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진우가 근무하는 HN은행 근처의 조용한 카페. 진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슬비를 바라보았다. 슬비는 지현의 비서답게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진우씨"
진우는 서류를 열어보려다가 멈칫하며 슬비를 응시했다.
"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그리고 이지현태표님의 비서께서 왜 저를 찾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은행은 GS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슬비는 차갑지만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며 서류봉투를 눈짓했다. 거기에는 슬비가 미리 준비한 진우의 '진짜' 이력서가 들어있었다. 진우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와튼 스클 수석 졸업, 뉴욕 월가에서 '미다스의'손이라 불리던 박진우씨가 왜 HN은행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 자신을 가둬두고 계신지 궁금하더군요."
슬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내용은 날카로운 송곳 같았다.
"박진우 씨가 직접 설계했던 '퀀트알고리즘'기반의 투자 성공률운 경의로운 수준이었습니다. 누적 수익률 130%,연속 12분기 흑자, 업계에서는 아직도 당신을 찾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전략기획팀장이라는 명함튀에 숨어계시네요."
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슬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우리는 당신에게 RV인베스트먼트의 대표이사자리를 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곳은 당신에게는 작은 놀이터일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시작을 시작하기에는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진우는 순수하고 회사에 찌들어있던 회사원의 모습에서 데이터를 분석하는 투자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제 뒷조사를 하신건가요? 그건 넘어가 드리지요. 하지만 지금의 RV는 가망이 없습니다. RV에서 투자한 곳이라고해도 CB그룹의 작은 프로젝트들 뿐이지. 그리고 그 프로젝트들의 성공여부도 불확식합니다. 그런 부실투자사에 갈 의향은 없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거기에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으나 곧 정리될 예정이니 팀장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RV를 아신다니 그곳의 자금력정도는 알고계시겠지요?"
진우는 잠시 고민을 하다 대답했다.
" 왜 하필 저인가요?"
"우리는 RV가 새로이 탄생하길 위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에 가장 적합한 심장이 박진우씨라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슬비의 확신에 찬 말에도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다시 데이터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는 피비린내 나는 곳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슬비는 더는 진우를 설득하지 않고 일어났다. 빗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진우는 잊었다고 믿었던 과거의 망령에 휩싸였다. 코를 찌르는 메케한 화염 냄새, 쉬를 찢는 비명, 그리고 화면 너머러 쏟아지던 네티즌들의 칼날 같은 비난들. 지우고 싶었던 과거는 비가 내리는 습한 공기를 타고 더욱 또렷한 형체가 되어 진우의 숨통을 조였다. 어느새 붉게 충혈되 눈으로, 진우는 고통을 짓씹으며 인파속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진우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가는 모습은 수진이 7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지방 출장을 가서 자정이 넘는 시간이라 해도 진우는 반드시 집에 돌아왔다. 제 감정보다는 수진과 아이들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늘 제자리에 서 있던 남자였다.하지만 수진은 그런 진우의 낯선 모습이 오히려 반가웠다. 자신을 희생하며 성인군자처럼 굴던 진우의 모습은, 타인의 눈에는 부러운 남편일지 몰라도 수진에게는 '너도 나처럼 희생하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수진은 진우의 부재를 '일탈'이 아닌 '항복'으로 여겼다.다음 날 아침, 수진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머리맡에 앉아 자신을 깨우는 엄마를 보며 현수가 환하게 웃었다.“엄마! 아침부터 엄마를 보니 오늘은 분명 아주 많이 행복한 하루가 될 거예요.”사랑스러운 아들을 끌어안으며 정수리에 입을 맞추는 수진은 그 순간만큼은 자애로운 엄마였다. 하지만 현수가 품에서 빠져나와 당연하다는 듯 아빠를 찾자, 공기는 순식간에 서늘해졌다.“아빠는 안 계셔. 오늘은 엄마가 씻겨주고 유치원도 데려다줄 거야.”“……엄마가요?”현수의 눈에 찰나의 당혹감이 스쳤다. 수진이 조심스레 현수의 옷을 벗기려 하자, 아이는 어색한 듯 몸을 움츠렸다.“엄마, 노래는요? 아빠는 항상 노래 불러주면서 씻겨 줬어요. 그리고…… 물이 조금 차가워요.”
산부인과에서 들었던 “축하합니다.”라는 의사의 음성. 도진의 보호를 받으며 들어섰던 명품관의 서늘하고 고급스러운 공기.서너 개의 화려한 쇼핑백을 팔목에 걸친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진은 복도식 아파트 현관에 들어섰다.코 끝에 스며드는 눅눅한 습기 냄새와 오래된 페인트 향. 그것은 방금까지 도진의 마세라티 조수석에서 느꼈던 우아한 우디 향과 안락함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것이었다. 팔에 걸린 쇼핑백이 아니었다면, 낮 동안 누린 그 모든 것이 허상이며 이곳이 네가 있어야 할 비루한 현실이라며 날카롭게 일깨우는 듯했다.흥얼거리던 콧노래는 어느새 짧은 욕설로 바뀌었고, 기쁨의 미소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찡그림으로 변했다. 수진에게 이 낡은 아파트는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닌, 탈출해야 할 감옥이었다.“현수야, 현지야! 엄마 왔어!”수진은 좁은 현관에 어지럽게 널린 아이들의 신발을 발로 치우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들고 있던 화려한 쇼핑백들은 거실 한복판에 툭 던져졌다.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일어섰다. 거실 불도 켜지 않은 채 식탁에 앉아 있던 진우였다.“이제 왔어?”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의 앞에는 식어버린 국 한 그릇과 정갈하게 깎아놓았지만 이미 갈변해버린 사과 몇 조각이 놓여 있었다. 수진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면서도, 진우는 퇴근 후 내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왜 불도 안 켜고 있어? 사람 놀라게.”“현수는 방금 잠들었어. 너 기다리다가…… 아빠가 사준 장남감은 싫다면서 울다가 겨우 달래서 재웠어.”진우의 시선이 수진의 목에 걸린, 처음 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머물렀다. 화를 참듯 주먹을 꽉 쥔 진우의 눈에 거실 벽면의 낡은 액자가 들어왔다.
그날 밤, 도진은 지수가 처음 임신 사실을 알렸던 그날처럼 한 손에는 화려한 꽃다발을, 다른 한 손에는 망고 케이크 상자를 들고 귀가했다. 하지만 도진이 준비한 장미는 붉은색이 아니었다. 거실 스탠드 불빛 아래 놓인 꽃잎은 창백한 노란색이었다. 노란 장미.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도진은 현관에서부터 집안의 적막을 살폈다. 거실 한쪽, 태블릿 PC의 빛에 의지해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지수의 옆모습이 보였다. 느슨하게 올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 그리고 고심하는 듯한 오뚝한 콧날. 도진은 그 서늘하고도 우아한 옆얼굴에서 어째서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집요한 시선을 느낀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말없이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비즈 함과 스케치 패드를 정리했다. 도진에게는 무해한 취미로 보이겠지만, 지수에게는 무너진 디자인 감각을 되찾기 위한 필사의 수행이었다.“일찍 올 줄 몰랐어. 저녁 준비 하려면 시간 좀 걸려. 씻고 와.”지수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무감했다. 도진은 가슴 한구석이 찌릿한 불편함을 느꼈지만,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애써 미소 지었다.“저녁은 됐어. 네가 좋아하는 망고 케이크 사 왔는데, 같이 한잔하자.”도진이 건네는 장미와 케이크를 받아들던 지수의 손끝이 움찔했다. 장미가 노란색인 것을 확인한 지수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지수의 시선을 읽은 도진이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별 의미 없어. 오늘은 노란 장미가 싱싱해서 선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아를 제외한 부속기관만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질환입니다. 안타깝지만 태아는 자라지 않기때문에 소파술만이 유일한 치료방법 입니다" 순간, 지수의 세상이 암전되었다. 충격으로 정신을 잃어가는 지수를 붙잡으며 도진이 비명 섞인 질문을 던졌다. "검사가 잘 못 되었을 가능성은 없나요?오진일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의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맞이한 것은 하얀 병실 천장과 소독약 냄새였다. 도진은 지수의 손을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지수야, 다른 병원 가보자. 여긴 돌팔이가 분명해. 우리아이가 자라지 않다니, 그게 말이 돼?" 도진의 절규 섞인 슬픔 앞에 지수는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후 찾아간 세 군데의 병원에서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후 지수는 비로소 입을 뗏다. "소파술 받겠습니다." 도진은 경악한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 조금만 더 기다려 보면 혹시라도....!" 지수의 눈빛은 단호했고,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나 간호학 전공이야 거기다 부인과에 관심이
"기쁘지... 않아?" 수진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도진은 굳어있던 안면 근육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껍데기뿐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기괴하게 자리 잡았다. "당연히 기쁘지. 내일 병원 갔다가 아기용품부터 보러 가자. 전에 네가 갖고 싶다던 한정판 가방도 사줄게." 그의 다정한 음성에 수진은 안심한 듯 도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도진은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안의 쓴 침을 삼켰다. 수진과 밀회를 즐기면서도 잠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피임을 챙겼던 자신이었다. '임신이라고?' 머릿속에 의구심이 뱀처럼 똬리를 틀었지만, 도진은 애써 부정했다. 어쩌면 이건, 지수를 주사기 무덤에서 구원해줄 선물이라고 스스로를 속였다."그런건 괜찮아 하지만 우리 아이가 사생아 소리 들을까.... 그게 걱정이야하지만 나는 너와 지수씨를 사의가 나빠지길 원하는 건 아니야." 수진의 자책하는 말투가 평소에는 자신을 향한 애정과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지금의 도진에게는 그저 무거운 납덩어리처럼 다가왔다. 이혼과 사생아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도진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어린 시절 여성편력이 심했던 아버지때문에 힘들어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자신은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하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단지 도진 자신만이 그 잔인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진에게 '아내'란, 처음부터 끝까지 지수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 문제는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아버지는 어머니를 울렸지만, 나는 지수를 울리지는 않아, 지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는 여전히 지수만을 사랑해.' 도진은 술잔 속에 비친 자신의 비겁한 눈을 피했다. " 너는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아를 제외한 부속기관만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질환입니다.안타깝지만 태아는 자라지 않기때문에 소파술만이 유일한 치료방법 입니다."순간, 지수의 세상이 암전되었다. 충격으로 정신을 잃어가는 지수를 붙잡으며 도진이 비명 섞인 질문을 던졌다."검사가 잘 못 되었을 가능성은 없나요?오진일 수도 있잖아요!"하지만 의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지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맞이한 것은 하얀 병실 천장과 소독약 냄새였다.도진은 지수의 손을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지수야, 다른 병원 가보자. 여긴 돌팔이가 분명해. 우리아이가 자라지 않다니, 그게 말이 돼?"도진의 절규 섞인 슬픔 앞에 지수는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후 찾아간 세 군데의 병원에서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마지막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후 지수는 비로소 입을 뗏다."소파술 받겠습니다."도진은 경악한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지수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 조금만 더 기다려 보면 혹시라도....!"지수의 눈빛은 단호했고,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나 간호학 전공이야 거기다 부인과에 관심이 많아서 제일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