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불 속에 나를 두고 간 사람: Chapter 1 - Chapter 10

23 Chapters

제1화

안수연은 멍하니 반쯤 열린 병실 문 안을 들여다봤다.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 환자복을 입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침대 머리맡에 느긋하게 기댄 하재윤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사람들에게 얼굴이 살짝 가려져 있었지만, 오뚝한 콧날과 깊은 눈썹뼈가 어렴풋이 보였다.도무지 중상을 입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안수연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신이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얘들아, 어디 한번 세어 보자. 이번이 몇 번째 복수지?”“첫 번째는 재윤이 선물하려던 목걸이를 잃어버렸다고 속였지. 그랬더니 눈보라 속을 밤새도록 뒤지고 다니더라. 열이 40도까지 올랐는데도 쉬려고 하지 않았어.”“두 번째는 재윤이가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한다고 속였어. 그러자 밤새 계단 999개를 기어 올라가서 평안 부적인지 뭔지를 받아 왔잖아.”“그리고 재윤이는 그 부적을 진작에 개한테 던져 줬고.”“세 번째는 수연이 부정행위를 했다고 누명을 씌워서 졸업까지 망쳐 놨잖아.”“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웃겨 죽겠어.”“이번에 수혈하도록 속인 게 벌써 96번째인가? 세 번만 더 속이면 우리 복수도 끝이네.”“와, 정말 쉽지 않았어. 재윤이도 몇 년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잖아.”“어쩔 수 없지. 누가 눈치도 없이 단희의 무용 대회 우승을 가로채서 밤새 울게 만들래? 단희가 재윤의 첫사랑인데, 걔를 울린 사람을 재윤이 가만둘 리가 있겠어?”“그래서 일부러 걔랑 사귀면서 99번 복수하기로 한 거잖아. 사실 아쉽긴 해. 복수가 끝나면 재윤이 걔를 차 버릴 텐데, 우리도 더는 재미 볼 일이 없을 거잖아.”...그 말에 안수연의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렸고,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가슴이 칼로 찢기는 것처럼 아팠다. 안수연은 가슴팍을 꽉 움켜쥐고 허리를 굽힌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숨이 막힐 만큼 고통스러웠고, 방금 들은 말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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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곧바로 강하선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잘됐다, 수연아. 그럼 우리도 수속 밟을게. 아, 수속을 마친 뒤에는 번복할 수 없는 거야.]안수연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손끝이 가늘게 떨렸지만, 이내 단호하게 대답했다.“번복하지 않을게요.”강하선은 전화를 끊으려다가 문득 생각난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데 네 남자친구는? 오랫동안 쫓아다닐 정도로 네가 좋아했잖아.]‘남자친구’라는 말이 가시처럼 안수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안수연의 머릿속에 병실에서 들었던 날카로운 웃음소리와, 침대에 느긋하게 기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하재윤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그리고 거리낌 없이 자신을 조롱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차례로 스쳤다.송단희를 위해 3년이나 자신과 연애하며 복수를 해왔다는 하재윤의 잔인함에 안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꽉 움켜쥔 듯 고통스러워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이제 안 좋아해요.”그 말을 하는 안수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놀라울 만큼 담담했다.“다시는 안 좋아할 거예요.”전화를 끊은 안수연은 길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찬바람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져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저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집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익숙한 공기가 안수연을 감쌌다.안수연은 현관에 서서 익숙한 거실 풍경을 바라보다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이곳은 하재윤의 집이었다.하재윤이 안수연의 고백을 받아 준 날 열쇠를 건네주었던 바로 그 집이었다.그날 하재윤은 문가에 기댄 채 무심하게 말했다.“동거하자.”그때 안수연은 부끄러우면서도 기뻤다.동거가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라고 믿었다.언젠가는 이곳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남몰래 상상하기까지 했다.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그저 자신의 환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같이 살자고 한 것도 그저 복수를 더 편하게 하려는 속셈이었겠지.’‘송단희를 얼마나 좋아했기에 안수연에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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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안수연이 거절할 틈도 없이, 하재윤은 여자의 손을 잡아끌면서 차에 태웠다.차는 고급 프라이빗 클럽 앞에 멈춰 섰다. 하재윤은 차에서 내린 뒤 안수연이 앉아 있는 조수석으로 돌아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안수연은 그런 하재윤을 한 번 바라봤지만 이내 말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클럽 안으로 들어선 순간, 안수연의 시선은 익숙한 한 사람에게 머물렀다.바로 송단희였다.흰색 원피스를 입은 송단희는 긴 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린 채, 사람들 한가운데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몇몇 친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송단희는 하재윤의 소꿉친구였다.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지만, 안수연이 하재윤과 연애한 3년 동안 송단희와 마주칠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그래서 안수연은 하재윤이 송단희를 좋아하고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손을 잡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송단희의 눈에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의미심장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그 눈빛은 송단희 역시 99번의 복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듯했다.안수연은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했다.하재윤도 송단희의 존재를 알아차린 모양인지, 손가락이 순간 굳어지면서 이내 안수연의 손을 놓았다.그러면서 몸을 살짝 돌려 안수연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화 좀 하고 올게. 먼저 놀고 있어, 금방 돌아올게.”안수연은 그 자리에 선 채 돌아서서 멀어지는 하재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차갑게 식어 갔다.안수연이 무슨 말도 꺼내기 전에 송단희가 우아한 걸음으로 하재윤의 뒤를 따라갔다.그렇게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더니 클럽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서 뭘 하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안수연은 하재윤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였다.“수연아, 이리 와서 술 한잔해!”다들 웃으며 안수연에게 술잔을 내밀자 안수연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나 술 못 마셔.”“분위기 깨지 말고 한잔해. 딱 한 잔인데 뭐 어때?”그러나 다들 안수연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술잔을 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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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그 메시지들은 곧바로 모두 삭제되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휴대폰을 쥔 안수연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가슴속은 얼음물에 흠뻑 젖은 듯 차갑게 식었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물에 빠진 일부터 열이 나고 약을 먹은 것까지, 전부 치밀하게 계획한 복수였던 것이었다.하재윤이 안수연에게 먹인 그 약도 결국 안수연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재윤이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 왜 집에 없어?]나지막한 하재윤의 목소리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다급함이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그러자 안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열이 너무 심해서 병원에 왔어.”전화 너머는 잠시 조용해졌다가, 곧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로 갈게.]“안 와도 돼.”안수연은 하재윤의 말을 끊었다.“수액 맞고 하루만 더 입원해 있으면 퇴원할 수 있어. 요즘 많이 바빠 보이던데, 네 일이나 봐.”하재윤은 잠시 동안 말이 없더니 문득 물었다.[휴대폰 봤어?]그제야 안수연은 하재윤이 왜 전화했는지 알 것 같았다.혹시라도 그 메시지들을 봤을까 봐 확인하려는 것이었다.그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안수연은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아니? 의사 선생님이 열이 심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하는데, 휴대폰을 들여다볼 틈이 어디 있겠어?”전화 너머가 다시 조용해졌다.하재윤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내가 있잖아, 너한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그 감언이설에 안수연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마음은 싸늘하게 식었다.‘네가 내 곁에 있다고? 지금까지 내가 겪은 모든 고통이 바로 너에게서 비롯된 것인데?’퇴원한 안수연이 병원을 막 나와 택시를 잡으려던 순간, 갑자기 뒤에서 한 무리가 달려들었다.그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이 안수연의 뒤에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안수연은 저항할 틈도 없이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 안수연은 어두컴컴한 호텔방에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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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쥐 죽은 듯 고요한 병실은 마치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했다.방금까지 사건의 주범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던 하재윤도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그리고 머릿속에서는 한마디가 계속 맴돌았다.‘설마 지난 몇 년 동안 연기하다가 진짜로 안수연을 좋아하게 된 거야?’‘내가 안수연을 좋아한다고? 그럴 리 없어.’하재윤은 재빨리 그 생각을 부정했다.마음속에 피어오른 알 수 없는 감정까지 완전히 지워 버릴 수 있을 것처럼, 거듭 그 생각을 밀어냈다.하재윤이 줄곧 좋아한 사람은 송단희였다.‘안수연이 뭐라고... 그저 복수를 위해 접근한 도구에 불과한데.’그런데 안수연에게 조금의 감정도 없다면, 그 불량배들이 안수연을 짓누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왜 그렇게 분노했을까?사실 예전에 송단희가 다른 남자에게 그런 모욕을 당했을 때에도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한 적은 없었다.하재윤의 말에 병실 안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친구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중 한 명이 하재윤의 어깨를 두드리며 가볍게 말했다.“재윤아, 진작 그렇게 말하지, 우리 깜짝 놀랐잖아.”“진짜 안수연을 좋아하게 된 줄 알았네, 복수 게임하다가 너까지 마음을 빼앗기면 손해잖아. 단희가 알면 더 서럽게 울겠네.”그러나 하재윤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그저 가슴속에서 꿈틀대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나는 평생 걔를 좋아할 일 없어.”본인들이 듣고 싶은 대답을 들은 친구들은 그제야 안심한 듯 웃으며 말했다.“됐어, 됐어, 쟤도 곧 깨어날 테니 우린 이만 갈게.”모두 떠나고 나서야 하재윤은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가서 잠들어 있는 안수연을 내려다봤다.안수연의 얼굴은 창백했고 미간은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아무래도 편히 잠들지 못하는 듯했다.하재윤은 무의식 중에 손을 뻗어 안수연의 뺨을 어루만지려고 했다. 하지만 손끝이 뺨에 닿는 순간, 마치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곧 하재윤은 몸을 돌려 창가로 걸어가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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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하재윤의 기세에 겁을 먹은 인턴은 황급히 사과한 뒤 병실을 나갔다.곧바로 차가운 얼굴로 안수연에게 다가온 하재윤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앞으로 저런 사람을 만나면 남자친구가 있다고 바로 말해. 그 말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하재윤을 빤히 바라보던 안수연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평생 나를 좋아할 일은 없다고 해 놓고, 갑자기 자기 여자인 것처럼 소유욕을 드러내는 이 상황은 대체 뭐지?’퇴원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하재윤은 갑자기 안수연에게 동창 모임에 함께 가자고 했다.안수연은 하재윤이 예전에는 이런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이번에 먼저 나서서 가자고 하는 데는 분명 다른 목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예상대로 모임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안수연의 눈에 송단희가 들어왔다.하재윤은 겉으로는 송단희에게 냉담하고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이며, 별다른 교류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하지만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마음은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모임이 한창 진행되던 중 안수연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다. 돌아와 보니 사람들은 진실게임을 하고 있었다.송단희가 게임에서 지는 바람에 사적인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이었는지 꽤나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고 했다.그때 하재윤이 갑자기 카드를 낚아채며 차갑게 말했다.“벌칙은 내가 대신 받을게.”그 카드에는 이런 질문이 적혀 있었다.[성적으로 생각하는 이상형은 누구인가요? 그 사람 이름의 이니셜을 말해 주세요.]꽤나 수위가 높은 질문에 사람들은 신이 나서 소리쳤다.“질문이 꽤 그렇긴 한데, 쟤한테는 엄청 쉽겠지!”“여자친구도 있으니까 당연히 여자친구겠지!”그러자 하재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SDH.”그 세 초성을 듣자 안수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SDH, 송단희네.’안수연은 더는 그 자리에 있기 힘든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곧 그것을 나온 안수연은 하재윤에게 심플하게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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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왜 또 안 된다는 거야? 재윤아? 너 이 복수 빨리 끝내고 싶어 했잖아?][사람 목숨이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할게! 수연이 도저히 못 버티겠다는 그 순간에 문을 열어 주면 되잖아.]그러나 하재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단호했다.“안 돼, 위험 부담이 있어. 걔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도 안 돼.”그러자 전화 너머에서 누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아니, 재윤아? 오늘 네가 단희를 두고 수연이를 쫓아갔다는 얘기를 들었어.][그러는 바람에 단희는 밤새 울었어. 네가 한참을 달래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잖아.][걔가 괜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우리가 바로 99번째 복수 방법을 의논한 건데, 이거 안 된다 저거 안 된다고 하면 어쩌자는 거야?][네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잊었어? 얼른 수연이랑 헤어지고 단희 곁으로 돌아가. 그게 네가 줄곧 바라던 거잖아?]하재윤의 숨소리가 갑자기 거칠어졌다.뭔가 반박하려는 듯했지만, 바로 그때 전화 너머에서 송단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재윤아, 방금 너희가 나눈 이야기 전부 들었어.][지금 다시 물을게, 나는 반드시 이 방법으로 안수연에게 복수해야겠어. 이에 대해서 동의해? 안 해?]하재윤이 묵묵부답으로 있자, 곧 송단희의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한참 만에 하재윤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동의할게,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고 나서야 송단희는 울음을 그치고 해맑게 웃었다.그리고 친구들도 신이 나서 외쳤다.[잘 생각했어! 나 진짜 그날만 기다릴게!]하재윤은 몇 번이고 당부했다.“근데 절대 사고가 나서는 안 돼.”어둠 속에 서 있던 안수연은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꽉 움쥔 듯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안수연은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서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기념일 당일, 하재윤은 계획대로 안수연에게 말했다.“수연아, 오늘 깜짝 선물을 준비했는데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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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사람들이 하늘을 뒤덮은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흥분에 찬 비명을 지르면서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 댔다.“하하하! 99번째 복수도 성공했네!”“우리 재윤이도 드디어 사랑에 눈먼 안수연이라는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겠네!”“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무너져서 펑펑 우는 추한 모습을 잔뜩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야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구경하게!”...시뻘건 불길이 사람들의 광기 어린 얼굴을 유난히 선명하게 비췄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하재윤은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처음으로 불편한 기분을 느꼈다.문득 헤어지던 순간의 안수연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제야 하재윤은 안수연이 지나치게 침착했던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예전에는 기념일만 되면 안수연이 누구보다 들떠 있었다.장소를 정하는 일부터 그곳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준비하는 일까지, 안수연은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임했다.기념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안수연 혼자 준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하재윤은 처음부터 끝까지 손 하나 까딱할 것도 없었다.사실 애초에 안수연을 좋아하지 않았던 하재윤은 오히려 그게 편했다.심지어는 하재윤은 안수연을 탓하고 싶기까지 했다.안수연이 송단희를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지금 자신과 기념일을 보내는 사람은 안수연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번 기념일에 안수연은 유난히 조용했다. 별장으로 오는 길에도 안수연은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뜬금없이 몇 마디 고백을 한 것 외에는 기념일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을 하나도 묻지 않았다.마치 인형처럼 하재윤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게다가 하재윤이 자리를 비운 지 이렇게 오래되었고 불길도 그토록 오래 타오르고 있는데도, 안수연이 전화 한 통 걸지 않았다는 것이었다.그제야 이상한 점을 깨달은 하재윤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서 화면을 몇 번이고 새로 고쳤다.그러나 아무리 새로 고쳐도 안수연과의 통화 기록이나 메시지창에는 새로운 연락이 하나도 뜨지 않았다.심장이 걷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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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하재윤의 움직임이 멈칫하더니 가냘픈 시신을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그 자리에 우뚝 선 남자의 모습은 마치 조각상과도 같았다.멀리서 구조대원들이 안수연의 시신을 들것에 실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하재윤에게 다가왔다.이윽고 구조대원들은 하재윤 앞에 들것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더니 위로의 말을 전했다.“보호자분,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어요...”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면서 하재윤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남자는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고, 하재윤이 뻗은 손은 갈수록 심하게 떨렸다.몇 번이나 시신을 끌어안으려고 했지만, 좀처럼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결국 하재윤은 구조대원의 도움을 받아서야 안수연의 시신을 품에 꼭 끌어안을 수 있었다.불과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안수연은 하재윤의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눈을 반짝이며 하재윤에게 자신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야기했다.그런데 지금 안수연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하재윤의 품 안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안수연의 차가운 체온이 하재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자, 심장까지 얼어버린 것 같았다“수연아, 인제 그만 장난쳐.”“빨리 눈 떠, 응?”하재윤은 품에 안긴 안수연을 몇 번이고 불렀지만, 안수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하재윤은 개의치 않았다.예전처럼 안수연에게 어리광을 부리듯 자기 얼굴을 안수연의 얼굴에 바짝 가져다 댔다.안수연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과 두꺼운 그을음이 하재윤의 얼굴까지 더럽혔지만, 하재윤은 미간조차 찌푸리지 않았다.그제야 하재윤은 지난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을 스치듯 지나갔다.그동안 하재윤은 안수연에게 숨겨 온 일이 많았다.그중 가장 오래된 비밀은 안수연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하재윤이 안수연을 눈여겨봤다는 사실이었다.그해 신입생 환영회에서 하재윤은 무대 위에서 우아하게 춤추는 안수연에게 한눈에 마음을 빼앗겼다.경쾌한 발걸음과 가볍게 흩날리는 치맛자락, 눈부시게 환한 미소는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났다.하재윤이 넋을 놓고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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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어느새 주변에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하재윤의 친구들은 겁에 질리고 후회하는 표정이었고, 송단희의 눈빛에는 원망과 질투가 가득했다.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이 슬픈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지만, 하재윤은 그 모든 것을 못 본 척했다.하룻밤 사이에 발생한 화재 때문에 서운시 전체를 뒤흔들었다.하씨 집안은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집안에 무자비한 타격을 가했다.그리고 그 집안들의 후계자들은 지금 하재윤에 의해 지하실에 갇힌 채 끊임없이 얻어맞고 있었다.하재윤은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주먹으로 연달아 내리쳤다.“왜 별장 안에 기름통이 있었던 거야?”“왜 너희가 먼저 도망쳤어?”“왜 수연이를 구하지 않았어?”“왜 죽게 내버려뒀냐고!”원래 계획대로라면 안수연을 오랫동안 별장에 가둬 둘 생각은 없었다.게다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안수연을 지킬 사람들까지 따로 배치해 두었다.만약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면, 그 사람들이 곧바로 안수연을 구해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그런데 하필 별장 안에 갑자기 기름통이 여러 개나 더 들어있었다. 고용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 게 두려워서 곧바로 도망쳐버렸다.자기 목숨만 챙기느라 안수연의 존재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었다.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은 이미 하재윤의 주먹에 맞아 입안이 피투성이가 된 채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자신들이 걷잡을 수 없는 화재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용서를 구하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재, 재윤아, 우리가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안에 기름통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 알았더라면 절대 불을 지르지 않았을 거야.”“제발 용서해 줘.”친구들을 포함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십여 명이 무릎을 꿇은 채 하재윤에게 끊임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하지만 하재윤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지극히 차분한 목소리로 가장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용서해 달라고? 그러면 지옥에 가서 죗값을 치러.”사람들의 겁에 질린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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