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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5화

Author: 은지아
그도 그럴 것이 송남지의 실력은 이미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회의를 마친 후 민지현은 송남지를 따라 사무실로 향했다.

“은지영이 여길 아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길래 제가 미리 와서 정리 좀 해뒀어요. 예전이랑 똑같을 거예요.”

익숙한 공간에 발을 들인 송남지는 뭉클한 마음에 민지현의 얼굴을 비비며 감동을 표했다.

“우리 민 실장님은 어쩜 이렇게 이쁜 짓만 골라서 할까?”

민지현은 송남지의 마수에서 벗어나 에어컨 바람이 잘 드는 소파에 앉아 시원함을 만끽했다.

인형을 꼭 껴안은 그녀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걱정스럽게 물었다.

“기획전 준비는 어떻게 할 거예요? 관장님이 돌아오기 전에 업계 거물들이랑 접촉해 봤는데, 다들 예술 전시관 자리가 꽉 찼다느니 하면서 요리조리 피하더라고요.”

송남지는 턱을 괸 채 창밖의 강렬한 햇살을 바라보았다. 겨우 5월인데 서경은 벌써부터 달아오르고 있었다.

“별로 안 좋은 자리들도 예약하기 힘든 거예요?”

그녀가 무심하게 물었다.

민지현은 수심 가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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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면을 쓴 남편   제1028화

    “머리가 보입니다.”분만대 끝에서 모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 한 번만 더 힘내요.”송남지는 이를 악물고 온몸의 힘을 쏟아부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힘을 주는 그녀의 표정에는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투혼이 서려 있었다. 하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오래전 화실에서 밤을 새워 그림을 그리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입술을 짓씹으며 멈추지 않고, 절대 포기하지 않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한 번 더, 아기 머리가 나왔어요.”송남지가 나직하면서도 거의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토해냈다. 그녀답지 않은, 벼랑 끝에 몰린 채 모든 것을 내던진 어머니의 외침이었다.그리고 이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분만실을 가득 채웠다.나약하거나 간신히 짜내는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세상이 자신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듯, 힘차고 우렁차며 심지어 분노까지 서린 쩌렁쩌렁한 울음소리였다.송남지는 긴장이 풀린 듯 분만대에 늘어져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고 눈가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딸입니다.”모로 교수가 웃으며 축하를 건넸다.“작지만 아주 건강합니다.”간호사가 피가 묻은 채 쭈글쭈글한 아기를 송남지의 가슴팍에 내려놓았다. 살결이 닿자마자 울음이 뚝 그쳤다. 세상에 나온 지 1분도 되지 않은 작은 생명은 엄마의 체온을 느끼자마자 기적처럼 평온을 되찾은 것이다.송남지는 고개를 숙여 딸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맞추었다.“안녕, 연아.”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쉬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엄마야.”하정훈은 침대 곁에 서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송남지에게 붙들려 있던 그의 손가락 마디엔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격리복에는 핏자국이 튀었고 셔츠 소매는 땀과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붉게 충혈된 눈이었지만,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간호사가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아버님, 안아보시겠어요?”하정훈은 하얀 속싸개에 싸인 작은 아기를 바라보며 목울대를 울렸다. 그가 손을

  • 가면을 쓴 남편   제1027화

    진통은 새벽 두 시부터 격렬해지기 시작했다.송남지는 잠결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아랫배 깊은 곳을 천천히 그러나 단단히 쥐어짜는 듯했다.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고 침대 시트를 꼭 쥔 채 통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몇 초 후 통증이 물러갔다. 조수처럼 빠르게 찾아왔다가 빠르게 사라진 통증은 온몸에 식은땀과 가쁜 호흡만을 남겼다.그녀가 안도의 숨을 내쉬자마자 다음 진통이 찾아왔다. 먼젓번보다 더 강하고 주기도 짧았는데, 마치 무딘 칼이 몸속을 오가는 것 같았다.“정훈 씨.”그녀가 불렀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조용한 병실 안에 유독 또렷하게 울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는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오늘 밤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병상 옆 의자에서 밤을 새웠다. 양복 외투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었고 셔츠 소매는 팔뚝까지 걷어 올린 상태였다. 그의 눈 밑은 거뭇하게 그늘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얼음물처럼 맑아서 졸린 기색이 전혀 없었다.“왜 그래?”그는 침대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송남지는 그의 팔을 붙잡았고 손톱이 그의 셔츠 천 속으로 파고들었다.“아파요.”그녀는 한 단어만 말했지만 그 끝 음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하정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침대 머리맡의 호출 벨을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심호흡하자, 남지야. 나를 따라서 들이마셔 봐...”송남지는 그의 템포에 맞춰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고 진통의 정점은 몇 차례의 호흡 속에서 서서히 물러갔다. 그녀는 땀에 젖어 기진맥진한 채 침대에 누웠는데 꼭 물에서 건져 올린 사람 같았다.잠시 후 의사와 간호사들이 도착했다. 검사를 마친 모로 교수는 고개를 들며 영어로 하정훈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 한마디를 던졌다.“자궁문이 벌써 4센티미터 열렸습니다. 분만실로 옮겨야 해요.”송남지는 그 소리에 온몸이 굳었다. 31주 하고도

  • 가면을 쓴 남편   제1026화

    창밖의 달은 무척이나 밝아서 테라스 위에 핀 부겐빌레아의 윤곽까지 선명하게 보였다.먼바다는 달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일렁였고 마치 고요하고 끝을 알 수 없는 길처럼 뻗어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하정훈 혼자 걷는 길이 아니었다.사흘 뒤, 송남지는 퇴원했다.모로 교수는 퇴원 전 검사에서 그녀와 아기의 상태가 모두 안정적임을 확인하고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지만 휴식에 주의하고 과로를 피해야 한다고 했다. 하정훈은 의사의 지시를 메모장에 하나하나 기록했는데, 그 어떤 계약서에 서명할 때보다 진지했다.권우빈이 병원으로 송남지를 마중 나왔다. 소년은 손에 하얀 데이지 꽃다발을 들고 있었는데, 르 파티오의 정원에서 꺾은 것이었다. 클로딘은 송남지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게 문을 닫고 찾아오려 했으나 권우빈이 겨우 말렸다고 했다.“클로딘 할머니가 전해달라 하셨어요.”권우빈은 송남지에게 꽃을 건네며 말했다.“정원의 올리브 나무가 오늘 꽃을 피웠으니 얼른 와서 보래요.”송남지는 꽃을 받아 들고 고개를 숙여 향기를 맡았다. 데이지 향은 아주 옅어서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맡아본 꽃 중 가장 좋은 향기라고 생각했다.하정훈은 한쪽에 서서 권우빈과 송남지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년의 눈빛은 맑고 순수했으며 송남지를 볼 때 아주 소중한 사람을 대하듯 했지만 이성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고마움이자 존경이었고 가족애와 우정 사이의 때 묻지 않은 감정이었다.하정훈은 문득 유경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권우빈이 나타나기 전에 송남지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는 것을.이 소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송남지의 보호를 받으면서 동시에 송남지를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남편 대역을 맡은 것도 그녀를 소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권우빈.”하정훈이 입을 열자 권우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고맙다.”하정훈이 말하자, 권우빈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별말씀 다 하세요. 누나가 제게 해준 게 제가

  • 가면을 쓴 남편   제1025화

    검사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양호했다.결과지를 들고나온 모로 교수는 하정훈에게 긴 영어 문장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요점은 송남지의 자궁 수축이 가짜 진통이며 자궁 경부 상태도 정상이라 조산 위험은 없지만, 며칠간은 무리하지 말고 침대 위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퇴원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출혈이나 파수, 혹은 자궁 수축이 잦아지면 즉시 병원으로 오십시오.”하정훈은 모로 교수가 말한 내용을 하나하나 숙지한 뒤 검사실로 들어갔다.송남지는 침대에 누워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조금 전보다 한결 편안해진 안색을 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본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별일 없대요. 아기는 아직 나올 생각이 없나 봐요.”하정훈은 침대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집으로 가자.”“어느 집으로요?”송남지의 물음에 하정훈은 찰나 멈칫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돌아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좋아.”송남지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르 파티오로 가요. 클로딘이 걱정할 거예요.”하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숙여 그녀에게 신발을 신겨주었다.그의 동작은 마치 깨지기 쉬운 귀한 도자기를 다루듯 지극히 부드럽고 느릿했다.송남지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를 응시했다.그는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한 손으로는 그녀의 발목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신발 끈을 매고 있었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그의 눈매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짙은 회색 캐시미어 니트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그의 손목에는 그녀가 선물했던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제니스 시계였다.그는 여전히 그것을 차고 있었다.송남지는 문득 수리스에서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서 있었던 탓에 온몸이 젖어 사시나무 떨듯 떨었던 그 밤을 떠올렸다.그는 우산을 받쳐 들고 다가왔고 우산을 온통 그녀 쪽으로 기울여 자신의 어깨는 흠뻑 젖고 말았다.춥지 않으냐는 물음에 그는 아니라고 답했지만, 그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의 건강 상태로는 빗속에 노출되는 것

  • 가면을 쓴 남편   제1024화

    하지만 정작 하정훈이 영혼을 바쳐 읽어 내리는 정보는 고작 가진통의 특징과 조산 전조증상에 관한 보편적인 의학 정보 지식이었다.송남지는 문득 가슴 깊은 곳이 울컥 요동치며 코끝이 아릿하게 저려왔다.“정훈 씨, 이렇게 심각하게 긴장할 필요까진 없어요.”하정훈은 마침내 고개를 들어 그녀의 깊은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긴장 안 했어.”그가 애써 변명했지만, 손가락 끝은 작게 요동치고 있었다.송남지는 그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굳이 들추어내지 않았다. 그저 그의 커다란 손등에 손을 포갠 채 따스하게 온기를 전해주었을 뿐이다.차가 코다르의 한 사립 병원 로비 앞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의사와 간호사들이 문 앞에 줄을 서서 대기 중이었다. 하정훈이 먼저 재빨리 내려 송남지가 내릴 수 있도록 조심스레 부축했다. 그때 하얀 의사 가운을 걸친 한 중년 여성이 그들에게 접근하더니, 유창한 영어로 자신을 산부인과 과장이자 주임 의사인 모로라고 정중히 소개했다.모로 교수가 송남지를 데리고 신속하게 정밀 검사실로 이끌자 하정훈이 그 뒤를 다급히 쫓았으나, 검사실 문 앞에서 문지기처럼 가로막은 간호사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환자 보호자분, 여기 대기 구역에서 잠시 대기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하정훈이 송남지를 흘끗 쳐다보았다. 송남지가 그를 향해 슬며시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대기 구역으로 발길을 옮겼다.복도를 채운 전등은 온화한 유백색으로 빛났고 벽면에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몇 점이 조화롭게 걸려 있어, 병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즈넉하고 조용한 호텔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하정훈은 새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깊숙이 걸터앉아, 무릎 위로 팔꿈치를 올린 채 열 손가락을 모아 깍지를 끼고서 차가운 이마를 맞대었다.이토록 숨 가쁜 초조함을 느껴본 지는 실로 오랜만이었다.지난번 이 정도로 극도의 정서적 고통을 겪었던 것은 수리스의 차가운 수술실 안에서였다. 그는 무영등 조명을 온몸으로 받으며 수술대 위에 누운 채,

  • 가면을 쓴 남편   제1023화

    한참 산을 내려가던 도중, 송남지의 걸음걸이가 돌연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다.하정훈은 그녀의 이상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가던 길을 멈춘 채 뒤를 돌아보았다.“왜 그래, 남지야?”송남지는 차가운 돌담의 금속 난간을 꽉 움켜쥔 채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리고 있었다. 희뿌연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그녀의 뺨은 유독 창백해 보였고 무언가 통증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듯 아랫입술을 일 자로 굳게 다물고 있었다.“괜찮아요, 그냥 평소보다 오래 걷다 보니 배가 조금 당기는 모양이에요.”하정훈의 심장이 순간 칼로 도려내듯 덜컥 주저앉았다.그는 이미 송남지가 홀로 고통을 삼키는 모습을 수없이 목도했었다. 서경의 차가운 병원 병동에서, 폭우가 쏟아지던 수리스의 어느 우울한 밤거리에서, 온갖 무거운 비밀의 무게를 오롯이 가슴속에만 구겨 넣어야 했던 그 모진 세월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습관처럼 ‘괜찮다’고 속삭였고 자신에게 찾아온 그 어떤 고통이나 고난도 타인의 눈길을 붙잡아 둘 필요가 없는 아주 시시한 일인 양 치부해 버리곤 했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하정훈 역시 그녀가 홀로 끙끙 앓으며 견뎌내게 둘 생각이 없었다.“앉아봐.”그는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받쳐 돌계단 위로 앉혔다.“숨 깊게 들이마셔, 천천히 말이야.”송남지는 그의 손길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녀는 하정훈의 품에 기댄 채 한 손으로는 배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고 다른 한 손은 그의 큼직한 손안에 꼭 갇혀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차가운 온기와 미세한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역시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너무 긴장하지 마요.”송남지가 조금 쇠잔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당신이 그렇게 떨면 나까지 덜컥 겁이 나잖아요.”하정훈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필사적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김서윤에게 급히 메시지 한 통을 남긴 뒤, 이어 유경태에게 곧바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경태야, 지금 즉시 코다르 산부인과 의사 좀 수소문해 줘.”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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