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 아침.기획팀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훨씬 차분했다.엘리노어는 이전처럼 신체적인 괴롭힘 없이 일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파티션 자리에 앉았다.그러나 그 평온함은 파티션을 두드리는 가벼운 소리에 오래가지 못했다.고개를 들자 그곳에 아비가일이 서 있었다. 더 이상 날카롭고 분노에 찬 눈빛도, 차가운 욕설도 없었다.매니저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고, 심지어 강요된 친절함마저 감돌았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오히려 엘리노어의 머릿속에 경계 경보를 울리게 만들었다."엘리노어 씨," 아비가일이 최대한 전문적인 어조로 불렀다. 그녀는 공식 메모가 붙은 두툼한 빨간색 서류 더미를 엘리노어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3분기 주요 벤더 예산 재조정 문서예요."엘리노어는 대단히 중요해 보이는 두꺼운 서류를 바라보았고, 이내 의아한 표정으로 아비가일을 올려다보았다. "주요 벤더 예산이요, 팀장님? 이렇게 민감한 문서는 보통 선임 직원이나 팀장님이 담당하시지 않나요?"아비가일은 눈가에는 전혀 미치지 않는 형식적인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제는 당신이 이 회사의 압박을 견딜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해서 내가 너무 과하게 굴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고, 경영진이 이 부서를 얼마나 주목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나니 당신에게 큰 잠재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아비가일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행정 직원으로서 이 부서에서 보낸 2년이라는 시간은 당신의 충성심을 증명하기에 충분했어요. 당신의 진짜 능력을 증명할 골든 오퍼튜니티가 드디어 찾아왔다고 생각해요. 이 계약 드래프트 전체를 검증하고, 물류 벤더의 현금 유출을 확인해서 단 1자리의 오차도 없도록 하세요."엘리노어가 반응하거나 질문을 더 던지기도 전에, 아비가일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번에는 나와 이사회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라요, 엘리노어 씨. 수고하세요."아비가일이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자,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친절한 미소는 순
아치는 몇 초간 침묵했다. 깊고 검은 두 눈동자가 엘리노어를 직시하자, 티 테이블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수축하는 듯한 냉기가 감돌았다."맞습니다. 내가 보냈습니다." 아치가 변명이나 회피 없이 건조하게 대답했다.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무심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나는 내 회사의 직원이 정신 나간 매니저 때문에 파티션에서 기절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업무 효율성에 악영향을 주니까."얼음처럼 차가운 태도 뒤에 숨겨진 아치의 솔직함은 엘리노어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더 이상 질문하려던 의도가 순식간에 싹 가셔버렸다.대표이사의 무심하고 위압적인 시선 아래, 엘리노어는 서둘러 포크를 집어 들고 군말 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고, 오직 엘리노어의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하지만 그녀가 음식물을 우물거리는 와중에 아치의 저음이 다시 공기를 갈랐다."내 방에서 돌아간 뒤에 아비가일이 당신에게 또 문제를 일으켰습니까?" 아치가 마치 상사가 부하 직원을 취조하듯 무심하게 물었다.엘리노어는 놀란 마음에 살짝 사래가 들렸다. 서둘러 생수를 마셔 목을 축인 뒤, 아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사장님. 아비가일 팀장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엘리노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궁금증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포크를 천천히 내려놓고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어 맞은편 남자를 바라보았다."저... 사장님.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아비가일 팀장님에게 무슨 처벌이라도 내리신 건가요?" 엘리노어가 끝마무리를 웅얼거리듯 나지막이 물었다.아치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깊은 눈빛으로 엘리노어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그 강렬한 시선에 부담을 느낀 엘리노어는 결국 시선을 비켜나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엘리노어가 시선을 내리자 그제야 아치가 입을 열었다. "아비가일은 중징계를 받을 만했습니다. 그리고 알아두세요,
아비가일은 일부러 발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기획팀 복도로 돌아왔다.엘리노어의 파티션을 지나칠 때 그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오직 증오와 독기가 서린 눈빛으로 엘리노어를 쏘아본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쿵 소리가 나도록 세게 닫았다.그 모습을 본 엘리노어는 그저 자리에 앉아 말을 잃었다.그녀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위층에서 아치가 무슨 일을 벌였길래 매니저가 저토록 분노했는지 궁금증이 찰나 지나갔다.하지만 엘리노어는 곧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캐묻거나 관여할 자격도, 능력도 없음을 스스로에게 되새겼다.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마침내 찾아왔다.이틀 만에 처음으로 엘리노어는 종이 울리자마자 차분하게 책상을 정리할 수 있었다.그녀는 즉시 휴대폰을 꺼내 벨라에게 1층 카페테리아에서 만나자는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홀가분한 마음으로 엘리노어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러나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 메인 로비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려던 바로 그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지금 당장 위층으로 올라와요.]엘리노어는 엘리베이터 문턱 바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고, 뒤따라 내리려던 몇몇 사람들이 흠칫 놀라 멈춰 섰다.그녀는 얼굴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오늘 점심은 따뜻한 수프 한 그릇과 함께 벨라와 편안한 대화를 나누길 내심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대표이사의 명령을 거역할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엘리노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벨라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빠르게 보낸 뒤, 다시 최상층 전용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최상층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정적과 격식 차린 분위기가 그녀를 맞이했다.샘은 마치 엘리노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치의 집무실 문 옆에 서 있었다."오후 잘 보내고 계십니까, 엘리노어 양. 들어오십시오, 사장님께서 안에
아비가일은 더 이상 몸을 지탱할 힘이 없었다. 두 무릎이 풀리며 대표이사 집무실의 대리석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만함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사장님, 제 실수에 대해 깊이 사죄드립니다." 아비가일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치를 애원하듯 바라보며 애원했다. "회사에 손해를 입히려는 악의는 절대 없었습니다. 제가... 제 처벌이 너무 과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제 본래 의도는 그저 신입 직원이 리히터 컴퍼니에서 강한 정신력을 가질 수 있도록 단련시키려 했던 것 뿐입니다."아치는 여전히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1센티미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얼음 같은 눈빛은 여인의 눈물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변명은 길게 하지 마세요, 아비가일 매니저." 아치가 짧게 잘라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아비가일의 애원을 단번에 멈추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강이라는 구실로 포장된 비위 행위에 대해 변명을 들을 흥미는 없습니다."아치는 아비가일에게서 시선을 돌려 책상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샘, 이 결정을 맡으세요. 그녀가 저지른 모든 구조적 위반에 상응하는 징계를 내리도록.""알겠습니다, 사장님." 샘이 신속하게 대답했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절망하고 있는 아비가일을 문서 더미를 든 채 바라보았다."아비가일 매니저, 데이터로 입증된 세 가지 중대한 위반 사항에 따라 경영진은 중징계를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샘이 차분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낮부터 당신은 HRD 시스템에 영구 기록될 최종 서면 경고(SP3) 처분을 받게 됩니다. 향후 12개월 동안 모든 직책 수당과 연간 보너스는 동결됩니다."아비가일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현재 직책은 이번 분기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유지됩니다." 샘이 무자비하게 이어나갔다. "하지만 당신은 내부 준법 감시팀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게 됩니다. 향후 6개월 이내에 당신의 이름이 들
다음 날 아침.엘리노어가 발을 들여놓았을 때 기획팀 파티션 구역의 분위기는 한적했다.지난밤 아치의 거역할 수 없는 지시에 따라, 그녀는 평소처럼 본사로 출근했다.엘리노어는 자신이 섹터 4 프로젝트 현장으로 가지 않은 것을 알아차릴 아비가일의 반응을 기다리며 약간 가슴을 졸인 채 자리에 앉았다.아니나 다를까, 정확히 오전 9시가 되자 아비가일의 방 문이 열렸다. 그녀는 비어 있을 것이라 예상한 파티션을 확인하려는 듯 턱을 높이 들고 걸어 나왔다.하지만 컴퓨터 화면 앞에서 차분하게 타이핑을 하고 있는 엘리노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아비가일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아비가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엘리노어의 책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쿵 소리가 나도록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그 바람에 다른 직원 몇 명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엘리노어! 당신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아비가일이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내가 어제 오후에 당장 섹터 4 현장으로 나가서 조사 감사를 진행하라고 지시하지 않았어? 감히 매니저의 지시를 거역하는 거야?"엘리노어는 타이핑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최대한 격식을 차린 태도로 아비가일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아비가일 팀장님. 어제 밤 그 지시 서류는 수석 비서이신 샘 씨를 통해 상부 경영진 측에서 회수해 갔습니다. 해당 외근 업무는 기획팀의 권한이 아니므로 저는 본사에 남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아비가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권위가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엘리노어가 아치를 유혹하고 있다는 그레타의 말이 떠오르자, 그녀가 아치에게 고자질했을 것이라 확신한 아비가일은 더욱 분통이 터졌다."핑계 대면서 상부 경영진 이름 팔지 마! 그 업무는 당신 성과 평가의 일부야. 가지 않는다면 이번 분기 당신의 평가 점수는 엉망이 될 줄 알아!" 아비가일이 더욱 압박하려 들었다."여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비가일 매니저?"차가우면서도 엄숙함이
"그게... 오늘 오후에 아비가일 팀장님이 직접 주신 업무입니다, 사장님." 엘리노어가 거짓 없이 솔직하게 대답하며, 최대한 목소리를 차분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자금 집행과 예산 효율성에 관한 모든 일은 결국 저희 부서로 귀결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현장으로 직접 나가 조사 감사를 진행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아치는 두꺼운 서류를 책상 위에 툭 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엘리노어는 살짝 흠칫했다.그는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엘리노어의 일주일을 옭아매듯 시선을 고정했다."아비가일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군요." 아치가 감정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리히터 컴퍼니에는 그런 궂은일을 전담하도록 거액의 연봉을 주는 현장 감독팀이 따로 있습니다. 기획팀 직원의 임무는 책상 뒤에서 완성된 데이터를 처리하는 것이지, 먼지 날리는 현장에서 자재나 세고 있는 게 아닙니다."엘리노어는 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저도 아비가일 팀장님께 똑같이 말씀드렸습니다, 사장님. 하지만 팀장님께서는 직원은 그저 군말 없이 매니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셨습니다." 엘리노어가 아치를 거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 저로서는 순종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아치는 침묵했다. 깊고 검은 두 눈동자가 어제의 피로로 여전히 핏기 없이 파리한 엘리노어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오늘 밤 당장 HRD(인사팀)에 전화를 걸어 아비가일을 책망하고 싶은 옅은 충동이 가슴속에서 일었다. 하지만 아치는 곧바로 그 자존심을 털어냈다. 소문이 퍼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평사원의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했다."당신 매니저가 부서를 어떻게 관리하든 내 알 바 아닙니다." 아치가 다시 얼음처럼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마치 엘리노어의 곤경에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듯이. "하지만 당신은 계약 때문에 이 집에 있는 겁니다. 내일 먼지 구덩이 현장에 강제로 나갔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