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천하제일 기생은 왕을 버렸다: Chapter 1 - Chapter 10

15 Chapters

1화

“아버지를 죽이지 마십시오! 제발, 제 아버지만은 살려 주십시오!”윤해원의 비명이 처형장을 가로질렀다. 두 군졸이 양팔을 붙들고 있었지만, 해원은 온몸을 비틀며 형틀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신발 한 짝이 벗겨지고 치맛자락이 흙탕물에 끌렸어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형틀 앞에 무릎 꿇린 아버지밖에 보이지 않았다.윤승학은 평생 조정에서 청렴하기로 이름 높았던 신하이자, 해원에게는 세상 누구보다 다정했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 죄인의 흰옷을 입고 목을 숙이고 있었다. 등에는 매질로 찢어진 상처가 선명했고, 손목은 밧줄에 쓸려 피투성이였다. 며칠 사이 몰라보게 수척해진 얼굴에는 모진 고문을 당한 흔적까지 남아 있었다.해원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어젯밤까지도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리라 믿었다. 아무리 무서운 죄를 뒤집어씌웠어도 진실이 밝혀지면 풀려나실 것이고, 임금께서도 언젠가는 억울함을 알아주실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형장 한가운데 놓인 시퍼런 칼날이 그 믿음을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놓으라고 했잖아요! 아버지께 가야 합니다!”해원이 군졸의 손을 물어뜯었다. 비명을 지른 군졸이 손을 놓자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뛰었지만, 몇 걸음도 가지 못해 뒤에서 달려온 다른 군졸에게 허리를 붙잡혔다. 몸이 돌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면서 무릎의 살갗이 찢어졌고, 입술 안쪽이 터져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역적의 계집이 어디서 소란이냐!”군졸이 등을 짓누르자 해원은 얼굴이 흙바닥에 처박힌 채로도 고개를 들려고 버둥거렸다.“역적이 아닙니다! 제 아버지는 역적이 아니십니다! 평생 나라를 위해 사신 분입니다!”구경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불쌍하다며 혀를 찼고, 누군가는 역적의 딸까지 끌고 와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수군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윤승학의 청렴함을 칭송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해원은 이를 악물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아버지!”그 외침에 윤승학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왼쪽 눈가가 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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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윤승학의 말이 기침에 끊겼다. 해원은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애원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가난한 백성에게는 허리를 굽혀도 권세가 앞에서는 뜻을 굽히지 않던 분이, 딸 하나를 살리기 위해 처형장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안 돼요, 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저 때문에 고개 숙이지 마세요.”윤승학은 눈물 어린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우리 해원이…….”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형리가 다가와 어깨를 눌렀다. 해원은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라도 하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손이라도 한 번 잡게 해 달라고 빌었으나 군졸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마침내 형리가 칼을 들어 올렸다.그제야 해원은 정말 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고, 내일 아침에도 그다음 날에도 서재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울고 빌어도 저 칼날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아버지!”윤승학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다.“살아야 한다.”해원은 고개를 저었다.“아버지 없이 어떻게 살아요…….”“살아남거라, 해원아. 반드시…….”그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형조 관리가 손을 들어 올리며 형 집행을 명했기 때문이었다.“안 돼!”해원의 비명이 터지는 순간, 시퍼런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아버지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고 형틀 아래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아버지?”해원은 눈앞의 광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아버지, 일어나세요. 제발 일어나세요.”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어릴 적 잠든 자신을 깨우던 아버지처럼, 조금만 더 부르면 눈을 뜨실 것 같았다. 그러나 형리들은 이미 시신을 치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제야 해원은 목이 찢어지도록 울부짖었다.“아버지이이!”군졸이 붙잡고 있던 팔을 놓치자 해원은 형장으로 기어갔다. 찢어진 무릎이 바닥에 끌리고 손바닥에 돌조각이 박혔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옷자락에 손을 뻗는 일밖에 생각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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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관리는 붓을 멈추지도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누가 네 청을 들어주겠느냐? 네 이름은 이미 관비 명부에 올랐다.”그가 종이를 돌려 보이자 검은 먹으로 적힌 윤해원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에는 더 이상 양반가의 여식이라는 말이 없었고, 관비라는 두 글자만이 그녀의 신분을 대신하고 있었다.“저를 어디로 보내십니까?”“청월각이다.”해원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도성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기루였으며, 높은 벼슬아치들과 부유한 상인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기생들이 노래와 춤으로 손님을 맞는 그곳으로 자신을 보내겠다는 뜻이었다.“싫습니다. 저는 기생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네가 고를 수 있는 처지인 줄 아느냐? 관비가 되었으면 관에서 정하는 대로 살아야지. 아직도 네가 양반집 규수인 줄 아는 게냐?”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관리가 명부를 덮고 군졸에게 데려가라고 명하자, 그녀는 다급히 한 걸음 물러섰다.“아버지의 시신이라도 거두게 해 주십시오. 장례라도 치르게 해 주세요.”“역적의 시신을 네 마음대로 거둘 수는 없다.”“그럼 어디에 모시는지만 알려 주세요. 제발, 그것만이라도…….”관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등을 돌리자 군졸이 해원의 팔을 붙잡았고, 그녀는 아버지를 어디에 두었는지 알려 달라고 거듭 애원했다.“제 아버지입니다. 역적이라 부르셔도 제 아버지입니다. 살아 계실 때 마지막 인사도 못 드렸는데, 돌아가신 뒤에 어디 계신지조차 모르게 하실 겁니까?”마당이 잠시 조용해졌다. 군졸 하나가 난처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지만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고, 결국 해원은 포승줄에 묶인 채 수레로 끌려갔다.그녀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높은 담장 너머에 아버지가 계실 것만 같았지만, 관아의 문은 굳게 닫혔고 그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해원을 실은 수레가 도성의 거리를 지나갔다. 양옆으로 늘어선 가게에서는 장사꾼들이 손님을 불렀고, 아이들은 떡을 사 달라며 어머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자신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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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러나 해원은 기억했다. 그의 얼굴과 목소리, 손가락에 낀 옥가락지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그녀는 천 조각을 소매 안에 깊숙이 넣었다.'아버지, 저는 살아남겠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원하는 대로 살지는 않겠습니다.'***청월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대문 위로 붉은 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열린 창에서는 웃음소리와 거문고 소리가 흘러나왔다. 술에 취한 사내들이 기생들의 어깨를 감싸 안고 드나드는 모습을 보며 해원은 수레에서 내려섰다.아침에는 아버지의 딸이었고, 낮에는 역적의 딸이 되었으며, 저녁에는 관비가 되었다. 이제 밤이 되자 낯선 사내들이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값을 매기고 있었다.“저 아이가 새로 들어온 계집인가?”“얼굴이 참 곱구나. 저런 아이가 어찌 관비가 되었대?”“역적의 딸이라지 않나. 한때 양반집 규수였다니 더 재미있겠군.”사내들의 웃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해원은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등 뒤에서 군졸이 떠밀자 비틀거리며 문턱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낮게 탄식했다.“저런 아이가 이곳에 오다니…….”검은 비단 치마를 입은 여인이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청월각의 행수 옥매향이었다. 그녀는 해원의 얼굴과 피 묻은 소매, 상처투성이 손목을 차례로 살폈다.“네가 윤승학 대감의 딸이더냐?”“그렇습니다.”“이름이 무엇이냐?”“윤해원입니다.”옥매향은 그녀를 오래 바라보았다.“여기서는 그 이름이 너를 지켜 주지 못할 텐데.”해원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곧 고개를 들었다.“그래도 제 이름입니다.”옥매향은 더 묻지 않고 안쪽으로 손짓했다.“우선 들어오너라. 장부부터 정리해야겠다.”해원은 장부라는 말에 시선을 들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었다. 사람의 이름과 돈의 흐름이 적히는 곳이자, 거짓말이 가장 쉽게 숨겨지는 곳이기도 했다.옥매향은 시비에게 두꺼운 장부를 가져오게 한 뒤 해원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윤해원. 열아홉. 관비. 청월각 배속.”붓끝이 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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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낡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낯익었다. 윤승학의 집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체포되던 날 군사들 앞을 가로막고 섰던 어린 규수였다.강무진의 시선이 여인의 손목으로 내려갔다.“저 여인은 누구냐?”옥매향이 황급히 다가왔다.“장군, 어찌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이제 막 들어온 아이입니다.”“이름을 물었다.”옥매향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윤해원이라 합니다.”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강무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해원도 그를 알아보았다.“장군, 제 아버지를 기억하십니까?”강무진의 표정이 굳었다. 해원은 한 걸음 더 다가가 소매 안의 피 묻은 천 조각을 움켜쥐었다.“오늘 돌아가셨습니다. 장군께서 잡아가신 제 아버지가, 오늘 제 눈앞에서 목이 잘려 돌아가셨습니다.”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해원은 강무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그런데 장군께서는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이곳에 계십니까?”강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해원에게는 어떤 변명보다 잔인했다.잠시 후 강무진이 옥매향을 돌아보았다.“이 여인이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적은 장부가 있겠지.”“물론입니다만, 관에서 정식으로 넘긴 아이라…….”“그 장부를 가져와라.”옥매향이 머뭇거리자 강무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주변의 시비들이 숨을 죽였다. 해원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를 끌고 갈 때도 누군가 명령했고, 군사들은 따랐으며, 그 끝에 한 사람이 죽었다.“장부를 보시면 무엇이 달라집니까?”옥매향이 기겁하며 해원을 말리려 했지만 강무진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무슨 뜻이지?”“제가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모르실 분은 아닌 듯해서 여쭈었습니다.”“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을 것이다.”“제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함부로 입을 열면 목숨을 잃는 세상이라고요. 그런데 입을 다물고 계셨어도 죽으셨습니다.”강무진의 눈빛이 굳었다. 옥매향이 해원의 팔을 움켜잡았지만, 해원은 그에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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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윤승학이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자기 딸만은 살려 달라더군.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 역적의 자식이 어디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해원의 손가락이 천 조각을 세게 움켜쥐었다.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걱정했다. 그런데 저 사내는 그 마지막 부탁을 술자리의 우스갯소리로 삼고 있었다.해원은 시비에게 술병 하나만 달라고 청했다.“나리께 술을 올리겠습니다.”“안 됩니다. 행수 어른께서 손님 앞에 나서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그럼 행수 어른을 불러 주십시오.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시비가 당황해하는 사이 방문이 열렸다. 술에 취한 관리가 해원을 발견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오호, 새로 들어온 아이라더니 네가 그 아이냐?”해원은 고개를 숙였다.“술을 올리러 왔습니다.”“들어오너라. 얼굴이나 좀 보자꾸나.”방 안의 사내들이 웃었다. 해원은 문턱을 넘어 술상 앞으로 다가갔다. 상 위에는 기름진 안주와 은으로 만든 술잔이 놓여 있었고, 관리의 곁에는 이미 술을 따르던 기생이 앉아 있었다.“이름이 무엇이냐?”“해원이라 합니다.”“해원이라. 이름도 제법 곱구나.”관리가 손을 뻗어 해원의 뺨을 만지려 하자, 그녀는 술병을 들기 위해 몸을 숙이는 척하며 그 손을 피했다.“나리께 먼저 한 잔 올리겠습니다.”“그래, 그래. 양반집 딸이 따르는 술이라니 오늘 운수가 좋구나.”해원은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맑은 술이 은잔 안으로 흘러드는 동안 소매 끝을 잔 가까이 가져갔고, 손가락 사이에 접어 두었던 작은 천 조각을 술 위로 떨어뜨렸다.피가 말라붙은 천이 술에 닿자 검붉은 얼룩이 천천히 번졌다.“이게 무엇이냐?”관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해원은 술병을 내려놓았다.“오늘 처형장에서 주워 온 것입니다. 제 아버지의 피가 묻은 옷자락입니다.”관리의 눈이 커졌다.“아까 나리께서 제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기억하신다고 하셨지요. 그 말씀을 한 번만 더 들려주시겠습니까?”관리의 손이 술상을 내리쳤다. 잔이 흔들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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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이것이오?”해원이 입을 열었다.“제 아버지의 유품입니다.”강무진의 손이 멈췄다.“그걸 왜 술잔에 넣었지?”“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비웃는 분께서 그날 흘린 피도 기억하셨으면 해서요.”관리의 얼굴이 붉어졌다.“보십시오, 장군! 저 계집이 제정신이 아닙니다!”강무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은잔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장군!”“이곳에서 소란을 더 키우면 형조에도 좋을 것이 없을 테니.”협박처럼 들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관리의 표정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는 해원을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일을 그냥 넘길 줄 아느냐.”관리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방 안에 남아 있던 기생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강무진은 해원에게 말했다.“그 천 조각을 가져가라.”해원은 은잔에서 천을 건져 올렸다. 술에 젖은 천은 손바닥에 차갑게 달라붙었고,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에는 낯선 사내의 술 냄새까지 배어 있었다.그녀는 천을 소매 안에 넣고 일어섰다.“장군께서는 저 사람을 아십니까?”“왜 묻지?”“제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저 사람은 아버지가 죽던 날 처형장에 있었습니다.”강무진은 해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조금 전까지의 분노가 남아 있었지만, 무작정 덤벼들던 기색은 사라져 있었다. 자신이 본 것을 하나씩 확인하는 모습이 오히려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그 일은 네가 파헤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왜입니까?”“네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해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강무진이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가 다시 물었다.“장군께서는 그날 제 아버지를 직접 잡아가셨지요?”그의 걸음이 멈췄다.“그렇다.”해원은 그의 허리에 찬 검을 바라보았다.“그 검도 그날 가지고 오셨습니까?”강무진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검 손잡이 가까이 움직였다.“왜 그런 것을 묻지?”“사랑채 문틀에 부딪혀 칼집이 긁혔습니다.”해원은 칼집 입구에 난 흠집을 가리켰다.“제가 보았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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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형조 관리의 술잔에 피 묻은 천을 넣고, 대장군 앞에서 아버지를 잡아간 일을 따져 물어?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하니?”“있습니다.”“그런데도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이냐?”“살아 있으려면 제가 누구인지 잊어서는 안 되니까요.”옥매향은 헛웃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저었다.“그 고집이 언제까지 너를 지켜 줄지 두고 보자꾸나.”그녀는 시비를 불러 해원을 뒤채의 작은 방으로 데려가게 했다. 방에는 낡은 이불 한 채와 물그릇이 놓여 있었고, 높은 창문 너머에서는 청월각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시비가 상처에 바르라며 약그릇을 내려놓았다.“아씨, 오늘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행수 어른께서도 많이 화나셨어요.”해원은 약그릇을 받아 들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시비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손목의 상처가 욱신거렸고 얻어맞은 뺨은 열이 올랐지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방 안의 고요였다.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밤마다 서재에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날이면 해원은 차를 끓여 들고 갔고, 아버지는 늘 같은 말을 하셨다.'우리 해원이 왔구나.'그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었다.해원은 소매에서 천 조각을 꺼냈다. 술에 젖어 피의 흔적이 번진 천을 무릎 위에 펼쳐 놓고 가장자리를 쓸어 보다가 끝내 고개를 숙였다.“아버지…….”눈물이 천 위에 떨어졌다.해원은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손등으로 입을 막았지만, 어깨가 떨리는 것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오늘 아침까지 살아 계셨던 분이었다. 자신이 밥을 잘 먹었는지 물어보셨고, 찬바람이 부니 겉옷을 챙기라고 하셨다. 그 평범한 말들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면 한 번만 더 아버지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한참 후, 해원은 눈가를 닦았다.그리고 아버지가 가르쳐 준 방식대로 오늘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서 되짚었다.처형장의 관리와 형조에서 왔다는 사내, 붉은 비단 주머니와 옥가락지, 청월각의 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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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강무진은 자신이 내린 명령을 뒤돌아보는 사람이 아니었다.북방의 얼어붙은 성벽 아래에서 수천의 군사를 움직일 때도, 반란군의 퇴로를 끊어야 했을 때도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장수의 판단이 늦어지면 부하들이 죽었고, 한번 내린 명령을 번복하면 전장의 질서가 무너졌다. 서른둘의 나이에 북방군 대장군이 된 뒤에도 그 원칙만큼은 변하지 않았다.그런 그가 오늘 밤에는 장부 한 권을 앞에 두고 같은 이름을 몇 번이나 읽고 있었다.윤해원.열아홉. 역적 윤승학의 딸. 관비로 편입되어 청월각에 배속된 여인.장부에는 그녀가 오늘 이곳에 들어온 것으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름 아래에는 벌써 새 옷 두 벌과 비단 신발, 숙식비와 기예 교육비까지 빼곡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강무진은 붓으로 적힌 숫자를 짚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항목에서 손을 멈췄다.아직 옷도 갈아입지 못한 여자에게, 받지도 않은 물건의 값을 빚으로 지운 셈이었다.그는 장부를 덮으려다 다시 펼쳤다. 윤해원을 청월각에 인계한 관리의 이름이 눈에 걸렸기 때문이다.형조 참의보 민정수.윤승학의 역모 사건에서 증거를 취합했던 자였다.강무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윤승학이 살아 있을 때는 그를 청렴한 선비라 칭송하던 자들이 처형이 끝나자마자 집안의 재산과 사람을 나누어 가졌다. 역적의 딸을 관비로 편입하는 일 자체는 조정의 처분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누가 무엇을 챙겼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밖에 누구 있느냐.”문이 열리자 호위 군사 하나가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부르셨습니까, 장군.”“윤해원을 청월각에 넘긴 관리가 누구인지 확인해라. 처형이 끝난 시각부터 인계가 완료된 시각까지, 누가 그 여인을 데리고 움직였는지도 빠짐없이 적어 오고.”“명을 받들겠습니다.”“관비 인계 명부도 필요하다. 형조에 정식으로 요청해라.”군사가 잠시 망설였다.“장군, 형조에서는 윤승학 사건이 이미 종결되었다며 관련 기록을 봉해 두었습니다.”강무진이 고개를 들었다.“내가 역모 사건 기록을 달라고 했느냐?”“아닙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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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강무진은 장부를 덮었다.“물어볼 것이 있다. 있는 그대로 데려와라.”“알겠습니다.”행수가 물러난 뒤에도 그는 한동안 문을 바라보았다.해원은 아버지를 체포하던 날 그의 칼집에 생긴 흠집까지 기억했다. 형조 관리의 얼굴과 말투를 기억하고, 그자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비웃었다는 이유로 피 묻은 천 조각을 술잔에 떨어뜨렸다.위험한 짓이었다.강무진이 소란을 듣지 못했다면 그 관리가 어디까지 손을 댔을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뺨을 때리고 머리채까지 움켜잡았으니, 해원이 무사히 방을 빠져나왔으리라고 장담하기도 어려웠다.그런데도 강무진은 그녀를 어리석다고만 생각할 수 없었다. 해원은 자신이 본 것을 기억했고, 그 기억을 무기로 삼을 줄 알았다. 다만 세상이 그 무기를 얼마나 쉽게 부러뜨릴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그는 탁자 아래 놓인 봉함 기록을 꺼냈다.붉은 봉인.윤승학이 마지막까지 행방을 밝히지 않았다고 기록된 물건이었다. 형조의 진술서에는 붉은 인장이 찍힌 봉함 문서라는 설명만 남아 있었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강무진은 윤승학을 체포하던 날을 떠올렸다.사랑채 문을 열었을 때 윤승학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군사들이 들이닥쳤는데도 놀라지 않았고, 먼저 딸을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청했다. 강무진은 그 부탁만큼은 들어주었다.그러나 체포 명령은 거두지 않았다.그날의 선택이 지금 눈앞에 놓인 장부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장군, 윤해원을 데려왔습니다.”강무진은 봉함 기록을 뒤집어 놓았다.“들여보내라.”***해원은 여전히 처형장에서 입었던 옷을 입고 있었다.흙이 묻은 치맛자락과 찢어진 소매, 포승줄에 쓸린 손목까지 그대로였다. 창백한 얼굴에는 형조 관리에게 맞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강무진과 눈이 마주치자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는 해원의 뺨을 보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약은 발랐느냐?”해원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탁자 위의 장부와 봉함 문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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