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임소훈은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교수님이 송남지만 예뻐하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송남지가 주는 차 한 잔 마셨다고 옆에서 눈치를 주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임소훈은 억울해도 너무 억울했다.넓은 채운홀 안, 원형 테이블 상석에는 류무영과 온유미가 앉았고 송남지와 임소훈이 양옆을 지켰다. 그 옆으로는 하정훈과 민지현, 그리고 민지현 팀의 관리자 두 명이 차례로 앉았다.웨이터가 샴페인을 가져오자 민지현이 그것을 받아 흔든 뒤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펑 하는 소리와 함께 샴페인 향기가 순식간에 방 안 가득 퍼졌다.민지현이 일어나 샴페인을 따르려고 가장 먼저 류무영 앞의 잔에 병구를 향하자 온유미가 신속하게 손을 뻗어 가로막으며 온화하게 웃었다.“민 실장님, 선생님은 몸이 안 좋아서 의사가 이미 알코올 섭취를 엄격히 금지했어요.”그때 류무영이 손을 들어 온유미의 팔을 짚었다.“유미야, 괜찮아. 오늘같이 떠들썩하고 좋은 날에 샴페인 정도 조금 마시는 건 상관없어.”온유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계속 말리자니 분위기를 깨는 것 같고 그냥 두자니 건강이 걱정됐다.그녀는 결국 송남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시선을 읽은 송남지가 바로 나섰다.“선배님, 그 술 따랐다가 무슨 일 생기면 전 책임 안 져요.”겉으로는 책임을 떠넘기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임소훈에게 이런 때일수록 류무영이나 온유미가 선택하게 두지 말고 먼저 샴페인을 거두어야 한다고 귀띔하는 것이었다.다행히 임소훈도 즉시 알아듣고 급히 샴페인 병구를 눌렀다.“교수님, 이렇게 기쁜 날에 건강에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 나죠. 술 대신 다른 걸로 바꿔 드릴게요. 그래야 사모님도 걱정 안 하시죠.”송남지가 이어서 말했다.“교수님, 오늘은 재스민의 축하연이니 고집부리지 마세요.”류무영은 그제야 단념했다.“허허, 알았다. 마침 고향의 차가 그리웠는데 차나 마셔야겠군.”송남지는 류무영 옆에 딱 붙어 수저를 챙겨줬고 세 칸 떨어진 곳에 앉은 하정훈은 그 모습을 빤히 지켜봤다.이 세상에
류무영은 묵묵부답이었다.그는 예전부터 송남지를 무척 아꼈다.그가 아는 수많은 후배 중 오직 송남지만이 빛과 그림자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았고 신예임에도 거장처럼 아주 쉽고 가볍게 그림을 완성해냈기 때문이다.류무영은 그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가 예술에 전념하지 않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 살림을 시작한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했다.결혼 상대가 재벌 2세라는 말을 듣고 류무영은 당연히 송남지가 집안 형편 때문에 꿈을 포기한 거라 여겼다.그래서 그는 홧김에 그녀가 보낸 청첩장에 답장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외국으로 떠난 뒤 그는 매번 그때를 후회했다.자신의 성격이 조금만 덜 괴팍했더라면, 젊은 사람의 자존심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고 먼저 속 시원히 말을 꺼냈더라면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어쩌면 그것이 그가 지금 직접 나서는 것을 넘어, 송남지를 위해 스스로 길을 닦아주려 애쓰는 이유일지도 모른다.송남지는 예전에 함께 스케치 여행을 가서 그렸던 유화를 들고 연회장에 나타났다.재스민 직원들도 하나둘 모여들었고 그들이 류무영과 기념사진을 다 찍고 난 뒤에야 송남지는 유화를 꺼내 보였다.“교수님, 예쁘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해요.”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소훈이 다시 샘을 냈다.“교수님, 그동안 제 작품들도 경매 시장에서 꽤나 잘나가는 편인데, 저한테는 단 한 번도 그림 달라고 하신 적 없으시잖아요.”하정훈은 미간을 찌푸렸다.‘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질투의 화신인가? 왜 이렇게 투덜대?’류무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송남지가 건넨 그림을 받았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 앉은 임소훈을 향해 돌직구를 날렸다.“소훈아, 내가 예전부터 남지를 유독 아꼈던 거야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이제 와서 왜 그래? 네가 이제 남지보다 잘나간다고 생각해서 내가 너를 더 대접해 주길 바라는 거냐?”임소훈이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아이고, 교수님! 저를 남지랑 비교하시면 안 되죠. 저희 사이 멀어지면 책임지실 거예요?”류무영은 헛웃음을 지으며
민지현은 허탈해하는 임소훈을 곁눈질하며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저도 이 업계 10년 차예요. 나름 갤러리 운영에는 천재적인 소질이 있다고 자부하며 살았죠. 그런데 작년에 웬 신출내기 하나가 나타났는데, 예술 투자에 대한 감각이 정말 독보적이더라고요. 그 친구가 찍은 화가는 아무리 이름 없는 무명이라도 결국엔 숨겨진 보석이었어요.”그녀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처음엔 믿지 않았어요. 설마 천재겠어 싶었죠. 그러다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그 친구를 직접 보고 깨달았어요. 단순히 투자에 천재인 게 아니라 그냥 모든 걸 다 잘하는 사람이더라고요. 거물급 인사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대화하는 걸 보면서 절감했죠. 사람마다 타고난 그릇이 다르다는 걸요. 하지만 재능이 좀 부족하다고 해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안 살 수는 없잖아요?”임소훈은 옆에서 쫑알거리는 여자를 빤히 바라봤다.세련된 단발머리가 아주 시크해 보였는데, 입만 열면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게 겉모습과는 딴판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웃음이 났다.그녀의 말이 위로가 되어서인지, 아니면 운전대를 잡고 열변을 토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인지 알 수 없었다.신호 대기 중에 민지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재능 있고 잘난 사람도 멋지지만, 타인의 우월함을 쿨하게 인정하는 우리도 충분히 멋지다고 생각해요.”임소훈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화답했다.“와, 정말 멋진 마인드네요. 저도 제 열등감에만 갇혀 있으면 안 되겠어요.”민지현이 생긋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임 선생님 같은 거물께서 괴로워하시면 저희 같은 일반인은 어떡하라고요?”임소훈은 민지현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민 실장님은 전혀 평범하지 않아요.”민지현은 바로 그가 하정훈에게 소개한 인물이었고 하정훈은 검토를 거친 후에야 그녀의 팀을 재스민의 아트 디렉터 팀으로 고용하기로 결정했다.하정훈의 눈에 들 수 있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사람일 리 없다는 뜻이었다.명가원.류무영은 채운홀에 자리를 잡았고
작은 손이 큰 손을 이끄는 느낌이 꽤 묘했다.임소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투덜거렸다.“내 인생엔 언제쯤 저런 달달함이 찾아오려나? 이 염장 지르는 냄새, 진짜 고역이네.”팀원들을 보낸 뒤 직접 차를 몰아 명가원으로 향하던 민지현은 서둘러 발을 떼던 찰나 마침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임소훈과 마주쳤다.그녀는 앞서가는 커플을 보며 씩 웃었다.“임 선생님, 하 대표님한테 광속으로 버림받으신 거예요? 진짜 너무하시네. 온종일 같이 있어 준 친구는 나 몰라라 하고 바로 와이프한테 가버리다니.”임소훈이 쓴웃음을 지었다.“민 실장님 말이 맞아요. 전 이제 차 탈 자격도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네요.”송남지의 차가 출발하는 걸 보며 그가 한탄했다.그러자 민지현이 차 키를 흔들었다.“괜찮으시면 제 차라도 타실래요?”임소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잘됐네요, 어서 가시죠!”짧은 숏컷의 민지현은 운전 스타일도 거침없었다. 하정훈의 롤스로이스 뒤를 바짝 쫓는 그녀를 보며 임소훈이 농담을 건넸다.“이렇게 바짝 붙어 가다가 추돌 사고 나는 거 아니에요?”민지현은 어깨를 으쓱했다.“서경의 퇴근길 정체를 몰라서 그래요. 이렇게 안 붙으면 도착했을 때 우리가 먹을 음식은 하나도 없을걸요?”서경의 악명 높은 교통 체증을 비꼰 농담이었다.임소훈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저 롤스로이스를 들이받는다 해도 남지가 같이 타고 있는 한 하 대표는 절대 화 안 낼 겁니다.”하정훈과 송남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민지현의 호기심이 제대로 발동했다.그녀가 먼저 조심스레 운을 뗐다.“하 대표님은 다른 재벌들과는 참 다르신 것 같아요. 보통은 돈만 내고 마는데, 하 대표님은 돈은 물론이고 정성까지 지극히 쏟으시잖아요.” 임소훈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음을 이어갔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아마 목숨을 내놓으라 해도 기꺼이 내놓을걸요?”민지현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농담 마세요. 저 바보 아니거든요. 누가 목숨까지 걸
재스민 갤러리 개관 커팅식이 대성공을 거두며 마무리됐다.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완벽한 결과였다.온라인은 온통 이 소식으로 도배되었고 반달 동물원 벽화로 유명해진 천재 소녀가 서경 중심가에 재스민 갤러리를 오픈했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했다.대다수의 사람이 트래픽이 정말 이렇게 빨리 돈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에 부러움을 표하는 반면 이성적인 사람들은 송남지를 옹호했다. 그녀의 유명세는 결국 실력에서 나온 것이고 탄탄한 재능이 있기에 대중의 관심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세상 사람들은 송남지를 그저 자본의 선택을 받은 운 좋은 예술가로만 여겼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스스로가 곧 자본이 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걸 꿰뚫어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송남지는 명가원의 홀 두 개를 빌려 성대한 뒤풀이 자리를 마련했다.스승인 류무영과 온유미를 배웅하고 나서야 송남지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온종일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다가 이제야 겨우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나가자 하정훈도 답답했던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임소훈이 하정훈과 함께 송남지 쪽으로 걸어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축하 파티에 나 끼워줄 자리도 있어요?”송남지는 웃으며 고개를 돌려 임소훈을 바라보았다.“선배님, 그게 무슨 농담이세요? 선배님이 와주시면 저야말로 영광이죠.”마침 일정도 비어있던 임소훈이 제안했다.“좋아요, 남지 씨가 반겨주니 가서 한 끼 든든하게 먹어야겠네요. 마침 하 대표도 아침부터 지금까지 쫄쫄 굶었거든요.”하정훈은 묵묵히 서서 아무 말이 없었다.모자와 마스크를 벗어 던지자 하정훈의 날카로운 눈매와 차가운 입술이 온전히 드러났다.오직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만만한 상대가 아닌지 증명하는 듯했다.하정훈은 송남지의 옆모습을 훑으며 무심하게 툭 던졌다.“난 안 갈래. 네 자리는 있어도 내 자리는 없을 텐데.”그 은근한 가시가 돋친 말에 송남지는 민망함에 어쩔 줄 몰랐다.주위를 둘러보니
비서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이 정도로 긴박한 시간에 회의를 하시는 걸 보니 정말 중요한 비즈니스인가 보네요.”임소훈은 비서의 말에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그러고는 뒤를 돌아보는 척하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확실히, 아주 ‘중요한 비즈니스’이긴 했다.커팅식이 끝나자 갤러리 안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류무영의 명성은 독보적이었고 오랫동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터라 그의 등장은 현장을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했다.매체들은 마치 굶주린 늑대처럼 눈을 번득이며 류무영을 주시했다.누구든 류무영과 단독 인터뷰만 따낸다면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는 셈이었다.단상에서 내려오기 전 류무영이 한마디 덧붙였다.“이번에 귀국해서 당분간 머물 계획이니 저라는 노인네에 대한 호기심은 천천히 푸셔도 됩니다. 대신 오늘은 재스민 갤러리에만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군요. 협조 부탁드립니다.”온유미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온 류무영은 무리가 되었는지 심하게 기침을 내뱉었다.이에 온유미가 사색이 되어 권했다.“선생님, 병원에 갈까요?”그러자 류무영이 쏘아붙였다.“기침 몇 번에 병원이면 재채기하면 아주 제사 지내겠구나?”류무영의 까칠한 대꾸에 온유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류무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그런데 남지는 어디 갔지?”송남지가 인파를 헤치고 나오며 손을 흔들었다.“교수님! 저 여기 있어요!”류무영은 달려오는 송남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젊은 게 좋구먼, 에너지가 넘쳐.”온유미도 거들었다.“맞아요. 남지 씨는 볼수록 예쁘기도 하지만, 발그레한 두 뺨이 묘하게 분위기 있어서 훨씬 생기 있어 보이네요.”송남지는 쑥스러워하며 두 볼을 감싸 쥐고는 얼른 말을 돌렸다.“죄송해요, 마음이 급해서 뛰어오느라... 제가 조금만 움직여도 얼굴이 잘 빨개지는 편이라서요.”온유미가 송남지의 어깨를 토닥였다.“숨 좀 고르고 올라가요. 안 늦었으니까.”송남지는 웃으며 고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