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멸문시킨 폭군의 정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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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By:  YuIm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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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명으로 가문이 멸문한 지 3년... 살아남은 공녀 레일라는 정체를 숨긴 채 황궁의 시녀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독에서 깨어난 폭군 칼릭스가 그녀를 자신의 정인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들키면 죽는다!! 살아남으려면 그를 속여야 한다!!! 살기 위해 시작한 가짜 사랑은 집착이 되고, 집착은 복수의 기회가 된다. 모든 것을 빼앗은 남자가 마침내 그녀 앞에 무릎 꿇는 순간. 레일라는 선택해야 한다. 원수에게 복수할 것인가, 그를 사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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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정인이라 불린 밤

붉은 융단 위로 짙은 피비린내가 엉겨 붙어 있었다.

침전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창살 틈으로 스며드는 겨울바람이 촛불을 위태롭게 흔들었다.

레일라는 떨리는 손으로 은대야에 적신 리넨 천을 쥐어짰다.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졌다.

침대 위에는 제국의 황제 칼릭스 폰 룩센베르크가 누워 있었다. 형제들의 목을 베고 즉위한 폭군이었다. 흑발 아래 이마는 창백했고, 쇄골을 가로지른 검은 핏줄은 촛불 아래서도 뚜렷했다.

3주 전, 정체불명의 암살자가 찔러 넣은 단검에는 고대 주술 독이 묻어 있었다.

어의들은 황제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부터 믿기 어려워했다. 매일 밤 다른 해독제를 가져왔지만, 약을 먹이고 붕대를 갈고 나서도 침대 위에서는 대답 한마디 돌아오지 않았다.

리넨을 갈아도 약 냄새 아래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레일라는 말라붙은 천 위에 물을 조금 더 흘렸다. 그대로 떼면 상처가 벌어졌다. 새로 피가 난 자리를 아침 어의가 발견하면, 밤새 침전을 지킨 시녀부터 불러세울 것이었다.

깨끗한 천은 대야 오른쪽, 더러워진 천은 발치에 모았다. 둘이 섞이지 않게 놓고 나니 손을 움직일 자리가 겨우 났다. 촛대까지 옮기고 싶었지만 황제의 머리맡을 넘어 손을 뻗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불편해도 보이는 만큼씩 닦았다. 이 방에서는 일을 빨리 마치는 것보다 탈을 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제발 오늘 밤도 무사히 넘어가야 해.’

레일라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잿빛 머리칼을 낡은 하녀 두건 속에 단단히 욱여넣은 채, 그녀는 숨소리조차 죽였다.

에스테르 공작가. 3년 전, 반역이라는 누명 아래 하룻밤 사이에 멸문당한 가문.

일족의 피가 광장을 적시던 날, 17살이던 레일라는 충직한 늙은 시종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가장 천하고 위험한 황궁 최하급 침소 시녀로 기어들어 왔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황제의 침전이야말로 누구도 옛 공녀의 얼굴을 찾지 않을 곳이었으니까.

살아야 했다. 복수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짐승처럼 숨죽여 살아남아 국경 너머로 도망치는 것, 그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생존 법칙이었다.

국경 너머에서 어떤 이름으로 살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이름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이 방에서 다음 날 아침을 맞는 일이었다. 레일라는 물기를 머금은 천을 손바닥 안에 접었다. 어디까지가 상처이고 어디부터가 말라붙은 핏자국인지, 희미한 촛불로는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황제의 얼굴을 오래 보지 않으려 했다. 가족을 잃던 날을 떠올리고 나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픈 기억 때문에 천을 거칠게 움직였다가는, 살아남으려 버틴 지난날까지 허사가 될 터였다. 그녀는 이불 가장자리로 시선을 내리고 손끝에 남은 떨림부터 눌렀다.

“……윽.”

레일라는 조심스레 칼릭스의 가슴팍에 엉겨 붙은 검붉은 피고름을 닦아냈다.

전장을 구른 흔적이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레일라는 오래된 흉터를 피해 천을 옮겼다. 새 상처 가장자리에 또 피가 배어 나왔다.

젖은 천이 상처에 닿는 순간, 손목 옆으로 그림자가 움직였다. 미처 고개를 들기도 전에 은대야가 뒤집혔다. 핏물이 대리석 위로 쏟아졌다.

“커억……!”

레일라는 숨을 들이키지도 못했다. 쇠사슬보다 단단한 손아귀가 그녀의 목을 틀어쥐고 침대 아래 바닥으로 사정없이 내리눌렀다.

쾅!

등 뒤로 전해지는 둔탁한 충격에 눈앞이 번쩍였다. 폐부에서 공기가 한 번에 빠져나갔다.

레일라가 겨우 눈을 떴다. 3주간 닫혀 있던 황제의 눈이 바로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초점이 흐린 붉은 눈은 그녀가 든 천과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상처를 닦던 손을 공격으로 여기는 듯했다.

“감히…… 짐을 해하려 드는 쥐새끼인가.”

칼릭스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것처럼 낮고 메말라 있었다.

목을 죄는 악력이 점점 강해졌다. 목뼈가 바스러질 듯한 극심한 고통에 레일라의 다리가 허공을 버둥거렸다.

‘죽어……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는 건가……!’

레일라는 그의 팔을 긁으며 몸을 비틀었다. 손톱 밑으로 살이 긁혔지만 목을 쥔 힘은 풀리지 않았다. 시야가 어두워질 무렵, 헐거워진 리넨 두건이 벗겨졌다.

잿빛 머리칼이 바닥의 핏물 위로 풀려 내렸다. 숨을 찾아 고개를 든 레일라의 녹안이 황제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

칼릭스의 숨이 멎은 듯했다. 목을 누르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레일라의 얼굴에 시선을 붙박은 채,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을 한 번 깜박였다.

“……레일라?”

쇳소리 섞인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결코 황제의 침전에서 불려서는 안 될 이름이었다.

레일라는 목을 감싸 쥐고 기침을 토해냈다.

목 안쪽이 타는 듯했다. 숨을 들이마실수록 긁힌 곳이 욱신거려, 기침을 멈추려 해도 어깨가 들썩였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던 손이 가까이에 있었다. 레일라는 뒤로 물러서고 싶었지만 등을 바닥에서 떼어내는 것조차 버거웠다.

황제가 부른 이름은 숨겨둔 신분보다 먼저 그녀를 붙잡았다. 평범한 시녀의 이름으로 들은 것인지, 잃어버린 누군가를 부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되물을 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가 다시 손을 뻗는 것을 보자 몸이 먼저 굳었다.

“쿨럭! 쿨럭……!”

그녀가 숨을 고르기도 전에 칼릭스가 바닥으로 몸을 낮췄다. 레일라는 다시 목을 가리려 했지만, 그의 팔이 먼저 등을 감쌌다. 끌려간 가슴이 상처 난 몸에 눌려 아팠다.

뜨거운 물기가 귓가에 닿았다. 눈물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남자가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울고 있었다. 레일라는 턱 밑에 남은 손자국을 의식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살아 있었던 건가…… 레일라, 내 정인. 정말 너인가?”

칼릭스의 거친 손이 잿빛 머리칼을 헤집고, 그녀의 뺨과 목덜미를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로 더듬었다.

“꿈이 아니지? 짐을 두고…… 짐을 홀로 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은가.”

목덜미를 더듬는 손길에 레일라의 어깨가 굳었다. 방금 전 자신을 죽이려던 남자가 이제는 놓치기 두려운 사람처럼 매달렸다.

‘나를 안다고? 대체 누구를 보고 있는 거야.’

초점이 흔들리는 눈은 자꾸 그녀의 얼굴로 돌아왔다. 주술 독의 후유증 탓일까. 그는 기억 속 누군가와 자신을 혼동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저는 공작가의 죄인이자 하급 시녀일 뿐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눈앞의 폭군은 제 착각을 부정당한 수치심과 광증으로 즉시 제 목을 비틀어 죽일 터였다.

‘살아야 해. 어떻게든 살아야 해.’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해야 했다. 목에 다시 손이 닿기 전에.

레일라는 떨리는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피 냄새와 식은땀으로 젖은 칼릭스의 넓은 등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토닥, 토닥.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레일라는 맑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폐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칼릭스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레일라는 턱을 조금 돌려 숨을 쉬었다. 목 안쪽을 긁는 통증을 들키지 않으려 다음 말은 더 부드럽게 골랐다.

“울지 마세요. 저는 어디로도 가지 않습니다. 절대로 폐하를 떠나지 않아요.”

떠나지 않겠다는 말을 듣자 황제의 호흡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레일라는 같은 속도로 등을 쓸었다. 그의 입술에서 제 이름이 흘러나올 때마다 손끝이 멈칫했다. 숨기느라 작게 부르던 이름을, 이 남자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듯 불렀다.

그가 기다린 여자는 자신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대답해야 했다. 등을 쓸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짜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가 힘을 늦추자 눌렸던 갈비뼈에 숨이 들어왔다. 레일라는 한 손으로 등을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황제의 팔이 따라 움직였다. 가까스로 침대 가장자리까지 몸을 옮겨 앉자, 그도 그녀를 끌어안은 채 기대었다.

레일라는 목덜미를 만지려다 손을 멈췄다.

“조금만…… 팔에 힘을 풀어주십시오.”

그가 고개를 들자 곧바로 말을 이었다.

“도망가려는 게 아닙니다. 숨을 좀 쉬어야 해서요.”

옷을 잡은 손은 남았지만 팔 사이에 틈이 생겼다. 레일라는 그만큼만 몸을 뺐다. 아프다는 말을 하는 데도 변명이 필요했다. 그래도 숨은 쉬어졌다. 그의 어깨 너머로 대야의 위치를 확인한 뒤, 젖은 치맛단이 더 들러붙지 않도록 무릎을 조금 옮겼다.

침전 문밖에서는 아직 아무도 황제가 깨어난 것을 몰랐다.

아침이면 어의가 들어올 것이다. 그때도 이 남자는 하녀인 자신을 정인이라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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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정인이라 불린 밤
붉은 융단 위로 짙은 피비린내가 엉겨 붙어 있었다.침전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창살 틈으로 스며드는 겨울바람이 촛불을 위태롭게 흔들었다.레일라는 떨리는 손으로 은대야에 적신 리넨 천을 쥐어짰다.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졌다.침대 위에는 제국의 황제 칼릭스 폰 룩센베르크가 누워 있었다. 형제들의 목을 베고 즉위한 폭군이었다. 흑발 아래 이마는 창백했고, 쇄골을 가로지른 검은 핏줄은 촛불 아래서도 뚜렷했다.3주 전, 정체불명의 암살자가 찔러 넣은 단검에는 고대 주술 독이 묻어 있었다.어의들은 황제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부터 믿기 어려워했다. 매일 밤 다른 해독제를 가져왔지만, 약을 먹이고 붕대를 갈고 나서도 침대 위에서는 대답 한마디 돌아오지 않았다.리넨을 갈아도 약 냄새 아래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레일라는 말라붙은 천 위에 물을 조금 더 흘렸다. 그대로 떼면 상처가 벌어졌다. 새로 피가 난 자리를 아침 어의가 발견하면, 밤새 침전을 지킨 시녀부터 불러세울 것이었다.깨끗한 천은 대야 오른쪽, 더러워진 천은 발치에 모았다. 둘이 섞이지 않게 놓고 나니 손을 움직일 자리가 겨우 났다. 촛대까지 옮기고 싶었지만 황제의 머리맡을 넘어 손을 뻗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불편해도 보이는 만큼씩 닦았다. 이 방에서는 일을 빨리 마치는 것보다 탈을 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제발 오늘 밤도 무사히 넘어가야 해.’레일라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잿빛 머리칼을 낡은 하녀 두건 속에 단단히 욱여넣은 채, 그녀는 숨소리조차 죽였다.에스테르 공작가. 3년 전, 반역이라는 누명 아래 하룻밤 사이에 멸문당한 가문.일족의 피가 광장을 적시던 날, 17살이던 레일라는 충직한 늙은 시종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그리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가장 천하고 위험한 황궁 최하급 침소 시녀로 기어들어 왔다.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황제의 침전이야말로 누구도 옛 공녀의 얼굴을 찾지 않을 곳이었으니까.살아야 했다. 복수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짐승처럼 숨죽여 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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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황제의 반지
희뿌연 새벽빛이 침전의 높은 아치형 창문을 타고 흘러들었다.레일라는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다. 조금만 몸을 뒤척여도 자신을 끌어안은 남자의 팔에 소름 끼칠 정도의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다.칼릭스는 레일라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잠들어 있었다. 얼굴을 돌릴 때마다 그녀의 옷깃에 마른 피가 묻었다.상처투성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묵직한 체중이 갈비뼈를 짓눌렀다.‘도망쳐야 해. 아니, 지금 움직였다간 뼈도 못 추려.’레일라는 메마른 침을 삼켰다.눌린 팔을 조금 빼내려 해도 손끝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밤새 같은 자세로 붙들려 있던 탓에 어깨부터 저렸다. 레일라는 창문 쪽으로 눈만 움직였다. 새벽빛이 들어온다는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두려웠다. 날이 밝으면 누군가는 반드시 이 방으로 들어올 터였다.문밖 사람들은 자신을 황제의 품에서 끌어낼 것이다. 그때 황제가 순순히 놓아줄까. 레일라는 멀리 떨어진 하녀 두건을 바라보다가 눈길을 거두었다. 이제 와 머리칼을 숨길 수도 없었다. 누가 들어오든 황제보다 먼저 입을 열지 말아야 했다. 그녀가 정인이라는 말은, 황제의 입에서 나와야 믿을 테니까.그때, 침전 밖 복도에서 규칙적이고 무거운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쿵, 쿵, 쿵.“폐하, 침전 수석 어의 헬무트입니다. 아침 탕약과 붕대 교체를 위해 입시를 청합니다.”정적을 깨는 노인의 목소리 뒤로, 갑옷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짤랑거렸다. 황실 근위대였다.황제가 3주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위급 상황이었기에, 호위 기사들을 대동하고 억지로 문을 열려는 심산이었다.끼이익-묵직한 황동문이 열리며 헬무트 어의와 시종들, 그리고 은빛 갑주를 두른 근위대장 발렌이 들이닥쳤다.“폐하의 안색이 어떠하신…… 헉!”말을 맺으려던 노어의의 턱이 덜컥 떨어졌다.은쟁반에 받쳐 들고 있던 약사발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요란한 파열음을 냈다.챙그랑!“폐, 폐하……?”근위대장 발렌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허리춤의 검자루를 쥐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렸다.침대 위,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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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붉은 접견실
남색 비단이 맨살에 닿자 서늘했다. 레일라는 어깨를 움츠렸다가, 거울 뒤에서 시녀가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등을 폈다.코르셋이 갈비뼈를 조였고, 루비 초커가 목에 묵직하게 걸려 있었다.낡은 시녀복을 벗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거울 속에는 귀부인이 서 있었다. 굳은살이 남은 손과 목에 걸린 보석만 따로 노는 듯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저 모습을 보고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떠올리자마자 가슴이 아려, 레일라는 드레스의 주름을 펴던 손을 멈췄다.금실로 장미를 수놓은 야회복, 물방울 다이아몬드 귀걸이, ‘비둘기의 피’라 불리는 최상급 루비. 목걸이 아래에는 황제가 남긴 손자국이 있었다. 레일라는 초커가 닿은 자리를 살짝 문질렀다.레일라는 거울 속에 맺힌 자신의 얼굴을 차갑게 응시했다.잿빛 머리칼 아래 녹색 눈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두건을 쓸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에스테르를 기억하는 사람이 이 얼굴을 오래 보게 해서는 안 됐다.‘살아야 해.’3년 전, 반역 누명 속에 일족이 도륙당하던 밤. 어머니는 어린 레일라의 입을 틀어막으며 피 묻은 손으로 밀어냈다.‘살아서…… 부디 살아서 이름을 지우고 숨 쉬렴, 레일라.’어머니가 밀어낸 덕분에 혼자 살아남았다. 원수를 갚겠다는 말은 아직 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이름을 숨기고 버티는 일에도 힘이 모자랐다.그런데 왜 하필, 저 미친 폭군이었을까.칼릭스 폰 룩센베르크.형제들의 목을 베어 황좌 계단에 굴리고, 귀족들의 피로 즉위한 제국의 학살자.그 잔혹한 황제가 주술 독에 뇌를 다치더니, 침소 시녀인 자신을 첫사랑 정인이라 착각하며 매달리고 있었다.‘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네가 사라지면 숨이 쉬어지지 않아.’그 말 때문에 옷을 갈아입으러 나오는 일조차 허락을 구해야 했다.레일라는 초커의 잠금쇠를 짚다가 손을 내렸다. 하사품을 풀어놓은 이유까지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달칵.등 뒤에서 접견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황제의 특별한 허락 없이는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는 침전 앞 전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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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기억에 없는 입맞춤
접견실의 대리석 바닥을 적셨던 핏자국은 하룻밤 사이에 말끔히 지워졌다.문짝을 바꾸는 장인들도 목소리를 낮췄다. 접견실 앞을 지나는 시종들은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헤센 후작가의 가신이 손목이 으스러진 채 끌려 나간 사건은 삽시간에 궁정 귀족들에게 번져나갔다.이제 레일라 앞에서 천한 시녀라는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시녀들은 눈을 피했고, 복도에서 마주친 시종들은 하던 말을 멈추었다. 레일라는 비어 있는 길을 서둘러 지나갔다.‘나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야. 저 사람 때문이지.’레일라는 침실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 기둥 아래 은밀한 홈을 열었다.칼릭스가 매일같이 안겨주는 진상품들. 피비린내 나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에 꽂아주던 보석들이 그곳에 가득했다.레일라는 크고 눈에 띄는 장신구는 손대지 않았다. 황실 문양이 각인된 물건은 장물아비조차 받지 못한다.대신 그녀가 모은 것은 각인이 없는 최상급 무색 다이아몬드 나석 3알, 핏빛이 옅은 작은 루비, 그리고 제국 중앙은행이 발행한 무기명 금표 10장이었다.금표 한 장당 100만 류트. 제국 남부의 소도시에서 작은 저택과 농장을 사고도 평생을 풍족하게 먹고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황제의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이 돈을 들고 국경을 넘어야 해.’레일라는 얇은 가죽 주머니에 보석과 금표를 욱여넣었다. 그리고 낡은 하녀복 치맛단 안쪽에 바늘로 꿰매 단단히 숨겼다.바늘이 옷감을 뚫을 때마다 손끝에 섬유가 걸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레일라는 주머니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안쪽 솔기를 따라 눌렀다. 겉에서 보이는 주름을 펴고 다시 접어보았다. 드레스를 입고 있을 때와 하녀복을 입고 있을 때, 같은 물건도 몸에 닿는 자리가 달랐다.보석을 한꺼번에 움켜쥐면 작은 마찰음이 났다. 그녀는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감싸 그 소리가 얼마나 멀리 들릴지 가늠했다. 지금 모은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문지기 앞에서 옷자락을 들추는 순간에는 종이와 돌덩이일 뿐이었다. 바느질이 끝나자 실밥부터 안쪽으로 숨겼다.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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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자정의 초대
“온실에 피어 있던 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나?”칼릭스는 묻고도 손목을 놓지 않았다. 레일라가 조금 비틀자 손가락 마디에 힘이 실렸다.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었다.그는 더는 눈을 감고 통증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얼굴을 피하려 해도 시선이 따라왔다.“대답해 보아라, 레일라.”칼릭스가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서늘한 피비린내와 함께 사나운 맹수의 뜨거운 숨결이 뺨을 스쳤다.“왜 말이 없지?”“……폐하.”“기억이 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그의 엄지가 손목 안쪽을 눌렀다. 레일라는 빠르게 뛰는 맥박이 손끝에 들킬까 두려웠다. 침착한 얼굴을 만들려 할수록 붙잡힌 곳에서 더 세게 피가 뛰었다.“온실에서의 밤을 잊은 것인가?”칼릭스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짐에게 그토록 매달리던 네가, 그 밤의 꽃을 잊었을 리가 없을 텐데.”‘시험하는 걸까.’레일라는 그의 표정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 장미든 백합이든 이름을 대는 순간, 그의 기억과 맞는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자신은 그와 온실에서 입을 맞춘 적이 없었다.첫 입맞춤이라는 말부터 덫이라면 무슨 꽃을 골라도 틀린 답이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손목을 놓지 않는 그에게는 대답이 필요했다.‘도망칠 곳은 없어.’상대방이 발을 뺄 수 없는 수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레일라는 파르르 떨리던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그리고 칼릭스의 붉은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그녀의 맑은 녹안에 서서히 물기가 차올랐다.눈물이 먼저 떨어지도록 잠깐 입을 다물었다.칼릭스의 시선이 붙잡힌 손목으로 내려가자 레일라는 눈을 들었다. 억울해서 대답조차 못 하는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꽃이라고 하셨습니까?”레일라의 목소리가 메마르게 갈라져 나왔다.칼릭스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그래. 짐과 네가 함께 머물렀던 온실 속에서 피어났던…….”“어떻게 제게 그런 잔인한 질문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레일라가 말을 끊었다. 질문을 기다리던 칼릭스가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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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살아남은 기사
바스락.타다 남은 작은 양피지 조각이 레일라의 손끝에서 부서졌다.‘오늘 밤 자정, 제3 밀수 수로 창고.’레일라는 재가 묻은 손끝을 털었다. 창고의 위치와 약속 시각을 되짚었다. 협박장을 없애도, 자정까지 가야 한다는 조건은 남았다.황궁의 비밀 통로를 쥐고 흔드는 암시장 상단 ‘회색 까마귀’.그들은 길렌을 통해 정인이 황궁을 떠나려 한다는 것과 금표의 수를 알아냈다. 이름까지 확인했는지는 만나봐야 알 수 있었다.“마님, 황실 보물창고에서 보낸 하사품 목록입니다.”시녀장이 허리를 굽히며 황금빛 양피지 문서를 내밀었다.침전 앞마당에는 60개의 자개 궤짝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남해의 거대 흑진주 목걸이, 은실로 짠 드레스, 그리고 핏빛보다 붉은 루비 티아라.며칠 전 헤센 후작가의 가신을 짓밟았던 칼릭스가, 오늘 전속 정부로 공식 책봉한 레일라에게 쏟아부은 선물들이었다.“모두 창고에 넣어두어라.”레일라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낮게 대답했다.그녀의 시선은 창밖의 철갑 근위대에 닿아 있었다. 칼릭스는 그녀를 지키겠다며 호위 기사를 두 배로 늘렸다. 경비가 바뀔 때도 누군가는 침전 문 앞에 남았다.‘자정에는 나가야 해.’레일라는 순찰 일지를 되짚었다. 교대 시간, 북쪽 회랑에서 서편 수로로 이어지는 길에는 15분의 틈이 있었다. 그 안에 회랑을 벗어나야 했다. 돌아오는 길은 순찰이 지나간 뒤 다시 살펴야 했다.창밖에서 갑옷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레일라는 그 소리가 멀어지는 방향을 따라 눈을 옮겼다. 순찰 일지의 빈틈을 알고 있는 것과 그 길을 실제로 걷는 것은 달랐다. 귀환할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어야 했고, 중간에서 발각되면 오던 길로 뛰어갈 수도 없었다.그녀는 손톱을 소파의 천에 눌렀다. 약속된 창고까지 갈 수 있더라도 상대가 돈만 빼앗으면 끝이었다. 그러나 협박장을 받아든 뒤에는 가지 않는 쪽의 위험도 똑같이 선명해졌다. 황제의 정무가 끝나기 전에 표정을 가다듬어야 했다. 탈출할 생각을 얼굴에 드러낸 채 그를 맞을 수는 없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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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돌아온 침전
바닥에 떨어진 칼날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레일라는 문고리를 쥔 채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검은 털가죽 망토 아래 드러난 턱선은 기억에 남은 그대로였다. 왼쪽 뺨의 흉터만 낯설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황궁의 복도에서도 닮은 뒷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춘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다른 얼굴이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이름부터 불러놓고 잘못 보았다는 대답을 들을까 두려웠다.레일라는 사내가 떨어뜨린 단검을 내려다보았다.은빛 장미가 새겨진 단검. 저 문양을 알아본 자신보다, 그가 자신의 목소리에 칼을 놓았다는 사실이 더 믿기 어려웠다.3년 전 저택을 뒤덮었던 연기가 떠올랐다.‘아가씨, 부디 살아서 국경을 넘으십시오!’등 뒤에서 들렸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일라는 그의 생사를 알지 못했다. 돌아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오래도록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얼굴이 지금 창살 사이 달빛을 받고 있었다.입안이 말라 이름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레일라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이번에는 그의 눈을 보며 불렀다.“케일런 경.”사내가 움찔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처음에는 거친 숨만 새어 나왔다. 레일라는 그 짧은 대답을 기다리며, 자신을 내내 버티게 했던 도망칠 생각을 잠시 잊었다.“그 목소리…… 설마…….”레일라는 낡은 리넨 두건을 벗었다. 가려져 있던 잿빛 머리칼이 어깨로 흘렀다. 케일런은 그 머리칼과 녹색 눈을 번갈아 살폈다.“아…… 아가씨……?”그가 무릎을 꿇었다. 바닥을 짚은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얼굴을 들려다가 다시 숙이기를 반복하더니,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정녕…… 공녀님이십니까? 살아서…… 살아 계셨던 것입니까?”레일라는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흉터가 지나간 자리에도 기억하던 윤곽이 남아 있었다. 이름을 한 번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릎을 꿇은 그의 어깨를 보고 있자 오래 묻어둔 호칭이 입안에 맴돌았다.황궁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아가씨라고 부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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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내일 채워질 족쇄
“짐이 잠든 사이…… 이 야밤에 홀로 어디를 다녀온 것이냐?”장검에서 떨어진 피가 바닥에 번졌다. 칼릭스는 벽에 몰린 레일라 앞을 막고 서 있었다. 그녀가 얼굴을 돌리자 턱을 잡은 손이 그쪽으로 따라왔다.“대답해라, 레일라.”칼릭스가 붙잡은 턱을 더 들어 올렸다.“폐, 폐하…… 윽.”“문지기들도 모르게 침소를 빠져나가, 어둠 속을 헤매던 이유가 무엇이지?”“그것은…… 제 말을 먼저 들어주십시오.”“말해라! 짐을 두고…… 감히 나를 버리고 도망치려 했던 것인가!”“……도망이라니요?”레일라의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메마른 음성이 터져 나왔다.하녀복 치맛단 안쪽에는 1,000만 류트 금표가 숨겨져 있었다. 케일런이 신분증을 완성할 때까지 발각되어서는 안 됐다.수색당한다면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이었다.칼릭스의 손아귀에 살벌한 힘이 실렸다.“그게 아니라면 이 시각에 어디를 다녀왔단 말이냐!”“폐하를 위해 다녀왔습니다!”“무어라? 짐을 위해서라고?”“제발 손을…… 손을 놓아주십시오. 숨이 막힙니다…….”“네가 숨이 막히는 것이 대수인가! 짐은 지금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것 같은데!”칼릭스가 으르렁거리며 턱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눈을 떴을 때 네가 사라진 침전이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아느냐! 감히 짐을 기만하려 들지 마라!”“기만이 아닙니다, 폐하! 제발 제 진심을 들어주십시오!”“진심? 칠흑 같은 밤에 홀로 사라진 것이 네 진심이란 말이냐!”레일라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려 칼릭스의 손등을 적셨다.눈물이 닿자 칼릭스의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레일라는 그 틈에 품 쪽으로 손을 옮겼다. 치맛단의 금표를 건드려서는 안 됐다. 겉에 넣어둔 약초 주머니의 끈만 손끝으로 더듬었다.그 틈을 타, 레일라는 품 안에서 작은 모직 주머니를 꺼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스르륵, 툭.주머니가 풀리며 짙은 박하 향의 푸른 약초 잎들이 쏟아져 나왔다.“이것이…… 대체 무엇이냐?”“은청초(銀靑草)입니다.”“은청초?”“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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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막힌 탈출로
희뿌연 아침 햇살이 침전의 붉은 융단 위로 차갑게 내려앉았다.황실 수석 금세공장이 떨리는 손으로 벨벳 상자를 열었다.상자 안에는 섬세한 덩굴 문양이 양각된 순금 발찌가 놓여 있었다.가늘고 매끄러운 금빛 고리 안쪽에는 육안으로 식별하기 힘든 미세한 고대 룬 문자가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황궁 마탑의 공간 추적 마법과 황제의 침전 결계가 연동된 주술의 족쇄였다.“마, 마님…… 실례를 범하겠나이다.”금세공장이 이마를 바닥에 조아리며 레일라의 치맛자락 아래로 손을 뻗었다.금속이 발목을 감쌌다. 찰칵, 이중 걸쇠가 맞물렸다. 레일라가 발끝을 당기자 고리 안쪽이 복사뼈에 닿았다.칼릭스는 침대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미소를 지었다.“아름답구나.”칼릭스가 무릎을 굽혀 레일라의 발목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이것으로 족하다. 이제 너는 짐의 허락 없이는 이 침전의 문턱을 단 한 걸음도 넘지 못할 것이다.”“폐하…….”레일라는 입술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금세공장의 손이 물러나자 고리의 이음매가 보였다. 위쪽 경첩에는 틈이 있었고, 그 옆에 스프링 핀이 숨겨져 있었다.‘마법을 깨지 않고 걸쇠만 열 수 있다면.’공녀 시절 보물함과 마도구를 해체하며 놀던 기억을 더듬었다. 마법은 고리 안쪽에 새겨져 있었다. 레일라는 머리핀이 들어갈 틈과 핀을 밀어낼 방향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경첩을 아는 것과 지금 여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금세공장이 앞에 엎드려 있었고, 칼릭스의 손바닥은 발목 가까이를 감싸고 있었다. 레일라는 들여다보던 눈을 먼저 내렸다. 무엇을 알아낸 얼굴이 되어서는 안 됐다.차가운 고리가 움직일 때마다 발목뼈에 닿았다. 그녀는 그 자극을 외워두려 했다. 나중에 어둠 속에서 손으로만 걸쇠를 찾을 때 어느 방향으로 돌려야 할지, 잠깐 주어진 시선만으로 살펴야 했다. 황제가 아름답다고 말한 물건을 그녀는 문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부터 따졌다.레일라는 고개를 숙여 칼릭스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폐하께서 안심하실 수 있다면……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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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독이 든 축배
타닥, 타다닥.벽난로의 불꽃이 흔들렸다.길렌이 몸을 추스른 뒤에야 쥔 손을 폈다. 손바닥에는 피 묻은 양피지 조각이 붙어 있었다. 레일라는 가장자리가 찢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떼어냈다.[거점은 무너졌습니다. 압류를 피한 보급소의 수레를 확보했습니다. 자정, 서문 건초 보급소 뒷골목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검문을 피할 길은 아직 찾고 있습니다.]케일런의 글씨였다. 끝으로 갈수록 획이 짧아져 있었다. 약속 장소에 간다고 곧바로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다친 그를 혼자 남겨둘 수는 없었다. 레일라는 양피지를 접어 옷 안쪽에 넣었다.“마님, 제발 나가지 마십시오……!”바닥에 엎드린 시종 길렌이 눈물범벅으로 매달렸다.“헤센 가문 놈들이 서문 일대에 사병들을 쫙 깔아두었습니다! 나가셨다간 뼈도 못 추립니다!”“아니.”레일라는 금화 주머니를 꺼내 길렌에게 건넸다.“케일런 경이 다친 채 기다리고 있어. 그 사람을 두고 나 혼자 살길을 찾을 수는 없어.”길렌이 입을 열려 하자 그녀가 먼저 덧붙였다.“나는 연회가 시작되면 나갈 거야. 너는 이 돈을 가지고 떠나. 여기 더 있다가는 너까지 붙잡혀.”길렌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레일라는 거울 앞으로 돌아왔다. 성운 비단으로 짠 검은 드레스와 ‘빛의 눈물’ 목걸이가 불빛을 받았다. 치맛단 안쪽에는 1,000만 류트의 금표와 머리핀이 숨겨져 있었다.아름답게 보이는 것보다 무사히 걸을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녀는 주머니가 들뜨지 않도록 옷 안쪽을 눌렀다.레일라는 거울 앞에서 몸을 돌렸다. 넓게 퍼진 치마가 발목을 감싸자 손으로 한쪽을 걷었다. 계단에서도 이만큼은 들어야 했다. 숨겨둔 종이가 따라 올라와 드러나지 않는지 확인하고, 미끄러운 비단을 쥐는 위치를 바꾸었다.목걸이의 무게 때문에 목을 돌리는 동작도 느려졌다. 그녀는 그 감각을 기억한 뒤 손을 내려놓았다. 연회장에서는 불편한 티를 낼 수 없었다. 황제가 보석을 둘러주며 기대했던 표정을 지어 보여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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