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다는 그녀의 말에 진유경은 얼굴이 굳어졌다. 고은영의 눈빛에는 참지 못할 분노가 일렁였지만 그녀는 애써 감추고 있었다.진유경은 약간 딱딱하게 말했다.“어떻게 그럴 수 있죠? 배준우 씨 아내시잖아요.”‘강성의 최고 명문가로 시집온 사람인데 돈이 없다고? 그냥 주기 싫은 거면서...’고은영의 이런 태도에 진유경은 더 분노가 치밀었다.“은영 씨 친할머니잖아요. 지금 병상에 누워 계신다고요. 정말 그냥 보고있기만 할 겁니까?”친할머니라는 말은 왠지 모르게 고은영의 신경을 건드렸다.고은정은 이번 생에 가족과의 인연이 너무나도 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량천옥 사건도 그녀에게 가혹한 교훈을 주었고 진씨 가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진정훈과 진윤만이 그녀에게 확고한 태도를 보였고 진유경의 본성을 알지 못했다면 진호영은 지금까지도 양녀와 친여동생 사이에서 양녀를 택했을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와 할머니도 처음부터 끝까지 진유경 편이었다. 진유경이 친할머니라는 단어를 쓰자 고은영은 코웃음을 쳤다.“제 친할머니인 건 맞지만 저 혼자만의 친할머니인 건 아니잖아요. 어릴 때 누구를 제일 많이 아꼈으면 그 사람이 책임지면 되는 거죠.”‘갑자기 달려와서 1억을 요구한다고?’만약 처음부터 진씨 가문에서 고은영을 찾았으면 지금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할머니가 처음부터 그녀를 받아들였다면 둘째 오빠와 첫째 오빠도 지금과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지만 말이다.진유경은 고은영의 말을 듣고 더욱 초조해졌다.“아무도 할머니를 돌보지 않는 건 다 은영 씨 때문이에요.”“둘째 오빠랑 셋째 오빠가 할머니한테 막 대하는 것도 다 은영 씨 때문이잖아요.”진유경은 원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진씨 집안은 원래 잘 살았다. 아버지의 사랑, 할머니의 보살핌, 형들의 총애까지 받으면서 자랐다.하지만 고은영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완전히 무너졌다. 두 오빠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마저 잃었고 유일하게 그녀 편을 들어주던 할머니가 갖고있던 돈도 둘째 오빠가
고은영이 전화기 너머로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 끝에는 울먹임까지 섞여 있었다.배준우가 물었다.“무슨 일인데? 은지 씨, 어디 있는데?”“공항 가는 길에 있어요. 방금 전까지 통화 중이었는데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답을 안 해요. 교통사고가 난 것 같아요.”‘교통사고라니...’강성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산길이 한 구간이 있었는데 그 길은 산을 깎아서 만든 길이었다. 그리고 오늘 날씨는 고은지가 전화로 말했던 것처럼 눈도 내리고 얼음이 얼 정도로 매우 추웠다.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고은영은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전화 너머로 배준우는 고은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고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고은영을 다독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당장 사람 보내서 확인할게.”“빨리요.”전화를 끊은 고은영은 집사를 향해 말했다.“집사님, 차를 준비해 줘요. 저도 갈래요.”“알겠습니다, 사모님.”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차를 준비하러 갔다. 고은영은 아직도 전화를 끊지 못한 채였다.집사가 돌아서자 그녀는 다시 전화기 너머로 외쳤다.“언니, 언니, 내 말 들려?”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별장 문을 나섰다. 밖은 생각보다 너무 추웠고 그녀가 입은 옷은 날씨에 비해서 너무 얇았다.하지만 고은정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빨리 고은지를 찾으러 가고 싶을 뿐이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진유경은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급히 다가왔다.“은영 씨, 드디어 절 만나러 나와주신 건가요?”고은영이 반응도 하기 전에 진유경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하지만 고은영은 고은지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상태였기에 바로 냉랭한 표정으로 손을 뺀 뒤 말했다.“뭐라고요?”“은영 씨, 미안해요. 그동안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저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찾으러 온 거예요. 할머니께서 아프셔서 수술비 1억이 필요하거든요.”진유경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자 고은영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제서야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진유경임을
‘사실 확실한 거지만...’“이번에 가서 희주를 찾지 못 하더라도 난 강성을 떠날 거야.”“그래? 그럼 우린...”“어제 원래 너랑 같이 샤브샤브를 먹으려고 했거든? 근데 윤설 씨가 아이를 낳았다며. 너도 많이 걱정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못 불렀어.”‘어젯밤이라고? 그래서 어제 나한테 만나자고 했던 거구나?’고은영은 어제 밤새 병원에 있었고 오늘 아침에야 집에 돌아왔다.“그럼 내가 공항으로 갈까?”고은영은 고은지가 강성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고은영이 강성에 있는 대학을 고른 건 안지영 덕분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고은지가 곁에 있어 든든했기 때문이었다.“오지 마. 비행기 시간이 다 됐어. 이미 늦었어.”“그럼 좀 일찍 전화하지 그랬어.”“게다가 오늘 눈이 와서 길이 위험해.”고은지는 고은영이 자신이 떠난다는 걸 알고 급하게 공항에 오지 못하게 일부러 시간을 맞춘 것이다.“일부러 그런 거야?”“은영아, 너만 잘 지내면 돼.”고은지는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고은영은 여전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그럼 나태현 씨랑 량이모 사이 일은요?”고은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고은지가 지금 떠나는 게 또 다른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됐던 것이다.나태현은 나태웅과 마찬가지로 고집이 센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고은지가 천락 그룹에서 뭘 했는지 안 봐도 뻔했기에 만약 그 일로 천락 그룹에 이 손해를 보면 나태현은 절대 고은지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만약 나태현이 정말로 고은지를 괴롭히려 한다면 차라리 고은지가 강성에 남아있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배준우에게 부탁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고은지는 고은영이 걱정하는 바를 알고 대답했다.“다 처리했으니까 걱정하지 마.”하지만 아무리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그녀는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고은영이 말을 잇지 못하자 전화 너머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쿵’ 하고 무언가가 세게 부딪히는 소리였다. 전화 너머로도 그
고은지는 강성을 떠났다. 숨 막히고 온통 가시투성이였던 이 도시에서 벗어났다.“어디로 갔는데요?”나태현이 물었다.“그건 말해줄 수 없어.”량천옥은 냉소적으로 말했다.과거의 일들이 다 밝혀졌으니 이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인연도 남아선 안 됐다. 고은지도 분명 그걸 원할 것이었다. 이젠 나태현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니 그녀를 찾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나태현의 눈빛이 더 싸늘해졌다.“그럼 강성을 떠났다는 거예요?”“태현아, 나랑 너희 할아버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부터 알고 있었다면 너랑 은지가 왜 이어져서는 안 되는지 너도 알았겠지.”량천옥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가 자꾸 고은지의 행방을 묻는 걸 보며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지하고 있었다.나태현은 전부터 고은지에게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증오 때문에 그 감정을 억눌러왔던 것이다. 이제 진실이 밝혀졌기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전처럼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대체 어디로 간 거예요?”나태현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량천옥의 호흡이 깊어졌고 그를 바라보는 눈빛도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이제 다 밝혀졌어. 그렇게 오래 짓눌러온 과거의 진실이 드디어...’그녀 자신도 이제야 비로소 모든 걸 인정했고 딸의 앞날이 부디 평온하길 바랐다. 량천옥은 드디어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나태현의 증오를 낳았던 그 끔찍한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고은지도 이제는 나태현, 그리고 그 가문과의 인연을 끊어야 했다....그 시각, 나태현은 차에 올라타 담배를 껐다. 그리고 앞좌석에 있는 양지호에게 말했다.“공항으로 가.”“네, 알겠습니다.”양지호의 대답과 함께 차는 단지를 빠져나갔다.2층 창가에 선 량천옥은 그 차가 멀어지는 걸 끝까지 바라봤다.그녀는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당당히 마주하려 했지만 그래도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그날의 일을 고백하는 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었
그 시절, 량의와 량천옥에게 10억 원은 말 그대로 꿈에서만 받을 수 있는 액수의돈이었다.량천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태현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미 다 알면서 누구를 원망하겠어요.”“하지만 너희 할아버지 말이야. 처음엔...”“저희 할아버지도 괜찮은 사람은 아니에요.”나태현은 량천옥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도 아니고요.”량천옥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녀 역시 결백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일에서는 자신이 피해자였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나태현이 찾아낸 자료를 보면 량천옥과 량의의 대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그 사건에 관여된 모두가 결코 순수하지 않았다.“순진한 척하지 마세요.”나태현은 한 글자씩 칼로 베듯이 말했다.“그날의 그 자리가 당신한테 무슨 의미였는지 제일 잘 알잖아요.”량천옥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나태현은 깜빡이도 안 켜고 그녀의 가장 깊은 곳을 찔러왔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내가 결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그날 있었던 일이 다 내 책임은 아니었다는 걸 알아주길 바랐을 뿐이야. 그리고 너희 어머니의 죽음은 나랑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도.”그녀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설명하려 한 적 없었다. 오히려 홀로 이 과거를 끌어안고 편견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왔다.하지만 이젠 달랐다. 고은지가 나태현과 깊은 인연을 맺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추악한 기억이더라도 이제는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했다.량천옥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나태현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네 할아버지가 나한테 그런 짓을 하는 걸 네 어머니가 보셨거든. 그래서...”“그만하세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태현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말했잖아요. 이미 다
량의는 줄곧 그 영향이 너한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생각하라고 말해왔다. 량천옥은 그녀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놀라웠다.“천옥아, 나도 알아. 나씨 가문이 좀 지나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네가 지금 갖고 있는 걸 좀 생각해 보면...”“그만하세요!”량천옥의 날카로운 외침에 량의의 말은 중간에서 뚝 끊겼다.지금 가진 모든 것들은 딸과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을 포기해서야 갖게 된 것들이었다. 만약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같은 선택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젠 진짜 지긋지긋해요.”량천옥은 한 글자 한 글자 날을 세우듯 말한 뒤,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파고들었지만 그보다도 그녀를 더욱 숨 막히게 한 건 수년간 벗어나지 못했던 량의의 ‘굴레’였다.고은지의 엄마로서, 배항준의 아내로서, 천락 그룹 안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입지를 가진 여자로서 모두가 그녀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런 화려함 속에서 그녀는 온몸을 찌르는 가시투성이 갑옷을 입고 버텨왔던 것이다. 그 가시는 남을 찌르기도 했지만 가장 깊게 베인 건 결국 그녀 자신이었다.끝없이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그녀는 한참을 서 있었다.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어 나태현에게 전화를 걸려던 찰나,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창문이 절반쯤 내려가고 그 안에서 나태현의 차가운 얼굴이 드러났다. 숙취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전보다 창백했다. 량천옥은 손에 든 휴대폰을 더 힘주어 쥐었다.“은지는 어딨어요?”차가운 목소리로 묻는 그와 동시에 량천옥이 입을 열었다.“마침 널 찾으려던 참이었어.”나태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왜요?”“너희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야.”량천옥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태현의 눈빛에 싸늘한 빛이 번뜩였다. 평소였으면 이 말을 들은 즉시 격렬하게 반응했을 것이다.어머니라는 단어는 그의 아버지가 입에 올려도 그의 분노를 자극할 만큼의 금기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