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우선 손부터 놓지?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못 먹어.”정루아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구태윤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내가 먹여주면 되잖아.”“하.”정루아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럴 바엔 그냥 당신 허리춤에 나를 매달고 다니지 그랬어? 그럼 내가 꼼짝없이 묶여 있을 텐데.”구태윤의 눈빛이 한층 깊게 가라앉았다.“싫어서 안 그러는 줄 알아?”“꺼져.”정루아는 남자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구태윤은 가냘프고 아름다운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그녀가 입은 와인빛 드레스는 워낙 강렬해서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이내 발걸음을 옮겨 나란히 걸으며 마치 소유권이라도 주장하려는 듯했다.“안녕하세요, 대표님.”바로 그때, 연회장 직원이 다가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구씨 가문 큰 사모님께서 대표님을 급히 뵙고자 하십니다. 중요하게 전할 말씀이 있다고 하네요.”구태윤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어디 있죠?”직원이 안내했다.“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정시연은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구태윤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정시연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태윤 씨, 루아는요?”구태윤이 담담하게 대답했다.“혼자서 놀고 있어요.”정시연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루아가 분명 또 오해했을 텐데 걱정이네요. 이따 만찬 끝나면 우리가 잘 풀어줘요. 루아 마음 상하지 않게.”구태윤은 그녀의 옆에 앉으며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형수님, 무슨 일이십니까?”정시연이 한층 진지해진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아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만약 내가 정원 그룹을 대표해서 배성 그룹과의 협업을 성사할 수만 있다면 그동안 부모님이 키워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 같아서요. 태윤 씨, 저 좀 도와주면 안 될까요?”나긋한 어조는 물론, 내세우는 명분 역시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그 사파이어 귀걸이도 이미 포기했고, 부모님이 주시겠다는 지분도 전부 거절했잖아요. 나 정말 더는 바라는 거
남자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운에 정루아는 숨이 턱 막혔다.정체 모를 압박감이 온몸을 짓누르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루아야, 설마 만난 지 고작 며칠 만에 그 새끼가 특별해지기라도 했다는 헛소리 하려는 건 아니겠지?”구태윤의 어조가 한층 더 서늘해졌다.정루아 역시 차가운 얼굴로 받아쳤다.“그럼 당신은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대뜸 해고한 건데? 강 팀장님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네 주위를 서성거린 것만으로도 이미 큰 죄를 지었어.”구태윤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네 주변에 다른 남자가 알짱거리는 거 보기 싫다고. 그런데 넌 기어코 그 새끼 일자리를 지켜줬어. 나 지금 굉장히 불쾌하거든?”이유 모를 분노가 가슴속에서 요동쳤다.사방에서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귓가에는 오직 그의 서늘한 경고만이 날아와 꽂혔다.정루아는 몇 번이고 깊은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억눌렀다.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당신 진짜 내로남불의 정석이구나. 형수 일이라면 그렇게 발 벗고 나서면서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주변에 아는 남자 하나 있는 것조차 용납 못해?”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구태윤을 바라보는 눈빛은 차가움을 넘어 소름 끼칠 정도로 낯설었다.“나 때문에 애꿎은 피해를 본 사람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를 한 것뿐이야. 그런데 당신은? 형수와 조카를 살뜰히 챙기며 억 소리 나는 경매품을 턱턱 사 주질 않나, 비즈니스 협업까지 주선해 줘?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둘 사이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기에, 타인의 시선에는 영락없는 잉꼬부부의 모습처럼 비쳤다.하지만 당사자들은 뻔했다. 서로의 마음이 아득히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구태윤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묵살하며 여전히 손을 꽉 맞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감정을 수습하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어느새 언제 싸웠냐는 듯 평온하고 무심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그 사
정루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생긋 웃었다.“왜? 나 보니까 많이 놀랐어?”구태윤의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었다.이내 그녀의 하얀 손을 슬쩍 내려다보더니, 시선을 드레스로 옮기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아니. 네가 찾아올 줄 알았거든.”정루아는 밀려드는 불쾌함을 꾹 눌러 담으며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무슨 얘기들 나누고 있었어?”구태윤이 맞은편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그러자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즉시 입을 열었다.“사모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갈수록 더 아름다워지네요.”정루아가 가볍게 잔을 부딪치며 화답했다.“감사해요.”구태윤이 자연스럽게 소개를 이어가자, 정루아는 막힘없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한쪽에 서 있던 정시연은 정루아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게다가 등장하자마자 주변의 시선이 온통 쏠리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술잔을 꽉 움켜쥐었다.한참을 기회를 엿보던 그녀는 마침내 틈을 타 입을 열었다.“태윤 씨, 이번 일은 정말 고마워요. 다 태윤 씨 덕분이에요.”“아닙니다.”구태윤이 무심하게 대답했다.정루아는 귀를 쫑긋 세웠다. 속으로 의아한 반면, 경계심도 늦추지 않았다.‘또 정시연을 뭘 도와준 거지?’이내 주먹을 불끈 쥐었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구태윤이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오 대표님, 조만간 제 비서가 연락드릴 겁니다. 그때 우리 형수님과 구체적인 사항을 상의하시면 됩니다.”오범석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구태윤은 곧바로 정루아를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정루아가 단도직입적으로 쏘아붙였다.“이번엔 또 뭐야?”“왜? 질투해?”구태윤은 이목구비가 또렷한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정루아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내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면 어디가 덧나?”“질투한다고 인정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구태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정루아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그러고는 슬쩍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세상에, 진짜로 침대 옆에 서서 지켜본 적이라도 있나 봐요?”상대방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한술 더 떴다.“아니면 뭐... 자기가 그 여주인공이 되고 싶거나?”배다인은 술잔을 부서질 듯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이왕 오셨으니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재밌게 놀다 가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그리고 쌩하니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정루아의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옆에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이연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정루아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루아야, 너 괜찮아?”“그럼. 방금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게 누구인지 못 봤어?”정루아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이연희는 오히려 마음이 안쓰러웠다.“그 개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형수라는 작자랑 이런 공식 석상에 참석하다니, 불륜 사이라는 걸 사방팔방에 광고할 심산이래? 그럴 거면 너랑 이혼 도장부터 찍든가!”쓰레기 남편 때문에 친구가 남들의 비아냥이나 듣고, 아무나 와서 한 번씩 밟고 지나가려 하는 상황이 너무나 분했다.제게 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쫓아가 구태윤의 면상을 짓이겨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정루아는 이연희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달랬다.“됐어, 진정해. 오늘 우리 여기 온 목적이 뭔지 잊지 마.”이연희는 심호흡을 크게 하며 들끓는 분노를 가라앉혔다.“그나저나 배씨 가문 장남이라는 사람은 왜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야?”정루아가 연회장을 한 바퀴 둘러보며 말했다.“하객들이 아직 다 안 왔잖아.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 가자, 우리 먼저 뭐라도 좀 먹자.”“응, 좋아.”한쪽의 뷔페 구역에는 길어지는 연회 시간 동안 가볍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정갈한 디저트들이 즐비했다.정루아가 막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구태윤을 발견했다.그의 곁에는 정시연이 있었고,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서로 잔을 부딪치며 대
순간, 정루아의 안색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그래서 임혜숙이 어젯밤에 갑자기 전화가 왔단 말인가?하지만 거절하는 바람에 이 기회를 정시연에게 넘겨주게 된 꼴이었다.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정루아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곧이어 이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말이 맞아. 나도 가야겠어.”장차 정원 그룹은 그녀의 몫이 될 것이다.비록 지금은 경영에 소질이 없을지라도, 나중에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면 그만이었다.따라서 연회에 참석해 얼굴을 비추는 중요한 기회를 절대 정시연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이연희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응, 응! 당연히 가야지. 오후에 조퇴하고 나랑 같이 숍 가자. 메이크업도 새로 받고 드레스도 고르게.”“응.”정루아는 잽싸게 대답하고 곧바로 연차를 내러 정호를 찾아갔다.두 시간 일찍 퇴근하겠다는 말에 정호는 흔쾌히 허락하면서도,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방금 정시연 씨도 와서 조퇴하겠다고 하던데, 둘이 사적으로 만났다가 목소리가 맛이 가서 오면 절대 안 돼요. 그랬다간 위약금 다 물어낼 각오 하세요.”정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머리채 잡고 싸우러 가는 거 아니니까.”정호는 할 말을 잃었다.이연희와 함께 회사를 나선 정루아는 먼저 드레스를 고른 뒤 메이크업을 받았다.그녀가 선택한 것은 매혹적인 와인빛 롱 드레스였다.굵은 웨이브를 넣은 긴 머리, 정교한 메이크업까지 더해지자 마치 활짝 피어난 한 송이 붉은 장미처럼 화사한 아우라를 풍겼다.배씨 가문의 연회는 청야 라운지에서 열렸다.어둠이 짙게 가라앉자 연회장 안은 화려한 조명으로 가득 찼고,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정루아와 이연희가 함께 들어서는 순간,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다만 정루아를 향한 눈길은 호의보다 탐색과 의혹에 가까웠다.심지어 몇몇은 대놓고 수군거리기까지 했다.“나 방금 구태윤 봤는데, 형수랑 같이 서 있더라고. 설마 둘이 같이 온 건가?”“쯧, 그럼 정
장옥경은 강우현의 일자리를 알아봐 준 뒤, 안색이 잔뜩 굳어진 채 방 안을 초조하게 서성였다.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다니, 생각할수록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정루아라는 아이는 갈수록 실망만 안겨줄 뿐이었다.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안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머님.”휴대폰 너머로 깍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장옥경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소희야, 태윤이 비서로 다시 돌아간 거니?”안소희는 몹시 낙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어머님,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어요. 대표님이 절 아예 만나주지도 않으세요. 번호도 차단당했는지 연락도 안 돼요.”장옥경은 한숨을 푹 쉬었다.“그 아이 성격이 워낙 고집스러워서 한번 마음먹은 건 쉽게 바꾸지 않는단다. 그렇다고 너무 낙담하지 마. 내일 저녁에 큰 연회가 하나 있는데 나랑 같이 가자꾸나. 태윤이도 올 테니, 얼굴 보고 진지하게 얘기해 보렴. 네가 자길 도우려 한다는 걸 알면 분명 마음이 약해져서 곁에 남겨두려고 할 거다.”안소희의 목소리가 이내 활기를 띠었다.“네, 알겠습니다.”장옥경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오늘 시간 있니? 나랑 같이 숍에 가서 관리나 받자꾸나.”“네, 좋아요!”...다음 날, 연회 초대장이 구태윤의 사무실 책상 위에 놓였다.구태윤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네가 대신 참석해.”한민혁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이번 연회에 배씨 가문은 굉장히 많은 공을 들였어요. 내내 해외에 머물던 장남의 귀국을 널리 알리는 자리라, 대표님께서 참석하지 않으시면 향후 협업을 진행하는 데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끝을 흐렸다.“게다가 사모님께서도 대표님은 꼭 참석하라고 하셨습니다. 배씨 가문 사모님이랑 오랜 친구 사이라, 자식 된 도리로 당연히 가야 한다고...”구태윤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곧이어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래? 그럼 남은 업무는 나랑 같이 밤새워서 처리하는 걸로 하자.”한민혁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