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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ผู้เขียน: 최은솔
나정은 조모가 머무는 서정당(西正堂)에 임시로 거처하게 되었다. 조모는 서쪽 방을 쓰고 있었고 동쪽 방은 나정을 위해 빠르게 정리되었다.

“네 새언니가 난산이었을 때 현이가 명의를 불러 모자의 목숨을 살렸단다. 그 아이는 이 저택의 은인이야.”

조모는 나정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사촌 여동생인 백지현은 사람을 다루는데 익숙하고 집안 형편도 넉넉하여 이 저택에 발을 들이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웃어른들은 그녀를 총애했고 아랫사람들은 그녀를 우러렀다. 이 와중에 새언니를 구한 공덕까지 더해지니 그녀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씨 부인은 그녀의 거처를 문기당으로 옮겨주었다. 명분은 완벽했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곳은 명백히 나정의 자리였지만 그 당시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정아, 넌 본래 사리 분별을 잘하는 아이잖니. 혜화당도 머물기에 나쁘지 않단다.”

조모는 부드럽게 타이르는 듯했으나 그 말은 곧 양보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정이 없었다면 이 진남군 댁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조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전생에도 조모는 그리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백지현의 언변에 현혹되었을 뿐. 모든 진실을 깨달은 후 도리어 자신을 감싸주었던 사람이었으니 나정이 그녀를 원망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조모는 예기치 못한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날 밤 그녀 곁에 있었던 사람은 나씨 부인과 백지현뿐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사라지자 나정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할머니, 저 여기에 머물 수 있게 주세요.”

나정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어느덧 열일곱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저의 혼처를 정해주시지 않으실 건가요?”

그녀는 조모를 향해 불손한 말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화내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더 유연한 웃음을 머금었다.

“참 좋은 아이로 자랐구나. 더욱 대범하고 너그러워졌어.”

조모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기쁘게 말했다.

“그래, 이곳에서 지내도 좋다. 마음 쓰지 말거라.”

“네.”

나정은 조모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그 손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한참을 조모와 이야기하다 슬며시 백지현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그 사촌 동생 말입니다.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너의 큰 외삼촌의 적녀란다. 오랫동안 지방에 맡겨졌지. 계모의 구박이 두려워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하더구나.”

그러더니 조모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네가 한 번은 봤을 줄 알았는데...”

나정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처음 봤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어머니와 꼭 닮았더군요.”

“조카가 고모를 닮으면 복이 많다지.”

조모가 흐뭇하게 웃으며 답하자 나정도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녀의 웃음은 짐작과 확신이 교차하는 속내를 감춘 채 고요하게 흘렀다.

“네 큰 오라버니는 본 적 있다고 하더구나.”

조모는 이 말을 덧붙였다. 나정은 다시 한번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알겠지. 둘은 한핏줄이니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조모 곁에 머물렀다. 서정당의 밤은 평온했고 기도 소리만이 은은하게 들려왔다.

반면, 동정당(東正堂)에서는 나정 부모의 말소리가 낮고 무겁게 오갔다.

“정이가 돌아왔으니 현이 방을 다시 마련해 줘야겠습니다.”

진남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나씨 부인은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로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혜능수좌(慧能首座)께서 직접 짚어 주신 자리입니다. 문기당의 기운이 현이에게 좋다고 하셨잖아요. 정이는 예전부터 사리 분별을 잘 하는 아이였으니 이해할 겁니다.”

그러더니 급하게 말을 덧붙여 말했다.

“혜화당은 동정당 바로 뒤편에 있습니다. 작은 문으로 오갈 수 있어 저희와도 가까이 지낼 수 있고요.”

진남군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알아서 하시지요.”

그는 이 말만 남긴 채 송 씨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나씨 부인은 나정을 불러들였다.

“너의 빈자리가 몹시 그리웠단다, 정아. 현이가 내 곁에 있어서 다행이지. 현이마저 없었다면 이 어미는 네 얼굴도 못 보고 갈 뻔했단다.”

나씨 부인은 울먹이며 나정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아무 표정 없이 말했다.

“어머니, 고생 많으셨습니다.”

“현이도 한동안 몸이 많이 아팠단다. 법화사의 수좌께서 문기당에 들어가야 나쁜 기운을 누를 수 있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러니 너무 그러지 말거라. 너 덕분에 우리 집안이 작호를 받았다고 하지만 그걸 자꾸 겉으로 드러낸다면 네 아버지의 체면이 서질 않잖니. 진정한 공로는 내세우지 않는 법이란다.”

나씨 부인은 이 말을 하며 조심스럽게 나정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말없이 자신의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서 정 민망해하신다면 그 자리를 내려놓으시면 되겠네요. 제가 직접 전하께 청을 드려 작호를 하사받으면 됩니다. 군주로 봉해지면 아버지 체면도 덜 상하지 않겠습니까?”

나씨 부인은 말문이 막혀 한참 동안이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작호는 다 아버지의 은덕으로 내려오는 것이란다.”

“그렇습니까? 이상하네요. 방금 어머니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대비마마를 구한 은덕으로 지금의 작위를 얻은 거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는 건 제 공이 가장 크다는 뜻 아닙니까?”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끝을 흐렸다.

“공은 남이 알아주는 것이지 스스로 드러내는 게 아니란다.”

“그럼 어머니는 제 편도 들어주지 못하시겠네요?”

나정은 부드럽게 되물었다.

“그렇게 티 내는 건 옳지 않은 일이야.”

“그럼 제가 제 방을 돌려달라고 말하는 것은 그릇된 겁니까?”

나정의 말은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이어졌다. 그러자 나씨 부인의 얼굴에 슬슬 분노가 스치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는 잠시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위 내관의 존재를 떠올린 나씨 부인은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을 돌렸다.

“어디서 사나 마찬가지다. 문기당이 혜화당보다 특별한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이냐? 사소한 것에 마음을 두지 말거라.”

그러자 김단은 다시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사소한 것이라면 다시 제게 돌려주셔도 되겠네요.”

나씨 부인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가늘게 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정아, 넌 예전과 많이 달라졌구나.”

나정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니, 딸이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을 찾는 것이 그렇게 무례한 일인가요? 정 안되면 대비마마께 여쭤볼까요? 과연 뭐가 옳은 일인지를 말입니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나정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단이 깃들어 있었다. 나씨 부인의 눈빛 속에는 놀람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으나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정은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예를 지켰고 얼굴에는 늘 인자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누구도 그녀를 두고 ‘미쳤다’거나 ‘이성을 잃었다’고 말할 수 없도록 그녀는 스스로를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정은 조용히 서정당에 머물며 조모 곁을 지켰다.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아 불경을 읽고 조용히 차를 데웠다.

그 시각, 백지현은 조용히 나씨 부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치 빠른 그녀는 모든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씨 부인을 달래주었다.

“고모,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제가 방을 비우면 됩니다.”

“아니.”

그녀는 단호하게 백지현의 말을 거절했다. 그러더니 곧이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방법이 있다. 이번에는 네 할머니한테 부탁하여 정이에게 말하도록 해야겠구나.”

겨울은 점점 깊어졌고 밖에는 뼛속을 파고드는 칼바람이 불었다. 며칠 뒤면 납팔절(腊八节)인데 불가에서는 이날을 중히 여겼기에 ‘법보절(法宝节)’이라고도 불렀다. 그날에는 사찰에서 큰 법회가 열리고 불죽(佛粥)이 배부되었다.

법화사의 납팔절은 매년 성대하게 진행되었고 그날 하루 올라오는 정식 채식 한 상은 무려 오백 냥이 넘는 값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세 있는 집이 아니면 예약조차 어려웠다. 수년 동안 진남군 댁은 법보절의 연회에 참여하지 못했고 그 일은 늘 조모에게 아쉬을 남겼다.

어느 날 오후, 나정은 조모 곁에서 잠두를 고르고 있었다. 손끝으로 콩을 고르던 조모의 귓가에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스쳤다. 문이 열리자 나씨 부인이 백지현을 데리고 들어왔다.

“어머님, 현이가 기쁜 소식이 있다고 합니다.”

나씨 부인의 얼굴에는 생긋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기쁜 소식이라니?”

조모가 묻자 백지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할머니, 이번 납팔절에 법화사의 채식상을 예약했습니다. 그날은 법보절이라 자리가 귀했지만 운이 좋았어요.”

그녀는 이제 조모를 자연스럽게 할머니라 부르며 나가의 손녀인 듯 행동했다. 그 말에 조모의 얼굴에는 흠칫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그 귀한 자리를 예약했느냐?”

“혜능수좌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전에 몇 번 뵌 적이 있거든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저희도 예약하긴 어려웠을 겁니다.”

백지현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네가 또 애를 썼구나.”

조모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 날 만큼은 할머니께 효를 다하고 싶었어요.”

백지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자 조모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 옆에 앉아 있던 나정은 조용히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해의 납팔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에 나씨 부인과 백지현은 나정이 방을 양보하지 않자 법보절 채식상이라는 수를 꺼내들어 식솔들의 마음을 돌리고자 했었다. 하지만 섣달 초엿새 내리기 시작한 눈은 초아흐레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로 인해 한양 일대는 눈 재해로 피해를 입었고 백성은 얼어 죽었으며 가축은 몰살당했다.

그 와중에 벌어진 납팔절 연회는 조정의 질타를 받게 되었다. 그 대가로 법화사는 만 냥이라는 값을 지불해야 했고 그날 자리를 예약한 여섯 집안 역시 모두 탄핵을 당했으며 나정의 아버지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씨 부인은 뻔뻔하게도 그 책임을 백지현이 아닌 나정에게로 돌렸다.

“정이만 돌아오면 이 집에 재수가 없다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은 천천히 하인들 사이에서 퍼졌고 결국 나정이 모든 비난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나정은 그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들었습니다. 납팔절의 채식상 자리는 단 여섯 개뿐이고 상 하나에 오백 냥이 든다고 하더군요.”

백지현은 고요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두가 앞다투어 예약합니다. 한양에 불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데 할머니.”

나정이 조용히 조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를 우리가 차지하면 누군가는 우리를 곱게 보지 않을 겁니다.”

조모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그때 나씨 부인이 서둘러 그녀의 말을 되받아 쳤다.

“불연(佛緣)이 있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기회이다. 탓할 게 아니라 부러워해야 맞겠지. 큰 마님은 덕이 깊으신 분이니...”

조모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정이 다시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할머니, 그래도… 이번에는 그만두시는 게 어떻습니까?”

자신의 계획을 자꾸만 가로막는 나정에 나씨 부인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백지현 또한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언니,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허나 걱정하지 마세요. 혜능수좌께서 직접 나서주실 겁니다. 절대 물의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요.”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이번에는 백지현도 웃음을 유지하지 못했다. 나씨 부인의 눈에도 슬슬 분노가 어려 있었다. 조모는 중간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됐다. 올해 법보절에는 나 혼자 향불 하나 피우고 돌아오겠다.”

조모의 결정은 단호하지 않았지만 명백했다. 손녀가 갓 돌아온 마당에 억지로 채식 상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그 법보절 자리는 결국 문기당을 빼앗기 위한 명분이었다는 것을 조모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씨 부인은 백지현을 데리고 나가며 얼굴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하인들 사이에서는 벌써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정은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서랍을 열고 한 줄의 염주를 꺼냈다. 자단목에 정밀한 불상 조각이 박힌 염주는 숨이 막힐 정도로 정교하고 귀했다.

“할머니, 법보절에 이걸 차고 가세요.”

그녀는 염주를 조용히 조모에게 내밀었다. 조모는 그것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이건 현묘염주 아니냐? 대비마마의...”

“맞습니다. 대비마마께서 제게 하사하신 겁니다. 저의 평안을 빌며 주신 거지요. 할머니께 하루만 빌려드릴 테니 다녀오시면 다시 돌려주세요.”

나정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조모는 그 순간 가슴속에 뭔가가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오백 냥 채식 한 상보다, 만금의 은전보다 더 빛나는 것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왕실의 은혜이자 대비의 총애. 그 모든 것을 지닌 아이가 지금 조용히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대체 왜 망설였을까? 왜 그 아이와 자신의 손녀를 비교했을까? 자신의 핏줄이자 나가의 장녀인 이 아이만이 진짜인데 말이다. 오히려 어딘가 이상한 쪽은 백지현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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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하겸은 늘 그렇듯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정월 초하루의 아침, 그는 곤복을 정제하게 갖춰 입었고 소매에는 용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는 구류의 면관(冕冠)을 쓰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태어나면서부터 그에게 드리워진 격과 품을 더욱 부각시켰다.그의 깊은 눈동자가 조용히 나정에게 내려앉더니 곧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정초 아침에 궁에 가서 시혜를 받으려는 것이냐?”나정은 뜻밖의 말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대군자가...?”그러나 소하겸은 그녀의 말을 끊고 담담히 말했다.“주 부장, 창고에서 은여우 모피로 된 망토를 하나 찾아오거라. 이런 행색으로 따라오면 외명부 부인들이 어머니께서 너를 박대하는 줄 알 것이다.”그는 말없이 일 처리를 마친 후에야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나정은 자세를 바로잡고 성실하게 답했다.“궁궐 안은 너무 붐벼서요. 대비마마를 뵙기 어려울까 염려되어 관저의 총관사를 만나 서북문으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소하겸은 말없이 그녀를 보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나와 함께 들어가자.”이때 주 부장이 윤기나는 은여우 망토를 들고 돌아왔고 소하겸은 감정 없는 얼굴로 망토를 집어 들더니 나정에게 건넸다.“벗고 이걸로 갈아입거라.”나정은 고분고분 망토를 벗었다. 새로 입은 은여우 망토는 가볍고 따뜻했으며 품격마저 더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소하겸은 그녀의 몸종과 마부는 관저에 남기고 직접 그녀를 데리고 궁궐로 향했다. 나정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고 그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소하겸의 눈빛이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관저에서는 검은 옻칠을 한 평정 마차 한 대가 조용히 출발했다. 덮개가 낮고 장식이 없는 마차는 눈에 잘 띄지 않아 누구도 그 안에 옹성대군이 타고 있다고 짐작할 수 없었다. 마차 안에서 나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대군자가, 오늘 조참은 이미 끝나셨습니까?”소하겸은 무심한 듯 대답했다.“조참은 사시 말에 끝난다. 짐은 끝날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26화

    백씨 마님의 마차가 먼저 궁궐을 향해 출발했다. 그녀 곁에는 늘 그렇듯 그녀의 측근인 진 아주머니가 동행했다. 진 아주머니는 일곱 살 때부터 백씨 마님 곁을 지켰고 그녀가 시집올 때는 지참 몸종으로 함께 따라왔으며 이후 하급 사내종과 짝을 이뤄 정식 내실 아주머니로 올라선 인물이었다.그녀는 어린 시절 채찍을 맞으며 컸고 몸이 약해 아이를 가지기 어려웠으며 지아비는 병으로 쓰러져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녀에게 남겨진 건 오직 백씨 마님뿐이었기에 그녀의 왼팔이 되어 모든 일을 톡톡히 해냈고 필요할 때는 칼도 들이밀었다. 그녀는 세상의 누구보다 백씨 마님의 속내를 잘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녀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보경, 내가 정이를 너무 가혹하게 대한 건 아니겠지?”백씨 마님은 속으로 파문이 일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미워도 그 아이는 자신의 딸인데 얼굴만 봐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답답함이 치밀어 오르고 손길 닿는 것조차 불편했다. 그래도 약을 탄 죽을 그녀에게 주는 것은 너무했다는 생각에 내심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저 하루쯤 살갗이 부풀고 가렵게 하는 정도였지만 그 한 사발에도 양심이 흔들렸다. 그러자 진 아주머니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마님, 다 정이 아가씨를 위해서가 아닙니까? 현이 아가씨에게도 길을 열어주시려는 깊은 뜻도 있으시잖아요.”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그릇에 담긴 물도 너무 가득하면 넘치는 법입니다. 가진 게 많은 자는 덜어낼 줄도 알아야 덕이 쌓이는 것이지요. 마님의 결정은 두 아이 모두를 위한 길입니다.”백씨 마님은 천천히 숨을 토했다.“그래, 네 말이 맞아.”그러다 뭔가 허전했던지 말을 덧붙였다.“반대로 만약 현이가 저리 빛이 났다면 내가 적당히 눌러주고 정이에게 기회를 주었을 거야.”진 아주머니는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현이 아가씨는 언제나 정이 아가씨의 그림자 뒤에 있었습니다. 그토록 총명하고 착하고 효심 깊은 아이인데 마님께서 조금 더 아껴주셔도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25화

    백씨 마님의 심장은 마치 천 갈래로 찢긴 듯 저며왔다. 백지현이 무언가를 부러워하는 그 표정을 그녀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녀를 만족게 하고 싶었다. 백지현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나정이 가지게 되는 일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 생각에 이르자 백씨 마님은 주저 없이 장롱을 열어 작은 옥병을 꺼내 들었다. 예전부터 감춰두었던 비밀스러운 약제가 하나 눈에 띄었다. 향조차 미미하여 일반인은 구분하기도 어려운 약제였다.“아침에 끓인 연와죽 한 그릇 준비해 오너라.”백씨 마님은 몸종에게 조용히 일렀다. 그녀가 사라지자 백씨 마님은 병 속의 가루를 아주 소량 덜어내 죽에 섞었다. 죽은 다시 찬합에 담겨 몸종 손에 들려졌고 백씨 마님은 천천히 문기당으로 향했다.“어서 죽을 마시거라. 대비마마의 전갈이 도착했다. 너를 데리고 함께 궁궐로 들어오라는 명이었어. 길이 막히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백씨 마님은 부드럽게 웃으며 죽 그릇을 나정에게 내밀었다. 나정은 조용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주 옅은 향기. 그러나 그녀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에 이 죽을 마신 날 온몸에는 붉은 반점이 돋아났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어 이틀을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다음에도 또 한 번 이런 상황이 왔는데 그녀는 경계하면서도 설마 어머니가 자신에게 그러실까 하는 마지막 믿음으로 마셨지만 결과는 똑같았다.죽은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약은 백씨 마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만 사용하는 독이었다. 쌍둥이 첩 중 하나에게는 진한 농도로 사용한 바람에 피부가 갈라지고 피를 흘리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정에게 이 약을 쓴 것은 단지 그녀의 기회를 빼앗기 위한 용도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나정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죽 그릇을 들어 올렸다.“어머니, 먼저 한 모금 드세요. 궁에서는 식사도 늦게 나오지 않습니까? 공복에 견디시기 어려우실 겁니다.”백씨 마님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다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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