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 기생은 왕을 버렸다

천하제일 기생은 왕을 버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By:  해월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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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의 딸이 된 날, 윤해원은 기루 청월각에 팔렸다. 아버지를 잡아간 대장군 강무진은 그녀를 감시했고, 구원자인 줄 알았던 서이준은 정혼녀를 위해 그녀를 버렸다. 끝내 뱃속의 아이마저 잃은 해원 앞에, 가문을 멸문시킨 왕이 나타났다. “내 여자가 되면 네 죄를 용서하마.” 해원은 피 묻은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왕이 빼앗은 것은 이름과 가족, 사랑만이 아니었다. 살아갈 이유까지 짓밟힌 그녀는 기루로 돌아가 권세가들의 비밀을 모으기 시작한다. 천하의 남자들이 무릎 꿇는 기생이 되어, 마침내 왕을 버리기 위해. 버린 남자는 용서를 빌고, 그녀를 가뒀던 장군은 왕에게 칼을 겨눈다. 그러나 해원이 원하는 것은 남자의 품도 아니다. 왕좌를 무너뜨리고 빼앗긴 이름을 되찾는 것. 청월각에 마지막 연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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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윤해원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형리가 칼을 들어 올리는 순간, 뒤에 서 있던 포졸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땅바닥에 처박았기 때문이다. 이마가 돌바닥에 부딪쳤고, 입안으로 흙이 밀려들었다. 해원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형장 앞에 모인 백성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역적이 마땅한 벌을 받았다고 했고, 누군가는 어린 딸이 불쌍하다며 혀를 찼다. 그 소리들 사이로 형리가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내는 모습이 보였다.

해원은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있던 자리로 기어갔다. 손바닥으로 돌바닥을 짚을 때마다 살갗이 벗겨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곳에는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씀하려 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핏자국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 시신만이라도 거두게 해 주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제발…….”

포졸이 해원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역적의 시신을 누가 함부로 거두라 하더냐.”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장례만 치르게 해 주십시오.”

포졸은 대답 대신 품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관인이 선명하게 찍힌 종이에는 윤승학의 가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관노비로 편입한다는 명령이 적혀 있었다.

해원은 그 글자를 읽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익숙한 글자들이 눈앞에서 흩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포졸이 그녀의 손목에 포승줄을 감았다.

“윤승학의 딸 윤해원. 오늘부로 관비다. 청월각으로 배속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청월각이라니요?”

“기루 이름도 모르느냐?”

해원은 포승줄이 조여드는 것도 잊고 포졸을 바라보았다.

“저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포졸이 비웃었다.

“네 아비도 마지막까지 그 소리만 하더라.”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가 억울하다고 외쳤다는 사실을 이 사내는 알고 있었다.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포졸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걸어라. 해 지기 전에 넘겨야 한다.”

해원은 몇 걸음 끌려가다가 다시 멈췄다. 형장 가장자리에 아버지의 짚신 한 짝이 뒤집힌 채 놓여 있었다. 아침에 집에서 끌려 나가실 때 신었던 것이었다.

“저 신발만이라도 가져가게 해 주십시오.”

포졸은 신발을 한 번 보더니 해원의 등을 밀었다.

“죽은 사람 신발이 네게 무슨 소용이냐.”

해원은 포승줄에 끌려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형장이 담장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아버지의 짚신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

청월각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았다.

대문 앞에는 화려한 가마가 줄지어 서 있었고, 안쪽에서는 가야금 소리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인들은 손님들이 가져온 술독을 나르느라 분주했다.

포졸은 해원을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관에서 보낸 계집이다. 행수를 불러라.”

잠시 후 비단 치마를 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월각의 행수 옥매향이었다.

그녀는 포졸이 내민 문서를 받아 들고 한참 동안 읽었다. 그러고는 해원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살폈다.

“윤승학의 딸?”

옥매향은 해원의 턱을 들어 올렸다. 뺨에 묻은 흙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우더니 입술을 벌려 치아까지 살펴보았다.

해원이 얼굴을 돌리자 옥매향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직도 양반집 규수인 줄 아는 모양이지?”

그녀는 문서를 다시 펼쳤다.

“열아홉. 글을 읽고 거문고를 다룰 줄 안다고 적혀 있군. 오늘 손님들에게 내보내도 되겠어.”

“오늘이라니요?”

“오늘 밤 말이다.”

해원은 숨을 들이켰다.

“저는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못했습니다.”

옥매향은 포졸에게 인수 사실을 확인해 주고 문서를 품에 넣었다. 포졸들이 돌아가자 하인들에게 포승줄을 풀라고 지시했다.

손목이 자유로워진 해원은 얼른 두 손을 맞잡았다. 줄이 파고들었던 자리마다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행수 어른, 하루만 시간을 주십시오.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는 청이라도 다시 올리고 싶습니다.”

옥매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곁에 있던 하인에게 해원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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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윤해원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형리가 칼을 들어 올리는 순간, 뒤에 서 있던 포졸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땅바닥에 처박았기 때문이다. 이마가 돌바닥에 부딪쳤고, 입안으로 흙이 밀려들었다. 해원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형장 앞에 모인 백성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역적이 마땅한 벌을 받았다고 했고, 누군가는 어린 딸이 불쌍하다며 혀를 찼다. 그 소리들 사이로 형리가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내는 모습이 보였다.해원은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있던 자리로 기어갔다. 손바닥으로 돌바닥을 짚을 때마다 살갗이 벗겨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곳에는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씀하려 하셨다.그런데 이제는 핏자국만 남아 있었다.“아버지 시신만이라도 거두게 해 주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제발…….”포졸이 해원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역적의 시신을 누가 함부로 거두라 하더냐.”“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장례만 치르게 해 주십시오.”포졸은 대답 대신 품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관인이 선명하게 찍힌 종이에는 윤승학의 가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관노비로 편입한다는 명령이 적혀 있었다.해원은 그 글자를 읽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익숙한 글자들이 눈앞에서 흩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포졸이 그녀의 손목에 포승줄을 감았다.“윤승학의 딸 윤해원. 오늘부로 관비다. 청월각으로 배속하라는 명이 내려왔다.”“청월각이라니요?”“기루 이름도 모르느냐?”해원은 포승줄이 조여드는 것도 잊고 포졸을 바라보았다.“저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포졸이 비웃었다.“네 아비도 마지막까지 그 소리만 하더라.”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가 억울하다고 외쳤다는 사실을 이 사내는 알고 있었다.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포졸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어서 걸어라. 해 지기 전에 넘겨야 한다.”해원은 몇 걸음 끌려가다가 다시 멈췄다. 형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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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저 아이가 오늘부터 청월각에서 지낼 것이다. 문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해라.”“저는 도망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장례만…….”옥매향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네 아비는 역적이다. 역적의 딸이 상복을 입고 울고불고하는 꼴을 손님들에게 보여 줄 수는 없지.”그녀는 해원의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저 피 묻은 옷부터 벗겨라.”해원은 반사적으로 치마를 움켜쥐었다.“이 옷은 안 됩니다.”옥매향이 손을 내밀자 하녀가 작은 가위를 건넸다.“죽은 아비 생각이 나는 모양이구나.”가위가 치맛자락을 파고들었다.해원은 옷을 붙잡고 뒤로 물러났지만, 옥매향은 놓아주지 않았다. 낡은 비단이 길게 찢어지면서 그녀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안 됩니다!”해원이 찢어진 천을 붙잡자 옥매향은 가위 손잡이로 손등을 내리쳤다. 통증에 손가락이 풀렸다.“네가 지켜야 할 것은 죽은 사람의 옷이 아니라 앞으로 벌어들일 돈이다.”옥매향은 하인들에게 눈짓했다.해원은 두 여인에게 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녀들은 물을 떠 와 얼굴과 팔을 씻겼고, 피 묻은 옷을 벗기려 했다.해원은 마지막까지 치맛자락을 놓지 않았다.하녀 하나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행수 어른께서 보시면 저희까지 벌을 받습니다. 제발 놓으십시오.”해원은 하녀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여인이었다. 손등에는 오래된 흉터가 여러 개 있었고, 손톱 밑에는 물때가 끼어 있었다.해원은 손에 힘을 풀었다.하녀가 옷을 가져가려 하자 그녀는 찢어진 안쪽 자락을 조금 떼어 달라고 청했다.“작은 조각 하나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하녀는 문 쪽을 살피더니 찢어진 천 끝을 조심스럽게 잘라 건넸다.해원은 그것을 손바닥 안에 감추었다.곧 붉은 치마와 연분홍 저고리가 들어왔다. 하녀들은 머리를 빗어 올리고 뺨에 분을 발랐다.거울 앞에 앉은 해원은 낯선 여인을 바라보았다.아침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딸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밤이 되기도 전에 그녀는 다른 여인의 옷을 입고, 모르는 사람들의 술상 앞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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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서른 냥 내겠네.”“나는 쉰 냥.”옥매향 곁에 선 하녀가 장부를 펼쳤다. 붓끝이 종이 위를 오가며 금액을 적었다.해원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가 돈을 불렀는지, 어느 자리에 앉았는지, 옆 사람에게 어떤 호칭으로 불리는지 하나씩 머릿속에 담았다.아버지는 늘 숫자를 외우는 것보다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장부에 적힌 은자 백 냥은 누구의 손에서 나왔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같은 날 두 사람이 같은 액수를 주고받았더라도 그들이 왜 만났는지 알아야 돈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다.해원은 손님들의 얼굴을 살폈다.오른쪽 끝에 앉은 사내는 왼손에 비취 가락지를 끼고 있었다. 술상 앞쪽에 앉은 젊은 관리는 왼쪽 눈썹 아래에 작은 점이 있었고, 그 옆의 사내는 말을 할 때마다 오른쪽 어깨를 움찔거렸다.해원은 그들의 얼굴과 자리를 차례로 기억했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눈과 귀까지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일흔 냥.”금액이 올라가자 옥매향의 웃음이 짙어졌다.해원은 손님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는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면, 그들이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는 동안 자신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백 냥.”연회장 앞줄에서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옥매향이 급히 허리를 숙였다.“조 참의 나리께서 백 냥을 내셨습니다.”손님들 사이에서 감탄이 터졌다.조 참의는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낀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 콧등에는 오래된 흉터가 있었고, 웃을 때마다 윗입술 한쪽이 비뚤어졌다.그는 해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곁에 앉은 기생을 물렸다.“이리 오너라.”해원은 움직이지 않았다.옥매향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나리께서 부르시잖니.”“저는 누구에게 술을 따르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옥매향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손톱으로 해원의 팔 안쪽을 꼬집었다. 옷감 아래로 살이 파고드는 통증이 느껴졌다.“그 입을 다물지 않으면 오늘 밤이 얼마나 길어지는지 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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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역적의 딸이 제 아비를 두둔하는 것이냐?”옥매향이 급히 다가왔다.“나리,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입니다.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물러서시오.”조 참의는 옥매향을 밀어냈다.그는 해원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낮게 웃었다.“네 아비가 마지막까지 살려 달라고 빌었다면 내가 조금은 도와줄 수도 있었을 텐데.”해원은 눈을 들었다.“거짓말하지 마십시오.”조 참의의 얼굴이 굳었다.“뭐라?”“제 아버지는 살려 달라고 빌지 않으셨습니다.”해원은 그날 아침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형리에게 끌려 나오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딸을 발견했을 때 잠시 눈빛이 흔들렸지만, 곧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를 전하려 했다.그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것이 해원에게는 아직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조 참의는 술잔을 들어 그녀의 얼굴 가까이 내밀었다.“그렇다면 네 아비의 명복을 빌어 주마. 역적의 딸이 따르는 술을 마시며 말이지.”그는 일부러 잔을 흔들었다.“어서 따라라.”해원은 술병을 받았다.옥매향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조 참의도 그녀가 굴복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 관리가 웃으며 무언가를 속삭이자 그는 해원의 얼굴을 가리키며 떠들기 시작했다.해원은 천천히 잔에 술을 따랐다.잔이 반쯤 찼을 때 조 참의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만지려 했다. 해원은 몸을 뒤로 뺐고, 술이 잔 가장자리에서 흔들렸다.조 참의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다시 손을 뻗었다.“어디, 양반집 딸의 얼굴을 좀 보자꾸나.”해원은 그의 손이 가까워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술병을 기울였다.차가운 술이 조 참의의 가슴으로 쏟아졌다.비단옷을 타고 흘러내린 술이 무릎을 적셨고, 그가 놀라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술상이 뒤집혔다. 놋그릇이 바닥을 굴렀고, 깨진 잔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연회장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이런 발칙한 계집을 보았나!”조 참의의 손바닥이 해원의 뺨을 후려쳤다.해원은 옆으로 넘어지며 술상 모서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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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가 군관 둘을 거느리고 들어서고 있었다.그는 화려한 연회장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깨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고, 긴 겉옷 아래로는 칼자루가 드러났다. 손님들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옥매향이 황급히 회초리를 내려놓았다.“강 대장군 나리.”북방군 대장군 강무진이었다.조 참의도 젖은 옷자락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대장군께서 어찌 이런 곳까지 오셨습니까? 미리 기별을 주셨더라면 자리를 마련했을 텐데요.”강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뒤집힌 술상과 깨진 잔을 지나 연회장 한가운데로 향했다.하인들에게 팔을 붙잡힌 여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붉게 부어오른 뺨에는 손가락 자국이 선명했고, 입술 한쪽이 터져 있었다. 손바닥에서 떨어진 피가 마룻바닥에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강무진은 그 앞에 멈춰 섰다.“윤승학의 딸인가?”옥매향이 급히 대답했다.“그렇습니다. 오늘 관에서 내려온 아이입니다.”강무진은 해원을 바라보았다.해원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녀는 낯선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짙은 눈썹 아래로 날카로운 눈매가 자리하고 있었고, 오른쪽 관자놀이 가까이에는 오래된 상처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해원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옥매향에게 물었다.“무슨 일로 벌을 주려 했소?”옥매향은 조 참의를 힐끗 보았다.“손님께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술을 쏟고, 나리의 말씀에 대들었습니다.”강무진의 시선이 조 참의에게 옮겨 갔다.조 참의는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제가 백 냥을 내고 첫 접객을 청했는데, 저 계집이 갑자기 술을 끼얹었습니다. 대장군께서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버릇이 보통 없는 아이가 아닙니다.”강무진은 그의 젖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옥매향 곁에 놓인 장부를 집어 들었다.첫 접객 순서와 후원금이 적힌 장부였다.강무진은 가장 아래쪽에 기록된 백 냥이라는 금액을 확인했다.“이백 냥.”옥매향이 눈을 크게 떴다.“예?”강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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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그만.”강무진의 목소리가 두 사람을 멈춰 세웠다.그는 옥매향을 바라보았다.“내가 지불한 것은 오늘 연회의 접객을 중단시키는 돈이오. 저 아이를 다른 손님에게 다시 배정하지 마시오.”옥매향은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분부대로 하겠습니다.”“그리고 매질도 하지 마시오.”조 참의가 불쾌한 얼굴을 했지만, 강무진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옥매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알겠습니다.”해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청월각에서 자신에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옥매향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사내는 돈주머니 하나를 내려놓고 그 명령을 바꾸었다.그렇다고 자신이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대문에는 여전히 하인들이 서 있었고, 관에서 내려온 문서는 옥매향의 품에 들어 있었다. 강무진이 떠나면 해원은 다시 청월각의 관비로 남을 것이었다.강무진은 옥매향에게 별실을 준비하라고 했다.“윤해원과 따로 이야기하겠소.”옥매향이 하녀를 불러 방을 준비시키는 동안 해원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품 안쪽에 감춰 둔 피 묻은 옷 조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그녀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한 번 눌러 보았다.강무진이 몸을 돌렸다.그때 겉옷 아래에 가려져 있던 검이 드러났다.해원의 시선이 검집에 머물렀다.은으로 새긴 구름무늬와 검붉은 매듭, 그리고 은장식 아래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긴 흠집.해원은 숨을 멈췄다.아버지가 체포되던 밤, 사랑채 마당에는 횃불이 가득했다. 군사들이 대문을 부수고 들어왔고, 아버지는 장부를 펼쳐 놓은 채 그들을 맞았다. 해원은 안채에서 뛰어나와 아버지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검을 찬 장수가 길을 막아섰다.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검집이 돌문턱에 부딪쳤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고, 은장식 아래에 긴 흠집이 생겼다.군사들이 아버지를 끌고 가는 동안 해원은 마당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고, 검을 찬 장수는 대문을 나서기 직전 잠시 걸음을 멈췄다.그날은 횃불이 흔들려 장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하지만 검은 기억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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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그는 해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술상 하나가 전부였다.해원은 물러서지 않았다.강무진은 그녀의 손바닥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천을 집어 주지 않았다.“그 이야기는 여기서 할 수 없다.”해원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체포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마지막 조사에 관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그녀는 술상 위에 놓인 천을 밀어 냈다.“제 아버지를 죽음으로 보내신 분께서 이제 와서 제 상처를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강무진의 턱이 굳어졌다.그는 한동안 해원을 바라보다가 옥매향에게 별실을 준비하라고 명했다.“다른 사람은 들이지 마시오.”옥매향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강무진은 군관 하나를 연회장 입구에 세웠다.“내가 부를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군관이 허리를 숙였다.해원은 그 명령을 들으며 연회장 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도망칠 수 없도록 막으려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의 귀를 피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강무진은 다시 해원을 향했다.“따라오너라.”해원은 움직이지 않았다.옥매향이 눈짓으로 재촉했지만 그녀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강무진은 해원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길이 해원의 손목에 남은 포승줄 자국으로 내려갔다. 군사들이 사람을 체포할 때 사용하는 매듭의 흔적이었다.잠시 후 강무진이 군관에게 말했다.“청월각으로 이 아이를 인계한 관원의 이름을 확인해라.”해원은 고개를 들었다.강무진은 옥매향에게도 시선을 돌렸다.“오늘 관에서 내려온 문서를 가져오시오. 이 아이가 이곳에 도착한 시각과 인수한 사람의 이름까지 확인하겠소.”옥매향의 얼굴이 굳었다.“대장군 나리, 관에서 내려온 명령대로 인수했을 뿐입니다.”“그렇다면 확인하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강무진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옥매향은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그녀는 하녀를 불러 관에서 받은 문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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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형조 관리의 술잔에 피 묻은 천을 넣고, 대장군 앞에서 아버지를 잡아간 일을 따져 물어?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하니?”“있습니다.”“그런데도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이냐?”“살아 있으려면 제가 누구인지 잊어서는 안 되니까요.”옥매향은 헛웃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저었다.“그 고집이 언제까지 너를 지켜 줄지 두고 보자꾸나.”그녀는 시비를 불러 해원을 뒤채의 작은 방으로 데려가게 했다. 방에는 낡은 이불 한 채와 물그릇이 놓여 있었고, 높은 창문 너머에서는 청월각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시비가 상처에 바르라며 약그릇을 내려놓았다.“아씨, 오늘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행수 어른께서도 많이 화나셨어요.”해원은 약그릇을 받아 들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시비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손목의 상처가 욱신거렸고 얻어맞은 뺨은 열이 올랐지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방 안의 고요였다.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밤마다 서재에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날이면 해원은 차를 끓여 들고 갔고, 아버지는 늘 같은 말을 하셨다.'우리 해원이 왔구나.'그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었다.해원은 소매에서 천 조각을 꺼냈다. 술에 젖어 피의 흔적이 번진 천을 무릎 위에 펼쳐 놓고 가장자리를 쓸어 보다가 끝내 고개를 숙였다.“아버지…….”눈물이 천 위에 떨어졌다.해원은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손등으로 입을 막았지만, 어깨가 떨리는 것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오늘 아침까지 살아 계셨던 분이었다. 자신이 밥을 잘 먹었는지 물어보셨고, 찬바람이 부니 겉옷을 챙기라고 하셨다. 그 평범한 말들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면 한 번만 더 아버지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한참 후, 해원은 눈가를 닦았다.그리고 아버지가 가르쳐 준 방식대로 오늘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서 되짚었다.처형장의 관리와 형조에서 왔다는 사내, 붉은 비단 주머니와 옥가락지, 청월각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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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강무진은 자신이 내린 명령을 뒤돌아보는 사람이 아니었다.북방의 얼어붙은 성벽 아래에서 수천의 군사를 움직일 때도, 반란군의 퇴로를 끊어야 했을 때도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장수의 판단이 늦어지면 부하들이 죽었고, 한번 내린 명령을 번복하면 전장의 질서가 무너졌다. 서른둘의 나이에 북방군 대장군이 된 뒤에도 그 원칙만큼은 변하지 않았다.그런 그가 오늘 밤에는 장부 한 권을 앞에 두고 같은 이름을 몇 번이나 읽고 있었다.윤해원.열아홉. 역적 윤승학의 딸. 관비로 편입되어 청월각에 배속된 여인.장부에는 그녀가 오늘 이곳에 들어온 것으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름 아래에는 벌써 새 옷 두 벌과 비단 신발, 숙식비와 기예 교육비까지 빼곡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강무진은 붓으로 적힌 숫자를 짚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항목에서 손을 멈췄다.아직 옷도 갈아입지 못한 여자에게, 받지도 않은 물건의 값을 빚으로 지운 셈이었다.그는 장부를 덮으려다 다시 펼쳤다. 윤해원을 청월각에 인계한 관리의 이름이 눈에 걸렸기 때문이다.형조 참의보 민정수.윤승학의 역모 사건에서 증거를 취합했던 자였다.강무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윤승학이 살아 있을 때는 그를 청렴한 선비라 칭송하던 자들이 처형이 끝나자마자 집안의 재산과 사람을 나누어 가졌다. 역적의 딸을 관비로 편입하는 일 자체는 조정의 처분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누가 무엇을 챙겼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밖에 누구 있느냐.”문이 열리자 호위 군사 하나가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부르셨습니까, 장군.”“윤해원을 청월각에 넘긴 관리가 누구인지 확인해라. 처형이 끝난 시각부터 인계가 완료된 시각까지, 누가 그 여인을 데리고 움직였는지도 빠짐없이 적어 오고.”“명을 받들겠습니다.”“관비 인계 명부도 필요하다. 형조에 정식으로 요청해라.”군사가 잠시 망설였다.“장군, 형조에서는 윤승학 사건이 이미 종결되었다며 관련 기록을 봉해 두었습니다.”강무진이 고개를 들었다.“내가 역모 사건 기록을 달라고 했느냐?”“아닙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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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강무진은 장부를 덮었다.“물어볼 것이 있다. 있는 그대로 데려와라.”“알겠습니다.”행수가 물러난 뒤에도 그는 한동안 문을 바라보았다.해원은 아버지를 체포하던 날 그의 칼집에 생긴 흠집까지 기억했다. 형조 관리의 얼굴과 말투를 기억하고, 그자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비웃었다는 이유로 피 묻은 천 조각을 술잔에 떨어뜨렸다.위험한 짓이었다.강무진이 소란을 듣지 못했다면 그 관리가 어디까지 손을 댔을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뺨을 때리고 머리채까지 움켜잡았으니, 해원이 무사히 방을 빠져나왔으리라고 장담하기도 어려웠다.그런데도 강무진은 그녀를 어리석다고만 생각할 수 없었다. 해원은 자신이 본 것을 기억했고, 그 기억을 무기로 삼을 줄 알았다. 다만 세상이 그 무기를 얼마나 쉽게 부러뜨릴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그는 탁자 아래 놓인 봉함 기록을 꺼냈다.붉은 봉인.윤승학이 마지막까지 행방을 밝히지 않았다고 기록된 물건이었다. 형조의 진술서에는 붉은 인장이 찍힌 봉함 문서라는 설명만 남아 있었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강무진은 윤승학을 체포하던 날을 떠올렸다.사랑채 문을 열었을 때 윤승학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군사들이 들이닥쳤는데도 놀라지 않았고, 먼저 딸을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청했다. 강무진은 그 부탁만큼은 들어주었다.그러나 체포 명령은 거두지 않았다.그날의 선택이 지금 눈앞에 놓인 장부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장군, 윤해원을 데려왔습니다.”강무진은 봉함 기록을 뒤집어 놓았다.“들여보내라.”***해원은 여전히 처형장에서 입었던 옷을 입고 있었다.흙이 묻은 치맛자락과 찢어진 소매, 포승줄에 쓸린 손목까지 그대로였다. 창백한 얼굴에는 형조 관리에게 맞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강무진과 눈이 마주치자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는 해원의 뺨을 보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약은 발랐느냐?”해원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탁자 위의 장부와 봉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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