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hat ng Kabanata ng 다른 이름으로 그를 다시 만났다: Kabanata 31 - Kabanata 40

79 Kabanata

31화_파혼한 사이의 거래

태현은 소은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가엔 여전히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어젯밤 응급실에 실려 갔던 여자가다음 날 아침, 이 꼴로 이룸 로비에 나타났다.손에는 스케치 사본 몇 장을 꼭 끌어안은 채.태현은 잠시 침묵하더니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린다."팀장실로 가죠."비서 한태풍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인다.어제 파혼을 선언한 상대방이 아니었던가.하지만 태현은 이미 앞서 걷고 있었다.그제야 태풍이 소은을 이끈다."백 팀장님, 따라오세요."소은은 잠깐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리고 스케치 사본을 가방 안에 깊숙이 밀어 넣은 뒤 발걸음을 뗐다.***이룸 그룹 27층 팀장실.소은이 소파에 앉자 태현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그 사이 한태풍이 커피를 두 잔 내려놓고 조용히 나갔다.두 사람만 남겨진 방 안에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았다.소은이 먼저 가방에서 스케치 사본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펼쳤다.태현의 시선이 그것에 머물렀다.손을 뻗지는 않았지만,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무심한 척했지만 소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공모전 수상작 기준으로 골라서 가져왔어요. 미공개 스케치도 섞여 있어요.""...미공개 작품까지."태현이 천천히 손을 뻗어 가장 위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섬세하게 그어진 드레이프 라인, 소재의 질감까지 연필 한 자루로 살려낸 필선들.그의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이며 도면 구석구석을 읽어 내려갔다."디자이너 S를 어디서 알게 됐습니까."예상한 질문이었다.하지만 막상 그 눈이 자신을 향하자, 소은의 심장이 조용히 쿵 하고 내려앉았다."아는 사람이에요.""아는 사람."태현이 한 글자씩 받아 읊었다.곱씹는 듯한 그 어조가 탐탁지 않다는 뜻인지, 아니면 더 캐묻겠다는 뜻인지 읽기 어려웠다."가까운 사이입니까.""가까운 편이죠.""이름은."소은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그건 알려드릴 수 없어요."잠시 침묵."S가 원하는 게 아니니까.""그 사람이 익명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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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_파혼했는데 새아가라니

"태현아!"소은의 어깨가 움찔하며 경직됐다.이남국 회장이 문 앞에 서 있었다.활짝 열린 문 너머로 한태풍이 당황해서 허리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회장님, 팀장님은 지금 미팅 중이신데ㅡ""알아, 알아. 잠깐이면 돼."이남국은 태풍의 만류를 깃털처럼 가볍게 무시하며 팀장실 안으로 들어섰다.그러다 소파에 앉아 있는 소은을 발견하고는 눈이 동그래졌다."오, 이게 누구야. 우리 새아가 아냐?""...네?""아버지."태현의 목소리가 경고 신호를 내보냈지만, 이남국은 이미 소파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소은은 서류를 내려놓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아, 안녕하세요.""어, 어, 앉아요 앉아. 내가 괜히 놀라게했네. 이 녀석이 파혼했다길래 설마 싶었더니만, 직접 찾아온 거야?""그게...""마음 고쳐먹은 거지? 잘 생각했어요. 우리 태현이가 좀 무뚝뚝해서 그렇지, 속은 여린 놈이야.""아버지. 오해하지 마세요. 비즈니스 협의차 오신 겁니다."태현이 낮고 단호하게 끼어들었다.이남국이 태현을 보았다가 소은을 보았다가, 이내 씨익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아이고, 비즈니스는 무슨. 얼굴 보러 온 거잖아.""아버지.""알았어, 알았어. 방해하지 않을게."이남국은 물러서면서도 소은을 향해 다시 한번 반갑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얼굴이 좀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아픈 건 아니지?"소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태현이 입을 연다."한 비서, 어서 회장님 모시고 나가.""아이, 진짜. 알았다고."이남국은 문을 나서면서도 못내 아쉬운 듯 소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문이 닫혔다.정적.소은은 뒤를 향한 채 잠시 굳어 있다가, 천천히 앞으로 돌아섰다.태현은 이마를 짚으며 짧은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죄송합니다.""...아니에요."소은은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으며 서류를 챙겨 들었다.심장이 아직 제멋대로 뛰고 있었다.이남국 회장의 '새아가'라는 호칭이 귓가에 자꾸만 맴돌았다.상황이 지독하게 복잡했고지독하게 죄스러웠고지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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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_흔한 애칭

공장 내부는 소음으로 가득했다.직기들이 반복적인 리듬으로 움직였고, 실의 장력과 소재의 밀도가 눈으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소은은 마스크를 내리고 원단을 집중해서 살핀다.잡아당겼다가 놓으며 복원력을 확인하고, 빛에 비춰 광택 방향을 살폈다."이건 경사 밀도가 너무 높아요. 드레이프가 안 살겠는데."옆에 서 있던 공장 담당자가 태현을 바라봤다.태현이 고개로 신호를 보내자, 담당자가 소은에게 상세한 사양 설명을 시작했다.소은은 질문을 이어갔다.위사 종류, 가공 방식, 수축률.담당자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소은의 다음 질문이 튀어나왔다.태현은 그 옆에 나란히 서서 공장 내부를 바라보며 간간이 의견을 덧붙였다."S가 원하는 드레이프감이 나오려면 경위사 비율을 조정해야 할 것 같은데요.""저희도 그 부분을 조율 중입니다. 어느 정도 비율이 기준이 되겠습니까."소은은 잠깐 원단을 손 위에 올려 무게를 가늠하더니 말했다."7대 3 정도면 어떨까요. 대신 위사는 좀 더 가늘게 가는 게 낫겠어요. 드레이프는 살리면서 내구성도 잡아야 하니까.""확인해 보겠습니다."담당자가 메모를 하며 다음 구역으로 안내했다.소은과 태현이 나란히 걸었다.태현이 낮게 말했다."정확하게 봤습니다.""경험이 많으니까요.""많이 봤습니까.""어릴 때부터요."무심결에 나온 말이었다.소은은 바로 말꼬리를 죽이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태현은 그 찰나를 붙잡지 않았다.그냥 같이 걸었다.다음 구역으로 넘어가면서 소은은 원단 샘플 보관실 앞에서 발을 멈췄다."여기 어느 것까지 열람 가능해요?"태현이 담당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3번 섹션까지는 보여드려도 됩니다."담당자가 문을 열었다.소은이 안으로 들어서며 선반에 가지런히 꽂힌 샘플들을 살폈다."생각보다 많이 준비됐네요.""이 프로젝트에 걸고 있는 게 적지 않아서요."소은이 샘플 하나를 꺼내 들었다.보드라운 원단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이 프로젝트가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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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_20년 전의 흔적

오전 10시, 이룸 공장.공장 상황을 다시 확인하러 온 태현이 김승아와 눈이 마주쳤다.승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공장 직원으로서의 형식적인 인사였다.태현은 그것을 받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개를 끄덕이지도,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그냥 바라보았다.'뭘 봐.'승아는 속으로 조용히 내뱉었다.그를 알아보지 못한 척했다.20년이라는 세월이 그 사이에 끼어 있었으니까.그러나 그 눈매는 여전했다.입술 끝을 내리누르는 버릇도.무언가를 계산할 때 눈빛이 잠깐 가라앉는 것도.안 변했다, 이 사람.승아는 속으로 짧게 내뱉었다.보육원에서 달리기라면 항상 1등이던 아이였다.은아, 은아 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코찔찔이 남자애.소은이보다 커보이겠다고 항상 까치발을 들어야 했던.그 녀석이 이룸 그룹 팀장이 됐다.그리고 지금, 소은과 비즈니스 관계로 얽힌.승아는 쓴웃음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승아가 돌아서는 순간, 머리카락이 목 뒤의 화상 흉터를 스치며 흩어졌다.***차는 이룸 그룹 본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태현은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정확히는 창밖을 보는 척하고 있었다.시선은 밖을 향해 있었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한태풍이 조수석에서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팀장님, 초안 서류 검토가 끝나면 계약 날인 일정을 잡으면 되겠습니까.""백 팀장님한테 연락해서 확인해요.""알겠습니다."한태풍이 잠깐 멈추었다가 덧붙였다."그리고 팀장님, 아까 공장 검수 파트 직원 중에 백 팀장님과 아는 분이 계신 것 같던데요."태현의 시선이 처음으로 창밖에서 거두어졌다."무슨 파트라고 했습니까.""원단 검수입니다."차 안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태현은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은아.'그 목소리가 귓가에서 자꾸만 재생되었다.그 애칭이 심장 안 어딘가에 박힌 것처럼 떨어지질 않았다.태현은 미간을 잠깐 찌푸렸다가 폈다.그리고 차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지 않으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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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_사진 속의 원장님

이룸이 패션 부문에 처음 발을 들인 해의 기록이었다.사진으로 인화된 드레스 디자인들이 낡은 비닐 속에 보존되어 있었다.비닐이 살짝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지만, 안에 든 사진들은 선명했다.태현은 사진을 하나씩 꺼내어 책상 위에 펼쳤다.의상들은 이상했다.이상하다는 표현이 정확한 건지 몰랐다.오히려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인위적인 구조가 없는데 실루엣이 완성된 의상들.소재의 흐름을 억지로 누르지 않고 그대로 살려낸 라인.분명 공을 들여 만들었는데도,공을 들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 옷들.그리고 어딘가.굉장히 익숙한 느낌이었다.태현은 미간을 좁히며 사진들을 다시 천천히 살폈다.드레이프의 각도, 어깨선의 떨어지는 방식, 허리를 기준으로 아래가 퍼지는 흐름.하나하나 보면 그냥 잘 만들어진 의상이었다.그런데 전체를 놓고 보면.오늘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의 필선과 닮아 있었다.소은이 가져온 디자이너 S의 스케치.태현은 사진에서 눈을 거두어 파일 뒤에 첨부된 디자이너 정보 시트를 꺼냈다.디자이너 윤세화.이룸에서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이룸의 공식 역사에서 단 한 번도 거론된 적 없는 이름.그런데 이 시트에는 분명히 이룸 초창기 메인 협력 디자이너로 기록되어 있었다.게다가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태현은 인터폰을 눌렀다."한 비서."문이 곧장 열렸다."네, 팀장님.""윤세화라는 디자이너 알아요?"태현은 시트를 들어 보였다.한태풍이 다가와 살폈다.그의 눈이 잠깐 멈추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이룸의 공식 디자인 팀 명단에는 없는 것 같은데요.""공식 명단에 없는 게 이상한 거지. 여기 보면 초창기 메인이었다고 나와 있어. 외부 협력 계약 형식이긴 했지만."한태풍이 고개를 갸웃했다."이쪽 초기 기록들이 워낙 정리가 안 된 편이라서요. 아카이브가 디지털로 전환되기 전 시기라 원본 서류 파악이 쉽지 않습니다만...""이룸의 초기 기록이라면 아버지가 아실 수도 있겠는데."태현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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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_어둠 속의 발소리

밤이 깊었다.도심 변두리, 낡은 상가 건물 지하의 공방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좁은 공간에서, 소은은 혼자 일하고 있었다.오늘은 이상하게 손이 잘 움직였다.머릿속이 어지러울수록 손이 움직이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하지만 늘 그랬다.공장에서 잠깐 만졌던 원단의 감촉이 손끝에 아직 남아 있었다.그 느낌이 있는 동안 선이 잘 나왔다.소은은 의상의 어깨선을 다듬으며 낮게 혼잣말을 뱉었다."경위사 비율 7대 3. 위사는 가늘게."공장에서 담당자에게 말했던 것을 자신도 모르게 되뇌었다.그 원단으로 이 실루엣을 만든다면.지금 연필 끝에서 흘러내리는 이 선을 그 감촉에 얹는다면.연필이 빠르게 움직였다.손가락으로 뺨을 콕 찌르는 버릇이 나왔다.소은은 그것도 모르는 채 선에만 집중했다.한참 후, 스케치북을 들어 작업을 확인했다.마음에 들었다.오랜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손이 멈추지 않은 날이었다.어딘가 막혀 있던 것이 뚫린 것 같은 느낌.그 느낌은 늘 좋았다.그 순간만큼은 백가은이라는 이름은 없었다.오직 종이 위의 선만 있었다.소은은 스케치북을 덮고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손목도 뻐근했다.몇 시간이나 됐는지 시계를 확인했다.시간은 새벽 1시를 넘어 있었다.소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또 이렇게 됐다.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이 공간에 들어오면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승아였다.[야, 자냐]소은이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안 자][이 시간에 왜 안 자. 어디야][공방][그럴 줄 알았어. 밥은?]소은은 잠깐 생각했다.오후에 주스 한 잔 마신 것밖에 없었다.그녀는 손끝으로 화면을 두드리다 결국 핸드폰을 뒤집어 엎어놓았다.[야, 답장 안해? 너 또 안먹었지?]소은이 피식 웃었다.승아는 어차피 알 테니까.들려올 잔소리를 미리 차단했다.연필을 다시 들었다가, 이내 내려놓았다.오늘은 여기까지가 맞았다.더 하면 내일 손이 말을 안 들을 것이다.소은은 작업대 위를 정리했다.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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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_넘을 수 없는 선

오전11시, 이룸 그룹 로비.자동문이 열렸다.한태풍이 서류를 끼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걷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멈췄다.새하얀 롱코트.선글라스.로비 공기가 순간 멈춘 것처럼 조용해졌다.느린 걸음으로 로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여자를 보고, 안내 데스크 직원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방문 목적이 어떻게 되십니까."여자가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었다."나 누군지 알죠? 디자인부서 이태현 팀장님 보러 왔어요."루루미였다.한태풍이 낮게 한숨을 삼켰다."루루미 씨."루루미가 한태풍을 보고 웃었다.팽팽하게 당겨진 웃음이었다."어머, 태풍 씨. 마침 잘 만났네요. 오빠 위에 있죠?""팀장님은 지금 미팅 중이라—""걱정말아요. 기다릴게요."끊었다.단호하게.루루미는 이미 소파 쪽으로 걷고 있었다.하얀 코트 자락이 대리석 바닥을 스치며 나부꼈다.한태풍은 안내 데스크로 가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루루미 씨가 오셨습니다."짧은 정적.태현은 펜을 내려놓았다.[내려가지.]루루미는 앉아 있지 않았다.로비 유리창 앞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발소리가 들리자 몸을 돌렸다.태현이었다."오빠."목소리가 달라졌다.아까의 당당함은 어디 갔는지.가늘고 떨렸다.그녀의 손목에 하얀 팔찌가 빛을 내며 찰랑인다."오빠, 보고 싶었어.""연락하고 오라고 했잖아.""연락하면 못 오게 할 거잖아."태현이 주위를 한번 훑었다.직원들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쏠려 있었다.그는 낮게 말했다."자리 옮겨."***건물 뒤편 화단.인적이 드문 쪽이었다.루루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결혼 진짜 해? 그 백가은이라는 사람이랑?""그 얘기 하러 온 거야?""오빠가 말을 안 해주니까—""루미야.""난 궁금하단 말이야. 오빠가 누구랑 결혼하는지. 내가 그것도 못 물어봐?""......"태현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루루미의 두 손이 코트 소매 안에서 떨고 있었다.그 손끝을 태현은 놓치지 않았다.부채감이었다.화마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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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_서로 다른 시선

태현은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루루미가 소매 끝을 잡으려다 손이 허공을 갈랐다."오빠."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넓은 등.루루미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백가은.그 이름이 혀끝에서 날카롭게 부서졌다.절대 안 돼.절대로.***오후 2시, 백제 그룹 회장실.백동우는 창가 소파에 앉아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오후 두 시에 술이었다.좋은 신호가 아니었다.소은은 문 근처에 선 채 더 들어가지 않았다."이태현이랑 계약 진행한다지?""네.""그 건방진 이룸 그룹 후계자를.""......""잘 꼬셨어."소은의 눈이 가늘어졌다."계약입니다."백동우가 소은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네 아비도 그랬지."소은의 입술이 굳었다."사람 마음 파먹는 건 타고났어. 네 엄마도 당했지않나.""아버지.""제 아비를 닮았나보구나. 유혹하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해."백동우가 비릿하게 웃었다."그 재주로 이태현도 잘 잡아둬. 그 결혼, 혹시 모르잖아?"소은은 대답하지 않았다."나가봐."문을 닫는 순간까지, 등 뒤에서 시선이 피부를 긁어내는 것 같았다.복도로 나온 소은이 멈췄다.닫힌 문을 바라보다가.이를 악물다가.다시 앞으로 걸었다.발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오후 4시.태현에게서 문자가 온다.[오늘 오후 5시 반. 주소 보냅니다.]소은은 화면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도심 외곽.오래된 전시 공간.재킷을 집어 들었다.***건물은 골목 안쪽에 있었다.한때 창고였을 것 같은 낡은 외벽.거칠게 드러난 시멘트 위로 세월이 얼룩처럼 내려앉아 있었다.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소은의 발걸음이 멈췄다.높은 천장.위에서 쏟아지는 자연광.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공간.소은의 눈이 안을 멍하니 훑는다."생각보다 반응이 좋군요."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소은은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놀랐을 뿐이에요.""놀랐을 때 표정치고는 꽤 오래가네요."소은이 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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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_닮아 있는 두 사람의 선

"여기, 3미터짜리 행거를 저쪽 벽면에 붙이면 하중이 버텨질까요?"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소은이 물었다.태현이 가까이 다가왔다.그녀의 시선을 따라 벽면을 보았다."보강 작업이 필요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아요.""러닝웨이를 이쪽 대각선 방향으로 내면."소은이 발끝으로 선을 그었다."저 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정면으로 닿겠는데."혼잣말처럼 뱉은 말이었다."오후 3시에서 4시 사이가 조명이 가장 좋겠군요."태현이 낮게 받았다.소은이 멈췄다.고개를 들어 태현을 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부딪혔다.소은이 먼저 눈을 거뒀다."공간은 마음에 들어요.""그거면 됐습니다."불필요한 말을 얹지 않는 사람이었다.소은은 그 점이 거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편했다.말을 지어낼 필요가 없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공간을 걸었다.말이 없었다.그런데 어색하지 않았다.서로의 걸음이 묘하게 같은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오래된 창틀 앞에 멈춰 선 소은이 바깥을 내다보았다.낡은 골목.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이 공간 안에서 보니 그것도 하나의 프레임이 됐다."...어머니를 기억합니까."소은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태현이 말없이 옆에 섰다."윤세화 씨 말입니다."심장이 조용히 한 박자 내려앉았다."아버지께 들었습니다. 이룸의 초창기 협력 디자이너였다고.""...알아요.""저희 아버지와 친하셨다고 하더군요.""그건 몰랐네요.""혹시 그거 압니까. 디자이너 S의 스케치랑,"잠시 침묵."그 분 스케치가 닮았어요."소은이 굳었다.태현은 그녀의 반응을 확인하지 않았다.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필선이요. 선을 시작하는 위치까지. 구조보다 흐름을 먼저 잡는 방식.""...우연이겠죠.""그런가요."태현이 깔끔하게 잘랐다.침묵이 내려앉았다."계약 날인은 다음 주 수요일로 잡을까요.""좋습니다."출구 쪽으로 나란히 걸었다.빛이 쏟아지는 각도가 조금씩 달라졌다.태현의 시선이 그 빛 안에 선 소은의 옆얼굴 위에 잠깐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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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_잊지 못한 버릇

이룸 그룹 디자인 작업실.소은은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의상 틀을 잡는 중이었다.담당자가 나간 뒤로 혼자였다.계약 초안 검토 전에 잠깐만 하려던 게, 어느새 손이 멈추질 않고 있었다.공방이 아닌 이룸 그룹의 작업실이었지만 편안했다.낯선 공간인데도 손은 익숙하게 움직였다.몸이 먼저 기억하는 것이었다.연필을 쥐는 각도, 종이에 닿는 힘의 정도.어디서든 그리기 시작하면 주변이 지워졌다.사각사각.종이 위로 연필 자국이 그려진다.허리선.어깨.드레이프의 흐름.소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선을 이었다.그리고.손가락이 뺨을 콕 찌르는 순간이었다.집중할 때 나오는 오래된 버릇.소은은 몰랐다.언제나 그랬듯.그때였다.손목이 잡혔다.거칠게."앗!"연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탁.소은이 고개를 들었다.태현이었다.그의 얼굴이 이상했다.표정이 없는데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무언가를 억지로 멈추려다 실패한 사람처럼.손목을 잡은 손도, 미세하게 떨렸다.이럴리가 없다는 듯."깜짝이야...! 이 팀장님?"태현의 눈이 천천히 내려갔다.소은의 손목.그것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아."짧은 탄식이었다.그가 손을 놓았다.빠르게.마치 잡아선 안되는 걸 잡은 사람처럼."미안합니다."소은은 풀려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빨개지지 않았다.아프지도 않았다.그런데 심장이 이상하게 뛰고 있었다.잡혔던 자리가 아직 따뜻한 것 같았다."왜 그러세요?"따지는 게 아니었다.진짜로 물었다.태현은 대답하지 않고 창가로 걸어갔다.등이 굳어 있었다.넥타이를 매만지는 손이 평소보다 느렸다."아무것도 아닙니다.""아무것도 아닌게 아니던데."창밖을 보는 채로, 태현이 입을 다물었다.소은은 바닥에 떨어진 연필을 주워 들었다.소은은 더 말하지 않았다.연필을 작업대에 내려놓고 스케치를 덮었다.태현이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소파에 앉는 대신, 작업대 옆에 섰다.덮인 스케치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집중하면 그렇게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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