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강서이는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이건 얘기할 여지가 없어.”민도하는 기분 나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느긋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차분하고 무심하게 말했다. “내 조건부터 듣고 결정해도 되잖아. 거절하기 어려운 조건일 수도 있으니까.”민도하를 잠시 바라보던 강서이가 미간을 폈다. “좋아. 얘기해 봐.”민도하가 가볍게 웃었다.비웃음 같았다.옆에 있던 노아리도 붉은 입술을 업신여기듯 끌어 올렸다.강서이는 개의치 않았다.이번에는 민도하가 노아리를 위해 얼마나 내놓을지, 어떤 좋은 조건을 제시할지 궁금할 뿐이었다.이런 협상은 당연히 단둘이 해야 했다.일어선 민도하가 노아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안심시키려는 동작이었다. “금방 다녀올게.”노아리는 너그럽게 굴었다. 민도하와의 관계를 굳게 믿는다는 듯이. “편하게 얘기하고 와.”그러면서도 강서이가 나갈 때는 깔보는 눈길을 던졌다.‘민 회장님이 좋아해 주면 뭐 해?’‘도하한테 강서이는 아무것도 아닌데!’‘도하가 신경 쓰는 건 나뿐이야.’민도하의 기록을 깨고 B시에서 가장 빠르게 회사를 상장시킨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민도하는 곧바로 움직였다.직접 SL증권 고인수에게 연락하고, 강서이가 계약하기 전에 와서 기회를 가로챘다.민도하는 강서이를 다른 별실로 데려갔다. 안에서는 직원이 미리 차를 우려 놓고 있었다.테이블에는 보기 좋은 다과가 몇 접시 놓여 있었다.몇 년 전 SNS에서 크게 유행했던 꽃설기도 있었다. 한창 인기일 때는 구하기도 힘든 디저트였다.당시 자회사 상장 때문에 쉬지 않고 야근하던 프라임로드투자 직원들을 챙기려고, 강서이는 한밤중부터 가게 앞에 줄을 서서 그 떡을 샀다.수량이 한정돼 있어 강서이 자신의 몫은 남겨 두지 못했다.보다 못한 여진이 결국 반 상자를 나눠 주었다.맛을 보니 정말 괜찮아서 강서이는 그 일을 민도하에게도 이야기했다.일에 바빴던 민도하는 그 메시지에 답을 하지도 않았다.그 뒤로는 강서이도 잊고 지냈다
눈앞에 온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리 없었다.이예수의 말이 끝나자, 여전히 휠체어에 앉아 있던 민두해가 눈꺼풀을 들고 한번 쓱 훑었다.아무 감정도 없는 시선인데도 이예수는 괜히 물러서고 싶어졌다.노아리도 얌전하게 인사했다. “회장님.”민두해는 노아리를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표정은 담담하고 거리가 있었다.그래도 노아리는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었다. “도하가 곧 올 거예요. 먼저 모셔다드리라고 할까요?”옆에 있던 진인자가 차가운 눈길로 노아리를 보았다. “괜찮아요. 회장님은 모시러 오는 분이 계세요.”말이 끝나자마자 마침 강서이가 도착했다.민두해 앞에 차를 반듯하게 세운 뒤, 강서이가 곧바로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민두해는 진인자의 부축을 받으면서 일어났다.조금 전까지 차갑고 무심했던 표정이 강서이를 보자 한결 부드러워졌다. “왔구나.”“제가 부축할게요.” 강서이가 민두해를 부축하면서 차로 향했다.진인자도 얼른 뒤를 따랐다.그 자리에 남은 모녀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노아리는 화가 나서 온몸이 떨렸다.이예수도 화가 났지만 그래도 노아리보다는 참을 줄 알았다.“도하 곧 온다. 표정부터 가다듬어.”그러면서 강서이의 차가 떠난 방향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강서이도 오래 기고만장하진 못할 거야.”민두해가 소개해 준 덕분에 강서이는 SL증권 고인수 대표와 순조롭게 이야기를 나눴다.고인수는 ‘문심’의 전망을 밝게 봤고 강서이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반드시 ‘문심’을 상장시키겠다며 자신 있게 약속했다.그 말을 듣고 강서이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주말 이틀도 쉬지 않았다. 회사에 남아 SL증권에서 요구한 자료를 준비하느라 야근을 이어 갔다.월요일, 고인수를 만나 자료를 전달하려고 약속 장소에 간 강서이는 민도하와 노아리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다.세 사람이 아는 사이인 줄 모르는 고인수는 웃으며 소개했다. “강 대표님, 이쪽으로 오세요. 인사 나누시죠. 영승반도체 민 대표님, 이쪽은 바스테크 노 사장님입니다.”‘바
‘뭐긴.’‘노아리 일인데 급하지 않을 리가...’강서이의 관심은 그쪽에 있지 않았다. 민두해에게 몇 가지를 더 물은 뒤, 병실을 나섰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강서이는 병실로 돌아간 뒤, 이튿날 아침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강윤희에게 먼저 가겠다고 알렸다.안내 데스크에 들러서 당직 간호사에게도 인사했다. 남은 검사 결과가 정확히 언제 나오는지, 언제 받으러 오면 될지도 함께 물었다.그때 그쪽으로 노아리와 민도하가 걸어왔다.노아리가 민도하에게 말했다. “도하야, 우리 엄마 때문에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민도하의 목소리는 보기 드물게 부드러웠다. “번거롭긴. 네 일이 내 일이지. 진작 말했으면 어머님도 고생 안 하셨잖아.”마음이 따뜻해진 노아리가 민도하의 팔짱을 꼈다. “일하는 데 방해될까 봐 계속 전화하기가 그랬어.”“앞으로는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해.”VIP 병동은 정말 조용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한마디도 빠짐없이 강서이의 귀에 들어왔다.하지만 마음에는 아무 동요도 없었다. 강서이는 간호사가 알려 주는 시간을 메모 앱에 꼼꼼하게 적었다.간호사가 친절하게 말했다. “검사 결과는 저희가 대신 받아 드려요. 대표님은 일 바쁘시면 나중에 오셔도 돼요. 꼭 시간을 맞추실 필요는 없어요.”그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강서이임을 확인하자 노아리는 무심한 눈길을 거두었다. 대신 민도하에게 몸을 더 바짝 붙였다.민도하도 강서이를 봤지만 눈빛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두 사람은 금세 멀어졌다.병실을 돌고 돌아온 다른 간호사가 동료에게 푸념했다. “빈 병실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또 입원했대요?”“민 대표님이 부탁해서 조정했다나 봐요.”강서이가 있어서인지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두 간호사 모두 썩 반갑지 않은 눈치였다.강서이는 그제야 알았다. 민도하가 아까 급히 떠난 건 노아리의 어머니에게 VIP 병실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다.미래의 장모에게 정말 정성도 지극했다
한지수는 더 신이 났다. “민도하는 매일 먹어도 안 더러운데 넌 듣기만 해도 더러워?”“그만하라니까!”강서이가 젓가락이라도 던질 기세를 보이자 한지수가 얼른 항복했다. “알았어, 안 할게. 어쨌든 애인이 바람피우는 것도 모른 채 당분간 더 살라고 그러지 뭐.”강서이도 같은 생각이었다.식사를 마쳤을 때 강서이가 주문한 퀵 배송이 도착했다.민두해가 좋아하는 가게의 갓 만든 약과였다.VIP 병실을 마련해 준 덕을 많이 봤으니,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게 당연한 도리였다.문을 두드리고 들어간 강서이는 민도하도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민도하는 강서이를 보자 몸을 살짝 틀었다. 깊은 눈을 들어 한 번 바라보았다.여전히 무심했고, 별다른 감정은 읽히지 않았다.강서이는 진인자에게 상자를 건넸다. 인사만 하고 곧바로 나갈 생각이었다.그런데 민두해가 상장 주관사 이야기를 꺼냈다.강서이도 몇 군데에 연락해서 계속 협의하고 있었다. 다만 제안받은 계획들이 조금씩 아쉬웠다.“추천할 만한 곳이 두 군데 있어.” 민두해가 미리 준비해 둔 자료를 건넸다.자료를 받아 본 강서이는 놀랐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상장 주관사 두 곳이었다.‘문심’의 사업이나 규모로는 아직 협업 기준을 맞추기 어려운 곳들이었다.주로 기업 가치가 수십조 원에 이르는 회사들을 상대했으니까.그래서 강서이는 애초에 이 두 곳과 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민두해는 강서이의 망설임을 알아차렸다. “내가 소개하면 검토는 해 줄 거야.”강서이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창업이라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그래도 좋은 사람들을 여럿 만난 덕분에 조금은 덜 힘들게 걸어갈 수 있었다.“‘문심’에는 SL증권이 더 맞을 것 같아. 비슷한 일을 맡아 본 경험이 있거든. S시 합중투자 상장도 주관했는데, 심사 접수부터 승인까지 88일밖에 안 걸렸어.”민도하도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강서이 역시 마음은 SL증권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SL증권이 코스닥 기술기업 상장 분야에 더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
한지수가 조희경보다 더 큰 목소리로 받아쳤다. “들켰으니 말할게요. 그래요, 이제 안 숨길 거예요. 어머니라고 불러 봐요!”“절도 한번 하면 더 좋고요! 시집오려면 새 시어머니 허락부터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말싸움에서 한지수가 진 적은 없었다.그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모두 확 바뀌었다.이예수는 자극이라도 받은 듯 더 심하게 토했다.노아리가 다급히 이예수를 챙겼다. 조희경만 한지수에게 맞섰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젊은 사람이 못된 것만 배워서, 남의 새엄마가 될 생각이나 하고! 회장님이 나이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마음이 들어요?”한지수는 화내기는커녕 웃었다. “말씀은 잘하시네요. 기회가 없어서 그러시지, 그런 기회가 오면 따님이라도 침대에 밀어 넣고 싶으실 텐데요?”‘고상한 척은...’“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데, 어떻게 마음이 드는지 궁금하시면 노아리 씨한테 물어보세요. 노아리 씨가 잘 아실 테니까.” 한지수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노아리를 보았다.이예수를 부축하던 노아리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조희경이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이예수가 단호하게 끊었다. “그만해요! 나 몸이 안 좋으니까 병실로 좀 데려다줘요.”조희경은 못마땅했지만 더 말하지 못했다.세 사람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한지수가 시원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상대도 안 되는 것들이.”의기양양한 한지수를 보면서 강서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속 시원해?”한지수가 답했다. “완전!”“그럼 됐어.”한지수가 물었다. “나한테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강서이는 담담하게 웃었다. “왜? 남들이 나한테 더러운 말 보태는 게 무서웠으면, 민 회장님하고 가깝게 지내지도 않았지.”“그렇지! 착한 사람 노릇 안 하면 착하게 굴라고 협박해 봐야 안 먹히는 거야!”한지수는 대학 때부터 남다른 정신세계로 앞서 나갔다.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오래 함께 지냈기에 강서이도 그 배짱을 조금은 배웠다.한바탕 속을 풀고 나서야 한지수는
그 한마디가 모녀의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두 사람의 표정은 아주 좋지 않았다.그때 간호사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 위·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았는지 물었다.노아리는 아직이라고 답했다.간호사가 서둘러 달라고 했다. “진료에 필요한 결과라서요. 검사부터 받고 오셔야 해요.”이예수가 물었다. “수면으로 바꿔 주면 안 돼요?”일반 내시경 검사에는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간호사는 난처해했다. “수면 검사는 미리 예약하셔야 해요. 예약이 없으셔서 지금은 일반 검사만 가능합니다.”조희경이 노아리에게 물었다. “예약 안 했어?”노아리의 표정이 굳어졌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네, 안 했어요.”그런 것까지 어떻게 생각했겠는가.전에는 이예수가 입원하든 노아리가 입원하든 모두 민도하가 알아서 해 주었다.VIP 병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특별 관리를 받았으니 따로 예약할 필요도 없었다.조희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수면 아니면 정말 고생인데. 도하한테 전화해서 좀 알아봐 달라고 해. 이 병원에 투자했으니 한마디만 하면 될 거 아냐.”이예수도 거들었다. “그래, 도하한테 전화해 봐. 나 정말 맨정신으로 위랑 대장 내시경은 하기 싫어.”노아리는 어쩔 수 없이 민도하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바쁜가 봐요.” 노아리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민도하가 노아리의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을 리 없다는 걸 모두 알았다.일 때문에 핸드폰을 못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노아리도 그렇게 생각했다.“그럼 어떻게 하지? 도하 일 끝날 때까지 기다려 볼까요?” 조희경이 망설이며 물었다.이예수는 더 큰 일을 생각해서 그냥 견뎌보기로 했다. “됐어요. 그냥 받을게요. 매번 도하한테 부탁할 수도 없잖아요.”“아직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다 아리 일도 잘 안 풀리고 있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까지 도하를 귀찮게 하면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죠.”게다가 민두해도 같은 병원에 있었다.민두해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