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작은 거인
온이서가 눈을 떴을 때 어떤 낯선 방에 있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고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흐릿했던 시야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방이 아주 넓었다. 침대 머리맡에 커다란 유화 한 점이 걸려 있었고 천장은 깔끔한 단색이었다. 천장에 띠조명이 둘러져 있었는데 지금은 꺼진 상태였다. 욕실 쪽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중앙에 매달린 심플한 샹들리에에 닿아 빛을 반사했다.

짙은 회색 커튼이 빈틈없이 쳐져 있어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온이서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스르륵 미끄러진 순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원래 입고 있던 옷을 누가 벗겼는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다행히 침대 시트는 깨끗했고 머리가 아픈 것 외에 몸에 다른 이상은 없었다.

온이서가 허리를 숙여 바닥의 옷을 주우려던 그때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누가 들어온 것이었다.

심장이 터져 나올 것처럼 쿵쾅거린 그녀는 황급히 이불로 몸을 가리고 문 쪽을 쳐다봤다.

빛을 등지고 걸어와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키가 훤칠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얼굴이 선명해졌다.

깊고 날카로운 이목구비, 차가운 눈매... 뜻밖에도 하은후였다.

‘여기가 하은후의 방이었어? 나한테 약을 탄 건 분명 황주원의 사람이었는데 어쩌다가 하은후의 방에 왔지?’

온이서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하은후는 고급스러운 짙은 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코트 안에는 정장 차림이었다. 문을 닫고 코트를 벗어 소파에 던진 그때 침대 위에 있는 온이서를 발견했다.

방 안에 갑자기 사람이 생긴 걸 본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하은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온이서에게 향했다. 긴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채 하얀 어깨를 드러내고 그의 이불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카펫 위에는 그녀의 카디건, 청바지가 널브러져 있었고 연한 색의 속옷이 시든 꽃잎처럼 허은후의 구두 옆에 놓여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시선을 돌리며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온이서.”

하은후가 온이서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무슨 수작이야?”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나도 몰라. 누가 나한테 약을 탔다는 것밖에 모르겠어.”

“약을 탔다고?”

“응. 부탁 하나만...”

“아니.”

하은후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칼에 거절했다.

“꿈도 꾸지 마. 난 유부녀랑 안 자.”

‘자긴 뭘 자?’

역시 사람은 어이가 없을 때 헛웃음이 나오나 보다.

온이서는 지금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오해하지 마. 내가 먹은 건 수면제지, 최음제가 아니야. 그리고 나도 너랑 자고 싶지 않아. 내 말은 옷 좀 입게 뒤돌아 있으라고.”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은후가 입술을 깨문 채 재빨리 등을 돌리자 온이서는 바닥의 옷을 주워 입었다.

짧은 정적이 흐르던 그때 갑자기 옆방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이서, 이 빌어먹을 년아. 역시 얌전한 년이 아닐 줄 알았어. 감히 딴 남자랑 뒹굴어? 문 열어, 당장!”

황주원의 목소리였다.

“빌어먹을 것들아, 당장 나오지 못해? 어떤 놈이 내 와이프한테 손을 댔는지 똑똑히 봐야겠어. 문 열어!”

옆방에서 남자의 고함과 여자의 비명이 뒤섞여 들려왔다.

온이서는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손아진더러 그녀에게 약을 먹이라고 한 것부터 지금 이 ‘현장 검거’까지 전부 황주원이 짠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 착오가 생겼는지 온이서는 하은후의 방으로 옮겨졌다.

하은후도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옆방과 맞닿은 벽 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이더니 씩 웃었다.

“네 남편이 널 맨몸으로 내쫓으려고 아주 용을 쓰는구나.”

‘네 남편’이라는 세 글자에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온이서는 황주원과 함께 살면서 같은 편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황주원의 비열한 수단 때문에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물론 두려움도 당연히 있었다.

다른 방으로 옮겨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황주원의 방에 갔다면 파렴치한 황주원에게 도덕의 칼날로 난도질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옆방에 있던 황주원은 사람을 잘못 잡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뭐야? 어디 갔어? 온이서가 여기서 외간 남자를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대체 어디 간 거야?”

밖의 소란이 잠시 멈췄다.

“여기 맞는데. 다른 방에 있는 거 아니야? 옆방에 있나?”

원망 어린 발소리가 하은후의 방 쪽으로 다가왔다.

쾅, 쾅, 쾅.

황주원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세게 두드리는지 쿵쿵거릴 때마다 온이서의 가슴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문 열어, 온이서. 연놈들아, 당장 나와!”

온이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황주원은 목표가 생기면 성공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타입이었다. 문을 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문짝을 뜯어내서라도 열 것이다.

이렇게 ‘현장에서 검거’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은후를 쳐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나 좀 도와줘...”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린 하은후는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겉으로는 무척이나 차분했고 심지어 냉랭하기까지 했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고 문을 열 생각이나 움직일 기색도 없이 그저 조용히 온이서를 내려다봤다.

“내가 왜 널 도와줘야 하지?”

“지금 네 방에 있잖아. 우린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야.”

“난 널 건드리지 않았어. 내연남도 아니고. 저 사람이 쳐들어와도 날 어쩌지 못해.”

하은후는 조급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느긋했다.

“문제는 너야. 내 방에 무단 침입했어. 이건 민사상 침해 행위에 속해서 위법 행위에 해당해.”

온이서는 머리 위에 얼음물 한 통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졌고 절망에 빠졌다.

“온이서, 안 나오면 문 부술 거야. 사람들한테 네가 어떻게 나 몰래 바람피우는지 보여줄 거라고.”

문을 열지 않자 황주원은 그녀가 이 방에 있을 거라고 더욱 확신했다.

한 명은 미쳐 날뛰는 전남편이고 한 명은 그녀에게 돌을 던지는 전 남자친구였다. 온이서는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래. 다들 이렇게 몰아붙이겠다는 거지? 끝까지 가보자, 그럼.’

온이서는 몇 초간 생각하다가 하은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발끝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싼 다음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목에 키스했다.

가벼운 키스가 아니라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흡입했다.

하은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목덜미에서 촉촉하면서도 따끔한 감촉이 전해졌고 온이서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스킨십이었다.

“온이서, 미쳤어?”

하은후가 온이서를 힘껏 밀어냈지만 이미 늦었다. 목덜미에 붉은 키스 마크가 순식간에 선명하게 생겼다.

“넌 날 건드리지 않았지만 내가 널 건드렸어. 이제 넌 내연남이야.”

온 힘을 다해 빨아드린 바람에 온이서는 숨을 살짝 헐떡였고 볼에 비정상적인 홍조가 떠올랐다.

“하은후, 같이 잡히든지, 날 도와주든지 알아서 해.”

그녀는 하은후의 눈을 빤히 보며 처량하면서도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은후는 손을 들어 그녀가 빨았던 부분을 손끝으로 만지고는 어둡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법이네, 온이서.”
Patuloy na basahin ang aklat na ito nang libre
I-scan ang code upang i-download ang App

Pinakabagong kabanata

  • 6년 만의 재회, 똑같은 선택   제30화

    “변호사님, 또 뵙네요!”황주원이 하은후를 보자 즉시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맞이하며 인사했다.하은후는 미지근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황주원은 여전히 열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변호사님, 며칠 전 로펌 변호사분께서 전화 주셔서 조언해 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안 그러면 제 상음시 항구 사업에 큰 문제가 생길 뻔했죠.”‘며칠 전에 전화를?’온이서는 피팅룸에 있었던 그날 하은후가 메시지를 보낸 후 황주원의 전화벨이 울렸던 게 생각났다.‘그날이었을까?’“황주원 씨, 상음시 항구 쪽에 저와 제 친구들도 약간 작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사업을 많이 확장하고 있나 보네요.”하은후는 담담하게 한마디 했지만 저도 모르게 압박감이 풍겼다.“한 마디 조언드리자면 다들 돈 벌기 위해 사업하는 거지만 선은 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러면 결과는 예측하기 어려울 테니까요.”황주원은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지난 몇 년 동안 상음시 시장인 아버지만 믿고 선 넘는 사업을 적지 않게 해왔다.‘하변이 뭔가 알게 된 걸까?’하은후의 방금 한 말은 겉으로는 조언 같지만 실은 경고에 더 가까웠다.“알겠습니다. 앞으로도 변호사님의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하은후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려 떠나갔다.한쪽에 서서 듣고 있던 온이서는 그제야 뭔가 이해했다.이제 보니 하은후가 황주원의 약점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피팅룸에서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하은후는 한마디만 했지만 이 한마디에 황주원이 많이 당황한 듯했다. 더 이상 고객 대응을 할 마음이 사라진 황주원은 온이서를 뒤로 한 채 복도로 나가 오랫동안 전화를 했다.황주원이 곁에 없으니 굳이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었기에 온이서는 오히려 기뻤다.작은 접시에 담긴 말차 무스를 한 접시 들고 혼자 연회장의 창가 앞에 서서 천천히 먹었다.통유리에 연회장 안의 각양각색의 드레스와 술잔이 어우러진 장면이 그대로 비쳤다. 사람들 속에 있는 하은후는 그야말로 위성들에 둘러싸인 지구나 다름없었다.최강현

  • 6년 만의 재회, 똑같은 선택   제29화

    황주원과 조미리가 동시에 온이서를 향해 압박하는 시선을 보냈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신호였다.“아무 일도 없어요. 얼마 전에 며칠 여행 다녀오느라 조금 피곤해서 연락드리지 못했어요.”“아무 일 없다니 다행이야. 언제 시간 나면 꼭 불러줘, 전에 이서 씨가 가르쳐 준 두 동작 지금 아주 잘 연습했으니까 나중에 확인해 줘. 이서 씨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거든.”“알겠어요.”두 사람이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연회장 입구에 또 다른 손님들이 들어왔다.“이서 씨, 편히 앉아 있어. 나는 다른 손님 맞이하러 가야 해서. 우리 나중에 시간 날 때 또 이야기하자.”“네, 바쁘실 텐데 수고하세요.”장가을이 자리를 뜨자 시어머니 조미리가 온이서를 한쪽으로 끌어당겼다.“주원한테 들었는데 너 요즘 이혼하겠다고 난리라며? 우리 주원이 술에 취해서 실수로 너한테 손을 댔다고 바로 경찰에 가정 폭력으로 신고했다며?”조미리는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온이서, 너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온씨 가문이 파산해서 넌 이제 온씨 가문 딸도 아니야. 친정에 빚만 잔뜩 있는데 우리 주원이를 떠나면 누가 너를 원하겠니? 이혼할 자격도 없는 주제 무슨 난리를 치는 거야?”조미리는 아들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시어머니 유형이었다. 조미리 눈에 자기 아들 황주원이 하는 모든 일이 항상 옳았고 이 세상 가장 완벽한 존재였다. 온이서는 황씨 가문에 들어온 순간부터 숨 쉬는 것조차 잘못이었다.“정신이 있으면 우리 주원이 곁에 남아서 대를 이을 떡두꺼비 같은 아들 낳을 생각이나 해. 만약 아들을 또 못 낳으면 네가 이혼하겠다고 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버릴 거야. 황씨 가문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필요 없으니까.”손자만 바라는 조미리는 남녀 차별이 극도로 심했다. 온이서가 딸 라임을 낳았을 때 여자아이라는 소식을 들은 뒤 병원에도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상에 누워있던 온이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아들을 낳을 때까지 노력하라고 명령했다.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 후 온이서에

  • 6년 만의 재회, 똑같은 선택   제28화

    이내 의사가 와서 온이서의 ‘상처’를 소독한 뒤 연고를 발라주었다.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온이서는 더 이상 드레스를 고를 생각이 없었다. 대충 꽃 자수가 있는 드레스 한 벌을 입어 본 뒤 괜찮겠다 싶어 점원에게 부림원으로 보내달라고 했다.온이서가 떠날 때 하은후는 여전히 아래층에 앉아 심아정이 드레스를 고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이 남자, 이미 여자친구가 있는데 왜 내 일에 자꾸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걸까?’온이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별 이슈가 없이 무사히 넘어간 것에 대해 안도했다.사흘 후면 바로 최씨 가문 사모님 장가을의 생일 파티였다.사흘 동안, 온이서는 매일 황주원에게 라임의 일상 영상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딸이 그리운 이유도 있었지만 영상 속 배경에서 실마리라도 찾아 황주원이 라임을 어디에 숨겼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워낙 잔뜩 경계하고 있던 황주원인지라 보낸 영상에서는 그 어떤 유용한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난감해진 온이서는 그 때문에 라임이 더 걱정되어 매일 하루하루가 십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하은후 역시 사흘 동안 편히 보내지 못했다. 드레스 가게에서 만난 다음 날 온이서가 집에 남겨둔 조미료 한 봉지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문을 두드렸다.그런데 문을 연 사람은 소예린이었다.소예린이 하은후를 보고 멈칫했다.“이서 찾으러 온 거야?”“물건 돌려주려고.”“하지만 이미 이사 갔어.”하은후는 얼굴이 잔뜩 어두워졌다.‘이사 갔다고? 정말 이혼하지 않겠다는 건가?’순간 머릿속에 황주원이 온이서의 허리에 손을 얹은 장면이 떠올랐다. 황주원 곁으로 돌아가서 매일 밤 살결을 맞대며 부부 관계를 가질 거라는 생각에 마음속에 이유 모를 분노가 불타올랐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하은후는 온이서가 가져왔던 조미료 한 봉지를 전부 계단 쓰레기통에 내던졌다.깜짝 놀란 소예린은 하은후가 떠나자마자 바로 방으로 돌아가 온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서야. 하은후가 너 찾으러 왔어.”“나? 무슨 일

  • 6년 만의 재회, 똑같은 선택   제27화

    “빨리 가!”온이서는 거의 애원하는 어조였다.“내보내려면 일단 빚부터 갚아.”“무슨 빚? 이미 요리까지 해줬잖아?”“호텔 빚.”말을 마친 하은후는 온이서의 허리를 꽉 잡더니 고개를 숙여 뜨거운 입술로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불꽃처럼 덮쳤다.그날 온이서가 했던 것처럼 부드러운 키스가 아니라 벌과 징벌의 의미를 담은 강한 빨림이었다.“으...”눈살을 찌푸린 온이서는 따끔하고 간지러운 감각에 저도 모르게 온몸을 떨었다.어떻게든 몸을 비틀며 하은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강하고 거친 하은후의 힘 앞에서는 턱없이 부족했다.밀폐된 공간에 거칠게 얽히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들렸다.몇 초 후 하은후가 드디어 온이서를 놓아주었다.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서 거울에 기댄 온이서는 목에 선명하고 애매한 붉은 자국이 남은 것을 발견했다.‘큰일 났네... 고른 드레스가 모두 터틀넥 스타일인데... 이제 어떻게 입어 보지?’몸을 곧게 편 하은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이서의 하얀 피부에 자신이 남긴 키스 마크를 바라본 순간 눈빛이 폭풍 전야의 바다처럼 무거워졌다. 눈빛 속에는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혼란이 섞여 있었다.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자기 입술을 살짝 닦은 뒤 한마디 했다.“이걸로 호텔 빚 갚은 거야.”말을 마친 뒤 온이서를 더 이상 보지 않은 채 뒤로 돌아 커튼을 젖혔다. 그러고는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거친 기운을 풍기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온이서는 부드러운 의자에 미끄러지듯 앉았다. 미처 숨을 고르기도 전에 두 점원이 함께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황씨 가문 사모님, 필요한 드레스 두 벌 다 가져왔어요. 나와서 입어 보세요.”갑작스럽게 생긴 키스 마크라 뭐로도 가릴 수 없었기에 온이서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깔끔하게 다듬은 손톱으로 하은후가 남긴 키스 마크를 세게 꼬집었다.“아악!”온이서가 비명을 질렀다.“벌레!”두 점원이 온이서의 비명을 듣고 급히 뛰어 들어왔다.“사모님, 괜찮으세요? 벌레 어디 있어요?”“

  • 6년 만의 재회, 똑같은 선택   제26화

    “하은후, 미쳤어?”온이서가 당황하며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빨리 나가!”“미친 게 누군데!”온이서를 바라본 하은후는 맹수처럼 거친 기운을 내뿜으며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너한테 가정 폭력을 하고 너를 기절시켜 다른 남자 침대에 보내 바람을 피운 것처럼 모함하려는 그런 개자식인데, 그래도 이혼 안 하겠다고?”“내 일이니까 신경 끄고 나가!”온이서가 손을 들어 하은후를 밀쳤지만 하은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일한 출구를 막아서며 두꺼운 벨벳 커튼에 등을 기댄 채 말을 이었다.“황주원이 뭐가 좋은데? 그렇게까지 황주원이라는 남자를 사랑해? 너를 해쳐도 용서할 만큼? 결혼해서 부부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은 있는 거야.”온이서는 초조하면서도 화가 났다.“하은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따지는데?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무슨 자격? 잊었어? 나는 네가 바람피운 상대야.”하은후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자 큰 키 때문에 온이서 몸 위에 하은후의 그림자가 뒤덮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숨 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좁아졌다.“다시 네 남편과 산다고? 그러면 네 바람 상대인 나는 어쩌고?”온이서는 하은후가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바람 상대 역할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건가 싶었다.“아프면 가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짓 하지 말고!”온이서가 다시 한번 하은후를 밀치려 했지만 하은후는 오히려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 뒤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너무 뜨거운 하은후의 체온에 온이서는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했다.“아가씨, 결혼 생활에 떳떳하지 못한 행동한 적 없다고? 그럼 지난번 호텔에서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잊었어?”하은후는 긴 손가락으로 온이서의 길고 하얀 목을 스쳤다.“네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키스 마크를 남겨놓고 결혼 생활에 떳떳하다고?”하은후의 어두운 눈빛에 위험한 감정이 출렁이는 것을 본 온이서는 긴장한 마음에 거울에 몸을 기댔다.“지금 이런 걸 얘기할 때가 아니야, 누가 들어와서 우리 둘이 여기 있는 걸 보

  • 6년 만의 재회, 똑같은 선택   제25화

    검은색 하이엔드 맞춤 정장을 차려입은 하은후는 아주 잘생겼다.그의 곁에 있는 심아정은 검은색 벨벳 롱드레스를 입어 두 사람이 매우 어울려 보였다.‘세상이 작다는 말 이래서 하나 보네...’온이서는 그들이 보지 못하게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지만 하은후는 여전히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하은후의 멈칫한 시선에 심아정도 바로 온이서를 발견했다.“오빠, 저분 며칠 전에 오빠 집에 와서 요리하던 시간제 도우미 언니 아니야?”눈에 놀라움이 스친 심아정은 온이서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언니, 여기서 뭐 하세요?”“저...”상음시의 드레스 전문점은 고급 정품을 주력으로 하는 곳이었기에 여기 드레스 가격은 시간제 요리 도우미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온이서가 어떻게 둘러댈지 생각 중이었을 때 점원이 그녀 곁으로 와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지금 손에 들고 계신 이 드레스, 디자이너 로렌스 씨가 때마침 2층에 계세요. 필요하시면 내려오셔서 디자인 컨셉을 설명해 드리라고 하겠습니다.”“괜찮아요. 감사합니다.”“사모님?”심아정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그쪽이 사모님이라고요? 그럼 왜 은후 오빠 집에서 시간제 도우미로 일한 거예요?”“이혼 준비 중이어서 생활비를 벌려고요.”온이서가 말했다.“그럼 지금은요?”“지금은... 지금은 이혼 안 하려고요.”온이서의 말이 끝나자 하은후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눈빛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독을 묻힌 바늘 같아 관자놀이가 쿡쿡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단 1초도 머물고 싶지 않아 막 돌아서려는 순간 황주원이 다가왔다.“이거, 하은후 변호사님 아닌가요?”하은후를 발견한 황주원이 웃으며 악수를 하려고 다가왔지만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서 있는 하은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색해진 황주원은 지난번 호텔에서 하은후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때문에 하은후가 이러는 줄 알고 사과하려 했다. 바로 그때 하은후가 입을 열었다.“황주원 씨, 누군지 소개 좀 해줄래요?”하은후가 온이서

Higit pang Kabanata
Galugarin at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Libreng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sa GoodNovel app. I-download ang mga librong gusto mo at basahin kahit saan at anumang oras.
Libreng basahin ang mga aklat sa app
I-scan ang code para mabasa sa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