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버림받은 왕비는 천하제일 의원이었다: Chapter 1 - Chapter 10

14 Chapters

1화

“커헉……!”죽은 정왕비의 몸에서 눈을 뜬 순간, 오세경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던 뜨거운 액체가 터져 나오자 숨이 턱 막혔다. 세경은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었지만, 팔다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고 명치 아래에서는 장기를 비틀어 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마마!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젖은 수건이 입가를 훔쳤고, 작은 손이 등을 두드렸지만 세경은 한동안 제대로 숨을 들이마시지 못했다.겨우 기침이 잦아들었을 때 그녀의 눈앞에 들어온 것은 수술실의 흰 천장이 아니라 검게 그을린 서까래였다. 낡은 휘장 사이로 등잔불이 흔들리고, 창호지 너머에서는 비가 처마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여기가 어디지?분명 조금 전까지 대학병원 외상센터의 수술실에 있었다.서른셋의 외상외과 전문의 오세경은 교통사고 환자의 출혈을 막기 위해 수술대 앞에 서 있었다. 마취과 의사가 혈압이 떨어진다고 외쳤고, 세경은 출혈 부위를 확인하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천장의 조명이 길게 번지더니 귓속을 울리던 기계음이 갑자기 멀어졌다.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그런데 지금 그녀의 몸은 낯설 만큼 가벼우면서도 지독하게 아팠다.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혀에는 쓴 약 냄새가 진득하게 남아 있었다.“마마, 소인이 보이십니까? 복단입니다. 제발 한 번만 말씀해 주세요.”울먹이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열아홉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낡은 치마저고리의 소매는 피로 얼룩져 있었고, 눈물에 젖은 얼굴에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흔적이 역력했다.“여기가…….”입을 여는 순간 세경은 또 한 번 놀랐다. 자신의 것보다 훨씬 가늘고 여린 목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정왕부 별채입니다, 마마.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정왕부. 별채. 마마.그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맞물리는 순간, 누군가 뜨거운 쇠꼬챙이로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붉은 혼례복을 입은 사내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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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하지만 왕야께서 정해진 약은 반드시 드시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약을 거부하시면 또 벌을 내리실지도 모릅니다.”“사람이 피를 토하는데도 약을 강제로 먹이라고 했다고?”복단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의원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소인이 안채에 달려가 몇 번이나 빌었지만, 왕야께서는 마마께서 죄를 피하려고 꾀병을 부리시는 것이라 하셨습니다.”그 순간 담예린의 기억 한 조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차가운 대청이었다. 예린은 양손이 붙잡힌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연분홍 비단옷을 입은 설미주가 정왕의 품에 안겨 있었고, 주경헌은 아내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미주가 마신 차에 독을 넣은 사람이 너라는 증언이 나왔다. 그런데도 끝까지 발뺌할 생각이냐?’‘전하, 소첩은 그 차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한 번만 제대로 조사해 주십시오.’예린은 울면서 결백을 호소했다. 그러나 주경헌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집사에게 별채 유폐를 명했다. 그날 예린은 이미 피를 토하고 있었다. 주경헌도 그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고개를 돌렸다.‘제 잘못을 인정하기 전까지 의원은 들이지 마라.’기억이 끊기자 세경은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신이 들어온 몸의 주인은 이미 죽었다. 누군가 반복해서 위험한 약을 먹였을 가능성이 있었고, 그 여자를 보호해야 할 남편은 오히려 치료받을 길을 막았다.이곳에서는 병보다 사람이 더 위험하겠구나.***같은 시각, 정왕부의 안채에는 한 의원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한 의원은 왕부에서 오랫동안 병자를 돌봐 온 사람이었다. 그는 별채에서 정왕비가 피를 토하고 의식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집사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달려왔다.그러나 별채로 향하는 문 앞에서 호위들에게 가로막혔다. 의원은 결국 정왕이 있는 서재까지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왕야, 왕비 마마께서 피를 토하셨다면 반드시 진맥을 해야 합니다. 원인을 확인하지 못한 채 약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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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왕야…….”설미주였다. 연분홍 비단옷을 입은 그녀는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문턱에 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기침을 두어 번 하자 경헌의 표정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그는 직접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미주는 눈가를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왕비 마마께서 위중하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차라리 그날 차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네가 어찌 잘못이 있겠느냐.”경헌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그 여자가 저지른 죄 때문에 네가 마음 쓸 필요는 없다.”미주는 그의 품에 기대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그래도 왕비 마마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왕야께서 평생 마음에 짐을 지실까 두렵습니다.”경헌의 얼굴이 굳어졌다.“그 여자는 죽지 않는다.”그는 잠시 문밖을 바라보다가 덧붙였다.“설령 죽는다 해도, 그건 제 죄를 끝내 뉘우치지 않은 탓이다.”미주는 경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입술 끝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지만, 경헌은 보지 못했다.***별채로 돌아온 복단은 새로운 탕약을 받아 들고 있었다. 사발에서는 짙고 쓴 냄새가 올라왔다. 약을 가져온 집사는 문밖에 서서 그녀를 재촉했다.“왕야의 명이시다. 왕비 마마께 반드시 약을 올려라.”복단은 사발을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마마께서는 약을 드신 뒤 더 위중해지셨습니다. 오늘만이라도 의원을…….”집사의 얼굴이 굳어졌다.“내가 방금 왕야의 명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약을 거부하시면 네가 벌을 받게 될 것이다.”복단은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그녀는 약사발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세경은 침상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아직 숨을 조금만 길게 쉬어도 명치가 아팠고, 손끝의 저림도 가시지 않았다.복단이 들고 온 사발을 보자 세경의 눈빛이 달라졌다.“또 그 약이야?”“왕야께서 반드시 드시게 하라고…….”복단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세경은 사발을 받아 냄새를 맡는 대신 침상 옆 탁자에 내려놓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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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세경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피부색과 호흡만으로 건강 상태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눈앞의 여자는 심한 복통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진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걱정해 주러 오셨습니까?”세경이 묻자 미주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담예린이라면 이미 울면서 자신을 원망하거나 왕야에게 오해를 풀어 달라고 애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미주는 곧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아무리 마마께서 저를 미워하셔도 저는 마마께서 빨리 나으셨으면 좋겠어요.”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약사발을 발견하고 눈빛을 빛냈다.“그런데 약을 드시지 않으셨네요.”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주는 약사발을 집어 들었다.“이 약은 왕야께서 직접 명하신 것입니다. 마마께서 계속 거부하시면 복단이 벌을 받을 텐데, 어찌 그리 고집을 부리세요?”그녀는 세경의 침상 가까이 다가와 사발을 내밀었다.“제가 도와드릴 테니 어서 드세요.”세경은 사발을 바라보았다. 검은 약물 위로 희미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지금은 먹지 않겠습니다.”미주의 미소가 잠시 굳었다.“왕야의 명을 거역하시겠다는 말씀이세요?”“먹을 때마다 상태가 나빠졌습니다. 원인을 확인하기 전에는 더 먹지 않을 겁니다.”“마마께서는 의원도 아니시면서 약을 판단하실 수 있나요?”미주는 부드럽게 웃었다.“왕야께서 마마의 건강을 위해 내리신 약인데, 어찌 그런 불경한 말씀을 하세요.”그녀는 사발을 복단에게 건넸다.“네가 마마를 모시는 시녀라면 약을 드시게 해야지. 왕야께서 이 일을 아시면 네게도 책임을 물으실 거야.”복단은 사발을 받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미주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몸종 하나가 앞으로 나서 복단의 팔을 붙잡았다.“아씨께서 말씀하시잖아. 얼른 받아.”복단이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세경이 침상 가장자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그만하세요.”미주가 고개를 돌렸다.“마마?”“복단에게 손대지 마세요. 약을 거부한 건 접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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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문이 열리자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다정하게 변했다.“복단아, 마마께서 약을 거부하시니 어쩔 수 없구나. 내가 왕야께 잘 말씀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복단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미주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손길은 다정해 보였지만, 손끝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미주가 떠난 뒤 복단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세경은 그녀를 침상 곁에 앉혔다. 복단의 팔목에는 조금 전 붙잡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아까 그 여자들이 무슨 말을 했니?”복단은 고개를 숙였다.“약을 드시게 하지 않으면 소인을 벌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 어머니가 어디 사시는지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세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복단은 결국 눈물을 흘리며 사흘 전 약방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미주의 몸종이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켰고, 돌아왔을 때 약사발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는 것. 그날부터 정왕비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것.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입을 조심하라는 협박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세경은 이야기를 끊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그녀는 복단이 직접 본 것과 나중에 추측한 것을 구분해 다시 확인했다. 약그릇이 바뀐 정황은 있었지만, 누가 어떤 물질을 넣었는지까지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그럼에도 미주가 직접 찾아와 약을 먹이려 했다는 사실은 심상치 않았다.“약방에서는 약을 내보낼 때 기록을 남기니?”“예. 약재가 귀하니 누가 얼마를 가져갔는지 장부에 적어 둡니다.”“그 장부를 누가 관리하는지도 알아?”“약방을 맡은 하인이 관리합니다. 다만 설 아씨 처소의 시녀들도 자주 드나듭니다.”세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지금은 장부를 건드리지 마. 누군가 우리가 의심한다는 걸 알면 흔적부터 없애려고 할 거야.”복단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우선 네가 본 일을 날짜별로 적어 두자. 약을 가져온 사람, 약사발이 바뀐 시각, 내가 아프기 시작한 때까지 기억나는 대로.”세경은 침상 아래에 보관해 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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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복단은 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정왕이 금한 것은 단순한 출입이 아니었다. 왕비가 살아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까지 막아 버린 것이었다.밤이 깊어지자 별채 안의 등잔불이 희미해졌다. 세경은 침상에 누운 채 자신의 호흡을 의식적으로 가다듬었다. 속이 뒤집히는 듯한 메스꺼움은 여전했지만, 구역질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복단은 곁에 앉아 젖은 수건으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마마, 소인이 아무것도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어린 시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세경은 힘겹게 손을 뻗어 복단의 손등에 얹었다.“네가…… 지금 해 주고 있어.”복단이 눈물을 흘렸다.“소인이 의원만 불러올 수 있었어도…….”“네 잘못이 아니야.”세경은 숨을 고른 뒤 천천히 말을 이었다.“지금부터는 내가 언제 정신을 잃는지, 숨쉬는 게 달라지는지 잘 봐 줘. 물은 억지로 먹이지 말고, 내가 또 토하면 몸을 옆으로 돌려 줘.”복단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경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정리했다.의심스러운 약의 복용을 중단하고, 의식과 호흡의 변화를 살피며, 구토가 잦아들었을 때에만 조금씩 물을 마셔 보았다. 복단에게는 소변을 본 시각과 양도 기억해 두게 했다.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혈압을 확인할 도구도, 체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볼 검사 장비도 없었다. 무엇보다 어떤 독성 물질에 노출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현대 병원이었다면 즉시 진찰과 검사를 받았을 환자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녀의 생사는 정왕의 허락에 달려 있었다.세경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담예린의 기억이 다시 밀려들었다.혼례 첫날밤이었다. 열여덟 살의 예린은 붉은 혼례복을 입고 새신랑을 기다렸다. 밤이 깊도록 경헌은 나타나지 않았고,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온 그는 혼례상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았다.‘나는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 네가 정왕비가 되었다고 해서 내 마음까지 얻었다고 생각하지 마라.’예린은 그 말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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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복단은 밤새 기록한 종이를 펼쳐 보였다. 언제 물을 마셨는지, 몇 차례 구역질했는지, 정신이 흐려진 시각은 없었는지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세경은 그 기록을 천천히 살폈다.“잘했어. 앞으로도 계속 적어 두자.”복단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마마, 이제 정말 괜찮아지시는 겁니까?”“아직 장담할 수는 없어. 다만 처음보다 상태가 나아진 건 분명해.”그때 별채 바깥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집사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울렸다.“왕비 마마, 정왕 전하께서 오셨습니다.”복단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경은 손에 들고 있던 기록을 접어 이불 아래 넣었다.문이 열리자 찬바람과 함께 키 큰 사내가 들어섰다. 검은 비단 장포를 입은 주경헌이었다.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크고 위압적인 남자였다. 짙은 눈썹 아래로 날카로운 눈매가 드리워져 있었고, 차갑게 다문 입술에서는 좀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그는 침상에 기대어 앉은 예린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살아 있었군.”세경은 그 말을 듣고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사흘 만에 찾아온 남편이 아내에게 처음 건네는 말이었다.경헌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낡은 병풍과 차가운 화로,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그 어느 것도 문제 삼지 않았다.“미주가 네 상태를 걱정하더구나. 네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도 의원을 보내 달라고 몇 번이나 청했다.”“그렇습니까?”“그 아이는 네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너를 걱정한다. 그런데 너는 아직도 제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있느냐?”세경은 천천히 이불 위에 손을 올렸다.“제가 설미주에게 독을 넣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경헌의 표정이 굳었다.“아직도 그 말을 하는 것이냐.”“차를 누가 준비했고, 누가 가져왔으며,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확인하셨습니까?”그녀의 목소리는 약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설미주가 독을 먹었다는 사실과 제가 독을 넣었다는 사실은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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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이제 알겠습니다.”경헌이 눈썹을 찌푸렸다.“무엇을 알았다는 것이냐?”세경은 대답하지 않고 복단을 바라보았다.“복단아,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겠니?”복단은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마마…….”“괜찮아. 문밖에 있어 줘.”복단이 물러나자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경헌은 침상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제야 사죄할 생각이 든 것이냐.”그의 목소리에는 당연하다는 듯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담예린은 언제나 그랬다. 화를 내고, 울고, 자신을 원망하다가도 결국에는 돌아왔다. 그는 이번에도 그녀가 용서를 구하리라 생각했다.하지만 세경은 침상 가장자리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지럼증이 밀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경헌이 무심코 손을 뻗으려 했다. 그녀는 그 손이 닿기 전에 몸을 바로 세웠다.“전하. 저를 이곳에서 내보내 주십시오.”경헌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미주에게 사죄하고 네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겠다.”“안채로 돌아가겠다는 뜻이 아닙니다.”경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세경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전하의 아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세경은 숨을 고른 뒤 또렷하게 말했다.“화리를 청합니다.”순간 방 안이 고요해졌다. 경헌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뭐라고?”“저와의 혼인을 끝내 주십시오. 정왕비의 자리도, 전하의 총애도 원하지 않습니다. 더는 전하의 아내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경헌의 눈빛이 서서히 변했다. 처음에는 당혹이었고, 그다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분노였다. 그는 침상 가까이 다가왔다.“네가 감히 내게 화리를 요구해?”세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 몸의 주인은 평생 이 남자의 사랑을 갈구했다. 그러나 자신은 아니었다. 오세경에게 주경헌은 사랑하는 남편이 아니었다. 치료받아야 할 환자를 외면하고, 아내의 목숨을 자신의 권위보다 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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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으아악! 아씨께서 피를 토하십니다!”새벽의 정왕부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설미주의 처소에서 뛰쳐나온 시녀가 뜰 한가운데 주저앉았다. 손에 움켜쥔 수건에는 붉은 얼룩이 선명했고, 뒤따라 나온 몸종 초련은 울먹이며 정왕의 침전으로 달려갔다.소란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주경헌의 명령이 떨어졌다.“담예린을 끌고 와라. 제 발로 걷지 못하면 질질 끌어서라도 데려와.”***별채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호위들이 들이닥쳤을 때 예린은 침상에 기대 앉아 있었다. 밤새 속이 뒤틀려 잠을 이루지 못한 데다 새벽에는 겨우 마신 물마저 토해 낸 터였다. 며칠 전 몸속에 들어온 독의 정체도 알아내지 못했으니, 아직 회복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왕야의 명입니다. 당장 나오십시오.”호위 하나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예린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손목이 뒤로 꺾였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호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침상 아래로 끌어내렸다.“마마께서는 아직 병환 중이십니다!”복단이 달려들어 호위의 팔을 붙잡는 순간, 거친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작은 몸이 침상 모서리에 부딪히며 쓰러졌고,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호위가 머리채를 움켜쥐었다.“천한 계집이 감히 왕야의 명을 막아?”예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그 손 놓아라.”호위가 그녀를 돌아보며 비웃었다.“왕비 마마께서도 죄인으로 불려 가시는 처지입니다.”“네가 지금 누구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구나.”예린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내 죄가 확정되었다는 명이 내려왔느냐? 아니라면 당장 그 손부터 놓아라.”호위는 잠시 망설였다. 예린이 아무리 왕야에게 버림받은 왕비라 해도 정식으로 폐위된 것은 아니었다.그가 마지못해 손을 풀자 복단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예린은 복단의 뺨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떨렸지만, 지금은 분노를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신을 가져오너라.”복단이 급히 신을 집어 들자 호위가 문밖에서 냉소했다.“왕야께서는 지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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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날카로운 충격에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입술 안쪽이 찢어지며 비릿한 맛이 번졌고, 몸이 휘청이는 사이 호위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감히 내게 명령하느냐?”경헌은 피가 배어 나오는 그녀의 입술을 보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네가 미주를 살리지 못하면 오늘 이 자리에서 네 시녀의 목부터 베겠다.”복단이 숨을 삼켰다.예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복단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정한다.”경헌이 호위에게 손짓했다.“저 계집을 마당에 묶어 두어라. 미주가 죽으면 왕비 앞에서 처형할 것이다.”복단이 끌려 나가며 울부짖었다.“마마! 소인은 괜찮으니 제발 몸부터 돌보십시오!”예린이 앞으로 나서려 하자 호위가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경헌은 복단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미주의 침상으로 돌아가 이불을 고쳐 덮어 주었다.예린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한 여자에게는 손수 이불을 덮어 주면서, 다른 여자에게는 목숨을 담보로 협박하는 남자였다.***설미주는 이불 속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전날 밤, 미주는 몸종 초련을 시켜 왕부 의원에게 은자 스무 냥을 건넸다. 왕비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진단서를 받아 내기 위해서였다.초련에게는 복단이 약방에서 가져간 약재의 이름을 알아 오게 했고, 비슷한 꾸러미를 자신의 처소에 숨겨 두도록 지시했다.하지만 미주에게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새벽부터 실제로 배가 뒤틀리고 구토가 시작된 것이다.처음에는 전날 먹은 음식이 맞지 않았으리라 여겼지만, 통증이 심해지자 그녀 역시 두려워졌다. 의원을 불러오게 했으나 그는 제대로 진찰하기도 전에 왕비가 보낸 독성 약재 때문이라고 단정했다.그 말을 들은 경헌이 즉시 예린을 끌고 오라고 명했다.미주는 이불 속에서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고통은 분명 진짜였다. 그러나 이 고통을 누구의 죄로 만들지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었다.그녀는 경헌의 소매를 붙잡았다.“왕야…… 왕비 마마를 너무 꾸짖지 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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