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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Penulis: 최은솔
섣달 초엿새 한양에 첫눈이 내렸다. 눈발은 하루가 다르게 굵어졌고 초여드레가 되자 길은 이미 얼어붙어 있었다. 마차가 미끄러지고 사람들 입김이 하늘로 피어올라도 납팔절은 큰 절기였기에 조모는 해마다 법화사에 향을 올리는 것을 빠드린 적이 없었고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길,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날도 이리 추운데...”

낮은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불평들이 곳곳에서 들려왔지만 나정은 조용히 조모를 따라나섰다. 법화사로 오르는 길은 눈에 덮여 있었다. 그러나 산 아래에는 사미승들과 인근 마을의 시주자들이 계속해서 눈을 쓸고 있었기에 길이 미끄럽긴 해도 올라갈 수는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법화사는 예상보다 더 북적였다. 서로의 어깨를 맞댄 채 걸어야 할 정도로 인파가 몰렸고 법회가 열리는 대웅보전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곳에서 법문을 들으려면 자리를 따로 예약해야 했으나 조모는 이미 두 달 전부터 자리를 잡아두었기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여기저기서 조모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리 가운데 혜능수좌의 시선이 조모의 손목에 머무르더니 조용히 불경을 외웠다.

“아미타불… 나씨 큰 마님께서는 참으로 복도 많으시군요.”

그 말을 들은 사중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조모의 손으로 쏠렸다. 그녀의 손목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자단목 염주 한 줄이 채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단 번에 그 물건을 알아보았다. 생전 현무스님께서 칠십 해 동안 몸에 지녔던 성물이자 입적 하루 전 대비마마께 하사했던 귀물이었다.

그 해 대비는 태자비가 되었고 그 이듬해 중전으로 봉해졌으며 네 명의 왕자와 한 명의 공주를 낳아 높은 권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런 염주가 지금 나씨 조모의 손목에 걸려 있었다. 예불이 끝난 후 한양에서 가장 세력이 깊은 최씨 가문의 부인이 정중히 다가와 조용히 청했다.

“큰 마님, 혹여 오늘 소찬을 따로 마련하지 않으셨다면 저희 집에서 함께 드시지요.”

하지만 조모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날이 좋지 않습니다. 며느리와 손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부인의 성의를 감사히 여기지만 오늘은 사양하겠습니다.”

저택으로 내려가는 길에 조모는 방금 있었던 일을 흡족하게 이야기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은근한 기쁨이 묻어 있었다. 그때 나씨 부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님, 그래도 최씨 부인께서 그리 권했는데 함께 드시지 그러셨어요.”

백지현도 아무 말 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숨결 하나마저도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조모는 회색 망토를 입은 나정을 한번 돌아보았다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날에는 그냥 집으로 가는 게 맞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한양은 떠들썩해졌다. 연일 쏟아지던 눈으로 인해 많은 백성들은 굶어 죽었다. 그뿐만 아니라 두터운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집은 무너져 내렸고 그 아래에서 사람과 가축이 함께 깔려 죽었다. 조정은 빠르게 구휼을 명했고 국고가 넉넉지 않은 것을 발견한 어사 하나가 비극의 화살을 법화사로 돌렸다.

한쪽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한 상에 오백 냥씩 하는 채식상을 즐기는 자들을 비난했고 그의 주장은 곧바로 상소로 이어졌다. 그날 채식연에 참여한 여섯 가문은 모두 탄핵을 받았다. 그 연회를 주최한 법화사 역시 빠져나가지 못하고 순순히 만 냥을 구휼하는데 써야 했다. 이 소문은 삽시에 퍼져나가 온 한양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날 저녁, 모든 식솔들이 조모의 정당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는데 진남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날 채식상에 올라온 음식 안 드셨지요?”

조모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했다.

“안 먹었지. 원래는 현이가 예약한 거였는데 정이가 조심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그냥 불주만 하고 돌아왔다. 아무래도 정이의 말이 옳았어. 안 그랬으면 너도 탄핵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어 덧붙였다.

“우리 나가는 전장에서 공을 세운 것도 그렇다고 해서 조정에 큰 기여를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정이가 대비마마를 구한 그 은덕 하나로 작호를 얻은 것이니 왕실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걷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조심해서 나쁠 거 없지.”

순간, 방 안은 숨 막히도록 고요해졌다. 나씨 부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진남군은 무언가 말하려고 입술만 달싹였을 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식솔들은 조심스럽게 나정을 보았다가 시선을 다시 백지현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큰일을 저지를 뻔했어요.”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말없이 흐르는 눈물은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저릿해지게 만들었다. 울음소리는 없었지만 가슴이 아릴 정도로 애잔했다.

“왜 이 아이를 탓하십니까?”

나정의 큰 오라버니가 얼른 입을 열었다.

“괜찮다. 큰일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괜히 자책하지 말거라.”

새언니가 급히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이미 취소하지 않았느냐? 무사히 지나갔는데 왜 그렇게 우는 것이냐?”

그러나 백지현은 여전히 흐느끼며 말했다.

“전 그저 너무 겁이 납니다.”

“어이구. 바보 같은 너를 어쩌면 좋단 말이냐?”

나씨 부인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백지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주변에 앉아있던 이들은 저마다의 말로 그녀를 위로했다.

“괜찮다. 모두 지나간 일이지 않느냐?”

“마음고생이 컸던 게로구나.”

“다음에 조심하면 된다.”

누군가는 진심으로 또 누군가는 그저 겉치레로 그녀에게 한마디씩 건넸다. 위로의 말이 쏟아지는 가운데 말없이 조용히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다. 백지현은 계속 흐느꼈다. 그 눈물은 마치 가느다란 실처럼 뺨을 타고 흐르며 누군가의 마음에는 연민을 누군가의 마음에는 의심을 새겨 넣었다. 나씨 부인은 애달픈 표정으로 그녀를 달랬고 조모는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울고 자리에 앉거라. 누가 너를 탓했느냐? 효도하고 싶었던 마음은 이해한다. 다만 운이 조금 안 따랐을 뿐이지.”

조모는 고개를 돌려 진남군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이는 복을 타고난 아이다. 이번에도 돌아오자마자 집안의 화를 막아주지 않았느냐?”

진남군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는 무장이라 그런지 따뜻하고 온화한 성격을 지닌 자는 아니었다. 정직한 창 끝 대신 내뱉는 말마다 날카로웠고 지방에 나가 있을 때도 딸을 보러 오지 않았다. 한양에 머무는 지금도 관청 일과 사교에 매달리느라 가정사에는 무관심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부인, 문기당은 삼 일 안에 정리하세요. 정이가 열흘이나 어머님 곁에 머무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순간 식탁 위 공기가 조용히 바뀌었다. 나씨 부인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돌보던 아이는 그저 친족일 뿐 가족은 아니었다. 나정은 한마디 원망 없이 열흘을 기다렸다. 난동이나 억지를 부리지 않고 오직 미소와 공손함으로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다. 그녀는 칼을 들지 않고도 전세를 뒤집어 버렸다. 모두가 숨죽여 그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나정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진남군에게 답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사실 할머니와 함께 있는 것도 기쁘지만 혹여나 불편함을 드릴까 마음이 쓰였습니다. 문기당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녀는 혜화당으로 만족하겠다는 말도, 문기당을 양보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원체 그 자리는 본인의 것이었으니 돌려받는 것이 당연했다. 마차로 돌아오는 길, 조용하던 분위기 속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어머니, 큰 어머니는 왜 정이 언니를 좋아하지 않으세요?”

사촌 여동생 나미가 묻자 둘째 마님은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정이를 낳을 때 출혈이 심했다고 들었다. 생사의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났거든. 반년이 지나서야 겨우 손발을 움직였으니 그 아이 얼굴만 봐도 마음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나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언니가 불쌍하네요. 큰 아버지는 집안일에 무관심하고 큰 어머니는 사촌을 더 아끼시니 말입니다.”

둘째 마님은 아무 대꾸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도 마음 한편이 석연치 않았다.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끔찍한 장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릴 적, 정이가 겨우 다섯 살이었을 때, 그녀가 말대꾸 했다는 이유 하나로 나씨 부인은 신발을 벗어 그녀의 입을 사정없이 때렸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큰 충격에 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 집에 얹혀사는 입장이었기에 정이를 감싸줄 처지도 되지 못했다.

“정이는 많이 달라졌더구나.”

둘째 마님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전에는 성격이 급하고 마음이 여려 늘 상처받고 눈물부터 흘리던 애가 지금은 참는 법을 배웠더구나.”

그녀는 머릿속으로 방금 벌어졌던 일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미소 지으며 백지현을 누그러뜨렸던 그녀의 모습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니 지현이 조금 더 초라해 보였던 건지도 모르겠구나.”

둘째 마님은 빙긋이 웃었다.

“문기당도 돌려줘야 하잖아요. 우리 나씨의 좋은 것들을 왜 자꾸 그 아이가 차지하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뭐 이제 그럴 수도 없게 되었지만요.”

그 말에 둘째 마님은 깜짝 놀라 급히 딸의 입을 막았다.

“쉿, 조용히 하거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러면서도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정이가 이제는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더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어. 그 아이가 어쩌면 나가를 다시 일으켜 세울 인물일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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