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둡고 짓눌린 방안.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 속에서, 수진은 홀로 TV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참고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서 언론의 수십 가지 취재진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는 김미자의 모습이 잡히고 있었다. 그 마녀 같은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수진의 입술 사이로 자조 섞인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악마 같은 년…….'
김미자가 내민 가짜 유전자 결과지 한 장 때문에, 수진은 강도진에게 잔인하게 버림받았다. 그뿐인가. 임신 당시 아들을 가졌다며 고맙다고 건넸던 임신 축하금 30억 원을 다시 내놓으라며 협박하고, 법원에서 지급보증서까지 받아내 수진의 목을 죄어왔던 그 악몽 같은 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라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수진은 눈을 차갑게 번뜩이며 노트북을 열었다.
다른 강수한의 피해자들이 신분 노출이 두
찰스의 상해 및 살인미수 현행범 체포 속보가 터지자마자, 사전에 법무팀을 소집해 만반의 준비를 마쳐 두었던 강도진은 지체 없이 긴급 기자회견 대신 'CB 그룹 대표이사 강도진' 명의의 공식 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했다.[CB 그룹은 이번 찰스 CP(Chief Producer)의 불미스러운 개인 범죄 및 표절 논란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경영진으로서 개별 디자이너의 세세한 창작 과정까지 모두 감독하지 못하고, 찰스 CP를 과도하게 신뢰했던 점에 대한 책임을 통감합니다.현재 CB 그룹은 자체 내사를 정밀하게 진행 중이며, 만약 찰스 CP의 표절 및 디자인 약탈 행위가 사실로 확인될 경우 그에게 가장 강력한 법적·인사적 처벌을 내릴 것입니다. 아울러 이로 인해 발생한 CB 그룹의 브랜드 이미지 실추 및 재정적 손실 역시 찰스 개인에게 엄중히 손해배상을 청구할 방침입니다.또한, 본인은 오늘 남미 현지 정부와의 남미 광산 개발 최종 정식 계약 체결을 위해 출국합니다. CB 그룹은 단순한 패션·보석 디자인 브랜드를 넘어, 원자재 채굴부터 제조 및 유통까지 직접 총괄하는 글로벌 종합 기업으로 도약할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근거 없는 과한 억측이나 악의적으로 기업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소문에 대해서는 법무팀을 통해 무관용 원칙으로 강력 대응할 것임을 밝깁니다.]도진의 속전속결 성명문 발표는 즉각 언론과 대중의 여론을 사정없이 갈라놓았다.찰스 CP의 야만적인 폭행 행위에 대해서는 전 국민적인 비난이 일치했지만, CB 그룹과 강도진 대표를 향한 시선은 인터넷
대표 집무실 문을 부서져라 닫고 나온 찰스는, 분노로 사정없이 씩씩거리며 사옥 복도를 걸어 나갔다.'강도진, 어린놈의 새끼가 감히 나한테 소리를 질러? 내가 누군데! 망해가던 CB 디자인팀을 기사회생시키고 명성을 다시 올려놓은 게 누구 덕인데!'찰스는 강도진이 자신을 벌레 보듯 바라보며 법무팀을 집결시켜 '꼬리 자르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오직 도진이 자신이라는 독보적인 거장을 감히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헛된 자만심과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도진의 차가운 경고를 이행하지 않았다간 자신의 입지나 성과급에 차질이 생길 것은 분명했기에, 찰스는 어떻게든 유현을 찾아내 사적으로 합의를 끌어내기로 결심했다.한편, 유현은 찰스의 난입 위험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정식 소장이 접수되면 코너에 몰린 찰스가 틀림없이 유현의 거처나 개인 작업실로 난입해 행패를 부릴 것이라 예견한 유진의 배려 덕분이었다. 유현은 예전에 유진이 운영하던 매장이자 현재는 유진의 개인 작업실로 탈바꿈한 안전한 공간에서 지내고 있었다.찰스는 유현의 집을 몇 번이고 찾아갔지만 번번이 헛걸음을 쳤다. 분노와 조급함 속에서 도진의 차가운 경고가 머릿속을 스치자 찰스의 피가 바짝바짝 말라갔다.'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내 발로 오지 않을 놈이라면…… 오게 만들면 되지.'간교한 꾀를 낸 찰스는 CB 디자인팀의 막내 디자이너를 포섭했다. 찰스의 악독한 압박을 받은 막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유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앤더슨 교수의 차가운 폭로가 연회장을 때린 직후, 파티장은 순간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 뒤에 거대한 동요가 일렁였다."교, 교수님! 잠시만요!"강도진은 당황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급히 마이크를 틀어잡으며 스태프들에게 거칠게 손짓했다."여러분,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앤더슨 교수님께서는 학자로서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셨을 뿐입니다. 단상 위 화면을 봐주십시오!"도진은 급하게 자신이 원하는 최상의 결과만을 도출해 냈던 사설 지질 조사 기관들의 희망적인 분석 데이터와, 남미 현지 정부 관료들에게 뒷돈을 집어넣고 받아낸 관제 보고서들을 대형 스크린에 마구잡이로 띄웠다."보시다시피 현지 정부 공식 문서와 저명한 조사 기관에서는 매장량과 채굴 가치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투자 가치는 이미 완벽하게 입증되었습니다!"그러나 목에 핏대를 세우는 도진의 열변에도 불구하고,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파티장의 분위기를 돌이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자산가들과 투자자들은 냉소적인 눈빛으로 내밀어진 서류를 툭 내팽개치거나 쯧쯧 혀를 차며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공식 정부 문서? 어이구, 남미 관료들 호주머니에 돈 몇 푼 넣어주면 서류 만들어주는 건 일도 아닌데 누구를 바보로 아나.""그러게 말입니다. 앤더슨 교수가 불합격 보고서를 썼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요."
파티장 로비의 눈부신 역광을 뚫고 들어선 두 사람을 보며, 강도진은 한참 동안 이지수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혼 후 공식 석상에서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그 지수가 CB의 연말 갈라 파티장에 직접 발을 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까닭이다.도진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지수의 우아한 딥 네이비 실크 드레스뿐만이 아니었다. 지수가 가볍게 클러치를 쥐고 있는 왼손 손가락, 그곳에서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였다.'영원한 사랑'과 닮은 듯하면서도 완벽하게 다른 디테일.희귀한 핑크 다이아몬드를 중심으로 촘촘한 세공이 보석의 입체감을 극대화한 독보적인 반지는, 얼마 전 지수가 SNS에 사진을 올려 사교계의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던 바로 그 디자인이었다. 마침내 그 반지가 실물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멍하게 반지를 내려다보던 도진의 신경을 사정없이 깨운 것은 모친 김미자의 날카로운 비명이었다."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냐!"김미자의 히스테릭한 목소리에 이어, 그 곁에 서 있던 부친 강수한 회장의 묵직하지만 조심성 없는 호통이 날아들었다."넌 어른을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어디서 못된 버릇이냐!"그러나 지수는 그들의 거친 고함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는 듯 그들을 차갑게 지나쳐, 연회장 안쪽에서 지수를 반갑게 바라보고 있던 강인주 여사에게로 걸어갔다. 제이아우라 시크릿
김미자의 고집과 독단은 파티 준비 단계부터 스태프들과 정지상 팀장의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뜯게 만들었다.정지상이 기획했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미니멀리즘 연출안은 김미자의 손에 들어간 지 단 10분 만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미자는 호텔 대연회장 입구부터 촌스러운 대형 금빛 아치와 요란한 원색 조명을 도배했고, 사교계 사모님들의 눈길을 사로잡겠다며 CB의 신상 드레스와 보석들을 조잡하게 나열한 초대형 디스플레이 존을 강행했다."사모님,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겉으로는 CB의 연말 갈라 파티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이 자리의 본질은 남미 광산 유치를 위한 거액 투자자들을 위한 자리라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정지상의 절박한 건의에도 김미자는 명품 클러치를 쥔 손끝을 까딱거리며 비웃음을 날렸다."내가 설마 그것도 모를까 봐 그래? 어휴, 답답하긴! 투자가들도 우리가 가진 재력과 세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안심하고 선뜻 투자할 마음이 생기지 않겠어? 그리고 또! 그 투자가들이 혼자 오니? 다 자기 마누라나 파트너 손 잡고 와. 생각보다 그 안사모님들 입김이 사업 결정에 얼마나 센지 네가 잘 몰라서 그래!""하지만 사모님, 이건…….""토 달지 마! 어디서 감히 대표 모친이 지시하는 일에 일일이 토를 달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해!"결국 파티장은 품격 있는 명품 투자설명회의 무대가 아닌, 억지로 자본력을 과시하려 애쓰는 기괴하고 조잡한 삼류 연회장으로 변질되어 갔다.
"강 대표님, 내밀어 주신 사업계획서 상의 남미 광산 매장량 추정치만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성공만 하면 그야말로 대박이겠어요."고급 한정식집의 프라이빗 룸. 묵직한 정적 속에서 자산운용사의 이 이사는 도진이 내민 서류를 손끝으로 넘기며 감탄사를 내뱉었다.도진은 속으로 긴장의 끈을 조이며 조심스럽게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상대의 표정이 꽤나 긍정적으로 보였기에, 이번만큼은 기류가 흐뭇하다고 믿고 싶었던 까닭이다."그렇습니다, 이 이사님. 이미 1차 지질 조사와 현지 브로커 선점까지 완벽하게 마친 상태입니다. 초기 개발 자금만 빠르게 확보된다면 내년 상반기부터 본격적인 채굴과 대대적인 유통망 확보가 가능해집니다."도진은 기회를 놓칠세라 품속에서 정식 투자 계약서를 꺼내 들고, 차분한 태도를 가장하며 테이블 위로 스르륵 밀어 넣었다."오늘 이 자리에서 확약서에 도장만 찍어주신다면, 자금 집행 및 수익 배분 조건은 운용사 측의 요구에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그러나 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은한 가야금 소리가 흐르던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이 이사는 허허 싱거운 실소를 흘리며 슬그머니 찻잔을 내려놓더니, 도진이 밀어 넣은 계약서를 손끝으로 슬쩍 당겨 다시 도진 쪽으로 밀어냈다."아이고, 강 대표님. 마음이 너무 급하시네. 이렇게 수백억 원이 들어가는 초대형 사업인데, 우리가 서류 몇 장 보고 오늘 당장 인감도장을 찍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기쁘지... 않아?" 수진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도진은 굳어있던 안면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껍데기뿐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기괴하게 자리 잡았다. "당연히 기쁘지. 내일 병원 갔다가 아기용품부터 보러 가자. 전에 네가 갖고 싶다던 한정판 가방도 사줄게." 그의 다정한 음성에 수진은 안심한 듯 도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도진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안의 쓴 침을 삼켰다. 수진과 밀회를 즐기면서도 잠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피임을 챙겼던 자신이었다. '임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아를 제
지수는 도전에게 연락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119를 불렀다. 하지만 출산이 임막한 임산부처럼 부푼 배때문에 혼자서 움직이는 것조차 무리였다. 지수는 필사적으로 옆방에 잠든 가정부를 불렀다."아줌마 아줌마...! 하아, 남 좀... 도와주세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문트에 타고 넘고오는 가정부의 코고는 소리뿐이었다. 이것이 이 집에서 지수의 위치였다. 남편의 무관심 속에 고용인에게조차 무시당하는 철저한 그림자 같은 아내.지수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K국에 있는 부모님이나 오빠에
평번한 여대생이었던 '이지수'의 세상은 '강도진'은 만나고 완전히 변했다.언제나 부모님과 오빠의 과잉보호 속에 기사님이 태워 주시는 차와 가정부의 가사 관리 속에만있던 지수에서 생애 처음으로 모든일은 스스로 하는 생활은 힘들고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큰차가 아닌 작은차에 적응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친구도 만날겸 지수가 타고다니는 경차 동호회에 가입하였다. 그곳에서 지수는 스물둘의 강도진을 만났다. 도진은 185의 훤칠한 키에 다부진 어깨, 오똑한 콧날에 강아지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