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장옥경은 집 안으로 들어섰고, 정원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구태윤의 날카로운 얼굴에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정루아의 추궁에도 담담하게 물을 뿐이었다.“어디까지 알게 된 거지?”정루아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이 판국에 또 나를 떠보겠다? 미래 마을 사람들까지 매수했더라? 당신 형수를 위해서라면 정말 못 하는 짓이 없네.”맑고 투명한 눈동자에는 조롱이 가득했다.“내가 전에도 말했지? 그 여자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차라리 이혼하자고. 당신들 허락해준다니까? 굳이 숨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잖아.”구태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방금 네 입으로도 그랬잖아. 그 사람은 내 형수라고.”칠흑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고, 목소리는 한층 가라앉았다.“루아야, 형네 부부 사이좋은 거 뻔히 알잖아. 형이 너한테도 잘해줬고. 근데 네가 지금 형수님을 이런 식으로 몰아가면 형 입장이 뭐가 되냐?”“속이 제일 시커먼 사람은 바로 당신이거든?”정루아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금슬이 그렇게 좋다는 걸 알면서 형수한테 흑심을 품은 건 당신이잖아. 정작 잘못은 혼자 다 하고 있으면서. 난 진실만 말했을 뿐인데, 대체 뭐가 문제인데?”“정루아!”구태윤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랑 형수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글쎄, 육체적인 관계는 없었더라도 마음은 모르지. 당신이 무슨 생각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결백을 증명하려고 심장을 꺼내 보여주기라도 할 거야?”정루아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조소 섞인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곧이어 시선은 어깨를 향했다. 당시 그녀를 구하려다 다친 부위였다.문득 머릿속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며 대신 총을 막아주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지진 때 일어났던 일에 관해 입단속만 시키지 않았더라도,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철석같이 믿을 뻔했다.막상 툭 까놓고 나니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었다.그렇다면 애초에 자신과 결혼했던 이유는 또 무엇이었을까?단지 정시연에게 다가가기
앞에는 젊은 남자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뚜렷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인상, 구태윤과 묘하게 닮은 눈매, 정면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생기가 가득했다.정루아는 품에 안고 있던 꽃을 내려놓고 묵념한 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오빠, 저 왔어요.”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그중에서도 유독 끈질긴 눈길이 하나 있었다.장옥경이 정루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울먹이는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루아야, 오늘 그냥 가지 말고 집에 와서 밥 먹어.”정루아는 눈을 내리깔았을 뿐,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한참 동안 산소에 머물던 그들은 이윽고 발걸음을 돌렸다.기사가 대기하고 있었고, 장옥경은 정루아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곧바로 차에 올랐다.구태윤이 따라 타려 하자 그녀가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루아랑 할 말 있으니까 넌 뒤에 차 타.”차량은 총 두 대 준비되어 있었고, 정시연은 이미 두 번째 차에 올라탄 뒤였다.구태윤의 잘생긴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칠흑 같은 눈동자가 정루아를 향했다. 그녀가 도착한 이후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정작 당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공기 취급했다.구태윤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둡게 가라앉더니, 조수석 문을 열어젖히며 싸늘하게 말했다.“제가 못 들을 내용일라도 있습니까?”장옥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자식이, 여자들끼리 하는 얘기까지 네가 들으시겠다?”구태윤이 대답했다.“네.”장옥경은 할 말을 잃었다.이미 차에 올라탄 마당이라, 운전기사는 곧장 시동을 걸고 본가로 향했다.정루아는 옆에 앉은 장옥경을 바라보며 물었다.“하준이는 왜 안 데리고 왔어요?”“아직 너무 어려.”대답은 구태윤이 했다.“조금 더 크면 그때 알려줄 거야.”정루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장옥경이 구태윤을 흘겨보며 핀잔을 주었다.“거 봐, 루아도 너랑 말 섞기 싫어하잖니. 대체 왜 꾸역꾸역 올라탄 거야? 무시당해도 싸.”“엄마, 전에 저랑 약속하신 거 잊었어요?”구태윤이 나지막이 내뱉었다.장옥
김철웅의 표정이 한층 가라앉았다.“미래 마을에 사람을 보내서 당시 지진을 겪었던 주민들을 수소문해 봤거든요. 처음엔 다들 입을 닫고 모른 척하더군요. 심지어 루아 씨를 기억조차 못 한다고 잡아떼기도 했어요. 하지만 눈빛을 보니 거짓말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약간의 손을 좀 썼더니, 어떤 사내 입에서 결국 진실이 튀어나왔어요.”“지진이 났을 때 학생들이 전부 미래 초등학교 안에 있었고, 그자가 바로 학교 경비였다지 뭡니까. 다들 살겠다고 밖으로 도망치는데 루아 씨만 혼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답니다. 몇 번이나 불렀지만 돌아보지도 않았대요. 그렇게 폐허를 뚫고 잠시 뒤에 어떤 사내아이를 업고 나왔다더군요. 그런데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네요. 다행히 그쯤에 지진이 멈추고 구조하러 뛰어 들어온 사람들 덕분에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정루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녀는 서류를 꽉 움켜쥔 채 물었다.“혹시 내가 그때 구한 사람이 구태윤이 맞다고 하던가요?”김철웅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억은 딱 거기까지라더군요. 대신 아주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더 들었습니다. 누군가가 그 경비더러 이 일에 대해선 절대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지 뭡니까. 그리고 이를 지시한 사람이 바로 구태윤이었어요.”정루아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단숨에 구겨버렸다.구태윤이 그 사실을 은폐하게 시켰다니?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지?설마 정시연의 거짓말에 장단이라도 맞춰 주겠다는 건가?입만 열면 그를 구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말에 세뇌라도 당했나?심지어 정시연을 감싸기 위해 직접 나서서 입막음까지 했다.정루아의 눈동자에 분노가 차올랐다.분명 그녀가 구태윤을 구했는데 말이다.하지만 결국은 정시연의 편을 들어주었다.최근에 보여준 살신성의는 생각할수록 가소롭기만 했다.이제는 그가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지 종잡을 수도 없었다.어차피 구태윤의 마음이 정시연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기꺼이 그 뜻을 이뤄줄 참이었다
“멋진데?”허도준이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다.“이제 정시연 쪽은 신경 쓸 필요 없겠어. 그럼 남은 건 이혼 문제 하나뿐인가?”“응.”정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이혼만 해결하면 정말로 완벽한 자유야.”허도준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그 자유, 내가 찾아주도록 도와줄게.”정루아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때,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화면을 확인하자 김철웅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루아 씨, 정시연 부모님 신원에 대해 단서가 좀 잡혔습니다. 직접 만나서 말씀드릴까요?]그와 동시에 또 다른 낯선 번호로 문자 한 통이 더 도착했다.[허도준 조심해. 겉보기만큼 단순한 사람이 아니니까.]정루아는 나중에 온 메시지를 지워버린 뒤, 김철웅에게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곧이어 허도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알았어, 나도 이만 가려고.”허도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병원 뒷마당을 빠져나왔고, 허도준은 차를 몰고 먼저 떠났다.그 사이에 정루아는 김철웅에게 전화를 걸었다.김철웅은 때마침 근처에 차를 대고 기다리던 참이었다.정루아는 그쪽으로 걸어가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김철웅이 자료 한 부를 건네며 말했다.“루아 씨, 일단 이거부터 살펴보시죠.”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차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 담배를 한 대 물고 혹시라도 다가오는 사람은 없는지 주변을 경계했다.정루아는 곧바로 서류를 펼쳐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정시연의 어머니 이름은 주한나, 아버지는 소형민이었다.서류 봉투에는 주한나와 임혜숙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도 들어 있었다.풋풋한 두 여성이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아주 다정해 보였다.주한나는 어린 시절부터 하성에서 자랐고, 소형민과 소꿉친구였다.유치원부터 같은 학교에 다니다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나중에는 함께 해외로 떠났다.자료는 단출했다.사진 한 장으로 주한나와 임혜
송문애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단다. 남들이 뭐라 하든 우리는 자기 일만 충실히 해내면 그만이야.”정루아 역시 맞장구를 쳤다.잠시 후, 허도준이 도착했다.그는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서 싱글벙글 웃으며 송문애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정루아는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시선은 허도준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곧이어 머릿속을 맴돌던 의심을 지웠다.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지금 허도준의 도움을 받는 건 사실이니까.만약 근거 없는 억측으로 인해 그의 진심에 상처를 입힌다면 소탐대실일 터였다. 그야말로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짓이었다.오랜 대화에 지친 것인지 송문애의 얼굴에 금세 피곤한 기색이 서렸다.“할머니, 눈 좀 붙이세요. 저랑 루아는 바깥바람 좀 쐬고 올게요.”눈치를 살피던 허도준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그래, 다녀오렴.”...병원 뒤편에는 아담한 인공호수가 있어서 날씨가 좋은 날이면 환자들이 산책을 나오곤 했다. 하지만 이 시간대에는 사람의 발길이 뜸해 한적했다. 둘은 나란히 호숫가를 거닐었다.수면에 비친 가로등 불빛이 잔물결을 따라 부서진 금가루처럼 흩어졌다.“요즘 들어 많이 바뀐 것 같네.”허도준이 곁눈질로 그녀를 살피며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그래?” 정루아가 뺨에 손을 갖다 대며 가볍게 받아쳤다.“더 예뻐지기라도 했나?”“너는 원래부터 예뻤지. 다만 예전이랑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어. 훨씬 도도하고 단단해졌달까.” 허도준은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주기언이라는 사람이 네 뒤를 봐주고 있는 덕분인가?”정루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손에 쥐어지는 게 생기니까 배짱도 두둑해지더라고. 왜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렇게 여유로웠는지 이제는 조금은 알겠어. 지금 난 무서울 게 하나도 없거든.”허도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어지간히 큰 걸 거머쥐었나 보네? 혹시 나한테 살짝 귀띔해 줄 수 있어?”정루아가 그를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언젠가 알게 될 거야.”
장옥경은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태윤아, 혹시 아직도 네가 입원해 있을 때 엄마가 멋대로 이혼 서류에 서명해 버린 걸로 앙금이 남아 있니?”구태윤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이미 지난 일이에요.”“난 그저 너무 두려웠을 뿐이야.”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한숨을 내쉬었다.“승태가 그렇게 가고 나니, 너마저 잃을까 봐 제정신이 아니었어. 근데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드네. 네가 스스로를 지킬 수만 있다면 무엇을 하든 엄마는 무조건 지지할 거야.”구태윤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그럼 루아의 마음을 돌리는 것부터 도와주세요.”“알았어.”장옥경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네 형 제삿날에 루아를 본가로 초대해서 같이 밥 먹도록 할게. 승태가 살아생전 루아한테 제법 잘해줬었잖니. 그 정도 명분이면 거절 못 하겠지.”그 말을 듣는 순간, 구태윤의 눈동자에 뼛속까지 시린 살기가 스쳤다.어느새 목소리도 한층 더 가라앉았다.“알겠어요. 이만 끊을게요.”“그래.”구태윤은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조금 전 장옥경이 내뱉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구승태가 정루아에게 잘해줬다라...물론 사실이었다.다정하고 자상하게 잘 챙겨주는, 언제나 감정동요 없는 든든한 큰오빠의 모습 그 자체였다.그렇다면 정루아는?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었던 걸까?만약 그녀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구태윤은 눈을 질끈 감고 잡념을 털어냈다.다시 눈을 떴을 때, 칠흑 같은 눈동자는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애초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정루아와 함께한 세월만 벌써 8년이었다.아무도 그들을 갈라놓을 순 없을 테니까....휴일을 맞아 정루아는 송문애와 마주 앉아 바둑알을 놓고 있었다.이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발신자는 허도준이었다.“여보세요?”수화기 너머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요즘 누가 나를 캐고 다니는 것 같아.”정루아가 흠칫 놀랐다.“갑자기 무슨 소리야?”허도준이 대답했다.“해외에 있는 친구한테 연락이 왔는데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