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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작은 거인
“문 열어, 빨리.”

문밖에서 들리는 황주원의 목소리에 분노가 점점 짙어졌다.

하은후가 화장실로 들어가라는 눈짓을 보내자 온이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재빨리 화장실로 몸을 숨겼다.

그는 쿵쿵거리는 문 쪽으로 차분하게 걸어가 문을 열었다.

황주원이 문을 걷어차려던 그때 문이 벌컥 열린 바람에 다리를 든 자세 그대로 멈칫하고 말았다.

하은후는 황주원과 그의 뒤에 휴대폰을 들고 촬영하고 있는 듯한 두 남자를 쳐다봤다.

“왜 저의 방 앞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시는 거죠?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황주원은 문을 연 사람이 이렇게 기품 넘치는 남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현장에서 검거’당한 사람 특유의 당황함이 전혀 없었다.

“내 와이프를 찾으러 왔어요.”

황주원이 방 안을 들여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온이서,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당장 나와!”

그러면서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하은후가 팔을 들어 가로막았다.

“황주원 씨, 저의 동의 없이 함부로 방에 들어가는 건 불법 행위입니다.”

황주원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하은후를 다시 훑어봤다.

“날 알아요?”

“작년 아스타에서 열린 비즈니스 포럼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어요.”

비즈니스 포럼은 아무나 참석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황주원도 아버지 덕에 따라가서 구경만 했을 뿐이었다.

‘일반 사람이 아니네?’

황주원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하은후는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명함을 본 황주원은 놀란 나머지 손바닥에 식은땀이 다 났다. 눈앞의 이 남자가 바로 자이언트 로펌의 창립자 하은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예전에 아버지에게서 하은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이름은 법조계에서 단순히 성공한 변호사를 넘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은 인맥을 상징했다. 법조계의 거장이나 사법 시스템의 실세는 물론이고 금융, 부동산, 과학기술, 심지어 더욱 은밀한 분야에까지 인맥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법률 고문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청소부’이자 ‘전략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기업의 국제적인 인수합병이든 정재계의 어둡고 추악한 분쟁이든 최종적으로 그의 주도와 치밀한 지휘 아래에서 절차상의 허점이나 결정적인 증거가 포착되었고 이를 통해 기적 같은 역전극이 연출되곤 했다.

“자이언트 로펌의 하은후 변호사님이시군요.”

황주원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정말 큰 실례를 범했네요. 죄송합니다. 변호사님께서 이 방에 계시는 줄은 몰랐어요.”

“아직도 황주원 씨 아내분이 제 방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하은후가 덤덤하게 물었다.

“아니요, 아니요. 볼품없는 여자가 변호사님의 눈에 들 리가 없죠.”

황주원이 뒷걸음질 쳤다.

“오늘은 제가 무례했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봐주시길 바랍니다.”

하은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으려던 그때 하은후의 셔츠 깃 뒤에 생긴 보일 듯 말 듯한 키스 마크가 황주원의 눈에 들어왔다.

시뻘건 걸 보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키스 마크인 게 틀림없었다.

“잠깐만요, 변호사님.”

황주원이 하은후의 목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목에 뭐가 묻으셨네요.”

하은후는 가리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돌려 키스 마크를 황주원에게 제대로 보여주었다.

“왜요? 제 사생활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황주원은 그의 압도적인 눈빛에 눌려 더는 뭐라 하지 못했다.

“아... 아니에요.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에요.”

황주원이 굽신거리며 말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

온이서는 화장실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다 들었다.

그녀가 두려움에 떨던 일을 하은후가 명함 한 장으로 이렇게 쉽게 해결할 줄은 몰랐다.

예전의 가난했던 그 소년이 이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게 다시금 증명되었다.

“나와.”

하은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이서가 문을 열고 화장실에서 나갔을 때 그는 통유리 창 앞에 서 있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온이서가 입을 열었다. 이 감사 인사에 약간의 죄책감이 섞여 있었다. 어쨌거나 상대가 돕고 싶어서 도운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감사 인사에도 하은후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고맙다고?”

하은후가 피식 웃더니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

“날 이 판에 끌어들여 놓고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면 끝이야?”

“그럼... 원하는 게 뭔데?”

하은후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내연남 소리까지 들었는데 이대로 끝내면 억울하지, 내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온이서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너무 세게 잡은 나머지 온이서는 고통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곧이어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더니 그대로 침대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하은후가 이미 그녀의 위로 올라타 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침대 가장자리에 단단히 고정하고 팔로 지탱하면서 그녀를 그의 그림자 속에 완벽하게 가두었다.

“뭐 하는 거야?”

온이서가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유부녀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지 않았어?”

“지금 그 원칙이 중요해?”

그녀를 내려다보는 하은후의 두 눈에 모욕당했다는 분노와 이용당했다는 불쾌감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때 나랑 사귀기 전에는 날 가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니 오늘은 내연남으로 만들려고 애를 썼어. 우리 관계는 항상 네가 쥐고 흔들고 있어. 안 그래?”

하은후의 몸에서 나는 차가운 향기와 뜨거운 체온에 온이서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은후를 먼저 좋아한 것도, 그에게 먼저 다가간 것도 온이서였다.

당시 하은후는 온씨 가문 도우미의 아들이었다. 온씨 가문 저택의 정원에서 하은후를 처음 봤는데 그날 온이서는 래트리버와 함께 플라잉 디스크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플라잉 디스크가 궤도를 벗어나 어머니의 약을 가져다주러 온 하은후를 향해 날아갔다.

하은후는 회전하며 날아오는 플라잉 디스크를 안정적으로 잡아챘다.

그때 그는 심플한 흰색 셔츠를 입고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다. 얼굴도 잘생겼고 눈빛은 호수처럼 깊었다. 따스한 햇살이 하은후를 감싸 눈부시게 빛이 났다. 온이서는 그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다.

하은후는 플라잉 디스크를 온이서에게 돌려줬다. 두 사람의 손끝이 닿은 순간 온이서는 온몸에 전류가 흐른 것처럼 찌릿했고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그때 그녀는 결심했다. 하은후에게 대시해야겠다고.

그 후로 온이서는 하은후만 졸졸 쫓아다녔다.

하은후는 처음에는 그녀를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집안 형편이 가난한 그와 귀하게 자란 재벌 아가씨는 결코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온이서는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은후가 거절할수록 그녀는 더 매달렸다.

법대 금요일 헌법 수업 시간, 교수가 출석을 부를 때면 항상 정원보다 한 명이 더 많았다.

식당에서도 온이서는 하은후가 밥 먹는 시간에 맞춰 나타나 우연인 척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돈이 아까워 고기반찬을 사 먹지 않으면 배불러서 다 먹지 못하는 척하며 그의 그릇에 덜어주곤 했다.

그리고 하루건너 친구들과 함께 하은후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술집에 갔다. 가격이 비싸고 수당도 높은 술들을 온이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주문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온이서는 하은후의 굳게 닫힌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엄청나게 노력했다. 하은후는 그녀를 피하고 귀찮아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존재를 습관처럼 받아들였다.

결국 그녀의 치마폭 신하가 되었다. 그런데 온이서는 그와 사귄 지 석 달 만에, 그가 사랑에 완전히 빠졌을 때 홀연히 등을 돌려 다른 남자와 약혼했다.

하은후의 세상은 그녀로 인해 엉망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 일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었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그때 네가 날 어떻게 유혹했다가 버렸는지 다 잊었어?”

하은후가 온이서의 목을 움켜쥐었다. 두 눈에 핏발이 섰고 그녀에 대한 원한이 활활 타올랐다.

“지금의 난 네가 마음대로 쓰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이거 놔!”

온이서는 목이 부러질 것 같아 있는 힘껏 하은후를 밀쳐냈다. 그런데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가기도 전에 그는 다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침대 위로 끌어당겨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왜 도망가?”

하은후는 넥타이를 잡아당긴 다음 셔츠 단추를 풀면서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연남이라는 오명을 썼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억울하지.”

그의 셔츠 아래 숨겨졌던 복근이 드러났다. 과거의 기억이 온이서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6년 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두 사람은 낡은 월세방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툰 입맞춤, 망설이는 손길, 그리고 무모한 침범... 아무 기술도 없었지만 모든 스킨십은 넘치는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었으나 남은 거라곤 증오밖에 없었다.

“하은후, 난 너랑 자고 싶지 않아.”

온이서는 고개를 들고 하은후를 노려봤다.

“기억력이 나빠? 6년 전에도 말했잖아. 너랑 자는 게 질렸다고.”

그 한마디는 저주처럼 하은후의 가슴을 찔렀다. 순간 흥미를 잃어버린 그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에 누워있던 온이서도 몸을 일으켰다. 옷은 그대로였지만 조금 전의 모든 것들이 홀딱 벗겨진 채로 이 방에 던져졌을 때보다 훨씬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꺼져.”

하은후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럼 꺼지지, 뭐.’

온이서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제대로 서기도 전에 현기증이 밀려왔다.

아까 약에 취했을 때 부딪쳤던 뒤통수가 계속 욱신거렸고 조금 전 침대 위에서 발버둥 치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했다.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온이서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쓰러지기 직전 하은후가 빠르게 달려오는 걸 봤다.

...

빗줄기가 칠흑 같은 밤을 가로지르면서 뚝뚝 떨어졌다. 컬리넌이 날카로운 검처럼 미끄러운 도로 위를 쏜살같이 질주했다.

하은후가 운전대를 어찌나 꽉 잡았는지 손가락 마디가 다 새하얘졌다. 그는 운전하면서도 조수석의 온이서를 계속 힐끔거렸다.

온이서가 의식을 잃은 채 널찍한 가죽 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무력하게 창문 쪽으로 꺾여 있었고 계기판의 희미한 불빛이 닿은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온이서!”

하은후가 그녀를 불렀다. 그런데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온이서, 정신 차려.”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조여들어 침을 꿀꺽 삼켰다. 차량용 전화로 설승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만났는데 벌써 내가 보고 싶어졌어?”

설승범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병원에 누구 좀 데려갈 거니까 네가 와서 봐줘.”

“무슨 일이야?”

설승범은 인명 구조 상황임을 알아채고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그냥 갑자기 쓰러졌어.”

“알았어. 응급실 쪽으로 들어와.”

15분 후 하은후는 온이서를 설승범에게 넘겼다.

다행히 검사 결과는 심각하지 않았다. 머리를 부딪친 충격으로 인한 가벼운 뇌진탕이었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 그녀는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로 두 눈을 꼭 감고 하얀 침대에 누워있었다.

“언제쯤 깨어날 수 있어?”

하은후가 물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 금방 깨어날 수도 있고 내일 깨어날 수도 있어.”

설승범은 말하면서 하은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항상 구겨진 자국 없이 깔끔했던 맞춤 셔츠가 눈에 띄게 구겨졌고 단추마저 잘못 채워져 있었다. 셔츠 깃이 느슨하게 벌어져 있었는데 목에 생긴 키스 마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설승범의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하은후에게 다가가 들고 있던 환자 차트로 하은후의 어깨를 툭 쳤다.

“왜 날 급하게 불렀나 했더니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너였구나? 대체 얼마나 격렬하게 했으면...”

그 말에 하은후의 시선이 설승범에게 향했다. 두 눈에 닥치라는 경고가 다분하게 담겨 있었다.

하지만 설승범은 아무것도 못 본 듯 되레 더 심하게 장난쳤다.

“옷이 다 구겨진 것만 봐도 얼마나 격렬했을지 상상이 가. 아무리 그래도 살살했어야지. 이 여자 목이 벌겋게 된 것 좀 봐. 너 침대 매너가...”

“설승범, 입을 확 꿰매버린다?”

하은후의 목소리가 높진 않았지만 압박감이 엄청났다.

“알았어. 잘못했어.”

설승범은 두 손을 들어 항복하는 시늉을 하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이 여자를 진작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귀국하자마자 다시 불이 붙었네? 잠깐. 온이서 결혼하지 않았어? 너 남의 가정에 끼어든 거야?”

하은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친구야, 정신 차려. 남의 가정을 파탄 내면 벌 받아. 내 말 잘 들어. 지금 너의 조건과 몸값이라면 어떤 여자든 다 만날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선은 지키자. 내연남은 절대 안 돼.”

“제발 입 좀 다물어.”

하은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침대에 누워있는 온이서를 내려다봤다.

모든 경계를 내려놓은 상태라 얼굴에 공격적인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6년 전 그와 자는 게 질렸다는 독설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6년 전에도,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말했다.

하은후는 6년 전에 온이서가 어떻게 그의 자존심을 잔인하게 짓밟았는지 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그의 감정을 가지고 논 게 원망스러웠고 그의 가족까지 해쳤기에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다시 온이서와 사랑에 빠질 수 있겠는가?

“나랑 이서는 오래전부터 불가능했어.”

하은후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난 이서가 6년 전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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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리 가!”온이서는 거의 애원하는 어조였다.“내보내려면 일단 빚부터 갚아.”“무슨 빚? 이미 요리까지 해줬잖아?”“호텔 빚.”말을 마친 하은후는 온이서의 허리를 꽉 잡더니 고개를 숙여 뜨거운 입술로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불꽃처럼 덮쳤다.그날 온이서가 했던 것처럼 부드러운 키스가 아니라 벌과 징벌의 의미를 담은 강한 빨림이었다.“으...”눈살을 찌푸린 온이서는 따끔하고 간지러운 감각에 저도 모르게 온몸을 떨었다.어떻게든 몸을 비틀며 하은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강하고 거친 하은후의 힘 앞에서는 턱없이 부족했다.밀폐된 공간에 거칠게 얽히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들렸다.몇 초 후 하은후가 드디어 온이서를 놓아주었다.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서 거울에 기댄 온이서는 목에 선명하고 애매한 붉은 자국이 남은 것을 발견했다.‘큰일 났네... 고른 드레스가 모두 터틀넥 스타일인데... 이제 어떻게 입어 보지?’몸을 곧게 편 하은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이서의 하얀 피부에 자신이 남긴 키스 마크를 바라본 순간 눈빛이 폭풍 전야의 바다처럼 무거워졌다. 눈빛 속에는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혼란이 섞여 있었다.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자기 입술을 살짝 닦은 뒤 한마디 했다.“이걸로 호텔 빚 갚은 거야.”말을 마친 뒤 온이서를 더 이상 보지 않은 채 뒤로 돌아 커튼을 젖혔다. 그러고는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거친 기운을 풍기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온이서는 부드러운 의자에 미끄러지듯 앉았다. 미처 숨을 고르기도 전에 두 점원이 함께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황씨 가문 사모님, 필요한 드레스 두 벌 다 가져왔어요. 나와서 입어 보세요.”갑작스럽게 생긴 키스 마크라 뭐로도 가릴 수 없었기에 온이서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깔끔하게 다듬은 손톱으로 하은후가 남긴 키스 마크를 세게 꼬집었다.“아악!”온이서가 비명을 질렀다.“벌레!”두 점원이 온이서의 비명을 듣고 급히 뛰어 들어왔다.“사모님, 괜찮으세요? 벌레 어디 있어요?”“

  • 6년 만의 재회, 똑같은 선택   제26화

    “하은후, 미쳤어?”온이서가 당황하며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빨리 나가!”“미친 게 누군데!”온이서를 바라본 하은후는 맹수처럼 거친 기운을 내뿜으며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너한테 가정 폭력을 하고 너를 기절시켜 다른 남자 침대에 보내 바람을 피운 것처럼 모함하려는 그런 개자식인데, 그래도 이혼 안 하겠다고?”“내 일이니까 신경 끄고 나가!”온이서가 손을 들어 하은후를 밀쳤지만 하은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일한 출구를 막아서며 두꺼운 벨벳 커튼에 등을 기댄 채 말을 이었다.“황주원이 뭐가 좋은데? 그렇게까지 황주원이라는 남자를 사랑해? 너를 해쳐도 용서할 만큼? 결혼해서 부부라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은 있는 거야.”온이서는 초조하면서도 화가 났다.“하은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따지는데?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무슨 자격? 잊었어? 나는 네가 바람피운 상대야.”하은후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자 큰 키 때문에 온이서 몸 위에 하은후의 그림자가 뒤덮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숨 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좁아졌다.“다시 네 남편과 산다고? 그러면 네 바람 상대인 나는 어쩌고?”온이서는 하은후가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바람 상대 역할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건가 싶었다.“아프면 가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짓 하지 말고!”온이서가 다시 한번 하은후를 밀치려 했지만 하은후는 오히려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 뒤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너무 뜨거운 하은후의 체온에 온이서는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했다.“아가씨, 결혼 생활에 떳떳하지 못한 행동한 적 없다고? 그럼 지난번 호텔에서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잊었어?”하은후는 긴 손가락으로 온이서의 길고 하얀 목을 스쳤다.“네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키스 마크를 남겨놓고 결혼 생활에 떳떳하다고?”하은후의 어두운 눈빛에 위험한 감정이 출렁이는 것을 본 온이서는 긴장한 마음에 거울에 몸을 기댔다.“지금 이런 걸 얘기할 때가 아니야, 누가 들어와서 우리 둘이 여기 있는 걸 보

  • 6년 만의 재회, 똑같은 선택   제25화

    검은색 하이엔드 맞춤 정장을 차려입은 하은후는 아주 잘생겼다.그의 곁에 있는 심아정은 검은색 벨벳 롱드레스를 입어 두 사람이 매우 어울려 보였다.‘세상이 작다는 말 이래서 하나 보네...’온이서는 그들이 보지 못하게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지만 하은후는 여전히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하은후의 멈칫한 시선에 심아정도 바로 온이서를 발견했다.“오빠, 저분 며칠 전에 오빠 집에 와서 요리하던 시간제 도우미 언니 아니야?”눈에 놀라움이 스친 심아정은 온이서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언니, 여기서 뭐 하세요?”“저...”상음시의 드레스 전문점은 고급 정품을 주력으로 하는 곳이었기에 여기 드레스 가격은 시간제 요리 도우미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온이서가 어떻게 둘러댈지 생각 중이었을 때 점원이 그녀 곁으로 와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지금 손에 들고 계신 이 드레스, 디자이너 로렌스 씨가 때마침 2층에 계세요. 필요하시면 내려오셔서 디자인 컨셉을 설명해 드리라고 하겠습니다.”“괜찮아요. 감사합니다.”“사모님?”심아정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그쪽이 사모님이라고요? 그럼 왜 은후 오빠 집에서 시간제 도우미로 일한 거예요?”“이혼 준비 중이어서 생활비를 벌려고요.”온이서가 말했다.“그럼 지금은요?”“지금은... 지금은 이혼 안 하려고요.”온이서의 말이 끝나자 하은후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눈빛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독을 묻힌 바늘 같아 관자놀이가 쿡쿡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단 1초도 머물고 싶지 않아 막 돌아서려는 순간 황주원이 다가왔다.“이거, 하은후 변호사님 아닌가요?”하은후를 발견한 황주원이 웃으며 악수를 하려고 다가왔지만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서 있는 하은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색해진 황주원은 지난번 호텔에서 하은후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때문에 하은후가 이러는 줄 알고 사과하려 했다. 바로 그때 하은후가 입을 열었다.“황주원 씨, 누군지 소개 좀 해줄래요?”하은후가 온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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