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내일 정오 침전에서 해독 탕약을 올릴 것입니다.”어의실 앞을 지나던 레일라는 복도 그늘에 멈췄다. 조금 전 황제에게 올렸던 보고를 다른 어의에게 다시 확인하는 중이었다.“정제는 끝났나?”“예. 정화초와 빙령수의 배합을 마쳤습니다.”“기억이 어디까지 돌아올지는 아직 모르고?”“복용하신 뒤에 살펴야 합니다. 우선 착란이 가라앉는지부터 기록하겠습니다.”레일라는 벽에 손을 짚었다. 어의가 장담하지 못하는 것을 황제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약만 마시면 첫사랑의 진위까지 밝혀질 거라고.‘망각초를 쓸 기회는 놓쳤어.’완성된 약은 다시 가져갈 때까지 어의들의 손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레일라는 사람의 기척이 가까워지자 걸음을 옮겼다. 내일 정오까지 침전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정오의 황금 알현실. 칼릭스는 레일라의 손을 꽉 쥔 채 놓지 않았다.“황후 책봉식의 예복은 남부 최고의 비단으로 지어 올려라.”복식 담당관이 예복의 치수를 적었다. 칼릭스는 책봉식 날짜도 정하기 전에 보물고의 다이아몬드를 꺼내오라 명했다. 신료들은 반대할 틈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레일라의 손목에는 그의 손이 감겨 있었다.칼릭스가 레일라를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손이 얼음장
“일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내 침실로 기어든 것인가?”칼릭스는 한 번 묻고 기다렸다. 레일라는 그 침묵 속에서 대답을 골랐다. 급하게 부정하면 그가 무엇을 의심하는지 놓칠 수 있었다.감별석에서 떠올랐던 문장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귀족들은 그 빛을 보고 에스테르의 직계 혈통을 인정했다. 이제는 그저 시녀였다고 둘러댈 수도 없었다.칼릭스가 검을 빼 들었다. 레일라는 턱밑에 닿는 칼날을 피해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홀에서 자신에게 절하던 이들은 이 방에 없었다.“에스테르의 진짜 공녀라.”“……폐하.”“가문이 멸문당하던 날, 핏물 속에서 살아남은 공작의 막내딸이…… 천한 시녀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짐의 침소로 기어들었다?”“오해이옵니다, 폐하……!”“오해?”칼릭스의 입술이 잔인하게 비틀렸다.“언제 칼을 꽂을 생각이었지?”“칼을 꽂으려 한 적 결코 없습니다!”“거짓말 마라! 주술 독에 취해 짐이 널 정인이라 부르며 매달릴 때,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더냐!”“비웃은 적 결코 없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단 한 번도 폐하를 조롱하지 않았습니다!”&
“네 피를 저 돌 위에 떨어뜨려라.”폭군의 서늘한 검날이 레일라의 하얀 손가락 끝을 지그시 눌러왔다.수백 명 귀족들이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단상을 주시하고 있었다.“왜 망설이느냐, 요망한 계집아!”유리 파편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황태후가 비명을 질렀다.“가짜라는 사실이 탄로 날까 두려워 떠는 꼴을 보아라!”“닥쳐라.”칼릭스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황태후는 물러서지 않고 귀족들 쪽으로 감별석을 들어 보였다.“진짜 공녀라면 한 방울로 끝낼 일을 왜 못 하겠느냐!”“피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인정하겠소!”가면 뒤에서 누군가 외쳤다. 레일라는 그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았다. 조금 전 칙령을 받들겠다며 무릎을 꿇었던 자리였다. 황제의 위협이 멎자 그들은 다시 조건을 붙였다.레일라는 칼릭스를 향해 턱을 들었다.“폐하께서 제 결백을 증명하길 원하십니까?”“원한다.”“손가락을 베면 제 말도 들어주시겠습니까?”“저들의 의심부터 잠재우면 된다.”“폐하께 남은 의심은요.”칼릭스가
황금빛 샹들리에 아래, 가면을 쓴 제국 귀족 수백 명이 늘어서 있었다.가면 뒤로 번뜩이는 눈빛들은 살얼음판처럼 차가웠다.“오늘 그 계집에게 에스테르의 영지를 넘긴다더군.”“이미 칙령이 나왔소. 반환 명부에 서명하라고 사람이 찾아왔더이다.”“명을 받드는 것과 핏줄을 인정하는 것은 다르지. 침소 시녀를 황후로까지 세우겠다니.”“목소리를 낮추시오. 기병대가 듣겠소.”가면 뒤의 속삭임이 흑랑 기병대가 다가서자 끊겼다. 내주어야 할 땅과 다가올 국혼을 따지던 귀족들이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뿌우우-!황실 황금 나팔 소리가 홀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제국의 태양이시자 룩센베르크의 지배자, 칼릭스 폰 룩센베르크 황제 폐하와 에스테르 공작위의 대권 계승자, 레일라 에스테르 공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시종장의 외침과 함께 육중한 황금문이 활짝 열렸다.칼릭스가 레일라의 허리를 거칠게 감싸 안은 채 옥좌 단상에 올랐다.스릉-!칼릭스가 칼자루를 툭 치며 귀족들을 내려다보았다.“들으라, 제국의 귀족들이여.”칼릭스의 낮고 메마른 목소리가 귀족들의 숨통을 틀어쥐었다.“오늘 밤 에스테르 가문의 명예를 모욕하는 자는, 이 자리
“간밤에 누구와 밀담을 나누었지?”레일라는 숨을 멈췄다. 칼릭스의 질문은 방금 발렌에게 내린 명령보다 더 앞선 밤을 향해 있었다. 소매 안의 수정구가 손목에 닿았다.그가 팔을 풀고 앞으로 돌아서자 레일라는 주최권 패가 놓인 탁자에 손을 얹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다.“……폐하.”“대답해라, 레일라.”칼릭스가 뽑아 든 검으로 발치의 대리석을 툭 건드렸다.“밤에 통신을 나눈 자가 누구냐?”“연회의 안전을 위해 연락한 사람입니다.”“짐을 위한 자?”칼릭스의 눈매가 잔인하게 찌푸려졌다.“감히 짐의 침실에서 외간 사내와 전음을 나누고도, 짐을 위한 것이라 둘러대는 것이냐?”“둘러대는 것이 아닙니다.”레일라는 망설임 없이 칼릭스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내일 밤 열릴 피의 가면무도회, 그 연회의 안전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무도회의 안전이라?”“에스테르 가문의 옛 충복들을 통해 황도 외곽 불순 세력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불순 세력이라니? 대체 누구를 뜻하는 것이냐?”“황태후의 잔당들과 헤센 가문의 음모가 황궁 내부로 스며들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습니다.”“황태후의 잔당들이 감히 내 궁전을 넘본단 말이냐?”“그들은 폐하의 옥체를 해치고 정변을 일으킬 기회만을 엿보고 있습니다.”“그렇다면 내 기병대에 알리면 될 일이었다.”“그래서 발렌 경을 불렀습니다. 본대가 나가면 들킬 테니 별동대만 보내달라고 했고요.”칼릭스가 탁자 위의 패를 보았다. 레일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 손을 조금 옮겼다.“폐하께서 연회의 경호도 물어보라 하셨잖습니까. 제 손에 맡기신 일을 확인했을 뿐입니다.”“그래서 짐보다 먼저 명을 내렸다?”“지금 보고드리고 있습니다. 발렌 경이 돌아오면 제가 들은 말이 맞았는지도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정녕 그것이…… 네 진심이란 말이냐?”“제가 가져온 첩보부터 확인해 주십시오.”레일라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는 대신, 반지가 보이도록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발렌 경
- 공녀님! 지금 당장 탈출하셔야 합니다!수정구 너머로 들려오는 바론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감별석이 황태후 쪽으로 넘어간 것은 확실한가요?”- 수장고에서 사라진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놈들이 내일 밤 연회에 들여오려 합니다.레일라는 잠든 칼릭스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돌에 피를 떨어뜨리는 일은 두렵지 않았다. 그 빛을 본 뒤 그가 무엇을 물을지가 두려웠다.“핏줄이 확인되면, 원수의 딸이 왜 정인 행세를 했느냐고 묻겠군요.”- 돌이 공녀님의 마음까지 증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 물음을 황태후가 먼저 꺼내게 해서는 안 됩니다.“그렇다면 감별석만 되찾는다고 끝날 일도 아니겠어요.”- 그렇습니다! 내일 밤이면 늦습니다! 오늘 밤 흑랑 기병대의 눈을 피해 탈출하셔야 합니다!“도망칠 수는 없어요, 바론 경.”- 공녀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제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잊으셨습니까?”레일라는 검붉은 흑요석 반지를 내려다보았다.“저를 감시하는 군사들이 붙어 있어요. 황궁을 벗어나기 전에 따라붙을 겁니다.”- 하오나 무도회에서는 공녀님이 설명하시기도 전에 황태후가 복수를 들먹일 것입니다!“그렇다면 도착하기 전에 가로채야죠.”- 가로채다니요? 암살대를 어찌 막는단 말씀입니까!“감별석의 이동 경로는 파악되었습니까?”- 서부 외곽의 버려진 풍차 방앗간으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황태후궁의 비밀 안전가옥이로군요.”- 예! 놈들은 그곳에 감별석을 숨겨두고 무도회 당일 들여올 계획입니다!“그렇다면 아직 황궁 외곽을 벗어나지 못했겠네요.”- 하오나 저희 가문 잔당들만으로는 그림자 까마귀의 정예를 뚫기 어렵습니다!“우리가 직접 뚫을 필요는 없어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칼릭스가 제게 쥐여준 칼을 쓸 겁니다.”레일라의 시선이 협탁 위의 주최권 패로 향했다.‘피의 가면무도회’ 최고 주최권 패, 그리고 검지의 흑요석 반지.“제국에서 가장 사나운 사냥개들을 풀면 돼요.”- 설마…… 황제의 친위대를 움직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