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비참한 죽음 끝에 회귀한 재벌가 사생아 강이현. 그녀는 통제적인 약혼자 차도혁과 이복자매의 억압을 끊어내고 스스로의 힘으로 정점의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현의 완벽한 변화에 차도혁은 걷잡을 수 없는 집착을 느끼고, 모친을 구하기 위해 시작된 위험한 계약 결혼 속에서 복수와 자유를 향한 치열한 법정 로맨스가 펼쳐진다.
View More차가운 비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이현은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명치 끝을 찌르던 서늘한 감각과 차가운 빗물 냄새가 여전히 코끝에 감돌았다. 분명 이복자매 유라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음습한 바닥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비굴하게 헌신했던 지난날의 끝은 그렇게 처참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서초동에 위치한 약혼자 차도혁의 개인 파티룸이었다.
'혹시... 내가 살아서 돌아온 건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2년 전, 아직 로스쿨 진학을 포기하기 전의 젊은 모습이었다. 남들의 눈에는 대기업 집단의 사생아이자 차도혁의 충실한 약혼녀로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강이현,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태성그룹의 후계자이자 이현의 약혼자인 차도혁이었다. 서늘한 눈빛과 완벽하게 정돈된 수트 차림. 전생에 이현이 목숨 바쳐 사랑했고, 그녀의 희생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남자였다.
도혁은 무심한 태도로 이현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던졌다.
"유라가 이번 사교 모임에 쓸 가방이랑 장신구 목록이다. 네가 알아서 챙겨서 유라한테 전달해."
전생의 이현이라면 그 모욕적인 심부름도 군소리 없이 수행했을 것이다. 도혁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받고 싶어서, 사생아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인정받고 싶어서 비굴하게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현은 달랐다.
이현은 바닥에 떨어진 서류 봉투를 흘끔 바라보더니, 시선을 올려 도혁을 똑바로 응시했다.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무미건조한 눈빛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뭐?"
도혁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항상 자신의 말 한마디에 안절부절못하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어조였다.
"내가 강유라의 하수인도 아니고, 도혁 씨의 심부름꾼은 더더욱 아니야. 앞으론 이런 불필요한 일로 날 부르지 마."
이현은 서류 봉투를 툭 차버리고 차분한 걸음으로 파티룸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강이현, 너 지금 무슨 짓이야? 갑자기 왜 이러지?"
도혁이 이현의 팔목을 억세게 잡아챘다. 도혁의 표정에는 당혹감과 함께 묘한 통제욕이 엿보였다. 매번 자신만을 바라보던 인형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데서 오는 혼란이었다.
이현은 잡힌 팔목을 차갑게 털어냈다.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내 자신을 버리는 일은 없어. 내 삶은 내가 결정해."
이현은 미련 없이 파티룸을 나섰다. 쏟아지는 빗속으로 걸어 나가며 이현은 주먹을 쥐었다.
비굴했던 이전 생의 강이현은 죽었다. 이제 오직 자신의 힘으로 바로 서는 법을 찾을 것이었다. 차가운 빗물이 얼굴을 적셨지만, 이현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청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빗물이 뺨을 타내려갔다. 빗줄기는 점차 굵어졌지만, 강이현은 우산을 펼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대기의 감촉이 도리어 그녀가 살아있다는 현실감을 일깨워 주었다.
'내가 진짜 살아 있구나.'
전생의 마지막 순간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이복자매 강유라의 정교한 모략에 빠져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약혼자 차도혁의 서늘한 외면 속에서 고독하게 숨을 거두었던 그날. 숨이 막혀오던 어둠과 허파를 채우던 비릿한 혈향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때 그녀는 뼈저리게 깨달았었다.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재벌가의 사생아라는 주홍글씨를 품고서 남의 호의에 기대어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이다.
이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차가운 빗물 사이로 비릿한 맛이 감돌았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게 빛났다.
서초동의 펜트하우스 파티룸 안에는 묵직한 정적만이 깔려 있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장대비 소리만이 침묵을 깨뜨리고 있었다.
태성그룹의 후계자 차도혁은 이현이 나간 문을 오랫동안 노려보았다. 바닥에는 이현이 구두 끝으로 차 버린 서류 봉투가 비스듬히 뒹굴고 있었다. 강유라가 부탁했던 명품 가방과 장신구 목록이 담긴 서류였다.
언제나 자신의 손짓 하나, 눈빛 하나에 안절부절못하던 여자였다. 사생아라는 출신 성분 때문에 강씨 가문 저택에서조차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던 강이현. 자신과의 약혼이 취소될까 봐 늘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자신을 살피며, 그 어떤 부당한 요구도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던 순종적인 인형이었다.
'그런데 방금 그 눈빛은 뭐였지?'
도혁은 이현에게 잡혔던 손목의 감촉을 떠올렸다. 차갑고 결연하게 자신의 손을 뿌리치던 그 감촉. 이현의 눈동자에는 그동안 도혁이 보아왔던 두려움이나 눈치 보는 기색 따위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그를 한낱 타인, 아니 어쩌면 가치 없는 이물질처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도혁 씨?"
파티룸의 문이 열리며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유라였다. 화려한 드레스에 세련된 메이크업을 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안을 두리번거렸다.
"이현 언니는요? 아까 언니한테 심부름 좀 부탁해달라고 말씀 드렸는데... 벌써 간 거예요?"
도혁은 유라를 돌아보았다. 평소라면 완벽하고 교양 넘치는 이복동생이라 여겼을 유라의 얼굴이, 어쩐지 오늘따라 기묘하게 거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아늑한 서재의 불빛 아래서 부딪혔다. 더 이상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운 적대자가 아니었다. 완벽한 신뢰와 깊은 감정으로 얽혀가는,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공조자들의 시선이었다.---다음 날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 제417호.대한민국 언론의 모든 취재진과 카메라가 법정 안팎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정관계 고위 인사들과 한성그룹 회장단, 그리고 거대 로펌 '태산'의 최고위 변호사들이 피고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재판장이 법복을 정돈하며 법정에 들어섰다."2026가합 109281 한성그룹 불법 폐수 방류 및 손해배상 청구 사건, 정식 첫 변론 진행하겠습니다. 원고 대리인 출석하셨습니까?"원고 대리인 석에서, 이현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딥 네이비 수트를 입은 그녀의 곧은 자태와, 가슴 위에서 차갑게 빛나는 은색 변호사 뱃지. 그리고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청명하고 강렬한 눈빛."원고들 대리인, 변호사 강이현 출석했습니다."이현의 낮고 명확한 음성이 정숙한 대법정을 울렸다.피고 측 석에 앉아 있던 전직 검찰총장 출신의 대표 변호사가 오만한 표정으로 일어서며 반박했다."재판장님! 원고 측 대리인은 이제 막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신참 변호사입니다. 본 사건은 한성그룹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일부 언론과 소상공인들이 결탁한 무분별한 억측에 불과하며, 원고 측은 피고의 고의성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를 단 하나도 제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거대 법조 카르텔의 오만한 도발에 법정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현의 입가에는 싸늘하고 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이현은 가방에서 정갈하게 정리된 두꺼운 디지털 포렌식 분석 보고서와 금융 거래 내역 서류를 꺼내 재판부를 향해 내밀었다."증거가 없다고 하셨습니까?"이현의 단호한 목소리가 법정의 소음을 단숨에 제압했다."입증 취지 제1호증 내지 제15호증. 피고 한성그룹이 지난 5년간 환경 오염 물질을 은밀히 방류하기 위해 설립했던 해외 유령 법인의 자금 세탁 내역과, 담
며칠 후, 서초동 법조타운 중심가에 위치한 '법률사무소 정점(頂點)'.이현은 자신의 이름을 건 독립 법률사무소의 대표 변호사로서 정식 개업을 마쳤다. 대형 로펌의 파격적인 스카우트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정점에 서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윤민우 역시 '정점'의 공동 파트너 변호사로 합류하여 이현의 곁을 지켰다.이현이 정식 변호사로서 맡은 첫 번째 사건은 대한민국을 뒤흔들 대형 집단소송 사건이었다.피고는 정관계 고위 인사들과 결탁하여 수천억 원대의 환경 오염 물질을 무단 방류하고, 이에 항의하는 소상공인과 노동자들을 조폭과 관변 단체를 동원해 폭력으로 입막음해 온 거대 기업 '한성그룹', 그리고 그들의 범죄를 은폐해 준 전직 검찰총장 출신의 전관 변호사 카르텔이었다.피해자만 수백 명에 달했으나, 상대가 정관계와 거대 법조 카르텔을 등지고 있었기에 그 어떤 대형 로펌도 수임을 꺼리던 지독한 사건이었다."이현아, 이 사건 상대 측 대리인단이 화려해."민우가 사건 기록 서류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엄중하게 말했다."전직 대법관 출신 변호사 두 명에, 전직 검찰총장, 그리고 국내 1위 로펌 '태산'의 대표 변호사까지 총 10명의 메머드급 변호인단이 꾸려졌어. 저들은 돈과 권력으로 재판부를 압박하고 증인을 회유하려 할 거야."이현은 딥 네이비 수트 상의의 카라를 곧게 정돈하며 가슴에 달린 은색 변호사 뱃지를 가만히 쓸어내렸다."상대가 전직 대법관이든 검찰총장이든 상관없어."
이현은 창밖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자신이 나아가야 할 정점의 길, 변호사로서 세상의 비리를 단죄해야 할 완벽한 무대. 그러나 그 무대 위에서 그녀가 마주해야 할 상대인 차도혁은, 더 이상 단순한 적이 아니었다.두 사람 사이의 차가운 계약과 숨 막히는 냉전 속에서, 복수와 집착, 그리고 비틀린 진심이 얽혀가는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더욱 깊고 치열한 정점을 향해 가파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정점을 향한 첫 법정시간은 정직하게 흘러 계절의 옷을 여러 번 바꾸어 입었다.성북동 대저택의 권력 구도는 완전히 해체되었고, 가압류와 부도 위기에 몰렸던 강 회장 일가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했다.지방으로 밀려난 강유라는 형사 처벌과 사회적 매장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다시는 이현의 삶에 발을 들이밀지 못했다. 이선희 역시 모든 기득권을 상실한 채 삼청동 저택과 미술관 재단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이현의 어머니 한서영은 완벽한 무죄 불기소 처분과 함께 정식 명의 이전을 마친 삼청동 집에서 평온하고 건강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서울 서초동 법원단지 건너편에 위치한 대한변호사협회 대강당.화려한 현수막 아래로 제15회 변호사시험 합격자 명단이 크게 내걸려 있었다. 전국 유수의 로스쿨 출신 응시생 수천 명이 숨을 죽인 채 화면을 지목하고 있었다.&nbs
이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차도혁 씨."이현이 나지막하게 도혁을 불렀다.도혁이 문을 향해 걸어가려다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왜 그러나?""당신... 이사회 지분 15퍼센트를 담보로 내놓았어?"이현의 직선적인 물음에 도혁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도혁은 무심한 표정으로 외투를 챙기며 차갑게 응수했다."네가 신경 쓸 바 아니다.""신경 쓸 바가 아니라니!"이현이 이불을 거두고 침대에서 일어나 섰다. 아직 기력이 완벽히 회복되지 않아 몸이 살짝 휘청였으나, 그녀의 눈빛만큼은 서늘한 의문으로 빛나고 있었다."당신이 그 지분을 담보로 내놓으면, 차승태 전무 파벌이 몰락하더라도 이사회 내의 다른 보수파 이사들에게 약점을 잡히게 돼! 당신이 추진하려던 신사업 승인안도 위험해진다고! 그런데 왜 내 어머니 일에 당신의 가장 중요한 자산을 던진 거야?"이현의 추궁에 도혁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침실 안을 감싼 정적 속에서, 통유리창을 통해 비쳐드는 아침 햇살만이 두 사람 사이에 드리우고 있었다.도혁은 천천히 이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그의 짙은 눈동자 속에는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칠흑처럼 깊고 서글픈 진심이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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