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정루아는 말문이 막혔다.외할머니는 벌써 몇 걸음은 앞서 나갔다.구태윤과 아직 이혼 도장도 찍기 전이지 않은가.게다가 연애 같은 건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추호도 없었다.한 번의 결혼 생활에 기를 다 빨린 터라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쳐 있었다. 감정을 쏟아부을 여력조차 사치인데, 새로운 시작은 더더욱 엄두가 안 났다.집으로 돌아와 외할머니와 함께 TV를 좀 보다가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한밤중,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요란한 벨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비몽사몽 한 정루아는 발신자 이름조차 확인하지 않고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루아야.”수화기 너머로 낮고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는 끈질긴 집착과 애절함이 묻어났다.정루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미친놈.”짤막한 욕설과 함께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잠시 후, 전화가 다시 울려 퍼졌다.단잠을 방해받아 짜증이 치솟은 정루아는 아예 수신 거부를 해버렸다.청야 라운지.어두컴컴한 룸 안, 테이블 위에는 빈 술병들이 나뒹굴었다.장유성은 멍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쥐고 있는 구태윤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이내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열었다.“태윤아,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집에 들어가지?”구태윤은 화면만 응시했다.“연결이 되지 않아...”기계적인 안내 음성이 귓가를 맴돌자, 천천히 눈을 감았다.도드라진 목젖이 위아래로 꿀렁였다. 어두운 조명 아래 비친 그의 낯빛은 한층 더 짙은 그늘에 휩싸여 있었다.집에 가자고?그에게 이제 돌아갈 ‘집’ 따위는 없었다.구태윤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술병을 들어 잔에 술을 채웠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유성은 이러다간 정말 사달이 나겠다 싶어 조심스레 말렸다.“태윤아, 이미 마실 만큼 마셨잖아.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자.”“혹시...”구태윤은 그를 바라보며 느릿한 말투로 물었다.“내가 허도준처럼 위경련이 생길 때까지 마시면, 루아가 나를 보러 와줄까?”장유성은 묵묵부답했다.‘어림없지. 솔직히 말해서
“할머니, 저 돈 있어요.”정루아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할머니가 그냥 가지고 계시다 쓰셔야죠.”“너 이혼하고 나면 돈 쓸데가 어디 한두 군데인 줄 아니? 주머니라도 두둑해야 든든한 법이다. 토 달지 말고 받아.”송문애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계속 안 받겠다고 고집 피울래? 그럼 내가 멀리서 혼자 늙어가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 때 그 돈이 어디로 새 나갈지 난 책임 못 진다.”“아니, 진짜..!”정루아는 발만 동동 굴렀다.“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송문애는 웃음을 터뜨렸다.“어차피 다 내 손녀 줄 생각이었어. 루아야, 사양하지 말고 그냥 받아. 일찌감치 네 이름으로 해놔야 할머니도 시름이 놓이지.”결국 정루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낳아준 부모라는 사람들은 입양 딸을 감싼답시고 그녀의 카드를 정지시켜 버렸다.결국 돈 한 푼 얻어내기 위해서 온갖 비참한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하지만 외할머니는 개의치 않고, 오직 지금 손녀의 처지만 걱정하며 전 재산을 내어주려 했다.정루아의 마음이 훈훈해졌다.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던 서러움이 조금씩 녹아내렸다.비로소 수긍하는 정루아를 보자, 송문애는 큰 짐이라도 덜어낸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그 덕분인지 저녁에 평소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비웠다.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단지 내 산책로로 나섰다.그런데 우연히 배진욱과 마주쳤다.그는 하얀 사모예드 한 마리를 끌고 공원을 산책하는 참이었다.심플한 반팔에 편안한 바지는 한층 더 캐주얼한 분위기를 풍겼다.“루아 씨, 이분은 누구셔?”정루아는 웃으며 소개를 이어갔다.“우리 외할머니야.”“할머니, 이쪽은 제 친구 배진욱이에요.”“어르신, 안녕하십니까.”배진욱은 자세를 곧추세우며 한결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송문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나?”배진욱이 머뭇거렸다. 귀국한 뒤로 어른들이 나이를 물을 때면 대개 짝을 소개해 주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그의 시
정루아는 물을 한 잔 떠오다가 돌아오는 길에 장옥경의 말을 듣자 눈살을 찌푸렸다.“어머님, 하실 말씀이 뭔데요?”장옥경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루아야, 나가서 과일 좀 준비해 오거라.”즉, 자리를 비우라는 소리였다.이혼에 관한 이야기일 게 뻔했다.하지만 정루아는 자리를 뜨는 대신 차분한 얼굴로 받아쳤다.“저랑 구태윤 일이라면 아예 꺼내지도 마세요. 이미 외할머니한테 다 말씀드렸고, 할머니도 제 이혼 찬성하셨으니까요.”장옥경이 흠칫 놀랐다. 이내 의아한 눈빛으로 송문애를 바라보았다.연세가 있으신 어르신이라면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다.함께 보낸 세월이 얼만데, 이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어디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인가.송문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난 루아 외할머니 되는 사람이에요. 우리 아이가 무슨 결정을 하든 무조건 내 손녀 편에서 지지할 겁니다.”장옥경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렇지만 아들의 경고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사돈어른, 솔직히 말씀드려 저도 그 얘기하러 왔어요. 두 사람 갈라서는 건 아무리 봐도 너무 아까워요. 애초에 같이 있으려고 얼마나 생고생했는데... 이제 와서 이혼이라니, 그동안 공들인 게 다 도로 아미타불 되지 않겠어요?”송문애가 담담히 받아쳤다.“당시는 서로 사랑해서 그만큼 애를 썼던 거고, 지금은 마음이 식었으니 헤어지는 거겠죠. 도로 아미타불이 될 게 뭐 있습니까. 세상일이라는 게 앞으로 나아가야지,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잖아요.”장옥경은 할 말이 없었다.정루아는 처음엔 온몸이 팽팽하게 굳어 있었지만, 외할머니의 말을 듣자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 온전히 제 편이 되어준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정루아는 즉시 화제를 돌렸다.“어머님, 저녁 드시고 가실래요?”“됐어.”장옥경은 고개를 내저었다.“하준이가 집에 있어서 나도 얼른 들어가 봐야 해.”요즘 들어 함께 지내는 동
송문애가 거절하자 정석주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그럼 조심히 가십시오.”단지 거실에 서서 인사만 건넸을 뿐, 딱히 배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정루아는 송문애와 함께 저택을 나섰다.차에 타자, 송문애는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외할머니를 지켜보던 정루아는 왠지 눈가의 주름이 한층 더 깊어진 것만 같아 마음이 아팠다.“할머니...”“루아야, 너랑 무관한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송문애의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잊어버려. 괜히 나서서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정루아는 운전대를 꽉 쥐었다. 이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엄마가 귀걸이 받아내려는 이유 아세요? 자기가 데려온 양녀 주려는 거예요.”송문애가 그녀를 돌아보았다.“그 아이, 아직도 정씨 가문에 있어?”“네.”정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송문애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딸 노릇도 엉망으로 하더니, 엄마로서도 자격 미달이구나.”어르신의 평가는 늘 정확하게 본질을 꿰뚫었다.정루아는 입을 다물었다.외할머니를 모시고 식사하러 갔지만, 입맛이 없는지 통 먹질 않았다.송문애는 손녀의 닦달에 못 이겨 조금이나마 숟가락을 들었다.식사를 마치고는 곧장 풍림재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정루아는 객실 문을 잘 닫아준 뒤, 곧장 서재로 향했다.오늘 회사를 빠진 탓에 정호는 불만 가득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내오고 있었다.그녀는 서재에서 우선 몇 편의 콘텐츠를 녹음해 전송했다.거실로 다시 나왔을 때는 이미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그리고 객실 앞에 다가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할머니?”“응.”안에서 송문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정루아는 문을 살며시 열었다. 침대에 앉아 멍하니 사파이어 귀걸이를 바라보고 있는 외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내 다가가 옆에 나란히 앉으며 물었다.“할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송문애는 상자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사실 난 사파이어 같은 거 별로야. 비취를 훨씬 좋아하지. 그런데 영감탱이는 평생 나한테 이 보석 한 쌍만 딱
순간, 임혜숙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어머니가 정곡을 찌를 줄은 몰랐다는 듯,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에요. 전...”“혜숙아, 넌 내가 낳은 딸인데 속으로 무슨 생각하는지 모를 것 같아?”송문애의 목소리가 한층 차갑게 얼어붙었다.“넌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을 동정하면서 엄마인 나를 원망했고, 기어이 그 여자와 가까워졌지. 하지만 넌 잊었구나. 내가 아니었으면 너란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다는 걸.”“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안 태어나는 게 나았다고요!”임혜숙이 얼떨결에 내뱉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정루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섰다.어떻게 친어머니의 가슴에 저런 대못을 박을 수 있단 말인가.“외할머니는 엄마를 낳아준 분이에요. 엄마 눈엔 정략결혼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외할아버지 아픔만 보여요? 정작 외할머니 마음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차디찬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 졌을지, 이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외할머니의 심정이 어떨지 헤아려보긴 했냐고요!”정루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어떻게 이토록 이기적일 수 있죠?”신랄한 비난을 쏟아내는 딸을 보자 임혜숙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이내 욱하는 마음에 비아냥거렸다.“너는 뭐 다른 줄 알아? 명색이 내가 네 엄마인데, 자식이 돼서 엄마한테 이따위로 굴어?”정루아는 씁쓸하게 웃었다.“날 진짜 사랑해 주고 아껴 주는 엄마가 있었으면, 나도 이런 상처 따위 안 줬을 거예요.”“너...!”임혜숙은 말문이 막혔다.“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날 친딸로 생각했다면 애초에 소시연을 집에 들여놓지 말았어야죠.”정루아가 딱 잘라 말했다.“그러니까 가식 그만 떨어요.”임혜숙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정루아에게 뭐라 욕설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정루아는 송문애를 바라보며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지난 일은
임혜숙은 정루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외할머니도 진작 알고 계셨어야 할 일이야.”정루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이제와서 굳이 들춰내서 엄마한테 좋을 게 뭔데요? 엄마는 외할머니 자식도 아니에요?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어떻게 외할머니한테 이럴 수가 있지?연세도 많으신데, 지나간 일은 그냥 묻어두면 어디가 덧나나?하지만 임혜숙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동안 가슴속에만 품고 살았어. 이제야 겨우 말할 기회가 생겼는데, 왜 못 하게 해?”“하...”정루아가 쏘아붙이려는 찰나, 송문애가 그녀의 팔을 슬쩍 끌어당겼다.“루아야, 걱정 마.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온갖 풍파를 다 겪었는데 뭐 그리 유난이니. 나 괜찮다.”“하지만...”정루아는 다시 설득해보려 했다.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을까?그녀는 임혜숙이 하는 말을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다.외할머니가 상간녀라니, 개소리였다.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괜히 마음을 쓰시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송문애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쟤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저러는지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정루아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더는 끼어들 수 없었다.2층, 방 안.임혜숙은 문을 닫은 뒤, 곧장 송문애의 앞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주은영은 저희 아빠랑 만나는 분이셨어요.”시작부터 폭탄선언이었지만, 송문애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임혜숙은 말을 이어갔다.“당시 정략결혼에 묶이기 싫었던 아빠는 은영 이모랑 야반도주하기로 했어요. 모든 준비를 끝내고 그 사파이어 귀걸이를 징표로 주려고 했죠. 그런데 집안사람들이 알아채고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아빠를 협박해서 못하게 막았어요. 심지어 은영 이모까지 억지로 시집을 보내버렸죠.”그러다 문득 감정이 북받치는지 서글픈 기색이 역력했다.“넌 주은영이란 사람은 어떻게 알았니?”송문애가 물었다.임혜숙은 흠칫하더니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했다.“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원래 어머니 귀걸이가 아니라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