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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밥벌이요정
갑자기, 룸 안의 소란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모두가 송서윤을 바라보았고 그 순간 두려움이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고영훈이 허연수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더니, 그대로 바닥에 밀쳐버렸다.

“네가 애원해도 소용없어. 큰 사모님께서 정한 일은 아무도 바꿀 수 없어. 게다가 네가 하준이를 잘못 이끌고 서윤이 마음을 다치게 했으니, 내가 이 정도로 끝낸 것만 해도 너그러운 거야.”

차가운 목소리에 단호함까지 서려 있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허연수는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며, 송서윤을 향해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래, 네가 하준이를 잘못된 길로 이끌고 형수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형님이 이 정도로 넘어간 것도 고마워해야 해.”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숨을 내쉬며 송서윤을 감쌌다.

“하준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건 정말 실망이야. 형수님 속을 썩이다니....”

“형수님,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형님이 형수님을 얼마나 아끼는데, 누가 감히 형수님을 무시하겠어요.”

정지욱은 허연수를 밀치며 말했다.

“형수님, 지금 바로 연수 씨를 내보내겠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고영훈 옆에 있던 허연수는 한순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져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녀는 격하게 울부짖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송서윤은 이 위선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역겨움을 느꼈다. 그녀는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

“연수 씨, 조금 전에 하준이 아빠한테 들러붙은 거 해명해 봐! 정말 부탁하려고 그런 거였어?”

그 순간, 모든 분노가 허연수에게 쏠렸다. 아무도 송서윤의 심기를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허연수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가 금세 창백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송서윤을 노려보았다.

‘당연히 아니지! 네 남자랑 잤으니까, 네 남자의 애인이니까 그렇게 가까이 붙어있었던 거지. 바보 같긴!’

하지만 고영훈 앞에, 감히 모든 걸 드러낼 수 없었다.

그때, 고영훈이 정지욱을 흘긋 쳐다봤다. 그러자 정지욱은 곧바로 허연수를 바닥으로 밀쳐버렸다.

“아직도 형수님께 사과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그래, 사과해!”

사람들이 몰아세우자, 허연수는 무릎을 꿇은 채 송서윤 앞에 주저앉았다.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는 충격에 눈물이 터졌지만, 누구 하나 그녀를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차가운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녀는 겨우 입을 열어 한마디씩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왜 내가 이런 수모까지 당해야 해?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송서윤이 잘난 척한다고 욕하더니, 정작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잖아!’

허연수가 이를 갈며 올려다봤지만, 송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감히 허연수를 두둔할 수 없었다.

고영훈이 송서윤을 품에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여보, 이런 사람 때문에 마음 쓰지 마. 앞으로는 당신 눈에 안 띄게 할게.”

정지욱이 허연수를 끌어내려고 하자, 송서윤은 그를 밀쳐내며 막아섰다.

“잠깐만요.”

그녀의 시선이 허연수의 손목에 머물렀다.

“아까 하준이 아빠 차에서 나온 그 팬티가 왜 네 손목에 감겨 있는 거지?”

허연수가 문득 입꼬리를 비틀듯 올리더니, 초췌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도발적인 눈빛으로 고영훈을 쳐다봤다.

“이거? 사랑하는 남자가 선물한 거야. 내 몸매가 딱 맞다면서 주던데? 그 남자 주변에는 나처럼 이런 T팬티를 입어줄 여자가 없다고 하더라고. 이런 팬티는 굳이 벗을 필요도 없이... 아이, 부끄러워라. 언니는 그런 경험 없나 봐?”

그 마지막 말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허연수의 눈빛이 송서윤을 스치듯 훑고 지나갔다.

그 시선을 따라 고영훈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지금까지 사랑이라 믿어왔던 그의 말들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모니터 화면 너머로 본 역겨운 장면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늘 자신에게는 조심스럽고 다정하던 남자가, 허연수 앞에서는 욕망에 눈이 먼 짐승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이 이제는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송서윤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고장 난 듯 아팠고 창백해진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네가 말하는 ‘사랑하는 남자’가 설마 내 남편이야?”

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바로 그때, 정지욱이 일부러 허연수의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형수님, 사실 저... 접니다. 저랑 연수가 사귀고 있었습니다.”

“둘이 몰래 만난 거였어? 비밀이 참 많으시네!”

“그래서 아까 그렇게 데리고 나가려 했던 거구나! 애인이라고 감싸주려던 거였어?”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장난을 섞어가며 분위기를 풀었다.

그 와중에 고영훈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송서윤 앞으로 걸어와, 그녀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아까는 지욱이 부탁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연수 씨도 이 자리에 같이 있었던 거야. 미안해, 괜히 신경 쓰이게 했지?”

송서윤은 마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고영훈의 입술 위에 반짝이는 립스틱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조명 아래 번뜩이던 그 자국은, 마치 바늘로 두 눈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안겨줬다.

송서윤은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서 애써 눈을 감았다.

“근데 정씨 가문과 서씨 가문 사이에 혼약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아닌가요? 지원이는 내 오랜 친구야. 허연수가 지원이와 지욱 씨 사이에 끼어든 거네요? 지욱 씨, 어떻게 지원이한테 이럴 수 있어요?”

그 말에 정지욱은 허둥지둥 허연수의 손을 놓으며 송서윤에게 애타게 변명했다.

“형수님, 그게... 그게... 연수 씨가 저를 유혹한 거라서... 제발 이 일, 지원이한테만은 말씀하지 마세요.”

“거기 누구 없어? 당장 허연수부터 끌고 나가!”

곧바로 경호원들이 들이닥쳤다.

허연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경호원들이 거칠게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룸에서 들어냈다.

“아아악... 놔요! 난 정지욱 내연녀 아니야! 내가 먼저 유혹한 것도 아니라고!”

“영훈 오빠! 제발, 나 좀 도와줘. 난, 난 오빠 사람이잖아...”

버둥거리던 허연수의 목걸이에 반짝이는 반지가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송서윤은 허연수의 목에서 그 목걸이를 확 잡아당겼다.

목걸이가 끊기자, 허연수는 순식간에 고개를 떨구며 침묵했다.

허연수가 몸부림치는 사이, 옷깃 사이로 은빛 목걸이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끝에 달린 반지가 반짝였다.

송서윤은 단숨에 그녀의 목걸이를 낚아채듯 잡아당겼다.

목걸이가 끊기며 반지가 흔들렸고 허연수는 순간 당황한 듯 고개를 떨궜다.

송서윤은 그 목걸이를 고영훈 앞에 내밀었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목걸이에 매달린 반지가 공중에서 흔들리며 안쪽 각인을 드러냈다.

반지 안에는 송서윤과 고영훈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고영훈이 직접 새긴, 두 사람의 약속이 담긴 반지였다.

그녀는 자기 눈앞에서 두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왜 내가 잃어버린 결혼반지가 허연수 목에 걸려 있는 건데?”

떨리는 목소리로 고영훈에게 물었다.

“허연수 씨가 정지욱 씨 내연녀가 아니라 당신 사람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사이야? 설명해 봐.”

허연수는 경호원에게 붙잡혀 팔이 뒤로 꺾인 채 머리는 엉망이었다. 그 모습은 정말 비참했다.

고영훈 곁에서 5년, 그를 위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결국 이렇게 끌려 나가는 신세가 될 줄은 몰랐다.

‘왜 나는 늘 어둠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야 하고 송서윤만 늘 당당하게 빛나는 사모님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분노에 눈이 뒤집힌 허연수가 갑자기 소리쳤다.

“영훈 오빠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해!”

고영훈이 크게 외치며 송서윤을 품에 안았다.

“엄마 생각해서 네가 하준이 일로 실수한 것도 그냥 넘기려 했는데, 설마 우리 부부의 반지까지 훔쳐 갈 줄은 몰랐네.”

그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 결혼반지가 우리 부부에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알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당장 경찰서에 넘겨. 절도죄로 바로 고소해.”

고영훈의 얼굴에는 혐오와 분노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의 목소리는 한 점 온기도 없이 차가웠다. 그 날카로운 표정에, 방 안에 있던 모두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허연수조차 완전히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허연수가 반지를 훔친 게 맞는 듯한 분위기였다.

고영훈이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리자, 경호원들은 맥없이 늘어진 허연수를 그대로 방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 과정에서 차가운 무언가가 송서윤의 손끝을 스쳤다.

송서윤이 고개를 내려다보니, 고영훈이 결혼반지를 조심스럽게 그녀의 약지에 끼워주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여보, 아무도 당신한테서 이 반지를 빼앗아 갈 수 없어.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당신이 우는 걸 보는 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

그가 손끝으로 송서윤의 뺨을 훑어내리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반지가 그녀의 눈앞에서 반짝거렸다.

그 순간, 송서윤은 문득 예전의 고영훈을 떠올렸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을 아꼈고 항상 옆에서 지켜줬던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지금 감당해야 했던 모든 상처와 풍파는 모두 그로부터 온 것이었다.

‘아무도 내 것을 뺏어갈 수 없다고? 하지만 나만을 바라보던 그 마음은 이미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겨 버렸는데...’

송서윤은 심장이 멈춰버릴 것만 같은 벅찬 감정이 밀려와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고영훈의 손을 밀어내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그리고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로 얼굴을 적셨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겨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 화장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바로 고하준이었다.

그는 송서윤의 발 앞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애타게 말했다.

“엄마, 그 반지는... 내가 연수 이모한테 준 거예요. 제발, 경찰 아저씨한테 이모를 데려가지 말라고 해주세요. 만약 도둑질한 사람을 잡아가야 한다면, 저를 잡아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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