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진재언과 대화를 마친 강서이는 김설에게 ‘꿈결’ 쇼케이스 영상을 정리해서 보내 달라고 했다.김설은 말을 머뭇거렸다. “대표님, 그냥 안 보시면 안 돼요? 볼 것도 없는데요.”강서이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김설이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투덜거렸다. “멀쩡한 게임 쇼케이스가 갑자기 연애 발표회가 됐거든요.”강서이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래도 전체 내용을 정리해서 보내 달라고 했다.앞부분은 분명히 ‘꿈결’ 소개가 중심이었다. 그런데 한 기자의 질문으로 화제가 벗어난 뒤부터는 거의 두 사람의 연애 발표처럼 흘러갔다.김설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후반부 영상을 아예 잘라 버렸다.강서이는 놓친 내용이 있을까 싶어 직접 ‘꿈결’ 공식 숏폼 계정에 들어갔다.가장 많은 반응을 받은 영상은 게임과 아무 상관도 없는 내용이었다.강서이는 그대로 넘기고 게임 관련 영상을 보려고 했다.그런데 화면이 민도하의 얼굴로 바뀌었다.강서이의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곧 민도하의 다정한 고백이 영상에서 흘러나왔다.[아리 씨가 그렇게 뛰어난데 제가 어떻게 결혼이라는 틀 안에 가둬 두겠습니까? 결혼해도 아리 씨는 자유롭게 자기 일을 할 사람이고, 원하는 곳에서 마음껏 능력을 펼칠 겁니다.] 강서이는 눈을 내리깔며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다정하네.’‘민도하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저런 모습이 되는구나.’생각해 보면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7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저런 민도하의 모습은 처음 봤다.하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강서이는 영상을 넘긴 뒤 ‘꿈결’ 관련 콘텐츠와 이용자 평가를 간단히 살펴봤다.홍보부터 비공개 테스트, 쇼케이스까지 공개된 내용 대부분이 진재언이 꿈결엔진에 있을 때 만들어 둔 토대를 그대로 활용한 것이었다.대신 캐릭터 설정 일부는 수정돼 있었다. 예를 들면 여성 캐릭터의 의상이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몸매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다.강서이가 영상을 막 닫았을 때 한지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전화를 받자, 강서이가 인사할
‘강서이는 왜 그렇게 평온하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서태우는 한동안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결론을 냈다.‘강서이는 연기하는 거야!’예전에 강서이가 민도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주변 사람들이 다 봤으니까.민도하는 쇼케이스 시작 시간에 거의 맞춰서 도착했다.서태우가 민도하에게 물었다. “너네 집은 지대가 높아서 지하주차장이 잠길 일도 없잖아. B시에서도 손꼽히는 주거단지인데 차가 왜 물을 먹어?”민도하가 담담하게 답했다. “어제 본가에서 잤어.”“아, 그래서 오늘 아리랑 같이 안 온 거구나.”민도하가 자리에 앉자 쇼케이스가 정식으로 시작됐다.노아리와 ‘꿈결’의 창업자 이봉석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서, 게임의 특징과 비공개 테스트에서 나온 좋은 지표, 이용자 반응을 상세히 소개했다.기자 질의응답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질문은 대부분 게임에 관한 내용이었다.그러다 누군가 흐름을 바꾸듯 갑자기 노아리의 연애 이야기를 꺼냈다.“노아리 본부장님, 프라임로드투자의 민 대표님도 오늘 현장에 와 계신 걸 봤습니다. 두 분 사이가 정말 좋아 보이는데, 곧 좋은 소식이 있다는 이야기가 사실인가요?”노아리는 행복에 푹 빠진 사람처럼 눈꼬리를 예쁘게 휘면서 대답했다. “하나 정정할게요.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에요.”현장 곳곳에서 부러운 탄성이 터졌다.기자가 바로 이어 물었다. “그럼 민 대표님과 약혼하신 뒤에는 커리어를 접고 가정에 전념하실 계획인가요?”노아리는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민도하에게 자연스럽게 넘겼다. “그건 민 대표한테 물어보셔야죠. 제가 계속 일을 하길 바라는지, 아니면 집에서 가정에 전념하길 바라는지요.”카메라가 일제히 민도하를 향했다. 서태우조차 민도하가 어떻게 답할지 궁금해졌다.민도하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답하기 전에 먼저 노아리를 바라봤다.누가 봐도 애정이 깊어 보이는 눈이었다.“아리 씨가 그렇게 뛰어난데 제가 어떻게 결혼이라는 틀 안에 가둬 두겠습니까? 결혼해도 아리 씨는 자유롭게 자기 일을 할 사람이고, 원하는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빗소리가 일정한 백색소음처럼 들려서 강서이는 오랜만에 푹 잤다.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진인자가 이미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둔 뒤였다.진인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자고 가길 정말 잘했어요. 아침에 입주민 단톡방에 올라온 사진이랑 영상을 봤는데 너무 무섭더라고요.” “길 한 구간이 아예 내려앉아서 지나가던 차까지 빠졌대요. 다친 사람이 있는지도 아직 모르겠어요.”말을 마친 진인자가 한숨을 쉬었다. “민 대표도 어젯밤에 위험한 일은 없었는지 모르겠네요.”그건 강서이도 알 수 없는 일이어서 말없이 식사만 이어 갔다.아침을 먹은 뒤 강서이는 진인자에게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내비게이션에는 도로 일부가 내려앉아 통행할 수 없으니 우회하라는 안내가 떴다.평소보다 늦게 회사에 도착하자, 데스크의 직원이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알려줬다.서한승이었다.강서이는 꽤 의외였다.서한승이 이유를 설명했다. “한동안 ZH은행 일 때문에 정신없어서 네 회사 제대로 둘러본 적도 없잖아. 강 대표, 괜찮으면 안내 좀 해 줄래?”“물론이죠. 그런데 30분만 기다려주세요. 아침 회의가 하나 있거든요.”“난 상관없어.” 서한승은 오늘 시간이 충분했다.강서이가 회의에 들어간 사이에, 서태우가 또 서한승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꿈결엔진이 오늘 ‘꿈결’ 미디어 쇼케이스를 연다며 노아리를 응원하러 같이 가자고 했다.서한승은 바로 거절했다. “시간 없어.”[뭐 하는데? 요즘 왜 맨날 시간이 없어?]“협력사 점검 중.”서태우는 더 이해가 안 됐다. [협력사 둘러보는 걸, 직접 해야 해? 그냥 빨리 와.]“네가 있으면 됐지. 나 이쪽은 바빠. 끊는다.”서태우가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서한승은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다시 전화해도 안 받을 것 같자, 서태우는 서한승의 비서에게 연락해서 오늘 어느 협력사를 방문했는지 물었다.비서는 그로스캐피탈이라고 답했다.서태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서한승이 굳이 말을
객관적으로 봐야 올바른 판단도 내릴 수 있었다.차를 다 마신 뒤, 민두해는 바깥의 빗줄기가 더 거세진 걸 보고 강서이에게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가라고 했다. 이런 비에 운전하는 건 위험했다.강서이는 상황을 조금 더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거실로 돌아오자, 식탁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민도하가 보였다.민도하도 마침 강서이 쪽을 보고 있어서 시선이 마주쳤다.두 사람의 눈길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강서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시선을 거두고 진인자에게 물었다. “배즙 드시고 좀 괜찮아지셨어요?”“훨씬 나아졌어요.”물론 기침이 완전히 멈춘 건 아니었다.진인자가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민 대표는 서이 씨가 온 줄 몰랐어요. 제가 아프다는 얘기 듣고 들른 거예요.”강서이는 민도하가 자기 때문에 돌아왔다고 착각할 만큼 자의식이 과하지는 않았다.“시간도 늦었으니 저는 이제 갈게요. 남은 배즙은 보온병에 담아 뒀어요. 생각나실 때 조금씩 드세요.” 빈 그릇을 주방에 가져다놓은 강서이가 다시 나오면서 진인자에게 말했다.말이 끝나자마자 바깥에서 엄청난 천둥소리가 울렸다.창문까지 덜컹거릴 만큼 거센 소리라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비도 갈수록 더 세게 쏟아졌다.진인자가 급하게 말했다. “관리사무소에서 방금 연락이 왔는데 근처 도로가 여러 군데 잠겼대요. 운전하면 위험하니까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될까요?”민도하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강서이도 안전을 생각해서 남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강서이가 거절하기도 전에 민도하가 먼저 말했다. “넌 그냥 있어. 난 좀 있다 갈게.”진인자는 민도하도 걱정됐다. “비가 너무 많이 와요. 길도 잠겼다는데 괜찮으시겠어요?”민도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요.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갈게요.”강서이는 입을 열어 민도하를 부르려고 했다.“민 대...” ‘민 대표’를 채 부르기도 전에 민도하는 이미 서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진인자가 두 사람의 지금 모습을 보며 가슴
‘또 무슨 바람이 든 거야?’강서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끊지도 않았지만 받을 생각도 없었다.그냥 울리게 놔뒀다.어차피 민도하는 참을성이 긴 사람이 아니었다.한 번 전화가 끝나자 핸드폰은 조용해졌다.민도하는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강서이가 잠옷을 들고 다시 욕실로 가려는데, 하필 그때 또 전화벨이 울렸다.강서이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었다. 아예 전원을 꺼 버리고 평온한 밤을 방해받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런데 발신자는 진인자였다. 강서이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진인자의 심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강서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진인자는 기침이 너무 심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한참 숨을 고른 뒤에야 힘겹게 말했다. [서이 씨, 전에 기침에 좋다고 직접 만들어 주셨던 배즙 있잖아요. 그거 어떻게 만드는 거였죠?]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기침이 이어졌다.강서이가 바로 말했다. “직접 하지 마세요. 제가 가서 해 드릴게요.”[밖에 비가 너무 많이 와요.]“괜찮아요.” 강서이는 외투를 챙긴 뒤 바로 집을 나섰다. 최대한 서둘러서 민두해 집으로 차를 몰았다.진인자의 상태는 생각보다 꽤 심했다. A형 독감 때문에 기침이 심해진 것이었다.진인자 말로는 꽤 전부터 기침이 이어졌고, 약을 먹고 수액까지 맞았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고 했다.그러다 지난해 독감이 유행했을 때, 강서이가 가져다준 도라지배즙이 효과가 좋았던 게 떠올라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제가 금방 만들게요. 잠깐 쉬고 계세요. 다 되면 말씀드릴게요.”진인자가 부탁했다. “그럼 조금 넉넉하게 부탁드려요. 회장님도 A형 독감이세요.”“네.”강서이는 익숙하게 주방으로 들어갔다.원래 요리에는 재능이 없어서 간단한 해장국이나 도라지배즙밖에 만들지 못했다.그마저도 민도하와 사귀고 난 뒤 일부러 배운 것이었다.처음에는 제대로 만들지도 못했다.하지만 강서이는 한번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끝을 보는 사람
노아리의 눈에는 실망의 기색이 비쳤다.저녁 모임에 서한승이 나오기는 했지만 혼자였다.서태우는 낮에 같이 있던 여자는 왜 안 데리고 왔냐고 물었다.서한승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술자리 별로 안 좋아해.”“벌써부터 감싸는 거 봐라?”서태우가 놀렸다. “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애지중지해?”“뭐가 그렇게 급해?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그때가 언젠데? 결혼식? 애 돌잔치?”“둘 다 될 수도 있고.”서태우가 벌떡 일어날 기세로 반응했다. “그러니까 진짜 결혼까지 생각하는 거야?”“응.” 서한승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노아리는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둘의 대화가 하나도 빠짐없이 귀에 들어오자 표정이 굳어졌다.서한승과 알고 지낸 시간이 6년이 넘었지만, 서한승은 결혼 이야기에 진지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노아리가 몇 번 돌려서 떠봤을 때도 제대로 된 반응을 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노아리는 손에 든 잔을 꽉 움켜쥐었다. 표정도 편하지 않았다.다만 누구도 그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서한승은 자연스러운 척 민도하 쪽을 한번 바라봤다.민도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고요한 눈에는 방금 대화에 관심이 없다는 듯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아무리 캐물어도 서한승에게서 더 알아낼 수 없자, 서태우는 결국 포기했다.자기 잔에 술을 따르려다가 문득 보니, 민도하 혼자 어느새 반 병 넘게 비우고 있었다.“도하야, 왜 그래?” 서태우가 거의 빈 술병을 흔들었다. “접대 자리도 아닌데 뭘 그렇게 마셔?”민도하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주량 좀 늘리려고.”“아리 술 대신 마셔 주려고?”민도하가 답했다. “응. 곧 약혼식이잖아.”서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진짜 세심하다.”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노아리도 민도하의 말을 듣자 한결 나아졌다.노아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도하야, 너무 많이 마시지 마.”“알았어.”서태우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워낙 많이 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