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소율은 걱정으로 일그러진 도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두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쌌다."아무 일도 없었어요. 회장님께서 저한테 헤어지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하신 것도 아니에요.""그럼 왜 나한테까지 숨기고….""그건 이게 도현 씨를 사이에 둔 협상이 아니라, 회장님과 제가 직접 나눠야 할 이야기였기 때문이에요."소율이 옅게 웃으며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그제야 도현의 시선이 소율의 왼쪽 옷깃으로 향했다.베이지색 재킷 위에서 타오르듯 빛나는 붉은 루비 브로치.그것을 알아본 순간, 도현의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이건…."태성가에서 태어나 자란 도현이 그 브로치를 모를 리 없었다.어린 시절부터 이혜민 회장이 중요한 이사회나 그룹의 명운이 걸린 행사 때마다 반드시 착용하던 물건. 태성가의 실질적인 안주인에게만 전해진다는, 그 어떤 지분 증서보다 상징적인 가문의 증표였다."회장님. 설마…."도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할머니를 바라보았다.이 회장은 지팡이 손잡이에 두 손을 포갠 채 못마땅한 눈으로 도현을 게슴츠레 쏘아보았다."쯧쯧, 그래. 네놈이 파리 시내를 뒤집어엎으며 찾아다니려한 그 여자에게 내가 직접 건넸다. 이제 속이 시원하냐?""정말… 소율이를 태성가의 사람으로 받아들이신 겁니까?""어제부터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소율이 네 옆에 설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이미 충분히 봤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너 같은 놈에게 과분할 정도로 훌륭하더구나."도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이 회장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그러니 앞으로 소율이가 너를 버리고 도망갈까 봐 파리 한복판을 미친놈처럼 헤집고 다니지 마라. 그 아이가 달아난다면 네가 부족해서 달아나는 것이니, 그때는 이 할미도 네 편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소율이가 절 버릴 일은 없습니다."도현이 즉시 단호하게 받아쳤다. 조금 전까지 두려움에 질려 있던 남자가, 루비 브로치 하나를 확인하자마자 다시
"받을 수 없습니다, 회장님."소율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저와 도현 씨는 아직 약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런 귀한 물건을 받을 자격은….""자격을 판단하는 사람은 너냐, 나냐?"회장의 한마디가 소율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반지를 건네고 무릎을 꿇는 건 도현이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놈 몫까지 내가 빼앗을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 브로치의 주인을 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이걸 지켜온 내 몫이다. 그리고 후엔 너의 몫이 되겠지."이 회장은 케이스에서 브로치를 꺼내 소율 쪽으로 내밀었다."나는 네게 차도현의 아내가 되라고 명령하는 게 아니다. 도현이가 무너질 때 붙들어주고, 그놈이 오만함에 눈이 멀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멈춰 세우며, 태성이라는 이름이 잘못된 길로 가면 가장 먼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되어달라는 게야."회장의 서늘했던 눈빛에 처음으로 깊은 온기가 스며들었다."그 고집불통 손주의 목줄을 쥐고도 권력에 취하지 않을 사람. 제 실력으로 도현이 옆에 서고도 필요할 때는 그놈의 품에 기대 쉴 줄 아는 사람. 내가 지켜본 바로는, 그런 사람은 너밖에 없더구나."소율의 눈가에 투명한 물기가 차올랐다.3년 동안 도현을 홀로 바라보던 시절에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순간이었다.그의 연인이 되는 것만으로도 감히 욕심이라 여겼다. 14일의 계약이 끝나면 모든 마음을 정리한 채 파리로 도망치듯 떠나려 했다.그런데 이제 도현은 자신의 전부를 걸고 사랑을 고백했고, 태성그룹의 절대 권력자는 가문의 미래와 책임을 상징하는 보석을 소율의 손에 직접 맡기려 하고 있었다."내 손주를 부탁하마, 소율아."회장이 처음으로 직함도 성도 떼어낸 채, 소율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렀다.그 한마디에 소율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소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 회장을 향해 깊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네, 회장님."떨리지만 분명한 음성이었다."도현 씨가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량의 소음과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김만이 두 사람 사이를 천천히 흘렀다.이 회장은 소율의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도현의 품에 기대어 편한 길만 찾는지, 태성가의 이름과 권력을 탐내는지, 아니면 제 힘으로 도현의 옆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인지.소율은 매번 회장의 예상을 뛰어넘었다.악성 루머가 퍼졌을 때는 도현의 권력 뒤에 숨지 않고 실력으로 4억 유로 규모의 벨에포크 계약을 성사시켰다. 파리 지사 감찰을 명분으로 들이닥친 회장 앞에서는 3분기 매출 성장률과 물류 병목 감소 수치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쏟아냈다.그리고 지금은 차도현의 맹목적인 사랑을 누리면서도, 그를 필요할 때 멈춰 세우고 함께 책임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그것은 재벌가의 이름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의 대답이 아니었다.한 사람의 삶과 미래를 온전히 함께 짊어질 준비가 된 사람의 대답이었다.이 회장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태성그룹의 안주인이 된다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좋은 옷을 입고 행사장에 서서 웃거나, 후계자의 아이를 낳아 대를 잇는 자리라고 생각하느냐?""아닙니다."소율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수만 명의 임직원과 그 가족의 삶이 연결된 이름을 함께 짊어지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도현 씨가 후계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곁에서 붙들어주되, 사적인 감정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면 가장 먼저 반대할 수 있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고요.""만약 나와 도현이의 판단이 충돌한다면?""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는지가 아니라, 어느 선택이 태성과 사람들에게 옳은지를 따져보겠습니다.""그래도 답이 나지 않는다면?""제가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서 도망치지 않겠습니다."소율의 답은 짧았지만 단단했다.회장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음인지, 감탄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는 작은 변화였다."건방지고 당돌하구나. 겨우 기획팀장 자리에 앉은 아이가 태성의 수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아?"도현이 의심 어린 눈으로 소율을 내려다보았다."네. 걱정하지 마요. 대신 저 오후에 잠깐 외출 좀 할게요. 지사 직원한테 전달받을 자료가 있어요.""내가 데려다줄게.""됐어요. 도현 씨는 어젯밤 회장님 신경 쓰느라 제대로 못 잤잖아요. 쉬고 있어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소율은 그의 의심을 눌러버리듯 까치발을 들고 도현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그러나 소율이 몸을 돌린 뒤에도, 도현의 깊은 눈동자에서는 의심스러운 빛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오후 1시, 샹젤리제 거리.개선문을 향해 곧게 뻗은 가로수길 위로 화창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명품 부티크와 유서 깊은 레스토랑이 늘어선 거리 한복판, 일반 관광객의 출입이 제한된 최고급 살롱 카페의 2층 프라이빗 룸.소율이 묵직한 원목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 상석에 앉아있던 이혜민 회장이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회장의 뒤편에는 김 비서실장조차 보이지 않았다.백금 지팡이 하나만이 의자 옆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시간은 정확히 지켰구나.""부르셨습니까, 회장님."소율은 문을 닫고 들어와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앉거라. 귀국 비행기까지 시간이 많지 않으니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생략하자꾸나."소율이 맞은편 의자에 앉자, 회장의 예리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훑었다.펜트하우스에서 보여주었던 옅은 유쾌함은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태성그룹을 수십 년간 이끌어온 냉철한 제왕의 눈빛만이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도현이에게는 말하지 않았겠지?""회장님께서 혼자 오라 하셨으니 따랐습니다.""잘했다. 그놈이 알았다면 이 카페 벽이라도 부수고 따라 들어왔을 테니."회장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내 손주지만 요즘 하는 꼴을 보면 기가 막혀. 본부장이라는 놈이 제 여자 손목이 조금 아프다고 무릎까지 꿇고 주무르질 않나, 제 손으로 과일을 깎아 입에 넣어주질 않나. 네가 아주 단단히 홀려놓았더구나.""
펜트하우스의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한소율은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아래층을 향해 내려가는 층수 표시등이 하나씩 줄어들었다. 마침내 숫자가 1에서 멈추자, 그제야 소율의 굳어 있던 어깨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가셨네요…."안도와 아쉬움이 뒤섞인 작은 중얼거림이었다.불과 하루 전만 해도 이혜민 회장은 파리 지사 감찰을 명분 삼아 펜트하우스의 도어록을 뚫고 들이닥쳤다. 소율이 태성그룹의 유럽 사업을 책임질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차도현이라는 제멋대로인 손주를 곁에서 감당할 수 있는지 샅샅이 확인하겠다며 게스트룸에 짐까지 풀었다.하지만 회장은 하룻밤 만에 예정된 체류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떠나기 직전에는 소율의 어깨를 직접 두드리며 분명히 말했다.‘내 손주 녀석이 고집도 세고 유난스러운 놈이다만, 앞으로도 잘 길들여서 사람 구실 하게 만들어 주거라.’그것은 깐깐한 태성그룹 실권자가 내린 사실상의 가족 승인이나 다름없었다."이제 마음 놓였지?"등 뒤에서 나른한 음성이 떨어졌다.소율이 돌아보기도 전에 차도현의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았다. 도현은 소율을 제 품으로 바짝 끌어당기더니, 그녀의 어깨에 턱을 얹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회장님이 직접 허락했어. 더는 누구도 당신한테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떠들지 못해. 그러니까 오늘은 회사 생각도, 회장님 눈치도 전부 그만 보고 나랑 쉬어. 주말이잖아.""누가 들으면 제가 회장님 눈치만 보느라 벌벌 떤 줄 알겠어요.""어젯밤에 세 번이나 자다 깨서 게스트룸 쪽 확인한 사람이 누군데.""그건 회장님께서 불편하신 건 없는지 살펴보려고 한 거죠.""알았어. 우리 한 팀장님은 겁먹은 게 아니라 완벽한 내조를 한 겁니다요."도현이 능글맞게 웃으며 소율의 귓바퀴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따뜻한 숨결이 닿자 소율의 어깨가 간지러운 듯 움찔했다."그리고 회장님한테 임무도 부여받았지. 남은 평생 동안 날 길들여야 하는 막중한 임무."
도현은 자기가 입고 있던 부드러운 캐시미어 라운지웨어를 벗어 소율의 어깨 위로 포근하게 덮어주고 있었다. 소율의 찌푸려진 미간을 제 기다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질러 펼쳐주고, 혹여나 소율이 깰까 숨소리조차 죽인 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바라보듯 애틋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도현은 가만히 고개를 숙여, 졸고 있는 소율의 차가워진 이마 위로 깊고 긴 입맞춤을 남겼다."고생이 많네, 내 사랑."그 귓가에 남기는 낮고 애틋한 속삭임.그것은 이 회장이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차도현이라는 남자의 가장 솔직하고 완벽한 영혼의 고백이었다.도현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소율의 몸 아래로 팔을 밀어 넣어, 그녀가 깨지 않도록 공주님 안기 자세로 소율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세상의 모든 무게를 가볍게 짊어진 제왕처럼 당당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마스터 베드룸을 향해 걸어갔다.거실 어둠 속에서 그 모든 과정을 숨죽여 지켜보던 이 회장의 눈동자에,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것을 깨달은 시기는 제작년 쯤.자신은 태성그룹의 승계와 번성을 위해 도현을 그저 피도 눈물도 없는 완벽한 후계자로만 다듬어내려 했고, 그 결과 도현은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은 채 차가운 '인간 AI'로 살아가고 있었다.그런 도현의 얼어붙은 영혼을 깨부수고, 그 안에 따뜻한 피가 돌게 만들며, 마침내 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행복을 느끼게 해 준 유일한 구원자.그것이 바로 한소율이었다.이 회장은 진즉부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한소율을 지켜본 그녀는 이제 회사가 아닌, 손주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시간을 두고 지켜본바, 한소율은 도현에게 단순히 연인이나 몸 로비로 올라온 낙하산 따위가 아니란걸 알수 있었다. 그녀는 차도현이라는 얼어붙은 맹수의 목줄을 유일하게 쥐고 그를 길들일 수 있는 단 하나의 여왕이었고, 그의 삶 전체를 지탱하는 유일무이한 쉼터였다.이 회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