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른 이름으로 그를 다시 만났다: Chapter 61 - Chapter 70

93 Chapters

61화_너 왜 모른 척해

복도의 형광등 불빛은 차가웠다.침묵이었다.길고, 무거운.복도 끝 어딘가에서 에어컨 소리가 낮게 깔렸다.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태현의 눈이 동석의 얼굴을 읽었다.조각들이 맞춰지고 있었다.천천히, 거스를 수 없이.맞춰지면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그리고."​...너."말투가 달라졌다.존댓말이 사라졌다.태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그냥 툭, 떨어져 나왔다.오래된 말버릇처럼.잊고 있었는데 몸이 먼저 기억해낸 것처럼."너 왜 모른 척해."낮게 깔린 목소리였다.물음이 아니었다.확인이었다.이미 알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사람에게 던지는 말.태현의 눈빛에 처음으로 날이 섰다.냉소가 아니었다.차갑지도 않았다.오히려 뜨거웠다.오래 묻혀 있던 것이 겨우 올라온 사람처럼.비서를 대하는 이태현 팀장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동석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태현의 손이 다시금 동석의 팔을 붙잡았다.피하면 다 끝난다는 걸 알았다.그런데 마주 보고 있으면 더 끝날 것 같았다.진퇴양난이었다.동석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돌렸다.뭐라도 말해야 했다.지금 당장."​...팀장님,"동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목소리를 일부러 낮췄다.사무적으로.비서로.지금 이 복도에서 쓸 수 있는 유일한 가면이었다."무슨 말씀이신지 잘...""......"태현이 침묵으로 그 말을 받았다.낮고 건조하게.믿지 않는다는 뜻이 그 침묵 안에 다 들어 있었다.동석이 마른침을 삼켰다."저는 그냥—""됐어."태현이 말을 잘랐다.짧게.동석의 팔목을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힘이 빠진 게 아니었다.더 이상 붙잡는 게 의미 없다는 걸 안 사람처럼.두 사람이 복도에 서 있었다."​...가."태현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목소리가 낮고 무거웠다.그게 다였다.더 붙잡지 않았다.더 캐묻지 않았다.동석은 한 박자 망설이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그리고 걸음을 뗐다.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이 떨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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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_양자로 들어온 사람

이룸 그룹 27층.비서실 창가.한태풍은 태현이 팔목을 잡고 놓는 순간부터, 동석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전부 봤다.비서실 유리문 너머로.들리지 않게.보이지 않는 척하며.태현이 복도 한가운데 서서 구겨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 손이 보였다.흰 손가락 마디가 종이를 꽉 쥐고 있었다.손등에 힘줄이 돋을 정도로.한태풍은 인터폰에서 손을 뗐다.들어가지 않기로 했다.저 안에 들어가서 "팀장님, 다음 일정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태현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움직일 것이었다.그걸 알았다.그래서 들어가지 않았다.한태풍은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봤다.5년이었다.태현이 이룸 그룹에 처음 들어온 건 한태풍이 스물여덟 살이던 해였다.공채로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됐을 때 팀장실에 불려가서 "앞으로 제 비서 맡아요" 한 마디를 들었다.이유도 없었고, 선택권도 없었다.처음엔 솔직히 싫었다.이태현 팀장은 까다로웠다.서류 정렬 방향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다시 했고, 보고는 결론부터 말해야 했으며, 쓸데없는 말을 붙이면 그냥 무시했다.감정이 없는 건지 숨기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그런데 5년을 붙어 있다 보니 보이기 시작했다.이태현은 감정이 없는 게 아니었다.감정을 쓰지 않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다.어릴 때부터.아주 일찍부터.양자로 들어온 사람이었다.이룸 그룹 회장의 아들이 아니라는 걸 그룹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그래서 더 완벽해야 했던 것이었다.흠 하나 없이.빈틈 하나 없이.그렇게 살아온 사람.한태풍은 처음으로 태현이 흔들리는 걸 본 게 루루미였다.3년 전.루루미가 처음 나타났을 때.보육원 화재 생존자라며 이남국 회장을 통해 태현에게 연결된 그날.태현이 루루미를 처음 봤을 때 표정이 이상했다.굳어 있었다.다르게.당황한 것도 아니었고, 반가운 것도 아니었다.뭔가를 찾다가 엉뚱한 걸 발견한 사람처럼.뭔지 모르겠지만 기대했던 것과 다른, 그런 얼굴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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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_다 익을 때까지

냉정했다.업무적이었다.그런데 챙겼다.백가은 팀장이 늦게까지 일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편의점 봉투를 들고 사라졌고, 그녀의 뺨에 뭔가 생기면 뒷조사를 했고, 알레르기로 쓰러졌다는 소식에 하루 종일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한태풍은 모른 척했다.팀장이 챙기는 사람이 생겼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일이었다.이유가 뭔지는 몰라도.그리고 오늘.복도에서 태현이 김동석의 팔목을 잡던 그 순간.한태풍은 그런 태현의 표정을 처음 보았다.루루미를 처음 봤을 때의 그 얼굴과는 다른.그리고 방금 반말로 던진 한 마디.너 왜 모른 척해.한태풍은 모니터 화면을 껐다.팀장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찾지 못하기를 바라고 있었는지, 찾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어느 쪽이든.오늘 이후로는 달라질 것이었다.한태풍은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실 문 쪽으로 걸었다.노크했다."팀장님, 오후 일정 확인하시겠습니까."안에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들어와요."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그게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백제 그룹 회장 집무실.저녁 무렵.백동우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전화를 받고 있었다.창밖으로 도심의 불빛이 한층씩 켜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그는 그 풍경을 보지 않았다.시선은 책상 위 서류에 고정된 채로, 입꼬리만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그래서 가져왔다는 거지."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백동우는 짧게 끊었다."디자이너 S라."혀끝에서 그 이름을 굴렸다.천천히.음미하듯.피식,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비웃음이었다.자신을 향한 건지, 상대를 향한 건지, 아니면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향한 건지.구분이 없는 웃음이었다."그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백동우는 소파 팔걸이에 손을 얹으며 천장을 올려다봤다.그의 눈이 가늘어졌다.어미 닮은 것.손재주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빼닮았다.그게 백동우에게는 오래된 불쾌감이었다.없애려다 남겨뒀고, 그러다 보니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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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_그럴 리가 없었다

태현이 집으로 들어오며 TV를 켰다.바깥 소리가 멀어지고, TV 소리만 낮게 깔린 거실에 태현이 혼자 남겨졌다.그는 한동안 테이블 위 서류를 내려다봤다.구겨진 모서리.손가락 자국이 남은 종이.언제 이렇게 됐는지 기억이 없었다.태현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눈을 감았다.'살아 있습니까.'오늘 자신이 던진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이름도 부르지 않았다.부를 수 없었다.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실낱같은 희망조차 사라져 버릴까 봐.김동석.보육원 출신.백제 그룹 비서.그리고 소매 안쪽의 흉터.태현은 천장을 바라봤다.동석이 왜 숨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숨겨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그럴 리가.'태현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말이 안 됐다.20년이었다.공식 사망 처리된 사람이었다.이름도, 기록도.전부 그날 불길 속에 묻혔다.그걸 태현도 알고 있었다.수없이 확인했으니까.찾으려 했으니까.그런데.태현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백가은 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땅콩 알레르기.백가은의 프로필엔 없는 항목.그런데 그 여자는 쓰러졌다.뺨을 찌르는 습관.연필을 쥐는 방식.그리고 그 눈.태현은 이마를 짚었다.그 눈이 문제였다.뭔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집중할 때, 주변이 전부 지워지는 것처럼 보이는.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자기 하나만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그 눈을 태현은 딱 한 사람한테서만 본 적이 있었다.불러도 들리지 않아서.결국 반대쪽 뺨을 콕 찌르면 그제야 고개를 들던.그럴 리가 없다.태현이 눈을 떴다.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이성이 먼저 제동을 걸었다.백가은은 백동우 회장의 친딸이었다.백제 그룹의 후계자.그 집안에서 태어나 그 이름을 달고 자란 사람이었다.그리고 소은은.오래된 기억이 올라왔다.부원장님의 손을 꼭 잡고 다니던 아이.원장님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하던 아이.그 보육원에서 태어나 자란, 원장님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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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_달라진 시선

다음 날 오후.이룸 그룹 27층 회의실.소은이 자료를 펼치며 자리에 앉았다.맞은편에 태현이 앉아 있었다.한태풍이 옆에서 노트북을 열었다.평소와 다름없는 배치였다.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그런데.소은이 서류를 넘기다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태현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이상한 건 아니었다.회의 중에 상대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런데 달랐다.뭔가가 달랐다."원단 샘플 최종 확인은 이번 주 금요일까지 가능합니다.""알겠습니다."태현의 대답은 짧았다.소은이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며 말을 이었다."패턴 수정 건은 저희 쪽 작업실에서 처리하고, 완성본은 다음 주 초에 드릴게요.""백 팀장님."태현이 불렀다.소은이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태현이 소은을 보고 있었다.서류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소은 자체를 보는 눈이었다.읽으려는 눈.뭔가를 확인하려는 눈.소은의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났다."​...네.""이번 프로젝트 마감, 무리하게 잡은 거 아닙니까."뜬금없는 말이었다.소은이 잠깐 멈추다가 시선을 내렸다."괜찮아요.""얼굴이 좀 피곤해 보여서요."소은이 그를 바라봤다.태현이 소은을 바라봤다.한태풍이 노트북 화면을 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소은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괜찮아요. 계속 하죠."회의가 이어졌다.그 이후로도 태현의 시선이 느껴지는 순간이 몇 번 더 있었다.소은이 자료를 짚을 때, 메모를 할 때, 고개를 드는 타이밍마다.정확하게.매번.모른 척했다.모른 척할 수 있었다.백가은으로 20년을 살아온 사람이었다.시선 하나쯤 모른 척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그런데 오늘은 유독, 그 시선이 피부에 닿는 것 같았다.***회의가 끝났다.한태풍이 먼저 나갔다.소은이 서류를 정리하며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오늘 마감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룸 작업실에서 하실겁니까."태현이 물었다."​네.""몇 시까지."소은이 그를 봤다."왜요.""같이 저녁 먹을까 해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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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_놓고 싶지 않은 손

이룸 그룹 25층 작업실.저녁 여섯 시.낮에 미팅을 마치고 나서 소은이 작업실로 넘어온 건 오후 세 시였다.원단 배치 확인에, 수정 패턴 검토에,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다.담당자들은 퇴근했다.작업실엔 소은 혼자였다.작업대 위에 서류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도면.원단 샘플.색상 칩.소은은 그것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메모를 달았다.그때, 문이 열렸다.소은이 고개를 들었다.태현이었다.코트를 벗어 들고 있었다.소은이 잠깐 그를 보다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또 야근입니까.""이 팀장님도 하시잖아요.""그렇긴 하죠."태현이 자연스럽게 소파에 코트를 걸었다.소은은 내색하지 않고 메모를 이어 달았다.두 사람이 각자 일을 했다.태현은 소파 쪽 테이블에서 서류를 펼쳤다.소은은 작업대에서 패턴 도면을 들여다봤다.말이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같은 공간에서, 같은 방향을 보며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공기였다.소은은 그 공기가 편하다는 걸 느끼면서, 편하다고 느끼는 스스로가 마음에 걸렸다.이 사람 곁에 있는 게 편해지면 안 됐다.그런데 손이 멈추지 않았다.연필이 종이 위를 달렸다.중간에 한 번, 소은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태현은 서류를 보고 있었다.미간에 힘이 들어간 채로, 펜을 쥔 손이 여백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집중하면 저런 얼굴이 되는구나.소은은 그 생각을 하다가 바로 시선을 내렸다.밥 먹자고 했다가 거절당하고, 그래도 여기 와서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이상했다.무엇이 이상한지 정확히 짚을 수가 없어서, 더 이상했다.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소은이 작업대 끝에 쌓아둔 서류 뭉치를 당겼다.높이 쌓여 있었다.한 번에 너무 많이 당긴 모양이었다.서류가 와르르 쏟아졌다."아—"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태현도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바닥으로 손을 뻗으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같은 서류에 손이 닿았다.닿는 순간.소은의 손 위로 태현의 손이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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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_잠든 얼굴 앞에서

손을 놓은 건 태현이었다.천천히.힘을 빼듯이.무언가를 내려놓는 것처럼."...미안합니다."낮고 짧은 말이었다.소은은 대답하지 않았다.주워야 할 종이들은 여전히 작업대 아래 흩어져 있었다.소은이 먼저 허리를 숙였다.태현도 말없이 그 옆에서 몇 장을 주웠다.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그게 다였다.태현은 소파로 돌아갔다.소은은 작업대 앞에 앉았다.각자의 자리로.각자의 침묵으로.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공조기 소리.형광등이 낮게 우는 소리.이따금 도면을 넘기는 바스락 소리.소은은 연필을 쥐었다.손 위에 겹쳐졌던 감촉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 처음엔 선 긋는 방향을 두 번이나 틀렸다.알아채지 못한 척하며 지우고 다시 그었다.누군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태연한 척하는 자신이 우스웠다.창밖으로 도심의 불빛이 낮게 깔려 있었다.소은은 연필 끝을 종이에 댄 채로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그냥 놓고 싶지 않았다.그 생각이 문제였다.지금 자신이 품고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20년 동안 백가은으로 살면서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선이, 이 사람 앞에서만 자꾸 흐릿해졌다.가까워지면 안 됐다.그걸 알면서도 손을 빼지 않았다.소은은 연필을 내려놓았다.작업이 되지 않았다.그리고 두 팔을 작업대 위에 포개듯 얹고 그 위에 머리를 묻었다.잠깐만.딱 잠깐만.***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태현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아니, 보는 척을 하고 있었다.펜을 쥔 손이 한 줄도 진행하지 못한 채로 같은 자리에 멈춰 있었다.그는 작업대 쪽을 보지 않으면서도 소은의 기척을 쫓고 있었다.연필 소리.종이 넘기는 소리.가끔 낮게 새어 나오는 숨소리.그 소리들이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았다.태현이 고개를 들었다.소은이 작업대에 엎드려 있었다.두 팔을 포개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채로.어깨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잠이 든 것이었다.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소파 위에 걸어둔 코트를 집어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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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_목 뒤의 흉터

뺨의 선.눈을 감으면 저렇게 되는구나.집중할 때의 얼굴과는 다른, 아무것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얼굴.긴장이 풀린 자리에 남는 것들이 있었다.태현은 그것을 들여다봤다.캐묻듯 보는 것도 아니었다.그냥 봤다.오래.눈가.미간.조금 벌어진 입술.태현은 조용히 손을 뒤로 물렸다.그리고 작업대 옆 의자를 당겨 앉았다.그냥 앉아 있었다.소은의 숨소리가 들렸다.고르고, 낮고, 규칙적인.낯선 공간에서 이렇게 잠들 수 있다는 게 태현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다.아니면 그냥 너무 지친 것이거나.태현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그 짧은 사이에 오래된 이미지 하나가 지나갔다.먼지 냄새 나는 어두운 방.책상 앞에 엎드려 잠든 작은 아이.태현은 고개를 작게 저으며 한숨을 내쉰다."...백 팀장님."낮게 불렀다.소은의 어깨가 움직였다.눈이 천천히 떠졌다.처음에는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사람처럼 시선이 흐릿했다.그러다 눈앞에 있는 것들이 하나씩 정렬되는 것처럼, 작업대가 보이고, 도면이 보이고, 그리고 태현이 보였다.소은이 굳었다.태현이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거리가 가까웠다.어깨 위에는 코트가 올려져 있었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소은의 얼굴이 미세하게 달아올랐다.잠들었던 것도, 코트를 덮어준 것도, 지금 이 거리도.한 박자 뒤에 전부 인식되는 것들이었다."...저 얼마나 잤어요?"자신이 한 말인데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태현이 손목시계를 봤다."한 시간쯤.""한 시간이요?"소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코트가 흘러내렸다.태현이 그것을 조용히 받아들었다.소은은 도면을 확인하고, 메모를 확인하고, 몇 시인지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태현은 코트를 접으며 그것을 지켜봤다."...고마워요."소은이 작게 말했다.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그냥 코트를 팔에 걸쳤다.두 사람이 작업실을 나왔다.태현이 먼저 걸었다.소은은 그 뒷모습을 한 박자 바라봤다가 따라 걸었다.태현은 엘리베이터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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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_문밖의 인기척

태현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검수 구역을 지나쳐 다음 공정으로 이동했다.담당자가 뒤에서 설명을 이어갔다.태현은 들었다.그러면서 조금 전 지나친 테이블 쪽을 한 번 더 돌아봤다.승아는 자신이 바라보는 걸 알아챘는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검수가 끝난 뒤였다.담당자가 다음 구역으로 먼저 이동했다.한태풍도 잠깐 전화를 받으러 한 발 물러선 상태였다.태현이 돌아섰다.승아가 테이블 앞에 혼자 서 있었다.태현이 가까이 오는 걸 눈치채고 어깨가 굳는 게 보였다.그래도 고개를 들었다.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의 차분함이었다.태현이 승아를 내려다봤다."나 알아봤죠."단도직입이었다.승아의 입술이 잠깐 움직였다가 멈췄다."...잘 모르겠는데요."거짓말이었다.태현은 알았다.승아도 알았다.태현이 시선을 들었다.원단 검수 테이블 너머로 창밖의 하늘이 보였다.그는 잠깐 그쪽을 바라봤다."그렇군요."그 말로 끝냈다.더 묻지 않겠다는 것처럼.믿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었다.그냥 그렇게 두겠다는 것처럼.물론, 내게 숨기는 이유는 찾아야겠지만.승아가 태현을 올려다봤다.그 눈에 당황함과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태현은 그 눈과 잠깐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내렸다."수고하세요."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걸어가는 뒷모습을 승아가 바라봤다.숨을 내쉬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손이 원단 위에서 멈춰 있었다.태현의 뒷모습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승아는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손을 내렸다.모른 척해줬다.알면서.승아는 원단 끝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알면서 모른 척해주는 사람과, 들켜도 모른 척해야 하는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 선명했다."아, 은이한테 혼나겠네..."***소은의 공방.저녁 여덟 시.공방은 조용했다.조명을 작업대 쪽으로만 켜두고, 나머지는 어두운 채였다.소은은 원단을 잡아당기며 핀을 꽂았다.보육원 아이들한테 입힐 봄 자켓 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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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_위험한 방문자

소은의 공방.저녁 여덟 시.소은이 작업하던 디자이너 S의 스케치들을 보이지 않게 덮어두고 문으로 향했다.소은을 뒤로 보낸 동석이 문을 열었다.루루미였다.새하얀 코트.손목에 찰랑이는 팔찌.문 앞에 서서 공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낯선 공간을 처음 보는 눈이 아니었다.이미 와본 사람의 눈이었다.동석의 눈이 싸늘해졌다."오지 말라고 했는데."목소리에 날이 있었다.부드럽게 포장하지 않은 경고였다.루루미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들어가도 돼요?"이미 들어오면서 묻는 말이었다.루루미가 공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동석이 반 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 동선을 막았다.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공기가 당겨졌다."동석아."소은이 낮게 불렀다.동석이 소은을 봤다.소은이 눈짓으로 뒤로 물러서라는 신호를 보냈다.동석의 턱이 굳었다.그래도 반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눈은 루루미에게서 떼지 않으면서.루루미가 공방 안을 둘러봤다.그것들을 훑는 눈이, 무언가를 찾는 것 같기도 했고이미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 같기도 했다.동석은 그 동선을 좇으며 팔짱을 꼈다.루루미가 어디에 손을 뻗는지, 어디에 시선을 두는지.전부 보고 있었다.루루미의 시선이 멈춘 곳이 있었다.작업대 한쪽 구석.소은이 지난번 도면 사본을 끼워뒀던 파일함 자리.지금은 비어 있었다.루루미가 그 자리를 보다가 소은을 봤다.피식.웃었다.팽팽하게 당겨진 웃음이 아니었다.생각보다 가벼운, 그래서 오히려 더 읽기 어려운 웃음이었다."혹시."루루미가 입을 열었다.공방 안이 조용해졌다.동석의 어깨가 굳었다.소은은 표정을 움직이지 않았다."그쪽도 푸른 보육원 출신이에요?"정적이 내려앉았다.소은은 루루미를 바라봤다.루루미도 소은을 바라봤다.그 눈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모르는지.소은은 빠르게 읽으려 했다.읽히지 않았다."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소은의 목소리는 평탄했다.흔들림이 없었다.20년 동안 갈고닦은 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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