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혜와 경민준은 병실을 나와 한동안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 다다르자, 연미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돼, 아무도 없어.”경민준이 살짝 고개를 돌려 연미혜를 바라봤다.“보다시피 할머니 병세가 아직 불안정하니까, 이혼 이야기는 조금만 더 미뤘으면 해.”연미혜는 굳이 경민준을 바라보지도, 당황하거나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담담하게 대답했다.“알겠어.”“고마워.”그녀가 자리를 뜨려 하자,
이틀 뒤 점심, 연미혜는 구진원과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발신자를 다름 아닌 경민준이었다.이를 확인한 연미혜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할머니 깨어나셨어.”순간, 연미혜의 얼굴에 안도와 기쁨이 스쳤다.“지금 바로 갈게.”“알겠어.”전화를 끊은 뒤, 연미혜는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구진원에게 말했다.“진원 씨,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식사는 같이 못 할 것 같아요.”“괜찮아요...”구진원은 그녀가 정말 급한 전화였다는 걸 눈치챈 듯 고개를 끄덕였
박영순과 이금자 역시 늘 예의를 갖춰 모두를 대하던 하승태가 두 사람 앞에서 손아림을 그렇게까지 분명하게 거절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박영순은 여전히 손아림과 하승태가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애써 웃으며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이번 일은 아림이가 경솔했어요. 돌아가서 따로 잘 타이르겠습니다. 괜히 시간 뺏어서 죄송하네요. 조만간 지유랑 같이 아림이 데리고 찾아가서 정식으로 사과드릴게요.”하지만 하승태는 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읽고는 고개를 저었다.“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감정이라는 게...”그는 말을 멈추고
그러나 구진원이 이곳에 나타난 건 둘 사이에 끼어들거나 일부러 훼방을 놓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오히려 그의 태도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자연스러웠다.연미혜를 바라보며 그는 편하게 말을 건넸다.“하 대표님과 식사 약속 잡으셨어요?”연미혜가 고개를 끄덕였다.“이따 다시 회사로 돌아오실 거죠?”“네, 아직 처리 못 한 일이 있어서...”구진원은 그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그럼 이따가 다시 찾아뵐게요.”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하승태를 향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서 자리를 떴다.그 장면을
일을 마치고 나서도 구진원은 곧장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하승태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딘가 의미심장했다.그걸 눈치챈 연미혜가 조심스레 물었다.“왜요? 진원 씨 할 말 있어요?”구진원은 하승태가 연미혜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진작에 알아챘지만, 지금껏 하승태가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는 걸 보고 혹시 이미 마음이 식은 건 아닌가 생각했었다.하지만 오늘 만나보니, 하승태는 여전히 연미혜에게 깊이 빠져 있었고 그녀를 포기할 생각도 전혀 없어 보였다.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구진원의 머릿속을 스쳤다.‘혹시 하승태는 애초에 미혜 씨가
경민준은 계속 바쁘게 일에 몰두했다.정범규는 옆에서 한참 앉아 있다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아, 됐다. 난 승태나 보러 가야겠다.”경민준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심하게 말했다.“승태가 널 챙겨줄 만큼 한가할 것 같냐?”정범규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였다.잠시 후 하원 그룹에 도착해보니 경민준의 말대로였다. 정범규는 하승태가 정신없이 바쁜 모습을 보며 체념한 듯 물었다.“그래도 같이 점심 먹을 시간 정도는 있지 않냐?”하승태는 서류를 넘기며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점심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