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낡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낯익었다. 윤승학의 집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체포되던 날 군사들 앞을 가로막고 섰던 어린 규수였다.
강무진의 시선이 여인의 손목으로 내려갔다.
“저 여인은 누구냐?”
옥매향이 황급히 다가왔다.
“장군, 어찌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이제 막 들어온 아이입니다.”
“이름을 물었다.”
옥매향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윤해원이라 합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강무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해원도 그를 알아보았다.
“장군, 제 아버지를 기억하십니까?”
강무진의 표정이 굳었다. 해원은 한 걸음 더 다가가 소매 안의 피 묻은 천 조각을 움켜쥐었다.
“오늘 돌아가셨습니다. 장군께서 잡아가신 제 아버지가, 오늘 제 눈앞에서 목이 잘려 돌아가셨습니다.”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해원은 강무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이곳에 계십니까?”
강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해원에게는 어떤 변명보다 잔인했다.
잠시 후 강무진이 옥매향을 돌아보았다.
“이 여인이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적은 장부가 있겠지.”
“물론입니다만, 관에서 정식으로 넘긴 아이라…….”
“그 장부를 가져와라.”
옥매향이 머뭇거리자 강무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주변의 시비들이 숨을 죽였다. 해원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를 끌고 갈 때도 누군가 명령했고, 군사들은 따랐으며, 그 끝에 한 사람이 죽었다.
“장부를 보시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옥매향이 기겁하며 해원을 말리려 했지만 강무진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무슨 뜻이지?”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모르실 분은 아닌 듯해서 여쭈었습니다.”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제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함부로 입을 열면 목숨을 잃는 세상이라고요. 그런데 입을 다물고 계셨어도 죽으셨습니다.”
강무진의 눈빛이 굳었다. 옥매향이 해원의 팔을 움켜잡았지만, 해원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잠시 후 강무진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장부를 내 방으로 가져와라. 이 여인에 관한 기록도 빠짐없이.”
그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안채로 돌아갔다.
해원은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아버지를 잡아간 사내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보았고, 이제 장부까지 찾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인지, 아버지가 남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
밤이 더 깊어지자 청월각에는 새로운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옥매향의 지시에 따라 뒤채로 향하던 해원은 열린 방문 안에서 낯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윤승학 그 늙은이가 마지막까지 고집을 부리더라니까. 글 몇 장 품고 있으면 임금도 어쩌지 못할 줄 알았던 게지.”
해원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버지가 형틀에 묶였을 때, 형리에게 서두르라고 재촉하던 목소리였다. 죄인에게 마지막 할 말까지 들을 필요가 있느냐며 해가 지기 전에 끝내라고 명했던 바로 그 말투였다.
방 안에서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 집 딸은 어찌 되었다던가?”
“청월각에 들어왔다더군. 양반집 규수가 하루아침에 기생이 되었으니 볼 만하지 않겠나.”
해원은 문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술상 가운데 앉은 관리는 붉은 비단 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있었으며, 둥근 얼굴과 기름진 수염, 잔을 들 때마다 살짝 들리는 새끼손가락까지 처형장에서 보았던 그대로였다.
그녀의 손이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손끝에 아버지의 피가 묻은 천 조각이 닿았다.
“아씨, 이쪽으로 오셔야 합니다.”
시비가 작게 속삭였지만 해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 방에는 누구 계십니까?”
“형조에서 오신 높은 나리라 들었습니다.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해원은 형조라는 두 글자를 마음속에 새겼다.
그 순간 방 안의 관리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 윤해원을 기루로 보내는 일에 지나치게 서둘렀다. 단순한 우연이라면 형조가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할 이유가 없었다.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청월각의 붉은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윤해원은 지금 저 등불 아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아버지를 잃은 날에도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여자였다.강무진은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그가 처음으로 후회한 명령은 윤승학을 체포하라는 왕명을 따랐던 날의 명령이었다.그리고 오늘 밤, 그는 또 하나의 명령을 내렸다.윤해원을 감시하라는 명령.그것이 훗날 자신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 강무진은 아직 알지 못했다.***새벽이 가까워졌을 무렵, 옥매향이 다시 찾아왔다.평소 침착하던 행수의 얼굴에 불안이 어려 있었다.“장군,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강무진은 문서를 덮었다.“말해라.”“윤해원에게 손님을 붙이지 말라는 명령은 받들겠습니다. 다만 그 아이의 이름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이름?”“기루에 들어온 관비는 손님 앞에서 본래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청월각에서도 새 이름을 내려 주는 것이 관례입니다.”강무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윤해원.그 이름을 부르면 여인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유산처럼 자신의 이름을 지키려는 모습이 떠올랐다.“지금 당장 바꿀 이유가 있느냐?”“아직 정식으로 기예를 배우기 전이라 서둘러야 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루의 장부와 손님 명부를 정리하려면 언젠가는 정해야 합니다.”강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관비의 신분과 기루의 관례를 알고 있었다. 왕명이 내려진 일을 장군의 개인적인 호의만으로 뒤집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이름만큼은 빼앗기게 두고 싶지 않았다.“내가 확인할 일이 끝날 때까지는 본래 이름을 그대로 두어라.”옥매향은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그녀가 돌아선 순간, 강무진이 다시 불렀다.“옥매향.”“예, 장군.”“윤해원에게는 내가 감시를 명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마라.”
“윤해원을 함부로 손님 앞에 세우지 마라. 상처가 낫기 전에는 기예를 가르친다는 핑계로 몸을 혹사시키지도 말고.”“명심하겠습니다.”“오늘 형조 관리가 그 여인을 때린 일은 따로 기록해 두어라. 그자가 다시 찾아와 소란을 일으키면 내 군사에게 알려라.”옥매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장군께서 그 아이를 특별히 돌보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강무진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윤승학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실제로 해원은 아버지의 서재를 기억하는 중요한 증인이었다.그러나 조금 전 그녀의 노래를 멈추게 한 이유까지 그것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내가 확인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옥매향은 더 묻지 않았다.강무진은 탁자 위의 장부를 다시 펼쳤다.“오늘 밤부터 그 여인을 살펴라.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묻는지 알아두라는 뜻이다. 형조에서 온 사람이 접근하거나 아버지의 사건에 관해 묻는 자가 있으면 바로 알려라.”옥매향은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감시하라는 말씀이군요.”“그렇게 받아들여도 좋다.”“그 아이가 눈치채면 반발할 것입니다.”강무진은 짧게 웃었다.“이미 나를 미워하고 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겠지.”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그는 해원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을 떠올렸다. 두려움은 있었지만 복종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더라도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자신이 그녀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게 될 터였다.강무진은 아직 그 잘못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대신 몸에 손대지 마라. 감시하는 자가 그 여인을 겁주거나 상처 입히면 네 책임으로 묻겠다.”“알겠습니다.”“그 여인이 무엇을 물었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거절했는지도 기록해라.”옥매향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거절한 것까지 말씀이십니까?”“그렇다.”강무진은 장부를 덮었다.해원은 누구에게나 고개를 숙이는 여자가 아니었다. 원하지 않는 일을 분명히 거절했고, 그 때문에 더 큰 위험을 부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설명하는 순간 윤승학이 남긴 다른 기억들까지 입 밖으로 흘러나올 것 같았다.그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진실을 해원에게 말할 수 없었다.“다른 것을 불러라.”해원은 고개를 숙였고, 옥매향은 불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살폈다.세 번째 노래가 시작되었다.이번에는 멀리 떠난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노래였다.강무진은 첫 소절을 듣자마자 눈을 감았다.그는 수많은 전쟁터에서 그런 노래를 들었다.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불렀고,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가 불렀다. 전사자 명부를 들고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누군가는 아직 돌아올 사람이 있다고 믿었다.그 믿음이 얼마나 잔인하게 무너지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여인이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해원의 목소리가 조금씩 흔들렸다.강무진은 눈을 떴다.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소절로 넘어가기 전에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손가락이 치맛자락을 움켜쥐었고, 입술은 몇 번이나 움직이다가 겨우 소리를 냈다.그는 더 들을 수 없었다.“그만해라.”세 번째였다.해원이 노래를 멈췄다.잠시 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장군께서는 제가 우스우십니까?”강무진의 가슴이 내려앉았다.“무슨 뜻이지?”“노래를 부르라고 하셔서 불렀습니다. 그런데 세 번이나 중간에 끊으셨습니다.”해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어머니께 배운 노래이고,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노래였습니다. 오늘은 그분들을 모두 잃은 날입니다.”옥매향이 급히 다가갔다.“해원아, 그만하거라.”그러나 해원은 강무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장군께서 원하시면 저는 노래도 불러야 하고, 장군께서 싫으시면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지요?”강무진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제 아버지를 데려가실 때도 그랬습니다. 그만두라고 부탁드렸지만 듣지 않으셨지요.”해원의 눈가가 붉어졌다.“이제는 제가 무엇을 부르고 어디에서 멈출지도 장군께서 정하시는군요.”강무진은 손을 뻗으려다가
강무진은 해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그 일은 장부의 숫자를 고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그렇겠지요. 돈을 잘못 적은 사람은 꾸짖으실 수 있지만, 사람을 잘못 죽인 사람은 누구도 꾸짖지 못하시겠지요.”강무진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기대를 했는지 깨달았다.장부 몇 줄을 고쳐 준다고 해서 그녀의 원망이 줄어들 리 없었다. 북방에서 적장을 무릎 꿇리고 성문을 열게 만들었던 자신이 눈앞의 여인에게서는 감사 한마디조차 얻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그 사실이 불쾌했다.그런데도 해원이 고개를 숙이지 않는 모습은 싫지 않았다.강무진은 그 모순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장부를 덮었다.***“노래를 할 줄 아느냐?”강무진이 물었을 때, 옥매향은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들었다.“이 아이가 양반가에서 자랐으니 노래 한 자락은 알 것입니다. 아직 기루의 법도를 익히지 못했지만…….”“행수에게 묻지 않았다.”옥매향이 입을 다물었다.해원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대답했다.“어머니께 배운 노래가 있습니다.”“불러 보아라.”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지금 말씀이십니까?”“그렇다.”강무진은 자신이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조금 전부터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도, 자신을 비난하는 말도 아닌 다른 목소리였다. 처형장과 형조, 붉은 봉인에서 벗어난 평범한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그러나 그런 욕망을 해원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해원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옥매향이 눈짓으로 재촉하자 그제야 천천히 허리를 폈다.첫 소절이 흘러나왔다.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였다. 달빛이 내려앉은 뜰에서 먼 길 떠난 이를 기다리는 노래였는데, 강무진은 예상치 못한 맑은 가락에 손을 멈췄다.그는 청월각에서 수많은 노래를 들었다. 기교가 뛰어난 기생도 있었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명창도 있었다. 그러나 해원의 노래에는 그런 계산이 없었다.그녀는 손님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처럼 노래하지 않았다. 어딘가 돌아갈 곳이 있는 사
“제가 말씀드린 분들도 아버지처럼 잡아가실 겁니까?”그의 표정이 굳었다.“그것은 내가 판단할 일이다.”“그렇다면 저도 함부로 이름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윤해원.”“장군께서는 아버지를 잡아가실 때도 왕명을 따르는 것뿐이라고 하셨습니다.”해원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강무진은 그 말이 끝난 뒤에도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제가 어떤 이름을 말씀드리면 그 사람도 끌려갈 수 있습니까? 그분에게 딸이 있다면, 그 딸도 저처럼 이곳에 오게 됩니까?”강무진은 손가락으로 탁자 가장자리를 눌렀다.역모죄의 연좌가 얼마나 잔혹한지 그는 알고 있었다. 윤승학을 체포한 뒤 그 가족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왕명을 집행했고, 이제 그 결과가 자신의 앞에 앉아 있었다.“내가 조사하려는 것은 네 아버지의 죄가 아니다.”해원의 얼굴이 달라졌다.“그렇다면 무엇입니까?”강무진은 잠시 침묵했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사실을 섣불리 말하면 그녀에게 기대를 줄 수 있었다. 그 기대가 다시 무너졌을 때 어떤 얼굴을 보게 될지 생각하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네 아버지의 사건에 이상한 점이 있다.”“무엇이 이상합니까?”“확인 중이다.”해원은 짧게 웃었다. 기쁨과는 거리가 먼 웃음이었다.“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확인하셨다면 좋았을 텐데요.”강무진은 그 말을 피하지 않았다.“그랬어야 했을지도 모르지.”해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강무진 자신도 잠시 놀랐다. 왕명을 집행한 일을 두고 자신의 판단에 의문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더구나 역적의 딸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위험했다.그러나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그 말씀을 아버지께서 들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해원은 무릎 위의 손을 꼭 쥐었다.“하지만 이제는 들으실 수 없습니다.”강무진은 그녀의 손목에 남은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당장 그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그는 곧 시선을 거두었다.자신이
강무진은 장부를 덮었다.“물어볼 것이 있다. 있는 그대로 데려와라.”“알겠습니다.”행수가 물러난 뒤에도 그는 한동안 문을 바라보았다.해원은 아버지를 체포하던 날 그의 칼집에 생긴 흠집까지 기억했다. 형조 관리의 얼굴과 말투를 기억하고, 그자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비웃었다는 이유로 피 묻은 천 조각을 술잔에 떨어뜨렸다.위험한 짓이었다.강무진이 소란을 듣지 못했다면 그 관리가 어디까지 손을 댔을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뺨을 때리고 머리채까지 움켜잡았으니, 해원이 무사히 방을 빠져나왔으리라고 장담하기도 어려웠다.그런데도 강무진은 그녀를 어리석다고만 생각할 수 없었다. 해원은 자신이 본 것을 기억했고, 그 기억을 무기로 삼을 줄 알았다. 다만 세상이 그 무기를 얼마나 쉽게 부러뜨릴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그는 탁자 아래 놓인 봉함 기록을 꺼냈다.붉은 봉인.윤승학이 마지막까지 행방을 밝히지 않았다고 기록된 물건이었다. 형조의 진술서에는 붉은 인장이 찍힌 봉함 문서라는 설명만 남아 있었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강무진은 윤승학을 체포하던 날을 떠올렸다.사랑채 문을 열었을 때 윤승학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군사들이 들이닥쳤는데도 놀라지 않았고, 먼저 딸을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청했다. 강무진은 그 부탁만큼은 들어주었다.그러나 체포 명령은 거두지 않았다.그날의 선택이 지금 눈앞에 놓인 장부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장군, 윤해원을 데려왔습니다.”강무진은 봉함 기록을 뒤집어 놓았다.“들여보내라.”***해원은 여전히 처형장에서 입었던 옷을 입고 있었다.흙이 묻은 치맛자락과 찢어진 소매, 포승줄에 쓸린 손목까지 그대로였다. 창백한 얼굴에는 형조 관리에게 맞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강무진과 눈이 마주치자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는 해원의 뺨을 보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약은 발랐느냐?”해원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탁자 위의 장부와 봉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