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나를 멸문시킨 폭군의 정인이 되었다: Kapitel 21 – Kapitel 30

34 Kapitel

21화. 드러난 이름

새벽 어둠 속으로 군마의 발굽 소리가 울렸다. 칼릭스가 이끄는 황실 최정예 ‘흑랑 기병대’가 황태후궁을 포위하자, 횃불이 정문 양옆을 차례로 밝혔다.칼릭스는 정문을 향해 고삐를 당겼다. 말이 멈추자 뒤따르던 군마의 숨과 갑옷 소리가 한꺼번에 가까워졌다. 품에 넣은 문서의 거친 가장자리가 군복 안쪽에 닿았다. 그 감촉은 레일라가 발밑에 증거를 던지던 순간부터 사라지지 않았다.그가 베라고 명령했던 얼굴들이 기억 속에서 차례로 떠올랐다. 충신이었다는 사실을 지금 알았다고 해서, 자신이 내린 명령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남을 속인 사람과 그 말을 믿고 칼을 쓴 자신을 함께 생각하면 머리 안쪽이 다시 아팠다. 칼릭스는 말에서 내려 그 통증을 걸음으로 눌렀다.“폐하! 야밤에 사병을 이끌고 태후궁을 침탈하심은 불효이자 국법을 어기는……!”태후궁 시종장이 가로막으려 하자, 칼릭스의 장검이 허공을 갈랐다.서걱-!시종장의 목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내 길을 막는 자는 황족이라도 베어버린다.”칼릭스는 멈추지 않았다. 피 묻은 군화 뒤로 기사들이 따라붙었고, 레일라는 그 사이에서 문턱을 넘었다. 그녀는 시종장의 쓰러진 몸을 피해 발을 옮겼다. 황제가 분노를 쏟아낸다고 해서 손에 넣은 증거까지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칼릭스의 군복 안으로 들어간 서신이 신경 쓰였다. 저 문서가 없으면 가문에 씌워진 누명을 벗길 근거도 다시 사라질 수 있었다. 레일라는 그가 황태후를 만나기도 전에 칼부터 휘두르는 모습을 보며 걸음을 늦췄다. 그래도 증거가 어디로 옮겨지는지는 끝까지 지켜봐야 했다.콰아아앙-!칼릭스가 황금문을 걷어찼다. 부서진 문짝 너머 접견실에 황태후가 서 있었다. 비단 침의만 걸친 채였으나, 들이닥친 군사들을 보며 물러서지는 않았다.문이 부서진 틈으로 새벽 공기가 밀려들었다. 황태후의 침의 자락은 들어온 바람에 흔들렸지만 허리는 꼿꼿했다. 칼릭스는 그 얼굴을 보았다. 품속의 인장을 확인하기 전부터 자신의 잘못을 꾸짖을 준비가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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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믿지 않은 의심

“에스테르의 공녀라고?”칼릭스의 물음에 기사들이 레일라를 돌아보았다. 문밖에서 울리던 갑옷 소리까지 잦아들었다.레일라가 가장 숨기고 싶었던 말이었다. 칼릭스는 가문에 씌워진 누명을 알았지만, 그녀가 신분을 속이고 곁에 머문 이유는 듣지 못했다.레일라는 바닥에 놓인 증거를 보았다. 가문을 되찾겠다고 그 서신을 내밀 때부터 자기 이름도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아버지의 무죄와 자신이 살아남을 방법을 함께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 여겼다. 황태후는 그 기회부터 빼앗고 있었다.지금은 신분을 부정할수록 위조 칙서와는 상관없는 싸움으로 끌려갈 터였다. 레일라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치맛자락이 군화 자국을 스쳤지만 내려다보지 않았다. 칼릭스에게 답하기 전에, 자신을 고발한 사람이 왜 이 말을 꺼냈는지부터 물어야 했다.“황태후 마마의 추악한 발악이 참으로 눈물겹군요.”레일라는 황태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가문에 씌운 누명부터 해명하십시오. 제 신분이 무엇이든 저 위조 칙서가 진짜가 됩니까?”“이, 요망한 계집이 끝까지 발뺌을……!”“폐하의 손으로 충신을 죽게 하시더니, 이번에는 제 목을 베게 하실 셈입니까. 그러면 저 문서도 함께 없앨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황태후의 입술이 떨렸다. 레일라는 그 틈에 칼릭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자신의 거짓말을 감추려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그 거짓말 때문에 가족의 결백까지 다시 의심받게 둘 수는 없었다.칼릭스는 아직 검을 거두지 않았다. 레일라는 그 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릎을 꿇었다. 예전에 그의 손에 눌렸던 목덜미가 욱신거리는 듯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이 통하지 않으면, 태후궁에 도착하기 전보다 더 위험해질 수 있었다.“폐하! 제 목을 베어 저 늙은 뱀의 결백을 증명해 주시겠습니까!”레일라는 무릎을 꿇은 채 칼릭스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맺혔으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무릎 아래로 바닥의 냉기가 전해졌다. 제 목을 베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몸은 도망가고 싶어 했다. 레일라는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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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돌려받을 땅

“황태후의 말대로……”칼릭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네가 정말 에스테르 공작의 딸이라면 어쩔 셈이지, 레일라?”레일라는 기둥에 닿은 등을 조금 세웠다. 턱을 잡은 칼릭스의 손이 따라왔다. 그 손가락 아래에서 뛰는 맥박을 숨길 방법은 없었다.가문이 복권된 뒤에도 그는 같은 질문을 했다. 누구의 딸인지보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은 눈이었다. 레일라는 황태후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 여자의 죄를 물어 시간을 벌어줄 사람도 없었다.“왜 대답이 없지?”칼릭스의 입술이 기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침전의 문이 닫히기만을 기다려 짐을 찌르려던 복수의 칼날을 숨겨둔 것인가?”“……폐하.”“네 아비와 세 오라비의 목을 베어 황궁 성벽에 내건 자가 바로 나다.”칼릭스의 목소리는 낮고 잔인했다.“에스테르의 피를 이어받은 공녀라면, 지금 당장 내 숨통을 끊어놓고 싶겠지.”“……”“그 잿빛 머리칼과 서늘한 녹안.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침소를 닦던 시녀 계집이라기엔 지나치게 오만하고 고귀했지.”“제가…… 공작의 딸로 보이십니까?”레일라는 떨리는 숨을 삼켰다. 가족을 죽인 일을 이렇게 가까이서 듣고도 원망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검은 거두었지만 그 손은 아직 제 턱에 있었다.“황태후의 모함을 액면 그대로 믿으실 만큼, 폐하의 눈이 어두워지신 겁니까?”“황태후의 말 따위는 상관없다.”칼릭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단검을 쥐여주었다. 손가락이 제대로 칼자루를 감기도 전에 다른 손으로 군복 앞섶을 풀었다. 레일라는 손을 빼려 했으나 그가 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찔러라.”“……폐하!”“에스테르의 원수를 갚고 싶다면, 지금 내 심장에 이 칼을 꽂아 넣어라.”“이게 무슨……!”“힘껏 찔러라! 짐의 가슴을 가르고 피를 쏟아내게 만들어 보란 말이다!”칼릭스가 그녀의 손등을 누르자 칼끝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레일라는 급히 손목을 꺾어 더 들어가지 못하게 버텼다. 손가락이 떨려 칼자루를 오래 붙들 수도 없었다.“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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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해독제의 기한

“절대 불가하옵니다, 폐하!”황궁 대회의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노성의 주인공은 귀족원 의장, 로엔베르그 후작이었다.“에스테르 가문의 역모 누명이 벗겨진 것은 천만다행이오나, 천한 시녀 출신 계집에게 공작가의 방대한 영지와 금고를 통째로 넘기시다니요!”“의장 각하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헤센 가문과 손잡았던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혈통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와 황실의 전례를 번갈아 들이밀었다. 레일라는 옥좌 뒤 장막 안에서 그 이름들을 들었다. 영지를 돌려주라는 말이 나오자 가장 먼저 반대한 사람들이었다.스릉-!칼릭스가 황실 보검을 반 뼘 뽑았다. 가장 가까이 서 있던 귀족부터 입을 다물었다.“천한 시녀 출신 계집이라.”칼릭스가 로엔베르그를 보았다.“방금 그 더러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린 자가 누구였지?”“폐, 폐하…….”로엔베르그 후작의 턱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누가 천하다는 것이냐, 로엔베르그?”“그, 그것이 아니오라, 신들은 다만 제국의 오랜 국법과 황실의 전례를 걱정하여…….”“국법? 전례?”칼릭스가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붉은 눈에서 번뜩이는 잔혹한 광기가 회의장의 숨통을 틀어쥐었다.“짐이 곧 국법이며, 짐의 말이 곧 전례다.”“폐하!”“짐의 정인을 모욕하는 추악한 오물을 단 한마디만 더 지껄여 보아라.”칼릭스가 칼자루를 눌렀다. 레일라는 그 손을 보았다. 자기 영지의 일을 의논하던 자리가 또 피를 흘릴 자리로 바뀌려 했다.“그 주둥이와 함께 네놈의 목을 단칼에 베어 대회의장 문루에 걸어둘 테니.”“히익……!”후작이 바닥으로 허물어지듯 주저앉으며 비명을 삼켰다.칼릭스가 붉은 융단이 깔린 계단을 천천히 밟고 내려섰다.“짐이 누누이 경고하지 않았던가. 3년 전, 황태후의 거짓 교지에 편승해 에스테르의 영지를 헐값에 집어삼킨 자들이 누구였느냐고.”“소, 송구하옵니다!”“헤센 가문과 결탁하여 공작가의 금괴로 배를 불렸던 자들이 여기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군.”칼릭스의 시선이 귀족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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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첫사랑의 이름

“폐하의 의식과 기억을 옭아매던 주술 독의 잔맥이 드디어 잡혔습니다.”“정녕 사실인가, 수석 어의?”“배합은 잡았습니다. 마지막 정제를 마치면 투여할 수 있습니다.”“남방에서 공수해 온 성수와 희귀 약초의 배합이 끝났단 말인가?”“예. 사흘 뒤면 정제를 마칠 수 있습니다. 먼저 의식을 흐리는 여독이 가라앉을 것입니다. 묻힌 기억이 얼마나 돌아올지는 그 뒤에 살펴야 합니다.”어의실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있던 레일라는 소매를 움켜쥐었다.‘사흘.’어의는 모든 기억이 돌아온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인이 아니었다는 기억 하나만으로도 지금의 처지가 뒤집힐 수 있었다. 바론이 준비하는 탈출로와 마차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기다려도 되는지 더는 자신할 수 없었다.어의실 안에서는 약탕을 옮기는 기척이 이어졌다. 레일라는 그 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린 뒤 벽에서 몸을 떼었다. 어제는 투여 일자를 모른다는 말에 아직 여유가 있을 거라 기대했다. 이제 직접 들은 사흘 안에, 끝나지 않은 준비까지 마쳐야 했다.계획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구에게 탓할 수는 없었다. 황제의 기억이 돌아온 뒤 사정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녀가 내민 증거와 그를 살핀 밤은 사실이었지만, 정인이었다는 말까지 사실로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레일라는 복도 끝을 보고 어느 쪽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부터 골랐다.‘오늘 밤이다.’오늘 밤, 황제가 깊은 잠에 빠진 틈을 타 황궁 서문 지하 수로를 통해 국경으로 내달려야만 했다.***달빛이 은빛 비늘처럼 부서져 내리는 밤.황실 정원 최상층, 백옥으로 깎아 만든 테라스 난간 너머로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왔다.스륵-묵직한 온기가 뒤편에서 레일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칼릭스였다.흑발을 쓸어 넘긴 황제는 레일라의 목덜미에 깊게 숨을 묻었다.“밤공기가 차다, 레일라.”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레일라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어깨는 따뜻합니다. 다만 조금만 느슨하게 안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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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반지가 여는 문

“내 첫사랑의 이름은…… 그것이 아니었는데.”창틀에 올린 레일라의 발이 멎었다. 칼릭스의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없었다. 그녀는 소매 밖으로 나오려던 전송석을 다시 손안에 감췄다.칼릭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레일라는 창틀에서 발을 빼지 못한 채 그의 걸음을 세었다. 첫사랑의 다른 이름을 들었다는 말보다 지금 입고 있는 외투를 먼저 설명해야 했다. 이 방에서 밤바람을 쐰다고 둘러대기에는 신발까지 갖춰 신은 모습이었다.“……폐하.”레일라는 전송석을 숨기며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짰다.“이 야밤에 창틀을 넘어가며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칼릭스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폐하.”“바람이라?”칼릭스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비틀렸다.“외투에 신발까지 갖춰 신었더구나. 창밖에서 누구를 만나려 했지?”“혼자 있었습니다.”“그걸 묻지 않았다. 내 눈을 보아라.”레일라는 전송석을 쥔 손을 창틀 아래로 내렸다. 그가 이름을 의심하는 동안 물건까지 보게 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칼릭스의 시선은 이미 외투 앞섶을 훑고 있었다.칼릭스가 손을 뻗어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레일라의 등이 창틀에 부딪혔다. 발끝이 바닥을 더듬는 동안, 전송석을 감춘 소매가 두 사람 사이에서 눌렸다.“대답해라. 너는 누구지?”“……폐, 하…… 쿨럭!”“너는 대체 누구냐고 물었다!”“폐하의…… 정인입니다……!”“정인? 뻔뻔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마라!”칼릭스의 붉은 눈동자가 살기등등하게 희번덕거렸다.“네 잿빛 머리칼, 서늘한 녹안……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모습과 닮았기에 눈이 멀었다.”“폐하, 제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입 닥쳐라! 방금 내 머릿속을 스친 기억 속에서, 내 첫사랑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그 아이의 이름은 레일라가 아니었다! 결코 레일라 에스테르 따위가 아니었단 말이다!”칼릭스의 포효가 침전을 뒤흔들었다.목뼈를 으스러뜨릴 듯 조여오는 손아귀.“말해라! 짐의 눈을 멀게 하고 내 침소로 기어든 네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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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어의실의 장부

“북부 요새의 반란군 잔당 3,000명을 전원 효수하라.”황금 알현실을 쩌렁쩌렁 울리는 냉혹한 칙명.옥좌에 비스듬히 기댄 칼릭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군단장들을 내려다보았다.“항복을 청하는 자들의 목숨을 구걸하러 왔느냐, 군단장?”“폐하, 북부 귀족 300가문이 무기를 버리고 자비를 청하고 있나이다!”“자비?”칼릭스의 입술이 잔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반역자에게 베풀 자비 따위는 없다.”“폐하, 그들을 모두 베어내면 북부 국경의 방벽을 지탱할 영주들이……!”“입 닥쳐라! 짐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참수하라 일렀을 텐데.”“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투항한 자들도 예외는 없다. 주모자의 목은 성벽에 걸고, 가담한 귀족들의 영지는 모조리 몰수하여 황실 직할령으로 귀속시켜라.”“존명! 황제 폐하의 영을 받들겠나이다!”붉은 망토를 두른 군단장들이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장막 뒤의 레일라는 검지의 흑요석 반지를 만졌다. 간밤에 제 이름을 부르며 매달리던 사람이 이제는 투항한 자들의 목숨을 끊으라고 명했다.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닐 터였다.어의가 말한 정제 완료까지 이틀이었다. 레일라는 바닥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군단장들을 보았다. 약을 늦추려다 발각되면 자신뿐 아니라 조제실 사람들에게도 저 명령이 떨어질 수 있었다. 무엇을 건드려도 남의 목숨과 닿는다는 사실이 답답했다.***정오가 지나 정무가 잦아든 시각.레일라는 영지 문서를 살피러 가겠다고 말하고 침전을 나왔다. 어의실로 길을 바꾼 뒤에는 황제의 두통에 쓸 차를 구하러 왔다고 했다. 문을 지키던 경비병은 검지의 흑요석 반지를 확인하고 물러섰다.반지가 모든 질문까지 막아주지는 않았다. 뒤에서 출입 시각을 적는 소리가 났다. 레일라는 못 들은 척 지하 조제실로 내려갔다. 어의들이 약재를 가지러 자리를 비운 틈에, 청동 약탕관 곁의 조제 일지를 펼쳤다.- 1차 배합: 정화초 추출액 완료.- 2차 배합: 빙령수 증류 완료.- 최종 단계: 이틀 뒤 정제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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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감별석의 행방

칼릭스가 벽에서 뽑아낸 검을 틀었다. 날이 발렌의 목덜미를 스치자, 그가 레일라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발렌.”“폐, 폐하……!”발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감히 짐의 정인을 붙들어 몸을 수색하려 했느냐?”“소, 송구하옵니다! 신은 다만 어의실 주변을 배회하는 자를……!”“그것이 네 혓바닥을 놀릴 이유가 된다 생각하느냐?”“살려주시옵소서! 국법에 따라 비상 경계령을 수행 중이었을 뿐입니다!”“짐의 말이 곧 국법이며, 내 정인의 발걸음이 곧 법도다.”칼릭스가 발렌의 이마를 장검 끝으로 지그시 짓눌렀다.“누가 네게 그따위 권한을 주었지? 헤센의 잔당이냐, 아니면 토옥의 황태후냐?”“아니옵니다! 오직 황실의 안위를 위해 충성을 다했을 뿐입니다!”“소매에 손을 대겠다고 했느냐. 다음에는 네 팔이 먼저 잘릴 것이다.”발렌이 이마를 바닥에 댔다. 레일라는 목덜미에서 흐른 피를 보았다. 황제가 자신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망각초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안도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내 정인이 약을 찾으면 어의에게 전해라. 네 판단으로 붙들지 말고.”칼릭스가 레일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제 품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가자, 레일라. 이런 버러지들과 섞여 있을 곳이 아니다.”“……예, 폐하.”레일라는 숨을 죽인 채 칼릭스의 이끌림에 발걸음을 옮겼다.***깊은 밤, 황제의 침전.무거운 황금문이 닫히자, 칼릭스는 레일라를 침대 위로 조심스레 앉혔다.“손이 얼음장 같구나. 왜 이리 차가운 것이냐?”칼릭스가 레일라의 두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쥐며 입김을 불어넣었다.“침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차서 그렇습니다.”“발렌 때문에 아직 놀란 것이냐?”“……폐하.”“왜 짐에게 알리지 않고 홀로 어의실로 향했지?”“그것은…….”“짐의 두통 때문에 탕약을 구하러 갔던 것이 아니더냐?”“……예?”레일라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칼릭스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레일라의 뺨을 쓸어내렸다.“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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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빌려 쓴 군권

- 공녀님! 지금 당장 탈출하셔야 합니다!수정구 너머로 들려오는 바론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감별석이 황태후 쪽으로 넘어간 것은 확실한가요?”- 수장고에서 사라진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놈들이 내일 밤 연회에 들여오려 합니다.레일라는 잠든 칼릭스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돌에 피를 떨어뜨리는 일은 두렵지 않았다. 그 빛을 본 뒤 그가 무엇을 물을지가 두려웠다.“핏줄이 확인되면, 원수의 딸이 왜 정인 행세를 했느냐고 묻겠군요.”- 돌이 공녀님의 마음까지 증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 물음을 황태후가 먼저 꺼내게 해서는 안 됩니다.“그렇다면 감별석만 되찾는다고 끝날 일도 아니겠어요.”- 그렇습니다! 내일 밤이면 늦습니다! 오늘 밤 흑랑 기병대의 눈을 피해 탈출하셔야 합니다!“도망칠 수는 없어요, 바론 경.”- 공녀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제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잊으셨습니까?”레일라는 검붉은 흑요석 반지를 내려다보았다.“저를 감시하는 군사들이 붙어 있어요. 황궁을 벗어나기 전에 따라붙을 겁니다.”- 하오나 무도회에서는 공녀님이 설명하시기도 전에 황태후가 복수를 들먹일 것입니다!“그렇다면 도착하기 전에 가로채야죠.”- 가로채다니요? 암살대를 어찌 막는단 말씀입니까!“감별석의 이동 경로는 파악되었습니까?”- 서부 외곽의 버려진 풍차 방앗간으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황태후궁의 비밀 안전가옥이로군요.”- 예! 놈들은 그곳에 감별석을 숨겨두고 무도회 당일 들여올 계획입니다!“그렇다면 아직 황궁 외곽을 벗어나지 못했겠네요.”- 하오나 저희 가문 잔당들만으로는 그림자 까마귀의 정예를 뚫기 어렵습니다!“우리가 직접 뚫을 필요는 없어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칼릭스가 제게 쥐여준 칼을 쓸 겁니다.”레일라의 시선이 협탁 위의 주최권 패로 향했다.‘피의 가면무도회’ 최고 주최권 패, 그리고 검지의 흑요석 반지.“제국에서 가장 사나운 사냥개들을 풀면 돼요.”- 설마…… 황제의 친위대를 움직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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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국혼의 예고

“간밤에 누구와 밀담을 나누었지?”레일라는 숨을 멈췄다. 칼릭스의 질문은 방금 발렌에게 내린 명령보다 더 앞선 밤을 향해 있었다. 소매 안의 수정구가 손목에 닿았다.그가 팔을 풀고 앞으로 돌아서자 레일라는 주최권 패가 놓인 탁자에 손을 얹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다.“……폐하.”“대답해라, 레일라.”칼릭스가 뽑아 든 검으로 발치의 대리석을 툭 건드렸다.“밤에 통신을 나눈 자가 누구냐?”“연회의 안전을 위해 연락한 사람입니다.”“짐을 위한 자?”칼릭스의 눈매가 잔인하게 찌푸려졌다.“감히 짐의 침실에서 외간 사내와 전음을 나누고도, 짐을 위한 것이라 둘러대는 것이냐?”“둘러대는 것이 아닙니다.”레일라는 망설임 없이 칼릭스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내일 밤 열릴 피의 가면무도회, 그 연회의 안전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무도회의 안전이라?”“에스테르 가문의 옛 충복들을 통해 황도 외곽 불순 세력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불순 세력이라니? 대체 누구를 뜻하는 것이냐?”“황태후의 잔당들과 헤센 가문의 음모가 황궁 내부로 스며들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습니다.”“황태후의 잔당들이 감히 내 궁전을 넘본단 말이냐?”“그들은 폐하의 옥체를 해치고 정변을 일으킬 기회만을 엿보고 있습니다.”“그렇다면 내 기병대에 알리면 될 일이었다.”“그래서 발렌 경을 불렀습니다. 본대가 나가면 들킬 테니 별동대만 보내달라고 했고요.”칼릭스가 탁자 위의 패를 보았다. 레일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 손을 조금 옮겼다.“폐하께서 연회의 경호도 물어보라 하셨잖습니까. 제 손에 맡기신 일을 확인했을 뿐입니다.”“그래서 짐보다 먼저 명을 내렸다?”“지금 보고드리고 있습니다. 발렌 경이 돌아오면 제가 들은 말이 맞았는지도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정녕 그것이…… 네 진심이란 말이냐?”“제가 가져온 첩보부터 확인해 주십시오.”레일라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는 대신, 반지가 보이도록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발렌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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