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성유하는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이진성.그녀는 손가락으로 그 이름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오랫동안 자신의 하루를 채웠던 남자였다.그런데 이제 그 이름을 지워야 할 시간이 왔다.유하는 입술을 깨물었다.‘정말 이렇게 끝나는 건가.’잠시 가슴이 먹먹해졌다.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그 안에는 이창수 회장에게서 받은 거액의 수표가 들어 있었다.유하는 진성에게 연락했다.진성은 유하에게서 연락을 받고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얼마 전 자해 소동까지 벌이며 제 발목을 단단히 붙잡으려 했던 유하였다. 또다시 눈물로 매달리거나 악을 쓰며 자신을 원망할 것이라 짐작했기에, 진성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도착한 오피스텔의 문은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진성은 예상치 못한 풍경에 멈칫했다.거실은 짐 한 조각 없이 텅 비어 있었다.그 흔한 잡동사니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살지 않았던 공간처럼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만이 가득했다.그 텅 빈 공간의 한가운데, 유하가 가볍게 캐리어 하나를 손에 쥔 채 서 있었다.놀랍게도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 대신 묘할 정도로 차분하고 냉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유하야…… 이게 무슨 일이야? 집은 다 왜 이래?"진성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물었다.유하는 가만히 진성을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코웃음을 치며 가방끈을 고쳐 맸다."왔어? 바쁠 텐데 발걸음 하게 해서 미안하네.""너 갑자기 왜 이래? 어디 가려
북악산 변두리의 깊숙한 곳, 외부의 시선이 완벽하게 차단된 고즈넉한 전통 한옥 한정식집의 별채.도심 한가운데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고요한 곳이었다.수백 년 된 소나무가 담장 너머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고, 마당 한쪽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하고 있었다.연못 위로 떨어진 붉은 단풍잎이 가을바람을 따라 천천히 떠다녔다.이곳은 일반 손님을 받지 않는 전통 한옥 별채였다.태산건설 이창수 회장이 중요한 사람을 만날 때 가끔 이용하는 장소였다.오후 세 시.검은색 세단 한 대가 한옥 앞에 멈춰 섰다.차에서 내린 여자는 성유하였다.며칠 전 병원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던 여자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완벽하게 꾸민 모습이었다.유하는 잠시 한옥의 대문을 바라봤다.‘이창수 회장…….’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오늘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남자.유하는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어떤 조건을 내놓으실지 궁금하네요, 회장님.’그녀는 가방을 고쳐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마당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마저 숨을 죽인 듯 고요한 방 안에는 무거울 정도로 서늘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이창수는 앞에 놓인 찻잔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마주 앉은 성유하를 가만히 응시했다.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시선 앞에, 유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찻잔을 만지작거렸지만 속으로는 바짝 마르는 입술을 속이기 바빴다."불러낸 이유를 짐작하고 있겠지요."이창수의 낮고 굵직한 음성이 방 안을 울렸
성유하는 병실 창가에 서서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조금 전 걸려온 전화.태산건설 이창수 회장의 비서실이었다.이창수 회장님께서 성유하 씨와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유하는 순간 당황했다.진성의 아버지가 자신을 직접 만나겠다고 나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당혹감은 오래가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계산이 시작되고 있었다.‘이창수 회장이라…….’유하는 천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태산건설.진성이 아무리 태산건설의 후계자라고 해도 아직 회사의 실질적인 권한은 아버지에게 있었다.진성은 전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회사 자금이나 집안의 막대한 재산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중요한 결정에서는 그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유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유하는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어쩌면…….’그녀는 천천히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진성을 붙잡고 있는 것보다 이창수 회장을 상대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어.’이창수 회장이 자신을 만나려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아들의 결혼식 첫날밤, 신부인 시아가 호텔 스위트룸에 홀로 남겨졌다는 소식은 이창수 회장의 귀에도 순식간에 흘러들어왔다.“회장님,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이른 아침.이창수 회장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아들의 결혼식을 무사히 마친 다음 날이었지만, 이창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그는 결재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말해 보게.”맞은편에 서 있던 비서실장이 잠시 망설였다.“이진성 전무님에 관한 일입니다.”그제야 이창수가 고개를 들었다.“진성이?”“네, 회장님.”“무슨 일인가?”비서실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전무님께서 호텔을 나가신 뒤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이창수의 손이 멈췄다.그는 천천히 펜을 내려놓았다.이창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비서실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성유하 씨는 현재 병원에서 치료와 관찰을 받고 있으며, 전무님께서는 밤새 병원에 계셨습니다.”“…….”진성을 결혼시키면서도 그가 오랜 기간 곁에 두었던 성유하의 존재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던 이창수였다. 그는 혹시라도 진성이 결혼 후까지 유하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흔들릴 것을 우려해, 남몰래 유하의 동선과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참이었다.그리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첫날밤부터 아내를 호텔에 내팽개친 채 유하의 자해 소동에 휩쓸려 응급실로 달려간
진성은 호텔 스위트룸의 침실 문을 조용히 닫았다.손에 들린 휴대전화에서는 계속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성유하.진성은 한동안 그 이름을 바라봤다.비록 책임감으로 얽힌 결혼이었고, 시아에게는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결혼이라고 선을 그어 왔지만 진성의 마음 한구석은 점차 복잡해지고 있었다. 밝고 순수하며, 자신을 향해 따뜻한 눈빛을 보내는 시아를 마주할 때면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임신 초기 심한 입덧으로 원래도 말랐던 작은 몸이 더욱 야위어 가는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하지만 그런 자신의 낯선 감정을 인정하기 두려웠던 진성은, 오히려 그 마음을 숨기기 위해 시아에게 더 퉁명스럽고 무심하게 굴곤 했다.진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유하의 목소리는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진성 씨, 나 두고 정말 결혼했어요? 당신 없으면 난 어떻게 살라고…… 정말 이럴 거야? 지금 당장 내 오피스텔로 와 주지 않으면, 난 죽을지도 몰라!’“…….”“나는 아직도 네가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는 오늘 다른 여자랑 결혼했잖아!”진성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이야기는 이미 끝났어.”“너한테만 끝났겠지!”유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나한테는 아니야!”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리고 유하가 울먹이며 말했다.“진성씨…….”
“시아야, 몸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라.”“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황태석은 딸의 손을 잡고 몇 번이나 같은 당부를 했다.결혼식을 마친 성북동 갤러리의 정원의 아름다운 가든 결혼식이 끝난 후, 진성과 시아는 서울의 한 오성급 호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시아의 심한 입덧을 고려해 멀리 신혼여행을 떠나는 대신 선택한 조촐하지만 아늑한 첫날밤의 장소였다.서울 시내의 한 특급호텔.넓은 거실의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은은한 조명 아래에는 크림색 소파와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호텔에서 준비한 꽃다발과 축하 카드가 있었다.<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그 문구를 보는 순간 시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정말 결혼했구나.’그녀는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봤다.오늘 진성이 직접 끼워 준 반지였다.화려한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벗고 편안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자,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긴장과 어색함이 감돌았다.진성과 단둘이 호텔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겼지만, 정작 부부다운 시간을 보낸 적은 거의 없었다.모든 것이 시작된 그날 밤.술에 취해 기억조차 희미한 그날을 제외하면,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신체적 친밀감이 없었다.손을 잡는 것조차 어색했다.오늘 결혼식에서 진성이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췄을 때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그런데 이제는 한 방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시아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