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정시연은 임혜숙을 등지고 서 있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정루아를 향해 비웃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정루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안색이 극도로 험악해졌지만 필사적으로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역시 일부러 내 속을 긁은 거였어.’정루아가 걸려들지 않고 조용히 참아내자 정시연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웬일이래? 요즘 들어 참을성이 제법 늘었네.’정시연이 유유히 병실을 나가자, 정루아는 곧장 임혜숙을 매섭게 쏘아보았다.“그렇게 끼고 도시는 거 보면, 저년이 엄마 친딸이라도 되나 봐요?”“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 해라!”임혜숙이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내 친딸은 너 하나뿐이야. 그런데 넌 어째 날 눈곱만큼도 안 닮았니? 너그러운 구석이라곤 없고, 착하지도 않고, 통 철들 기미가 안 보여. 시연이가 우리 집 식구로 산 세월이 몇 년인데, 왜 아직도 걔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원래 우리 집엔 나 하나뿐이었다고요. 아빠도, 엄마도 나만 예뻐해 주고, 내가 달라는 건 다 주던 집이였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생판 남이 굴러들어 와서 내 걸 나눠 갖겠다는데 얌전히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애초에 정시연 입양할 때, 나한테 단 한 번이라도 물어보긴 했어요?”정루아는 병상에 누운 여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집에 딸이 없는 것도 아니고, 뭐가 부족해서 나보다 나이도 많은 딸을 또 데려왔죠?”이건 그녀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도대체 왜 그랬을까?정시연이 갑자기 나타나면서 그녀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부모님의 총애는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가장 아끼던 장난감도 고스란히 빼앗겼다.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그저 투정이나 부리는 말썽꾸러기가 되어 있었다.‘그건 원래 다 내 거였단 말이야!’분명 정시연이 남의 것을 가로챘는데, 왜 정작 빼앗긴 당사자는 화 한 번 내지 못하고 투정조차 부리면 안 된다는 말인가.“하아...”딸의 서슬 퍼런 원망 앞에서 임혜숙은 그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조사를 해보겠다고 말하고 있다니.정루아는 안전벨트를 꽉 잡고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몰랐다면서 처음에 내가 이 얘기를 꺼냈을 땐 왜 의심 한 번 안 했던 거야?”“그건 중요하지 않아.”구태윤이 돌연 정루아의 손을 움켜잡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이미 다 지난 일이야. 나한테는 하나도 안 중요해.”정루아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차올랐다.이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어떻게 안 중요해? 정시연은 내 모든 걸 뺏으려고 안달이 난 여자인데. 이제는 너를 구해준 공까지 가로채려 하잖아! 구태윤, 이건 나한테 전부가 걸린 문제라고.”그러자 구태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설령 날 구한 게 정시연이라고 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고작 목숨을 구해 준 은혜 때문에 그녀를 선택했다고 믿은 걸까.만약 그렇다면 정루아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널 구한 건 나야!”정루아는 고집스럽게 외치며 제 손을 빼냈다.“구태윤, 똑똑히 들어. 너 구한 거 나 맞아. 정시연 아니라고! 그 여자가 거짓말하는 거야, 내 걸 또 뺏어가려고.”감정이 격해진 그녀의 눈가로 물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차오른 눈물이 아슬아슬하게 일렁이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할 만큼 처량해 보였다.“알았어, 너 맞아. 조사 안 할게. 네 말 믿어.”구태윤은 일단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한발 물러섰다.하지만 정루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의 칠흑 같은 밤 풍경을 바라보았다.모든 상황이 너무나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아버지는 정원 그룹 지분을 친딸도 아닌 입양아에게 넘겨주려고 하고, 그년은 이제 자기가 구태윤을 구했다는 거짓말까지 해대고 있다.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하지만 차갑게 뺨을 스치는 밤공기는 이 모든 게 현실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그녀는 차 문을 열고 내리더니 곧장 아파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구태윤은 차에 앉아 멀어지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정석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태윤아, 시연이 말 못 들었니?”구태윤은 정루아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슬쩍 쓸어내리더니, 정석주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아버님,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지금 이런 얘기 해봤자 좋은 소리 안 나옵니다. 루아 데리고 먼저 들어갈 테니까, 내일 아침에 다시 어머님 뵈러 올게요.”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정시연을 빤히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이 어딘가 모르게 더 깊고 서늘해졌다.“급하게 나오신 것 같은데, 하준이는요?”정시연은 입만 벙긋거릴 뿐,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내가 지금까지 그 난리를 쳤는데, 고작 구하준 안부나 묻고 있다고?’하지만 대놓고 악을 쓰거나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나올 때 이미 잠들어 있었어요.”“얼른 가보세요. 애가 깼는데 엄마 없으면 자지러지게 울 겁니다. 이제 겨우 세 살인데, 형수님이 더 신경 쓰셔야죠.”구태윤의 말투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했다.정시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하지만 엄마가 아직 정신도 못 차리고 계시는데...”“형수님이 여기 있는다고 어머님이 깨어나시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방해만 되니까 그냥 가세요.”구태윤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그가 뿜어내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안 그래도 무겁던 분위기가 전보다 훨씬 더 서늘하게 얼어붙자, 누구도 감히 토를 달 엄두를 내지 못했다.구태윤은 정루아의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섰다.이번에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그 순간 구태윤의 싸늘한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으나,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정루아는 구태윤을 구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하지만 구태윤이라는 남자는 믿지 못했다.그는 정시연에게도 다정했고, 그 여자의 아이에게도 극진했다.‘만약 구태윤이 날 의심하기라도 한다면?’자신이 쏟아부은 헌신을 전부 부정당한다면,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구태윤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정시연을 향했다.이내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게 무슨 소리지?”정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루아를 힐긋 바라보았다.“만약, 그때 태윤 씨 구한 사람이 저 여자가 아니라고 한다면요?”“하, 뭔 개소리야?”정루아는 기가 찬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내가 아니면, 설마 너라도 된다는 거야?”하지만 정시연의 시선은 오직 구태윤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그러나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구태윤의 수려한 얼굴은 시종일관 담담했고,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가늠이 안 갔다.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지자, 정시연은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사실, 그때 태윤 씨 구한 사람은 저예요.”말을 마치고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구태윤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은 벌써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만약 구태윤과 정루아의 시작이 오직 ‘목숨을 구한 은혜’ 때문이었다면, 그 은인이 사실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지난 세월 동안 엉뚱한 여자를 사랑해 왔다는 걸 이제라도 알게 될까?“헛소리 그만해!”정루아는 기가 막혔다.설마 진짜로 저런 파렴치한 소리를 입에 담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정시연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찢어버릴 기세였다.정말 해도 해도 너무했다.워낙 지진이 갑작스럽게 일어나 겨우 대피하고 나서야 구태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밀려오는 공포도 잊은 채 곧장 무너져 내리는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천지가 뒤흔들리는 아수라장 속에서 무거운 돌 밑에 깔려 신음하던 구태윤을 발견한 것도 분명 자신이었다.온 힘을 다해 돌을 치우고 가까스로 그를 끌어냈을 때, 머리 위로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 내렸다.두 사람 모두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 본인이 구태윤을 구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겠는가?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정석주가 정루아의
“당시 저도 현장에 있었습니다.”구태윤이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뭐라고?”정석주는 흠칫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런데 왜 정루아를 말리지 않은 거야?”구태윤의 매서운 눈매에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형수님이 오해한 게 발단이었죠. 루아는 받은 만큼 돌려준 것뿐이고. 아버님도 루아 성격을 잘 아시잖습니까. 본인이 한 일도 아닌데 억지로 뒤집어씌우려 하면, 기어이 진짜로 저지르고 만다는 걸.”정석주의 안색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그렇다고 해도 네가 옆에서 뜯어말렸어야지. 사람을 때리는데 그냥 보고만 있어?”이내 고개를 돌려 정루아를 매섭게 쏘아보았다.“당장 네 언니한테 사과해!”정루아는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구태윤을 가만히 응시했다.그가 제 편을 들어줄 줄은 정말 몰랐다.그렇다고 해서 차갑게 식어 버린 심장이 다시 뛰지는 않았다.“정시연이 죽으면 그때 가서 절하고 국화꽃 한 송이 정도는 올려놓을게요.”정루아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정루아!”정석주가 억눌린 목소리로 포효하듯 소리를 질렀다.순간 정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흑... 애초에 내가 이 집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우리 부모님만 살아 계셨어도 나를 이렇게 함부로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을 텐데...”그 한마디가 정석주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정루아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짙은 실망감이 일렁거렸다.“이 빌어먹을 년, 네가 감히...!”이제는 정루아를 몰아세울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어떤 비난을 퍼부은들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정석주는 고개를 돌려 정시연을 바라보았다.“시연아, 그만 울어. 루아가 잘못한 게 맞으니 이 아비가 대신 사과할게. 너무 속상해하지 마. 내가 방금 결정을 내렸다. 정원 그룹 지분 5%를 너한테 주마.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회사는 네가 승계하도록 해라.”“전 반대예요!”무표정한 정루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고작 입양아일 뿐이잖
저택을 벗어나려던 찰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에 정루아는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병원.사방에 소독약 냄새가 매캐하게 감도는 병실 안은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다행히 정밀 검사와 처치 결과, 임혜숙의 부상은 가벼운 뇌진탕으로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지금은 기운이 없는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정시연이 허겁지겁 들어왔다.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지만, 초조함이 역력한 눈빛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아빠, 엄마는 괜찮으세요?”정석주는 어두운 낯빛으로 대답했다.“큰 고비는 넘겼다. 그런데 넌 왜 마스크를 쓰고 있어? 감기라도 걸렸니?”정시연이 슬그머니 정루아의 눈치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기 기운이 좀 있네요.”하지만 그 찰나의 움직임을 놓칠 정석주가 아니었다.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마스크 벗고 내 얼굴 똑바로 봐.”그러자 정시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안 돼요. 저 정말 감기 걸렸단 말이에요. 엄마 가뜩이나 몸도 약하신데 저 때문에 옮으면 어떡해요.”“벗으라고 했다.”정석주의 안색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결국 정시연은 마지못해 마스크를 벗었다.그녀의 얼굴은 군데군데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아침에 비하면 많이 가라앉은 편이었지만, 누가 봐도 얻어맞은 자국이 역력했다.정석주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정루아를 쏘아보았다.“네가 그랬어?”“네.”정루아는 당당하게 인정했다.“왜요, 양쪽 뺨이 짝짝이라 보기 싫으세요? 그럼 반대쪽도 때려서 맞춰 줄까요?”“너...!”정석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하지만 아직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임혜숙을 의식해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그러자 정시연이 다급하게 가로막으며 말했다.“아빠, 진정하세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루아 심기를 건드려서 맞은 거니까 괜찮아요. 나 때려서 화가 풀릴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 진짜예요, 아빠.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잔뜩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