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나를 멸문시킨 폭군의 정인이 되었다: Chapter 11 - Chapter 20

34 Chapters

11화. 자정의 마차

“크아아악!”칼릭스의 장검이 율리안의 어깨를 베었다. 율리안은 피가 흐르는 팔을 움켜쥐고 주저앉았다.“폐, 폐하! 제발 목숨만은……!”“감히 짐의 눈앞에서 내 정인을 독살하려 해?”“폐하, 자비를……! 제가 꾸민 일이 아닙니다!”“네놈이 독잔을 건네는 것을 짐이 똑똑히 보았다!”“황태후 마마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살려주십시오!”“황태후든 누구든 상관없다! 짐의 여인을 건드린 자는 모조리 찢어 죽일 것이다!”“율리안! 내 아들을 놓아라!”헤센 후작이 아들 쪽으로 달려들었다. 칼릭스가 검을 돌리자 가신들이 후작의 앞을 막았다.“후작, 네놈도 함께 무릎을 꿇어라!”“진정하십시오! 이곳은 전야제 연회장입니다!”“내 정인을 해치려 한 놈들의 피로 대리석을 닦겠다!”율리안이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에 귀족들이 출입구로 몰렸다. 뒤늦게 경비대가 길을 막자 밀려난 사람들이 탁자와 부딪혔다.“문을 닫아라!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해!”“열어줘! 여기서 죽으라는 거냐!”유리창이 깨지고 촛대가 넘어졌다. 융단에 옮겨붙은 불이 탁자 밑으로 번졌다.‘지금이야.’피비린내 나는 참극의 한가운데서, 레일라는 차갑게 숨을 죽였다.황제의 장검이 헤센의 가신들을 도륙하는 찰나였다.그녀는 성운 비단 치맛자락을 걷어쥐고 테라스로 몸을 날렸다.“마님, 안 됩니다! 안으로 피하십시오!”호위병 둘이 창을 교차하며 막아섰다.“저 피가 보이지 않느냐? 비켜라!”“하지만 폐하의 어명이……!”“폐하께서 내게 피신하라 명하셨다! 비키지 않으면 네놈들의 목을 먼저 베라 이르겠다!”“송, 송구하옵니다!”겁에 질린 병사들이 물러서자, 레일라는 난간을 박차고 뛰어내렸다.쿵.차가운 밤바람이 거칠게 뺨을 때렸다.“거기 멈춰라!”등 뒤에서 칼릭스의 포효가 들려오는 듯했으나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하아…… 하아…….”레일라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서편 정원 회랑을 향해 질주했다.치맛단 안쪽의 금표 및 머리핀이 살갗을 찔렀다.사락-어둠 속에서 살기가 덮쳐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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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빈 발찌

뎅! 뎅! 뎅!황궁 서문 망루에서 거대한 비상 경종이 터져 나왔다.“성문을 전면 봉쇄하라!”성벽 위에서 수백 개의 횃불이 붉은 핏빛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서문의 거대한 철문에는 이미 쇠빗장이 걸려 있었다.“공녀님, 어서 타십시오!”피투성이가 된 케일런이 낡은 건초 마차의 뒷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케일런, 성문이 막혔어요!”“제가 어떻게든 통과시킬 테니, 절대 숨소리도 내지 마십시오!”케일런은 마차 바닥에 깔린 썩은 널빤지를 걷어냈다.건초 더미 아래 숨겨진 비좁은 이중 바닥.레일라는 주저 없이 차가운 나무 바닥 밑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쿵!널빤지가 닫히고, 그 위로 무거운 건초 더미가 와르르 쏟아졌다.닫힌 널빤지와 그녀의 얼굴 사이에는 몸을 돌릴 여유도 없었다. 레일라는 한쪽 뺨을 팔에 붙이고, 어깨가 벽에 닿지 않도록 몸을 웅크렸다. 보석이 품속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팔꿈치로 눌렀다. 위에서 건초를 덮는 소리가 멎자 제 숨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밖에 있는 케일런의 목소리를 믿어야 했다. 직접 볼 수 없는 사람의 판단에 목숨을 맡기는 일이 낯설었다. 그래도 이 어둠은 누가 안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침전과 달랐다. 잠깐이라도 자신을 감추어줄 바닥이 있다는 사실을 붙잡고, 그녀는 무릎에 들어간 힘을 늦추었다.칠흑 같은 어둠.코끝을 찌르는 마른 풀과 흙먼지 냄새. 널빤지 틈새로 케일런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레일라는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1,000만 류트의 무기명 금표와 다이아몬드 나석이 주머니 안에 그대로 있었다.덜컹!마차가 거칠게 요동치며 서문 검문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서라! 거기 마차, 멈춰라!”성문을 지키던 황실 근위대와 헤센 가문 사병들의 서슬 퍼런 고함이 허공을 찢었다.끼이익-!마차가 거칠게 멈춰 섰다.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다.레일라는 입술을 틀어막았다.“어디로 가는 마차냐!”수문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차 벽을 뚫고 들어왔다.“황실 군마 사육장으로 가는 늦은 밤 건초 보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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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비룡 협곡

쿠구구궁-!바퀴가 돌을 넘으며 마차를 뒤흔들었다. 레일라는 창틀을 붙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숲길 저편에서 붉은 불빛이 밀려왔다.횃불은 길의 굽이를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어둠에 가려 잠시 보이지 않을 때도 말발굽 소리는 끊기지 않았다.창틀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깨를 동여맨 천이 당겨졌지만 상처를 누르려고 손을 떼는 순간 몸이 옆으로 쏠렸다. 레일라는 다시 창틀을 잡았다. 가까워지는 횃불을 보면서도 마부석에 소리칠 말을 찾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앞으로 가는 길만 바라보았는데, 이제는 뒤에서 오는 소리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는지 마차가 느려졌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케일런을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고삐를 놓지 않게 하는 것 외에 그에게 더 요구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두두두두두-!제국 최정예이자 피의 숙청을 도맡았던 황실 직속 ‘흑랑 기병대’였다.선두의 흑마 위에서 군복 자락이 펄럭였다. 레일라는 그 옷을 알아보았다.칼릭스였다.“공녀님, 엎드리십시오!”마차를 몰던 케일런이 절규하듯 외쳤다.레일라는 무릎을 접고 몸을 아래로 숙였다.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마차가 다시 크게 흔들려, 손이 미끄러졌다. 어깨의 상처가 벌어지는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공기를 들이킬 때마다 먼지가 더 깊이 들어와 눈물이 맺혔다.레일라는 무릎으로 굴러다니는 치맛자락을 눌렀다. 몸을 일으키면 마부석이 보일 터였지만, 바로 머리 위를 지나가는 소리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신 케일런이 외치는 쪽으로 몸을 낮췄다. 그가 방향을 틀 때마다 바닥도 기울었다. 창틀에서 손을 떼고 좌석 밑 나무틀을 붙잡자, 몸이 벽에 부딪치는 것은 겨우 막을 수 있었다.슈우웅- 쾅! 콰직!어둠을 뚫고 날아든 거대한 쇠뇌 화살들이 마차 지붕과 벽면을 무자비하게 꿰뚫었다.“히이이잉-!”화살에 맞은 군마가 피를 토하며 날뛰었다.“케일런!”“앞이 비룡 협곡입니다! 길을 꺾을 테니 꽉 잡으십시오!”케일런이 피 묻은 고삐를 거칠게 꺾었다.마차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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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달아난 이유

“대답해라, 레일라!”칼릭스의 포효가 밤하늘을 찢었다.거친 바위벽에 내리꽂힌 레일라의 목덜미로 서슬 퍼런 장검의 칼날이 파고들었다.칼날에 엉긴 핏자국이 턱 가까이 왔다. 고개를 돌리면 더 베일 것 같아 레일라는 숨만 짧게 내쉬었다.베인 살갗 틈으로 뜨거운 핏방울이 배어 나와 쇄골을 타고 흘러내렸다.“짐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네년이 감히 살아서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더냐!”멱살을 쥔 손이 목을 눌렀다. 레일라는 숨을 짧게 끊어 쉬며 칼끝을 보았다. 그 위로 칼릭스의 눈물이 떨어졌지만 손의 힘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여기서 죽는 건가…….’등 뒤에서는 비룡 협곡의 급류가 울렸다. 케일런이 어디로 떠내려갔는지,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달아났다는 사실은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거짓 정인이라는 것까지 들켰는지는 그의 다음 말을 들어야 알 수 있었다.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레일라는 질식할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눈을 감지 않았다.목에 힘을 주자 칼날이 살갗에 더 가까워졌다. 레일라는 눈만 움직여 황제의 손을 보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 손이 놓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가 믿고 싶은 이유로 자신을 죽일 터였다.손끝에서 자갈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케일런을 찾으려 뒤를 돌아볼 수도, 그의 죽음을 확정하고 울 수도 없었다.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생각할수록 이 자리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 마음과 제 목을 직접 내밀겠다는 말이 함께 올라와, 목 안쪽이 더 뜨거워졌다.오히려 턱을 치켜들며, 맑은 녹색 눈으로 폭군의 시선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죽이십시오.”레일라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칼릭스의 눈썹이 사납게 일그러졌다.“무어라?”“죽이라고 했습니다, 폐하!”레일라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살려달라 애원할 줄 아셨습니까? 짐승처럼 목숨을 구걸할 줄 아셨느냔 말입니다!”“이…… 발칙한 계집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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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잿더미가 된 이름

들것을 따라 침전까지 들어온 시종들의 신발에 협곡의 진흙이 말라붙었다. 어의가 지나가자 모두 벽 쪽으로 비켜섰다.비룡 협곡에서 쓰러진 칼릭스는 황궁 침전으로 급히 옮겨졌다.침전 안은 피비린내와 어의들의 비명으로 아수라장이었다.“폐하! 숨을 쉬십시오! 탕약을 삼키셔야 합니다!”수석 어의 헬무트가 피거품을 닦아내며 약사발을 들이밀었지만, 칼릭스는 탕약을 내동댕이치며 발작을 멈추지 않았다.“크아아악! 비켜라…… 꺼져라……!”거대한 맹수가 침대를 박살 낼 듯 날뛰었다.그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던 폭군이 진정된 것은, 근위병들의 칼날에 떠밀려 레일라가 침대 곁으로 다가섰을 때였다.발을 옮길 때마다 젖은 치맛자락이 다리에 달라붙었다. 레일라는 어깨를 감싼 천을 눌러둔 채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뒤에 선 근위병들의 칼을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등쪽으로 닿는 서늘한 기척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황제가 잠잠해지는 것만이 그들의 칼도 멀어지게 할 수 있었다.침대에서는 약사발이 부딪치고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의가 손을 뻗었다가 물러서는 동안, 레일라는 황제의 얼굴을 보았다. 협곡에서 붙들던 손과 같은 손이 허공을 긁고 있었다. 그에게 손을 대는 일이 두려웠지만, 뒤로 돌아설 길도 없었다.“……칼릭스.”레일라의 손이 관자놀이에 닿자 칼릭스가 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허공을 헤집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경련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칼릭스는 피 묻은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의식을 놓았다. 손목을 잡은 손은 여전히 놓이지 않았다.헬무트가 다가와 맥을 살폈다. 레일라는 손을 떼도 되는지 묻고 싶었지만,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칼릭스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어의도 더는 그녀를 물러나게 하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침전 창살 틈으로 서늘한 햇살이 스며들었다.레일라는 밤새 침대맡에 무릎을 꿇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무릎 아래의 감각이 둔해졌다. 자세를 고치려 조금 움직이면 손목을 감은 손이 따라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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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거절의 대가

바스락.레일라는 케일런의 혈서가 적힌 가죽 조각을 입안에 넣고 씹어 삼켰다.목구멍을 넘어가는 비릿한 쇠 맛.‘살아야 해. 케일런 경이 살아 있는 한, 아직 끝난 것이 아니야.’레일라는 발목의 강철 고리를 붙잡았다. 가장자리가 닿는 살갗이 벌겋게 쓸려 있었다. 문밖에 소리가 새지 않도록, 고리를 들어 사슬이 끌리는 것을 막았다.가죽 조각을 삼킨 뒤에도 혀에 거친 감촉이 남았다. 레일라는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들고 있지 않으면 빼앗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몸 안으로 숨겼다는 사실까지 두려웠다. 그래도 눈앞의 증거를 없앤 뒤에야 문밖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발목에 닿는 고리는 움직일 때마다 같은 자리를 눌렀다. 몸을 옆으로 돌려도 사슬이 따라왔고, 조금만 멀어지려 해도 길이가 끝났다. 그녀는 손으로 고리를 감싸 더 움직이지 않게 했다. 상처가 아픈 것보다, 다른 사람의 허락 없이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다.낮이 되자 황궁 밖에서 쩌렁쩌렁한 군화 소리와 함께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침전으로 밀려들었다.쾅!침전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칼릭스가 들어섰다.정복은 온통 선혈로 젖어 있었고, 그의 칼집에선 끈적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헤센 후작의 수하들, 그리고 어제 독살에 가담한 귀족 30명의 목을 모조리 베았다.”칼릭스가 피 묻은 장갑을 벗어 던지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성벽에 그놈들의 대가리를 효수해 까마귀 밥으로 던져주었지. 이제 네게 독을 먹이려 드는 놈은 세상에 없다.”피비린내 나는 폭군의 광기.뒤따라 들어온 시종들이 은쟁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최고급 송아지 고기 요리와 수프를 받쳐 들고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식사를 들어라, 레일라.”칼릭스가 명령조로 말했다.하지만 레일라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먹지 않습니다.”“무어라?”“사슬에 묶여 짐승처럼 사육당하느니, 굶어 죽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레일라가 발을 뻗어 은쟁반을 사정없이 걷어찼다.챙그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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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금고의 열쇠

레일라의 손이 황제의 가슴 위에 붙들려 있었다. 손바닥 아래로 박동이 전해졌다. 잠들기를 기다렸던 남자가 이제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대답해라, 레일라.”칼릭스가 레일라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붉은 눈을 치켜떴다.“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네가 내게 건넸던 첫마디가 무엇이었지?”“……폐하.”“왜 말이 없느냐? 설마 잊은 것이냐?”“잊을 리가 있겠습니까.”“그렇다면 말해라. 짐의 손을 잡고 매달리던 네 입술에서 흘러나온 첫마디를.”서늘한 적안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의심의 불꽃.레일라는 대답하려다 혀끝을 멈췄다. 머릿속에 떠오른 말 어느 것도 그대로 꺼낼 수 없었다.‘첫 만남의 첫마디라고……?’그가 말하는 첫 만남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레일라가 지어냈던 이야기를 믿는 것인지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하급 침소 시녀로 위장해 들어와 피고름을 닦던 날이었는가?아니면 이 미친 폭군이 기억하는 ‘진짜 첫사랑’과의 과거인가?그 어떤 대답을 지어내든, 단 한마디의 오차가 생기는 순간 발목의 쇠사슬이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될 터였다.발목을 움직이면 사슬이 소리를 냈다. 레일라는 무릎 위에 놓인 황제의 머리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세를 고쳤다. 피를 보인 낮의 일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같은 남자가 조용한 음성으로 과거를 묻고 있으니, 오히려 고함을 칠 때보다 눈을 떼기 어려웠다.정인의 기억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자신이 실제로 본 황제의 얼굴만으로 대답하면 그가 원하지 않는 밤을 말하게 될 터였다. 레일라는 그 사이에서 숨을 골랐다. 틀린 기억을 바로잡는 순간 자신의 거짓까지 드러나므로, 먼저 그가 무엇을 듣기 원하는지 바꾸어야 했다.‘물러서면 죽어.’공포에 질려 눈을 피하는 순간 거짓이 탄로 난다.레일라는 떨리던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칼릭스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레일라는 고개를 숙이려는 것을 참았다.칼릭스가 입술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보다 먼저 물었다. 이번에는 그가 대답해야 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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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황태후의 비밀 금고

“황태후의 비밀 금고라…….”레일라는 어둠 속에서 차가운 청동 열쇠를 움켜쥐었다.황태후와 헤센 후작이 조작한 칙서가 황궁 지하 수로에 있다고 했다. 레일라는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문서를 손에 넣는다면, 가족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을 더는 혼자 속으로만 삼키지 않아도 됐다.‘그걸 두고 달아날 수는 없어.’열쇠를 쥔 손은 뜨거웠지만 바깥 금속은 차가웠다. 레일라는 열쇠를 뒤집어 손바닥 안에 다시 쥐었다. 가문의 결백을 밝힐 문서가 가까이에 있는데, 자신은 침대 기둥에서 멀어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그 간격이 문서까지의 거리보다 답답했다.케일런이 전한 말만으로 모든 것을 확정할 수는 없었다. 눈으로 확인해야 했고, 확인한 뒤에는 가져와야 했다. 황제가 세상을 모조리 베어주겠다고 말할 때마다 지금까지는 제 목이 먼저 떠올랐다. 이제는 그 검을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하지만 청동 열쇠만으로는 발목의 마법 사슬을 풀 수 없었다. 금고에 닿으려면 침전의 결계부터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다음 날 아침.칼릭스는 침전 한가운데로 거대한 흑단목 집무 탁자를 옮겨왔다.레일라를 한시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겠다는 병적인 감시였다.집무 탁자가 들어오자 방 안의 길이 더 좁아졌다. 레일라는 침대에서 탁자까지 이어지는 공간을 눈으로 짚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사슬의 여유가 얼마나 남는지 느껴졌다.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황제가 바로 볼 수 있다는 것도 달라졌다.그가 서류에 눈을 둔 틈을 기다리려면 먼저 오래 곁에 있는 일이 자연스러워야 했다. 레일라는 차를 옮기는 손에 힘을 풀었다. 손목이 떨리면 마음이 급하다는 것도 보일 터였다. 찻잔을 올려놓을 자리를 살피는 동안 서랍과 그의 팔이 놓인 위치를 함께 보았다.“목마르지 않으십니까, 폐하.”레일라는 발목의 사슬을 차분히 숨긴 채, 따뜻한 허브차를 침대 곁에 놓인 칼릭스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찻잔을 내려놓은 뒤에는 두 손을 보이는 곳에 두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노리지 않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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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품 안의 위조 칙서

“엎드리십시오!”케일런의 장검이 선두 사병의 목덜미를 갈랐다. 비명이 터지자 뒤따르던 사내가 칼을 뽑았다. 레일라는 발치의 쇠파이프를 집어 그의 무릎 뒤를 후려쳤다.“아아악!”사내가 주저앉는 순간 케일런이 칼자루로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두 번째 사병도 바닥에 쓰러졌다. 레일라는 파이프를 놓지 못한 채 수로 저편을 살폈다. 뒤쪽의 군화 소리는 아직 수로 굽이 너머에 머물렀다.“이쪽입니다, 공녀님.”케일런이 쓰러진 사병들을 배수로 구석으로 끌어 옮기고, 젖은 벽을 따라 앞장섰다.벽면에 등을 붙이자 축축한 냉기가 옷을 뚫고 들어왔다. 레일라는 손에 든 쇠파이프를 몸 가까이 당겼다. 무릎을 후려칠 때 손바닥으로 전해진 충격이 아직 남아 있었다. 쓰러진 사내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한 번 살핀 뒤 케일런을 따라갔다.피 냄새가 물비린내와 섞였다. 발을 잘못 디디면 미끄러질 것 같아 벽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앞에서 움직이는 케일런의 어깨도 경직되어 있었다. 그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더 싸우기 전에 금고에 닿아야 한다고 걸음을 맞추었다.수로의 끝자락, 거대한 가시 덩굴 문양이 양각된 육중한 마법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황태후의 사조직 ‘그림자 까마귀’의 비밀 금고였다.철문 중앙에는 푸른 마법진이 시퍼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철문 결계를 부수려면 황제의 전속 열쇠가 필요합니다…….”“열쇠라면 여기에 있어요.”레일라는 소매 안에서 빼돌렸던 사파이어 황금 열쇠를 꺼내 들었다.철문 중앙의 홈에 열쇠를 꽂아 넣고 비틀자, 푸른 마법진이 산산조각 나며 묵직한 굉음과 함께 철문이 열렸다.열쇠를 돌리는 손목에 저항이 걸렸다가 풀렸다. 레일라는 그 감각을 끝까지 확인하고 손을 놓았다. 문이 열리며 나온 먼지가 코끝을 간질였으나 기침은 참았다. 수로 저편에서 소리가 이어지는지 먼저 귀를 기울였다.이 안에서 무엇을 보든 시간을 오래 쓸 수 없었다. 가문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찾겠다는 생각 때문에 발이 앞서려 했지만, 케일런이 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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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돌려세운 칼끝

칼릭스가 턱을 놓자 레일라는 겨우 고개를 내렸다. 발치에는 조금 전 내던져진 흑단목 서랍함이 뒤집혀 있었다. 벌어진 나무 틈으로 사파이어 열쇠를 넣어 두었던 빈자리가 보였다.검이 칼집을 빠져나오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칼릭스의 칼끝이 목덜미에 닿았다. 뒤로 물러나려던 발이 사슬에 걸렸다.“대답해라, 레일라.”그는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레일라는 오히려 그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움직이지 못했다.“짐의 서랍을 열고 어디를 다녀왔지?”“……폐하.”“열쇠를 훔쳐 야밤에 홀로 빠져나간 이유가 무엇이냐?”칼날이 쇄골을 지그시 눌러왔다.“또다시 짐을 버리고 도망치려 했던 것인가?”“도망이라니요?”“도망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냐!”“제가 도망치려 했다면, 왜 제 발로 이 침전으로 돌아왔겠습니까!”자신이 돌아온 방에서 또 도망쳤다는 말을 듣자 가슴이 막혔다. 레일라는 문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그 방향을 보는 것만으로 칼릭스의 의심을 키울 수 있었다. 품 안에 문서가 있다는 사실이 숨을 붙잡아 주었지만, 꺼내기 전까지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그가 듣기를 멈추면 모든 일이 목에 닿은 칼끝에서 끝났다. 레일라는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말을 짧게 끊었다. 먼저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부터 그에게 보이게 해야 했다. 수로에서 얻은 것을 내놓으려면, 손을 움직이는 동안 베이지 않을 틈이 필요했다.“돌아왔다고 없던 일이 되느냐. 열쇠로 어느 문을 열었지?”“폐하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그 말로 또 짐을 속일 셈인가?”“직접 보시고 판단하십시오. 제가 왜 돌아왔는지 아실 겁니다.”레일라는 가늘게 숨을 들이켰다. 검을 거두어 달라고 빌기만 해서는 같은 추궁이 끝나지 않을 터였다. 서신을 꺼낼 만큼만 그의 시선을 붙잡아야 했다.도망칠 곳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그녀는 가슴팍의 찢어진 옷자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움직이지 마라! 검을 더 깊이 찔러 넣기 전에!”“찌르십시오! 하지만 찌르기 전에, 제 손에 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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