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정루아는 휴대폰을 부서져라 꽉 쥐었다.“1,800만 원!”전화가 끊김과 동시에 사회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정루아는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다시 한번 번호판을 치켜들었다.하지만 승패는 이미 정해졌다.정시연이 원하는 이상 구태윤에게 2,000만 원 따위는 푼돈에 불과했으니, 기꺼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터였다.그렇다면 아내인 자신은?정루아는 참담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2,000만 원!”종착지에 다다른 액수가 선언되자, 그녀의 손에서 힘이 탁 풀렸다.번호판이 손바닥 사이로 스르륵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결국 외할머니의 유품을 지켜내지 못했다.평생 외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낡은 사진 속 귀걸이를 멍하니 바라보던 분이셨다.그 아름다웠던 시절의 유일한 흔적조차 찾아드리는 데 실패하다니.자신이 이토록 무능하고 쓸모없을 줄이야.이연희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루아야, 기죽지 마! 낙찰 못 받았으면 뭐 어때, 가서 도로 뺏어오면 되지. 구태윤 그 인간이 무슨 권리로 부부 공동재산을 마음대로 써서 딴 년한테 선물을 줘? 저쪽에서 상도덕 없이 나오는데, 너도 그냥 막무가내로 나가.”그 말에 정루아의 눈동자가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그래, 네 말이 맞아.”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곧장 대기실을 향해 걸어갔다.이연희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르며 연신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대기실 스태프는 이미 귀걸이를 정시연의 손에 인도한 상태였다.구태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정시연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상자를 소중히 품에 안은 채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태윤 씨, 내 소원을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구태윤은 그녀를 덤덤하게 바라보며 대꾸했다.“이걸로 과거의 빚은 전부 청산한 겁니다.”정시연의 안색이 순간 굳어졌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태윤 씨, 왜 자꾸 지난 일에 얽매여 있어요? 난 대가를 바란 적 한 번도 없어요.”“내가 남한테 신세 지는
정루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번호판을 부서져라 움켜쥔 그녀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구태윤.’이 사파이어 귀걸이는 애초에 대단한 수집 가치가 있는 물건도, 특별한 유래가 깊은 유물도 아니었다.아무리 높게 잡아도 800만 원 선.그 이상을 부르는 건 미련한 짓이었기에 600만 원에서 이미 다른 입찰자들이 발을 뺀 것이었다.뒤이어 소장 가치가 어마어마한 골동품들이 줄을 이어 대기 중인 상황에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지를 사람은 오직 한 명이었다.정루아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에 서슬 퍼런 분노가 피어올랐다.“1,000만 원 한 번!”사회자의 우렁찬 외침에 정루아는 다시 번호판을 치켜들었다.“1,050만 원!”한편, 행사장 반대편 객석.낙찰을 확신하던 정시연은 예상치 못한 복병의 등장에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이내 곁에 앉은 구태윤의 눈치를 살폈다.여기서 그가 손을 털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정시연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태윤 씨, 가격이 너무 터무니없이 올라가면 그냥 포기해요. 귀걸이 한 쌍에 이 정도 거금을 쓰는 건 아무래도 좀...”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 전략이었다.어스름한 조명 아래, 구태윤의 옆얼굴은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그는 정시연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기계적으로 번호판을 다시 한번 높이 들어 올렸다.“1,100만 원!”장내가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저 정도로 특별한 귀걸이었어?”“대체 왜 이렇게까지 값을 올리는 거지?”사람들은 술렁이며 양쪽을 번갈아 살폈다.직전까지 입찰했던 이가 과연 이 게임을 이어갈지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정시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태윤 씨, 이건 너무 과해요. 그냥 포기해요, 우리.”그러나 구태윤은 덤덤한 어조로 대꾸할 뿐이었다.“내 목숨의 가치가 고작 1,000만 원밖에 안 됩니까?”정시연은 할 말을 잃고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정루아 역시 지지 않고 번호판을 들
정루아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이혼 소송을 제기하려던 길마저 또다시 막혀버렸다.대체 어떻게 해야 그 지긋지긋한 남자와 갈라설 수 있단 말인가.치밀어 오르는 두통에 정루아는 관자놀이를 짚었다....오후가 되자, 이연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오늘 밤이 바로 경매잖아. 준비는 다 됐어?”정루아가 대답했다.“응.”이연희가 말했다.“그럼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알았어.”정루아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곧장 경매장으로 향했다.웅장한 규모의 행사장 안은 이미 수많은 참석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무대 위에서는 사회자가 분주히 움직였고, 사람들의 손에는 저마다 경매품이 인쇄된 팸플릿이 들려 있었다.이연희가 팸플릿에 실린 사파이어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시작가가 300만 원이고, 호가단위가 50만 원씩이네. 얼추 800만 원 선에서 낙찰받을 수 있을 것 같아.”정루아 역시 시선을 팸플릿에 고정한 채 결의를 다졌다.바로 그 순간, 장내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의 눈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구태윤의 모습이 들어왔다.몸에 맞춘 듯 정교하게 재단된 블랙 수트와 수려한 이목구비.그저 걸음을 옮길 뿐인데도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기품이 흘러넘쳤다.그의 팔짱을 낀 채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정시연은 검은색 드레스 차림으로 우아하고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저 인간 말종들 진짜...!”두 남녀를 발견한 이연희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하지만 정루아는 괜스레 불길한 예감이 들어 팸플릿을 꽉 움켜쥐었다.그가 왜 여기 온 걸까? 그것도 정시연을 데리고.이연희는 여전히 구시렁거렸다.“아니, 왜 가는 곳마다 저 쓰레기들이 눈에 밟히는 거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정루아가 이연희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저 사람들이 여기 왜 왔을까?”“내 말이! 불륜 저지른 게 무슨 벼슬이라고 동네방네 소문 못 내서 안달인 건지. 진짜 뻔뻔하게
탁!술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청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구태윤의 검은 눈동자가 한층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는 음침한 시선으로 허도준을 매섭게 노려보며 읊조렸다.“네가 루아를 돕겠다고? 그럼 나는?”허도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덤덤하게 받아쳤다.“넌 네 형수가 있잖아.”구태윤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갔다.“너 진짜 겁 상실했구나.”허도준이 입꼬리를 올렸다.“태윤아, 그동안 인생 너무 순탄하게만 살아서 감을 못 잡나 본데, 정루아가 널 사랑하니까 네가 무슨 짓을 해도 곁에 남을 줄 알았지? 루아도 사람이고 감정이 있어. 게다가 정씨 자매가 어떤 사이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도 넌 매번 루아 기분은 무시하고 정시연을 만나왔어. 당사자 속이 정녕 어땠을지 생각이나 해봤냐?”그러더니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푹 쉬었다.“나야 너희 둘 다 오래 본 친구지만 이번만큼은 상처받은 사람 편에 서야겠어. 안 그러면 다들 루아를 만만하게 볼 텐데, 너무 가엾잖아.”“정루아는 내 아내야. 누가 감히 루아를 건드려?”구태윤이 오만하게 받아쳤다.“우리 부부 일에 다른 인간 끼어드는 거 딱 질색이야. 허도준, 너 지금 친구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냐? 나랑 진짜 끝까지 가보려고?”허도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내가 끝까지 참견하겠다면?”“어디 한 번 해보든가.”두 남자의 시선이 공중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룸 안을 채우던 미묘한 여유는 온데간데없었고, 사방에 불꽃이 튀는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한참이 지나서야 허도준이 먼저 침묵을 깼다.“너 그렇게 독불장군처럼 굴수록 루아를 더 멀리 밀어내는 꼴밖에 안 돼.”“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허도준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버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룸을 나갔다.구태윤 역시 술을 들이켰다.한 잔, 또 한 잔 연거푸 들이붓는 그의 눈빛이 갈수록 차갑고 깊어졌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정시연의 전화였다.“네, 형수님.
구태윤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준수한 얼굴은 심연처럼 음침했고, 차 안의 공기는 얼어붙은 듯 무거웠다.한참을 달린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헛수고하지 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결국 다 들통나게 돼 있어.”하지만 정루아는 창밖만 내다볼 뿐, 대꾸 한마디 안 했다.구태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이 몹시 답답하고 화가 치밀었다.머릿속으로는 자꾸 정루아와 허도준이 나란히 앉아 밥을 먹던 모습이 생각났다.입가에 미소를 띤 채 다정한 눈빛을 보내던 그녀가 떠올라 여간 불쾌한 게 아니었다.정작 자신에게 웃어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돌이켜 보면 결혼기념일 밤만 해도 그에게 딱 붙어 있었던 정루아였다.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관계가 180도 뒤집힌 건지.구태윤은 이 상황이 몹시 낯설고 불편했다.차가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정루아가 문을 열고 내리려 했지만, 차 문은 잠겨 있었다.그녀가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문 열어.”구태윤은 정루아를 빤히 응시했다.“꼭 이럴 때만 나한테 먼저 말을 걸지?”정루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내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구태윤, 나 정말 지쳤어. 이렇게 붙잡고 늘어져 봐야 아무 소용 없어.”“겨우 8년 가지고 지쳤다고? 그럼 앞으로 남은 평생은 어쩔 건데?”구태윤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그러자 정루아가 맞받아쳤다.“내가 말한 평생은 ‘너와 나’단둘이었어. 다른 사람이 낀 게 아니라.”“우리 사이에 다른 사람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정루아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아버렸다.“그냥 이혼하자. 너랑 말 섞는 것도 이제 지쳐.”“싫어.”그녀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앞만 바라볼 뿐, 차 안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구태윤은 감정이 지워진 여자의 얼굴을 내내 응시했다. 한층 가라앉은 눈빛은 용암처럼 뜨거웠다.그러다 문득 울컥 화가 치밀었다.이내 안전벨
허도준의 시선이 정시연의 얼굴에 머물렀다. 입가에는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글쎄. 내가 루아를 도와주길 바라는 거야? 아니면 반대야?”정시연은 세상 무해하고 순진한 얼굴로 생긋 웃었다.“난 그냥 동생이 걱정돼서 물어본 거니까 괜한 오해하지 마.”“그렇구나.”허도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칼에 잘랐다.“그럼 난 더더욱 해줄 말이 없네.”정시연은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꾹 누르며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그러다 문득 미끼를 던졌다.“사실 너도 정루아 좋아하는 거 맞지?”허도준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묵묵히 밥을 먹었다.정시연은 구하준을 제 옆으로 끌어당겨 반찬을 얹어주며 말을 이어갔다.“걔가 워낙 성격도 밝고 시원시원하잖아. 꼭 햇살 같달까? 정 많고 의리도 넘쳐서, 솔직히 어떤 남자가 봐도 탐낼 만한 해.”허도준은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슬슬 민망해진 정시연이 허도준의 눈치를 살폈다.자신을 대할 때는 이토록 차갑고 거리감을 두면서, 정루아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어주다니.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의 대접이었다.정시연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정루아가 레스토랑을 나와 막 택시를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에게 손목을 덥석 붙잡혔다.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그녀는 구태윤의 깊고 서늘한 눈빛과 마주했다.“이거 안 놔?”정루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빼내려고 버둥거렸다.하지만 구태윤은 손아귀에 힘을 주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그 자식이랑 무슨 얘기 했어?”“신경 꺼!”정루아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이거 놓으라고.”“나, 네 남편이야. 밖에서 딴 남자랑 단둘이 밥 먹으며 비밀 얘기까지 나누는데, 내가 눈이 안 돌아가게 생겼어?”구태윤이 그녀를 앞으로 잡아당겼다.“루아야, 우리 아직 이혼한 거 아니야.”정루아가 그를 바라보며 조소를 흘렸다.“왜? 내가 다른 남자 좋아할까 봐 겁나?”그 말에 구태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너 진짜 그러기만 해 봐.”“당신은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