잖아요?"소은은 태현을 힐끔거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포크를 들었다.하지만 신선한 채소조차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한 입, 두 입 억지로 씹어 삼키던 소은이 결국 포크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먹기 싫어요. 입맛 없으니까 그만하죠.""백 팀장님."태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경고였다.하지만 소은은 보란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백을 챙겨 들었다."당신 말대로 내가 답례해야 할 일도 있으니, 오늘 계산은 제가 하죠. 이 팀장님은 천천히 드시고 오세요."차갑게 굳은 태현의 시선을 뒤로한 채 소은은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자신의 비참함을 가리기 위해 선택한 독설은, 결국 자신과 상대 모두를 베어버리고 있었다."이젠 정말, 만나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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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_존재하지 않는 알레르기

레스토랑을 나서자 밤공기가 차갑게 스쳤다.소은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만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등 뒤로 멀어지는 레스토랑의 불빛과, 마지막으로 본 이태현의 차가운 눈빛이 자꾸만 어깨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원하던 결과였다.그러니 잘 된 거였다.소은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길가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다.밤바람이 뺨을 스치는 순간, 코끝이 찡하게 저려왔다.'......아.'느낌이 왔다.처음엔 미미했다.목 안쪽이 간질간질한 느낌.숨을 들이킬 때마다 기도가 조여드는 것 같은 압박.소은은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시도했다.하지만 숨은 뜻대로 들어오지 않았다.샐러드.조금 전, 억지로 몇 입 씹어 삼켰던 그 신선한 채소들 사이에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소은은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땅콩.잘게 부서져 드레싱에 녹아들었을,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조각들.백가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알레르기.그러나 김소은에게는 어릴 때부터 지독하게 따라다니는 몸의 비밀.소은은 핸드백을 거칠게 뒤졌다.에피펜.항상 챙겨 다니는 주사기.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지갑과 립스틱 사이를 헤집었다.없었다.하필 오늘, 없었다.입술 안쪽이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목이 조여들었다.소은은 가로수 기둥에 손을 짚으며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는 것 같았다.택시를 잡아야 했다.병원으로 가야 했다.그것만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었다.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소은은 이를 악물고 핸드폰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눌렀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이름.동석.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됐다."뭐야, 왜 이 시간에-""......동석아."짧은 침묵이 흘렀다.소은의 목소리가 어떤 상태인지 눈치채는 데 동석에게는 0.5초도 걸리지 않았다."너 목소리 왜 그래. 무슨 일 있어?""나.. 알러지...""지금 어디야. 혼자 있어?"동석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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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_숨겨야 하는 진실

"오늘 저녁에 백팀장님과 식사하신걸로 아는데 드신 메뉴 좀 알 수 있을까요."전화기 너머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갑자기요?]"아, 네. 좀 확인할 게 있어서요."태현은 잠시 말이 없다가 대꾸한다.[샐러드와 스테이크를 주문했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구요.]동석의 손에 쥔 휴대폰이 더 세게 쥐어졌다.그는 조수석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짧게 대꾸했다."알겠습니다. 확인 감사합니다."[잠깐만요.]태현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파고들었다.[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백팀장님께 체기가 조금 있어서요. 확인차 연락 드렸습니다."[체기가 있다구요?]"네."동석은 잠깐 눈을 감았다.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이 돌아갔다.이태현이 의심하고 있다.어디까지 의심하는건지는 모르지만, 이 남자는 그냥 넘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심하신건 아니라서요. 그럼."그것만 말하고 동석은 전화를 끊었다.차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소은이 동석의 옆에서 눈을 감은 채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동석은 입술을 꽉 다물고 앞을 보았다.동석은 곧바로 소은이 말한 레스토랑으로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십니까. 오늘 거기서 식사를 했는데 알레르기 반응이 올라와서 연락드렸습니다. 샐러드와 스테이크를 시켰는데-"동석이 통화를 이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다 이마를 짚고는 한숨을 내쉰다."...땅콩 드레싱이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동석이 눈을 질끈 감으며 전화를 끊는다."넌 하필 먹어도 땅콩을 먹냐."백가은의 알레르기 항목에 땅콩은 없었다.누군가 그 사실을 제대로 파고든다면, 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었다.응급실의 형광등 불빛은 눈이 시릴 만큼 하얬다.에피네프린 주사를 맞고 수액을 달고 나서야 소은의 호흡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동석은 커튼 너머 보호자 의자에 팔짱을 낀 채 앉아 소은을 내려다보았다.평소의 잔소리꾼 같은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그 자리엔 지독하게 짙은 걱정만 남아 있었다."에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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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_하필이면 너와 닮아서

태현이 집에 돌아온 건 저녁 8시가 조금 넘어서였다.태현은 코트를 소파에 던져두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며 냉장고를 열었다.생수 한 병을 꺼내 절반쯤 들이켰다.그제야 숨이 조금 가라앉았다.조용했다.통유리 너머로 서울 야경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고, 펜트하우스 안에는 사람 하나 없는 정적만이 가득했다.파혼.그 단어를 뱉은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태현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후회는 없었다.아니, 없어야 했다.당연히 없어야 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왜.동석의 전화가 자꾸 머릿속에서 재생됐다.밥 먹은 메뉴를 묻는 목소리.어딘가 조급하게 눌러담은 듯한 그 어조.태현은 손으로 눈을 감싸며 낮게 내뱉었다.'...걱정하는 게 아니야. 그냥 이상한 거지.'***다음 날 아침.이룸 그룹 27층 팀장실.태현은 일찌감치 출근해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정확히는 같은 줄을 벌써 네 번째 읽고 있었다.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팀장님."한태풍이 단정하게 들어서며 곤란하다는 듯 말을 잇는다."어제 제가 예약했던 레스토랑의 매니저가 사과 전화가 왔습니다. 백팀장님께서 알레르기 반응으로 쓰러지셨다고...""뭐?"태현은 한동안 태풍을 가만히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아무래도 백팀장님 비서 분이 레스토랑에 메뉴 확인 전화를 하셨나봅니다. 백팀장님께서 응급실에 가셨다고 합니다."태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응급실?""예...""음식에 새우가 들어있었던건가?""예? 아닙니다. 새우는 없었습니다만, 땅콩 알레르기 때문에 쓰러지셨다고 하더군요.""땅콩?"어제 메뉴를 확인하러 전화한 비서.그리고 응급실.단순히 체한 수준이 아니었다.응급실에 갈 정도로 심한 알러지 반응.그런데 그 비서는 왜 체기라고 말한거지?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새우 알레르기는 꼼꼼히 챙겨서 직접 셰프에게 전달까지 했다.근데 땅콩 알레르기는 왜 말하지 않은건지.마치 숨겨야 하는 사람처럼.그 생각이 머릿속 한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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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_일주일의 기한

붓기는 하룻밤 사이에 가라앉지 않았다.소은은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봤다.입술 한쪽이 아직 도드라지게 부어 있었고, 목선을 따라 번진 두드러기 자국도 여전히 선명했다.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졌지만, 그 빛은 오늘따라 유난히 야속하게 느껴졌다."생각보다 많이 부었네."어차피 오늘은 집에 있을 생각이었다.이 꼴로 회사에 나갈 수는 없었다.침대에 반쯤 누워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던 참이었다.손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눈은 멍했다.어젯밤의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레스토랑.샐러드.동석의 다급한 목소리.응급실의 형광등 불빛.그리고.'좋아요. 파혼하죠.'그 차갑던 목소리가 또 귓가를 스쳤다.소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스케치북으로 얼굴을 가렸다.잘 된 거였다.원하던 결과였다.그러니까 이제 끝난 거고, 잊으면 되는 거였다.그때, 초인종이 울렸다.소은은 스케치북을 내리며 눈썹을 찌푸렸다.무거운 몸을 끌고 현관으로 향해 인터폰을 들여다보는 순간, 피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김동석.얘는 왜 또 온 거야.소리를 듣고 나온 아주머니에게 눈짓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 뒤 문을 열었다.동석이 편의점 봉투를 양손에 들고 서 있었다.바나나우유와 죽, 그리고 여러 과자 봉지까지.소은의 부어오른 얼굴을 확인한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아직도 이 꼴이네.""인사가 그게 뭐야?""백회장 없지? 어서 들어가자. 추워."동석이 당연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서며 봉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소은은 문을 닫고 그를 따라 들어왔다.동석은 죽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으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근데, 은아."동석이 등을 돌린 채 말을 꺼냈다.목소리가 슬쩍 낮아졌다."이번 이룸 차기 프로젝트 있잖아. 내부적으로 디자인 라인을 아예 갈아엎을 생각인 것 같던데."동석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덧붙였다."디자이너 S 유입을 원하는 것 같더라고.""뭐? 어디서 들은 거야.""아는 선배가 이룸 협력사 쪽에 있거든."동석이 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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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_디자이너 S라는 카드

일주일.이룸 그룹 프로젝트.홧김에 입에서 나온 말이긴 했지만, 과연 내가 참여할 수 있을까.더군다나 상대는 어젯밤 파혼을 선언하고 등을 돌린 이태현이었다.소은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명분.그 남자가 거절할 수 없는 카드.소은이 이내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테이블 위에 스케치북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소은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종이 표면을 쓸어내린다.디자이너 S의 스케치.업계에서 아무도 얼굴을 모르는, 공모전마다 압도적인 점수 차로 수상을 휩쓰는 그 미지의 디자이너.이태현이 어떻게든 영입하고 싶어 한다는 걸 소은은 알고 있었다.이룸의 기획팀 문제, 이본부장의 입김, 썩어가는 내부 구조.그 모든 것에 새 피를 수혈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가 바로 디자이너 S였다.소은은 스케치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부어오른 얼굴에 최소한의 컨실러를 바르고, 마스크를 단단히 고쳐 썼다.외투를 걸치며 스케치 사본 몇 장을 챙겨 가방에 끼워 넣었다.자존심은 나중에 챙기기로 했다."야."동석이 집을 나서는 소은의 팔을 잡았다."S 정체 절대 안 들키는 조건이야. 잊지 마.""당연하지.""이태현 그 자식, 눈치 빠른 거 알잖아. 조심해.""알았어."소은은 동석을 뒤로하고 현관으로 향했다.등 뒤로 동석의 낮은 목소리가 따라왔다."야, 마스크 잘 써. 얼굴 못생겼어."소은은 그를 째려보고는 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그녀는 마스크를 고쳐 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이룸 그룹 본사는 예상보다 훨씬 복잡했다.소은은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 선택이 얼마나 무모했는지를 실감했다.사전 연락 없이 들이닥치다니.태현에게 연락하면 거절당할 게 뻔했고, 거절당하고 나면 더는 방법이 없어진다.그러니 일단 들어오고 보자는 심산이었는데.막상 와보니 안내 데스크부터 막혔다."방문 목적이 어떻게 되십니까.""디자인 부서의 이태현 팀장님 뵈러 왔어요.""약속을 잡으신걸까요?""따로 잡진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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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_좁혀진 거리

그때였다."손대지마."소은은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다.날카로운 구두 소리.경비원들과 그곳을 지나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가고 이내 모두가 고개를 숙인다.태현은 한태풍 비서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소은은 마스크를 고쳐 쓰며 스케치 사본을 가슴에 끌어안고 빠른 걸음으로 그를 향해 뛰어갔다."이 팀장님!"태현이 고개를 들었다.소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걸음이 멎었다.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불편해보였다."대체 여기서 뭐합니까."소은은 숨을 고르며 그 앞에 섰다."잠시만 시간 좀 내주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은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서늘했다.어젯밤의 파혼 선언 이후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었다.당연히 좋은 표정일 리 없었다.소은은 개의치 않은 척 급히 스케치 사본들을 내밀었다."이룸 그룹 차기 프로젝트. 저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 대신 이걸 드릴게요."태현이 스케치 사본들을 내려다보았다.받아들지는 않았다."디자이너 S의 작품입니다."소은이 말을 이었다."프로젝트에 저를 넣어주시면, 디자이너 S의 스케치를 쓸 수 있게 해드릴게요. 물론 원본도 드릴 수 있어요."로비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한태풍이 파일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가 태현을 살폈다.태현은 움직이지 않았다.그저 소은을 바라보고 있었다.소은은 그의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화가 난 건지, 어이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냥 무심한 건지.'...많이 화난 건가.'소은은 속으로 눈치를 살피면서도 표정은 굳게 유지했다.여기서 먼저 흔들리면 안 됐다.태현의 눈이 가늘어졌다.그는 소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몸이 그 모양인데, 여기까지 온 겁니까."소은의 눈동자가 동그래진다.화가 담긴 말은 아니었다.어이없다는 말도 아니었다.그냥, 사실을 짚는 목소리였다.그런데 그게 오히려 더 뼈를 때렸다.부은 얼굴은 마스크로 잘 가렸다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 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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