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정루아의 고운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죽기라도 했대요?”장유성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루아 씨, 농담도 참.”“농담 아니에요.”정루아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전에는 그래도 8년이나 같이 지냈으니까 좋게 헤어지려고 했어요. 근데 이젠 그 사람이 미워지기 시작하네요. 지금은 그냥 죽어버렸으면 해요.”장유성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정루아가 그를 돌아보며 한층 서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가서 전해요. 난 몸이 안 좋아서 집에서 쉴 거라고.”장유성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정루아는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풍림재로 돌아갔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그녀는 샤워하며 피로를 말끔히 씻어낸 뒤 침대에 누웠다.이때, 휴대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배진욱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이제 들어온 거야?][응, 아직도 안 잤어?][방금 회의 하나 끝내고 테라스에서 바람 좀 쐬고 있었는데, 루아 씨 집에 불이 켜지는 게 보이길래.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나한테 연락해.]정루아는 그가 보낸 메시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마음이 살짝 흔들렸지만, 꾹 눌러 담았다.밤에는 감정이 앞서 섣부른 결정을 내리기 쉬운지라 자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다만 그날 밤 편히 잠들지는 못했다.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린 탓에,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어제보다 더 피곤했다.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이렇게 생기 없이 찌든 모습은 딱 질색이었다.이내 화장품 파우치를 꺼내 화장을 시작했다.메이크업이 더해지자 혈색이 한결 살아났고,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시계를 보니 아침 7시였다.허도준에게 밥을 사 가겠다고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정루아가 도착했을 때 허도준은 문짝만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를 발견하는 순간,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드디어 왔네! 나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미안, 차가 좀 막혀서.”정루아는 서둘러
허도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목소리는 거칠었고, 숨을 쉴 때마다 폐부를 찌르는 통증을 동반했다.혼란스러워하는 정루아의 모습에 그의 마음 역시 너무나 괴로웠다.이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나 생각보다 집요한 사람이야. 한번 시작한 일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쉽게 포기하지 마. 네가 원하는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부 이루어 줄 테니까.”하지만 정루아는 이미 모든 의욕을 잃은 뒤였다.오늘 벌어진 잔혹한 일들은 결코 구태윤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각인시켰다.그를 더 자극했다간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터였다.나중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이 지옥에 끌어들일 뿐이었다.허도준에 대한 걱정이 앞서면서도 상대방의 단호한 태도에 결국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다.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짙은 무력감과 좌절감이 온몸을 짓눌렀다.“휴...”허도준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루아야, 소송 취하하고 그 인간한테 굴복하면 예전처럼 상처받고 비참하게 사는 것 말고 더 있겠어?”그는 느릿한 어조로 정루아의 잔인한 미래를 읊어 내렸다.“구태윤은 앞으로도 너랑 정시연 사이를 오갈 테고, 언제나 구하준이 먼저겠지. 넌 평생 뒷전이자 차선책일 뿐일 텐데, 진짜 그렇게 살고 싶어?”정루아는 숨을 깊게 내쉬고는 가만히 손을 내렸다.붉게 물든 맑은 눈동자에 다시금 단단한 의지가 차올랐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절대 소송을 취하하지 않을 것이다.허도준이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내 말을 들으라는 게 아니야.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루아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가장 먼저 아껴 주고 사랑해줘.”정루아는 감동을 금치 못했다. 이내 참았던 말을 힘겹게 꺼냈다.“그래도...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꼭 전하고 싶어.”“알았어. 네 사과,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지.”허도준이 피식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나 지금 너무 피곤해서 졸리거든?”“응. 방해 안 하고 조용히 있을게.”“
허도준은 마지막 남은 술을 집어 들고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그러나 이미 한계를 넘어선 뒤였다.목구멍부터 식도, 위장까지 타들어 갈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첫 모금을 삼키기 무섭게 그는 참지 못하고 왈칵 토해 내기 시작했다.초점 잃은 눈동자는 흐릿했고, 몸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비틀거렸다.이를 본 정루아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안돼! 더는 마시지 마. 그러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나면...”“아니야.”허도준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제지했다.“나 괜찮아.”그리고 숨을 가다듬더니 다시 술병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안 돼, 그만! 제발 마시지 마.”정루아는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구태윤의 미간이 한층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그는 정루아를 눌러 앉히며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네가 움직이는 순간 끝이야. 저 자식 오늘 밤 여기서 제 발로 못 걸어 나갈 테니까.”정루아가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쳤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뗐다.“구태윤, 그만해. 둘이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친구 아니었어?”마침내 한풀 꺾인 태도였다. 명백한 애원이었다.그럼에도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어 하는 대답만큼은 해주지 않았다.구태윤의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대학교 졸업하기 전에 출국한 놈이야. 기껏해야 얼굴이나 아는 사이지, 뭐.”곧이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아냥거렸다.“보아하니, 나보다 너랑 더 각별한 모양이네.”정루아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제발 부탁이야. 도준이 더는 괴롭히지 마. 그러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나면...”저자세로 나오는 그녀의 태도에도 구태윤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오히려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을 뿐이었다.“지금 저 자식 하나 살리겠다고 나한테 비는 거야?”“그래, 제발 부탁할게.”정루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애원했다.“구태윤, 제발 이러지 마. 오늘 밤 당신이랑 정수원에 돌아갈게, 응?”‘하.’법정 싸움까지 불사하던
구태윤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끈 튀어나왔다.그는 정루아의 손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꽉 움켜쥐었다. 곧이어 조소가 번진 고운 얼굴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저 자식을 위해서 이 정도까지 하겠다?”자신의 충고 따위는 무시하고 계속 배진욱의 주변을 맴돌더니, 이제는 허도준 때문에 제 몸이 망가지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다.단지 그에게만 한없이 야속하고 쌀쌀맞았을 뿐이었다.사랑한다고 고백한 게 엊그제 같은데... 참으로 기가 막혔다.구태윤이 허도준을 돌아보았다. 눈빛은 뼛속까지 차가울 정도로 싸늘했다.“설마 여자 치맛자락에 숨어서 본인 책임을 떠넘길 생각은 아니겠지?”정루아는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구태윤! 그만해. 정말 저걸 다 마시면 병원에 실려 갈 지도 모른다고!”하지만 구태윤은 들은 척도 안 하고 허도준만 뚫어지라 노려보았다.룸 안에 있는 이들 모두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허도준은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했다.이미 엄청난 양의 술을 들이부은 탓에 타오를 듯 붉어진 얼굴과 풀려버린 눈빛을 하고서도 오기로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당연하지.”말을 마치고는 술 한 병을 집어 들더니, 또다시 입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안 돼! 하지 마.”이를 본 정루아가 그를 막아서려 했다.하지만 구태윤이 정루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긴 팔은 마치 쇠사슬처럼 강하게 죄어왔고, 벗어나기는커녕 허도준에게 다가서지도 못했다.독주 한 병을 전부 비워내는 허도준의 모습을 눈앞에서 무력하게 지켜보던 정루아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다 자신 때문이었다.허도준을 이런 구렁텅이에 끌어들이고 말다니.굳건하던 그녀의 결심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됐어, 그냥 소송 포기하자.’정 안 되면 참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어차피 살아갈 세상이지 않은가.툭.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허도준이 빈 술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루아야, 걱정 마. 나 진짜 괜찮으니까. 난 직원 쉽게 안 버려. 네가 하려는 일도 끝까지 도와줄 거
“쿨럭... 쿨럭... 응, 괜찮아...”허도준이 힘겹게 말을 쥐어짜 내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안심시키려는 듯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지만 얼굴에 술을 뒤집어쓴 채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모습은 비참할 지경이었다.도저히 괜찮은 모양새가 아니었다.정루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내 고개를 들어 구태윤을 노려보았다.“당신 미쳤어? 어떻게 사람한테 이런 짓을 해?”구태윤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고급스러운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정루아가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날카로운 질타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릴 뿐이었다.“본인이 마시겠다고 한 건데? 난 강요한 적 없어.”“이 뻔뻔한 놈아!”강요한 적이 없다니?조금 전까지 경호원들이 허도준을 붙잡고 강제로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람 하나 잡아먹을 기세였다.정루아는 허도준을 부축해 소파에 앉히고는 휴지를 쥐여주었다.그러고는 구태윤을 차갑게 쏘아보았다.“불만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아무 죄 없는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어떻게 그래?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구태윤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그리고, 허도준은 자업자득이야.”정루아의 머릿속에 대표실에서 그가 내뱉었던 말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오싹한 한기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갔다.“루아야, 나 괜찮으니까 걱정 마.”허도준이 겨우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녀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하지만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겠는가.정루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병원 가서 검사부터 받아봐. 내가 같이 가줄게.”허도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최근에 구명 그룹이랑 같이하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우리 직원이 사고를 좀 쳐서... 내가 직접 사죄하러 찾아온 거야.”“들었지? 난 강제로 불러낸 적 없어.”구태윤이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루아야, 이쪽으로 와.”정루아는 그의 말을 들은 척
정루아의 숨통이 순식간에 조여왔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무덤덤한 눈빛으로 구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이혼을 향한 마음만큼은 확고했다.구태윤의 눈동자가 갈수록 어둡게 가라앉았다.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적인 기운에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정루아를 향해 걸어갔다.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압박감이 숨 막히게 느껴졌다.“루아야, 이번엔 선 좀 넘었어.”구태윤이 무심한 얼굴로 읊조렸다.정루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가까스로 냉정을 유지했다.“그래서 어쩌라고.”구태윤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곧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게 될 거야.”말을 마치고는 그녀의 곁을 지나쳐 회의실을 빠져나갔다.정루아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깟 협박 한마디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지금 포기하면 그동안의 노력이 전부 수포가 되니까.정루아는 이를 악물고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그리고 아래층으로 돌아와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정루아의 파리한 얼굴을 본 정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무슨 일 있어요? 오늘 도통 집중을 못 하네.”정루아가 답했다.“잠을 잘못 자서 그런가 봐요.”정호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일할 때 사적인 감정 끌어들이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합니까! 자꾸 이러면 인원 교체할 수밖에 없어요.”정루아가 깊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최대한 컨디션 조절해 볼게요.”그러나 정호는 손을 내저었다.“됐어요. 들어가서 쉬고, 오후엔 나오지 마세요.”정루아는 얼떨떨했다.하지만 그는 이미 미련 없이 돌아선 뒤였다.‘말만 험하게 하고 속은 따뜻한 타입이었구나.’마음 한구석에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그녀는 짐을 챙겨 회사를 나섰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사 준비에 착수했다.수납 전문가와 이삿짐센터를 부른 덕에, 해가 지기도 전에 짐을 모조리 풍림재로 옮길 수 있었다.직원들이 알아서 물건을 깔끔하게 배치해 주어 그녀가 손댈 건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