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제의 명으로 가문이 멸문한 지 3년... 살아남은 공녀 레일라는 정체를 숨긴 채 황궁의 시녀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독에서 깨어난 폭군 칼릭스가 그녀를 자신의 정인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들키면 죽는다!! 살아남으려면 그를 속여야 한다!!! 살기 위해 시작한 가짜 사랑은 집착이 되고, 집착은 복수의 기회가 된다. 모든 것을 빼앗은 남자가 마침내 그녀 앞에 무릎 꿇는 순간. 레일라는 선택해야 한다. 원수에게 복수할 것인가, 그를 사랑할 것인가.
View More붉은 융단 위로 짙은 피비린내가 엉겨 붙어 있었다.
침전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창살 틈으로 스며드는 겨울바람이 촛불을 위태롭게 흔들었다.
레일라는 떨리는 손으로 은대야에 적신 리넨 천을 쥐어짰다.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졌다.
침대 위에는 제국의 황제 칼릭스 폰 룩센베르크가 누워 있었다. 형제들의 목을 베고 즉위한 폭군이었다. 흑발 아래 이마는 창백했고, 쇄골을 가로지른 검은 핏줄은 촛불 아래서도 뚜렷했다.
3주 전, 정체불명의 암살자가 찔러 넣은 단검에는 고대 주술 독이 묻어 있었다.
어의들은 황제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부터 믿기 어려워했다. 매일 밤 다른 해독제를 가져왔지만, 약을 먹이고 붕대를 갈고 나서도 침대 위에서는 대답 한마디 돌아오지 않았다.
리넨을 갈아도 약 냄새 아래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레일라는 말라붙은 천 위에 물을 조금 더 흘렸다. 그대로 떼면 상처가 벌어졌다. 새로 피가 난 자리를 아침 어의가 발견하면, 밤새 침전을 지킨 시녀부터 불러세울 것이었다.
깨끗한 천은 대야 오른쪽, 더러워진 천은 발치에 모았다. 둘이 섞이지 않게 놓고 나니 손을 움직일 자리가 겨우 났다. 촛대까지 옮기고 싶었지만 황제의 머리맡을 넘어 손을 뻗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불편해도 보이는 만큼씩 닦았다. 이 방에서는 일을 빨리 마치는 것보다 탈을 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제발 오늘 밤도 무사히 넘어가야 해.’
레일라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잿빛 머리칼을 낡은 하녀 두건 속에 단단히 욱여넣은 채, 그녀는 숨소리조차 죽였다.
에스테르 공작가. 3년 전, 반역이라는 누명 아래 하룻밤 사이에 멸문당한 가문.
일족의 피가 광장을 적시던 날, 17살이던 레일라는 충직한 늙은 시종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가장 천하고 위험한 황궁 최하급 침소 시녀로 기어들어 왔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황제의 침전이야말로 누구도 옛 공녀의 얼굴을 찾지 않을 곳이었으니까.
살아야 했다. 복수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짐승처럼 숨죽여 살아남아 국경 너머로 도망치는 것, 그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생존 법칙이었다.
국경 너머에서 어떤 이름으로 살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이름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이 방에서 다음 날 아침을 맞는 일이었다. 레일라는 물기를 머금은 천을 손바닥 안에 접었다. 어디까지가 상처이고 어디부터가 말라붙은 핏자국인지, 희미한 촛불로는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황제의 얼굴을 오래 보지 않으려 했다. 가족을 잃던 날을 떠올리고 나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픈 기억 때문에 천을 거칠게 움직였다가는, 살아남으려 버틴 지난날까지 허사가 될 터였다. 그녀는 이불 가장자리로 시선을 내리고 손끝에 남은 떨림부터 눌렀다.
“……윽.”
레일라는 조심스레 칼릭스의 가슴팍에 엉겨 붙은 검붉은 피고름을 닦아냈다.
전장을 구른 흔적이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레일라는 오래된 흉터를 피해 천을 옮겼다. 새 상처 가장자리에 또 피가 배어 나왔다.
젖은 천이 상처에 닿는 순간, 손목 옆으로 그림자가 움직였다. 미처 고개를 들기도 전에 은대야가 뒤집혔다. 핏물이 대리석 위로 쏟아졌다.
“커억……!”
레일라는 숨을 들이키지도 못했다. 쇠사슬보다 단단한 손아귀가 그녀의 목을 틀어쥐고 침대 아래 바닥으로 사정없이 내리눌렀다.
쾅!
등 뒤로 전해지는 둔탁한 충격에 눈앞이 번쩍였다. 폐부에서 공기가 한 번에 빠져나갔다.
레일라가 겨우 눈을 떴다. 3주간 닫혀 있던 황제의 눈이 바로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초점이 흐린 붉은 눈은 그녀가 든 천과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상처를 닦던 손을 공격으로 여기는 듯했다.
“감히…… 짐을 해하려 드는 쥐새끼인가.”
칼릭스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것처럼 낮고 메말라 있었다.
목을 죄는 악력이 점점 강해졌다. 목뼈가 바스러질 듯한 극심한 고통에 레일라의 다리가 허공을 버둥거렸다.
‘죽어……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는 건가……!’
레일라는 그의 팔을 긁으며 몸을 비틀었다. 손톱 밑으로 살이 긁혔지만 목을 쥔 힘은 풀리지 않았다. 시야가 어두워질 무렵, 헐거워진 리넨 두건이 벗겨졌다.
잿빛 머리칼이 바닥의 핏물 위로 풀려 내렸다. 숨을 찾아 고개를 든 레일라의 녹안이 황제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
칼릭스의 숨이 멎은 듯했다. 목을 누르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레일라의 얼굴에 시선을 붙박은 채,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을 한 번 깜박였다.
“……레일라?”
쇳소리 섞인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결코 황제의 침전에서 불려서는 안 될 이름이었다.
레일라는 목을 감싸 쥐고 기침을 토해냈다.
목 안쪽이 타는 듯했다. 숨을 들이마실수록 긁힌 곳이 욱신거려, 기침을 멈추려 해도 어깨가 들썩였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던 손이 가까이에 있었다. 레일라는 뒤로 물러서고 싶었지만 등을 바닥에서 떼어내는 것조차 버거웠다.
황제가 부른 이름은 숨겨둔 신분보다 먼저 그녀를 붙잡았다. 평범한 시녀의 이름으로 들은 것인지, 잃어버린 누군가를 부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되물을 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가 다시 손을 뻗는 것을 보자 몸이 먼저 굳었다.
“쿨럭! 쿨럭……!”
그녀가 숨을 고르기도 전에 칼릭스가 바닥으로 몸을 낮췄다. 레일라는 다시 목을 가리려 했지만, 그의 팔이 먼저 등을 감쌌다. 끌려간 가슴이 상처 난 몸에 눌려 아팠다.
뜨거운 물기가 귓가에 닿았다. 눈물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남자가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울고 있었다. 레일라는 턱 밑에 남은 손자국을 의식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살아 있었던 건가…… 레일라, 내 정인. 정말 너인가?”
칼릭스의 거친 손이 잿빛 머리칼을 헤집고, 그녀의 뺨과 목덜미를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로 더듬었다.
“꿈이 아니지? 짐을 두고…… 짐을 홀로 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은가.”
목덜미를 더듬는 손길에 레일라의 어깨가 굳었다. 방금 전 자신을 죽이려던 남자가 이제는 놓치기 두려운 사람처럼 매달렸다.
‘나를 안다고? 대체 누구를 보고 있는 거야.’
초점이 흔들리는 눈은 자꾸 그녀의 얼굴로 돌아왔다. 주술 독의 후유증 탓일까. 그는 기억 속 누군가와 자신을 혼동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저는 공작가의 죄인이자 하급 시녀일 뿐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눈앞의 폭군은 제 착각을 부정당한 수치심과 광증으로 즉시 제 목을 비틀어 죽일 터였다.
‘살아야 해. 어떻게든 살아야 해.’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해야 했다. 목에 다시 손이 닿기 전에.
레일라는 떨리는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피 냄새와 식은땀으로 젖은 칼릭스의 넓은 등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토닥, 토닥.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레일라는 맑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폐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칼릭스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레일라는 턱을 조금 돌려 숨을 쉬었다. 목 안쪽을 긁는 통증을 들키지 않으려 다음 말은 더 부드럽게 골랐다.
“울지 마세요. 저는 어디로도 가지 않습니다. 절대로 폐하를 떠나지 않아요.”
떠나지 않겠다는 말을 듣자 황제의 호흡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레일라는 같은 속도로 등을 쓸었다. 그의 입술에서 제 이름이 흘러나올 때마다 손끝이 멈칫했다. 숨기느라 작게 부르던 이름을, 이 남자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듯 불렀다.
그가 기다린 여자는 자신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대답해야 했다. 등을 쓸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짜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가 힘을 늦추자 눌렸던 갈비뼈에 숨이 들어왔다. 레일라는 한 손으로 등을 쓰다듬으며 다른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황제의 팔이 따라 움직였다. 가까스로 침대 가장자리까지 몸을 옮겨 앉자, 그도 그녀를 끌어안은 채 기대었다.
레일라는 목덜미를 만지려다 손을 멈췄다.
“조금만…… 팔에 힘을 풀어주십시오.”
그가 고개를 들자 곧바로 말을 이었다.
“도망가려는 게 아닙니다. 숨을 좀 쉬어야 해서요.”
옷을 잡은 손은 남았지만 팔 사이에 틈이 생겼다. 레일라는 그만큼만 몸을 뺐다. 아프다는 말을 하는 데도 변명이 필요했다. 그래도 숨은 쉬어졌다. 그의 어깨 너머로 대야의 위치를 확인한 뒤, 젖은 치맛단이 더 들러붙지 않도록 무릎을 조금 옮겼다.
침전 문밖에서는 아직 아무도 황제가 깨어난 것을 몰랐다.
아침이면 어의가 들어올 것이다. 그때도 이 남자는 하녀인 자신을 정인이라 부를까.
“간밤에 누구와 밀담을 나누었지?”레일라는 숨을 멈췄다. 칼릭스의 질문은 방금 발렌에게 내린 명령보다 더 앞선 밤을 향해 있었다. 소매 안의 수정구가 손목에 닿았다.그가 팔을 풀고 앞으로 돌아서자 레일라는 주최권 패가 놓인 탁자에 손을 얹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다.“……폐하.”“대답해라, 레일라.”칼릭스가 뽑아 든 검으로 발치의 대리석을 툭 건드렸다.“밤에 통신을 나눈 자가 누구냐?”“연회의 안전을 위해 연락한 사람입니다.”“짐을 위한 자?”칼릭스의 눈매가 잔인하게 찌푸려졌다.“감히 짐의 침실에서 외간 사내와 전음을 나누고도, 짐을 위한 것이라 둘러대는 것이냐?”“둘러대는 것이 아닙니다.”레일라는 망설임 없이 칼릭스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내일 밤 열릴 피의 가면무도회, 그 연회의 안전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무도회의 안전이라?”“에스테르 가문의 옛 충복들을 통해 황도 외곽 불순 세력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불순 세력이라니? 대체 누구를 뜻하는 것이냐?”“황태후의 잔당들과 헤센 가문의 음모가 황궁 내부로 스며들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습니다.”“황태후의 잔당들이 감히 내 궁전을 넘본단 말이냐?”“그들은 폐하의 옥체를 해치고 정변을 일으킬 기회만을 엿보고 있습니다.”“그렇다면 내 기병대에 알리면 될 일이었다.”“그래서 발렌 경을 불렀습니다. 본대가 나가면 들킬 테니 별동대만 보내달라고 했고요.”칼릭스가 탁자 위의 패를 보았다. 레일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 손을 조금 옮겼다.“폐하께서 연회의 경호도 물어보라 하셨잖습니까. 제 손에 맡기신 일을 확인했을 뿐입니다.”“그래서 짐보다 먼저 명을 내렸다?”“지금 보고드리고 있습니다. 발렌 경이 돌아오면 제가 들은 말이 맞았는지도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정녕 그것이…… 네 진심이란 말이냐?”“제가 가져온 첩보부터 확인해 주십시오.”레일라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는 대신, 반지가 보이도록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발렌 경
- 공녀님! 지금 당장 탈출하셔야 합니다!수정구 너머로 들려오는 바론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감별석이 황태후 쪽으로 넘어간 것은 확실한가요?”- 수장고에서 사라진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놈들이 내일 밤 연회에 들여오려 합니다.레일라는 잠든 칼릭스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돌에 피를 떨어뜨리는 일은 두렵지 않았다. 그 빛을 본 뒤 그가 무엇을 물을지가 두려웠다.“핏줄이 확인되면, 원수의 딸이 왜 정인 행세를 했느냐고 묻겠군요.”- 돌이 공녀님의 마음까지 증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 물음을 황태후가 먼저 꺼내게 해서는 안 됩니다.“그렇다면 감별석만 되찾는다고 끝날 일도 아니겠어요.”- 그렇습니다! 내일 밤이면 늦습니다! 오늘 밤 흑랑 기병대의 눈을 피해 탈출하셔야 합니다!“도망칠 수는 없어요, 바론 경.”- 공녀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제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잊으셨습니까?”레일라는 검붉은 흑요석 반지를 내려다보았다.“저를 감시하는 군사들이 붙어 있어요. 황궁을 벗어나기 전에 따라붙을 겁니다.”- 하오나 무도회에서는 공녀님이 설명하시기도 전에 황태후가 복수를 들먹일 것입니다!“그렇다면 도착하기 전에 가로채야죠.”- 가로채다니요? 암살대를 어찌 막는단 말씀입니까!“감별석의 이동 경로는 파악되었습니까?”- 서부 외곽의 버려진 풍차 방앗간으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황태후궁의 비밀 안전가옥이로군요.”- 예! 놈들은 그곳에 감별석을 숨겨두고 무도회 당일 들여올 계획입니다!“그렇다면 아직 황궁 외곽을 벗어나지 못했겠네요.”- 하오나 저희 가문 잔당들만으로는 그림자 까마귀의 정예를 뚫기 어렵습니다!“우리가 직접 뚫을 필요는 없어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칼릭스가 제게 쥐여준 칼을 쓸 겁니다.”레일라의 시선이 협탁 위의 주최권 패로 향했다.‘피의 가면무도회’ 최고 주최권 패, 그리고 검지의 흑요석 반지.“제국에서 가장 사나운 사냥개들을 풀면 돼요.”- 설마…… 황제의 친위대를 움직이시
칼릭스가 벽에서 뽑아낸 검을 틀었다. 날이 발렌의 목덜미를 스치자, 그가 레일라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발렌.”“폐, 폐하……!”발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감히 짐의 정인을 붙들어 몸을 수색하려 했느냐?”“소, 송구하옵니다! 신은 다만 어의실 주변을 배회하는 자를……!”“그것이 네 혓바닥을 놀릴 이유가 된다 생각하느냐?”“살려주시옵소서! 국법에 따라 비상 경계령을 수행 중이었을 뿐입니다!”“짐의 말이 곧 국법이며, 내 정인의 발걸음이 곧 법도다.”칼릭스가 발렌의 이마를 장검 끝으로 지그시 짓눌렀다.“누가 네게 그따위 권한을 주었지? 헤센의 잔당이냐, 아니면 토옥의 황태후냐?”“아니옵니다! 오직 황실의 안위를 위해 충성을 다했을 뿐입니다!”“소매에 손을 대겠다고 했느냐. 다음에는 네 팔이 먼저 잘릴 것이다.”발렌이 이마를 바닥에 댔다. 레일라는 목덜미에서 흐른 피를 보았다. 황제가 자신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망각초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안도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내 정인이 약을 찾으면 어의에게 전해라. 네 판단으로 붙들지 말고.”칼릭스가 레일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제 품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가자, 레일라. 이런 버러지들과 섞여 있을 곳이 아니다.”“……예, 폐하.”레일라는 숨을 죽인 채 칼릭스의 이끌림에 발걸음을 옮겼다.***깊은 밤, 황제의 침전.무거운 황금문이 닫히자, 칼릭스는 레일라를 침대 위로 조심스레 앉혔다.“손이 얼음장 같구나. 왜 이리 차가운 것이냐?”칼릭스가 레일라의 두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쥐며 입김을 불어넣었다.“침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차서 그렇습니다.”“발렌 때문에 아직 놀란 것이냐?”“……폐하.”“왜 짐에게 알리지 않고 홀로 어의실로 향했지?”“그것은…….”“짐의 두통 때문에 탕약을 구하러 갔던 것이 아니더냐?”“……예?”레일라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칼릭스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레일라의 뺨을 쓸어내렸다.“어의
“북부 요새의 반란군 잔당 3,000명을 전원 효수하라.”황금 알현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냉혹한 칙명.옥좌에 비스듬히 기댄 칼릭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군단장들을 내려다보았다.“항복을 청하는 자들의 목숨을 구걸하러 왔느냐, 군단장?”“폐하, 북부 귀족 300가문이 무기를 버리고 자비를 청하고 있나이다!”“자비?”칼릭스의 입술이 잔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반역자에게 베풀 자비 따위는 없다.”“폐하, 그들을 모두 베어내면 북부 국경의 방벽을 지탱할 영주들이……!”“입 닥쳐라! 짐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참수하라 일렀을 텐데.”“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투항한 자들도 예외는 없다. 주모자의 목은 성벽에 걸고, 가담한 귀족들의 영지는 모조리 몰수하여 황실 직할령으로 귀속시켜라.”“존명! 황제 폐하의 영을 받들겠나이다!”붉은 망토를 두른 군단장들이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장막 뒤의 레일라는 검지의 흑요석 반지를 만졌다. 간밤에 제 이름을 부르며 매달리던 사람이 이제는 투항한 자들의 목숨을 끊으라고 명했다.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닐 터였다.어의가 말한 정제 완료까지 이틀이었다. 레일라는 바닥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군단장들을 보았다. 약을 늦추려다 발각되면 자신뿐 아니라 조제실 사람들에게도 저 명령이 떨어질 수 있었다. 무엇을 건드려도 남의 목숨과 닿는다는 사실이 답답했다.***정오가 지나 정무가 잦아든 시각.레일라는 영지 문서를 살피러 가겠다고 말하고 침전을 나왔다. 어의실로 길을 바꾼 뒤에는 황제의 두통에 쓸 차를 구하러 왔다고 했다. 문을 지키던 경비병은 검지의 흑요석 반지를 확인하고 물러섰다.반지가 모든 질문까지 막아주지는 않았다. 뒤에서 출입 시각을 적는 소리가 났다. 레일라는 못 들은 척 지하 조제실로 내려갔다. 어의들이 약재를 가지러 자리를 비운 틈에, 청동 약탕관 곁의 조제 일지를 펼쳤다.- 1차 배합: 정화초 추출액 완료.- 2차 배합: 빙령수 증류 완료.- 최종 단계: 이틀 뒤 정제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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