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슬비를 만나고 잠시 RV에서 현재까지 도진의 회사에 투자된 내역을 훝어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지수는 아랫쪽의 축축한 감각에 번쩍 눈을 떳다.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한 것이다.
임신이라는 희망이 이내 절망으로 뒤바뀌는 이 지독한 상실감은, 몇번을 겪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일찍 돌아온 도진은 지수를 찾으며 방문을 열었을때 무기력하게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는 지수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 시술은 유난히 지수를 갉아먹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된 지수를 보며, 힘들었을 순간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도진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진은 한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가 이내 지수의 곁에 앉아 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네 번의 시술이 실패할때마다 반복된 광경이었다. 지수를 향한 애정은 이미 빛바랜 지 오래였으나, 그 또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매 번 희망이 사라질때의 절망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도진도 이런 상황에서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지만 지수를 혼자 남겨둘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병원 같이 못다녀줬었잖아. 미안해. 다음에는 꼭 같이 다니자. 내가 조금 더 신경쓸게"
도진의 작은 속삭임에 지수는 본능적으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비극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었기에.
하지만 그 온기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수진에게 역락이 왔다. 도진은 지수의 젖은 속눈썹을 잠시 살피다, 진동이 울리는 주머니를 움켜줘었다. 그는 지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정리해준 뒤 이마에 가벼운 입무춤을 남긴 그는 서둘러 전화를 받으러 방을 나섰다.
"도진씨 나 이사 끝났어. 아이들 데릴러 갈 껀데 같이 가면 안될까? 오늘 큰애 생일이야. 같이 저녁 먹고 싶어"
수진의 말에 눈살일 찌푸리던 도진은 닫힌 방문을 보며 대답했다.
"오늘은 안 돼. 지수 옆에 있어야해."
" 정말 안 돼는 거야? 나 당신한테 할 이야기도 있는데. 중요한 말이야"
도진은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전화를 끊으며 집을 나섰다.
도진과 수진은 수진의 아이들과 함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갔다.
"현수야, 아저씨가 사준 케이크 진짜 맛있지? 아저씨는 우리 현수가 원하는 건 다 해줄 수 있는 분이야. 그치?"
수지은 현수에게 '도진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세뇌하듯 속삭였다. 평범한 은행원인 남편 진우와 이혼하고 도진의 곁으로 옮겨가기 위해선, 아이가 도진을 아빠보다 더 좋아한다는 명분이 필요했고 이는 양육권을 가져오는 중요한 열쇠였다. 하지만 현수는 딸기를 씹다 말고 도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아이 특유의 맑은 눈동자로 물었다. "근데 엄마, 아빠는 퇴근하면 나랑 공놀이도 해주고 같이 웃어주는데... 이 아져씨는 왜 계속 시계만 봐요? 우리랑 있는거 재미없나 봐요."도진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평범한 은행원 따위와 비교당하는 것도 불쾌했지만, 다섯 살 아이의 눈이 자신의 위선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이 더 역겨웠다. 수진은 당황황하며 현수의 입에 스테이크를 밀어 넣었다. "현수야! 아저씨 바쁜 분이라 그랬지? 아빠처럼 맨날 은행에만 있는 분이 아니야." "그리고 아저씨 덕분에 이렇게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도 먹을수 있는거야. 아빠랑 함께했으면 작년처럼 집에서 생일 보냈을텐데. 현수는 그런게 좋아? 아저씨는 이렇게 멋진 장난감도 사주는 데 아빠는 이런거 못해주잖아." 수진의 날카로운 비교에 현수는 손에 든 화려한 장난감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짧은 고민 끝에 돌아온 대답은 잔인했다. 현수는 화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아빠는 맨날 다음에 사준다고만 해요. 전 그런 거짓말쟁이 아빠는 싫어요." 현수의 말 한마디에 도진의 굳어있던 미간이 스르르 풀렸다. 자신을 향한 아이의 거부감이 돈과 권력 앞에 굴복하는 것을 확인하자, 묘한 정복감마져 느껴졌다. 수진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안심하며 아이들을 챙겼다.도진은 그 모습을 보다 '지수도 아이가 있었다면 저런 모습이었겠지?' 하며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지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씁쓸한 미소로 지워내며 수진의 모습을 지켜봤다."오늘 중요한 이야기 있다고 안 했어?"
수진은 멈짓 하더니 가방에서 임신테스트기를 꺼냈다. 아이들의 해막은 웃음소리 사이로 수진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현수야, 현지야. 너희 이제 예쁜 동생 생길거야."
수진이 아이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준 뒤 시건을 돌려 도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진씨, 나 당신 아이 가졌어."
스테이크를 자르던 도진의 손이 멈추었다. 접시위로 나이프가 긁는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지수가 시술을 실패해 무너졌던 바로 오늘, 결코 원하지 않았던 곳에서 새로운 생명일 싹을 틔우고 있었다. 도진의 눈빛은 형용할 수 없는 혼란으로 가득 찼다.
CB 그룹 자체 세공 총괄 팀과, 국내외에서 손꼽히는 유명 외주 세공소 세 곳으로 긴급히 보냈던 남미 에메랄드 원석의 교차 검증 결과와 가공 완료 실물이 드디어 하나씩 본사 대표이사 집무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A 바이어 측이 보내온 20% 수율 보고서를 보며 '그쪽 세공사들의 기술력이 부족하거나 원석 컷팅 레이아웃을 잘못 잡은 탓'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던 강도진의 마지막 희망은, 며칠에 걸쳐 쏟아져 들어온 감정서들과 실물 보석 상자 앞에서 사정없이 짓밟히고 말았다.도진은 핏발 선 눈으로 마른 침을 삼키며,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감정 보고서들을 하나씩 들춰보았다.[CB 내부 세공 총괄팀 1차 감정서: 원석 내부 미세 균열(Fissures) 및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던 내포물 분포 심각. 보석급 컷팅 진행 시 최종 수율 19.4% 판정.][해외 전문 세공소 B사 감정서: 에메랄드 원석 특유의 결정 결함으로 인한 가공 손실 극대화. 예상 수율 20.1% 수준.][국내 대표 보석가공소 C사 감정서: 평균 수율 18.7%. 세공 공정비 및 위험 부담 감안 시 상업적 가치 대폭 하락.]어느 세공소를 거쳐도 결과는 잔인할 정도로 일관되었다. 한결같이 20% 내외라는 처참한 수치만이 붉은 날인과 함께 감정서 하단에 박혀
시크릿룸을 채운 묵직한 중압감과 정적 속에서, 이지수는 차분한 걸음걸이로 전면 유리창 쪽에서 걸어 나와 마호가니 테이블 상석에 우아하게 앉았다.채권자들 역시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채 맞은편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록 전파 차단과 갤러리 같은 인테리어에 잠시 위축되긴 했으나, 그들은 금융계의 뼈굵은 거물들이었다.외부에 비친 CB 그룹은 찰스의 폭로와 여론 악화로 리스크가 계속 늘어나고 있어 불안하긴 하지만, 여전히 남미 에메랄드 광산이라는 대형 호재를 쥐고 있는 거대 기업이었다. 아직 도진의 개인 자산이 바닥나 회사 비상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내부 파산 위기까지는 알지 못했기에, 채권자들은 자신들이 CB의 목줄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완벽한 '갑(甲)'의 위치에 있다고 믿으며 기고만장한 태도로 일제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이지수 대표. 직설적으로 말하겠소. 우리가 오늘 여기 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CB 그룹의 채권을 넘겨 달라는 해외 투자자들의 연락이 쇄도했소.""맞습니다. CB 그룹이 아무리 흔들린다 한들 남미 에메랄드 광산이라는 거대한 자산을 쥐고 있는 기업이오. 거래를 선택할 권리는 전적으로 우리 채권단에게 있다는 뜻입니다."거만한 목소리들이 방 안을 울렸지만, 지수는 그들의 말에 단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았다.지수는 그저 다기(茶器)를 집어 들고, 평소 즐기는 어린 찻잎으로 떫은맛이 적고 우아한 향이 일품인
정지상이 산산조각 난 태블릿 파편을 조용히 주워 담아 나간 뒤, 싸늘한 정적이 감도는 집무실에서 강도진은 핏발 선 눈으로 모니터 화면 속 자산 현황표를 멍하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남미 에메랄드 광산 측에서 요구한 추가 자금을 보내기 위해 그룹 재무팀과 개인 자산 관리인에게 명의로 된 모든 계좌와 유휴 자산을 끌어모으라 지시한 결과가 스크린 위에 띄워지고 있었다.숫자를 하나씩 확인해 내려갈 때마다 도진의 안색에서는 핏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 푸르스름한 흙빛으로 변해갔다."……이게 끝이라고? 내 개인 자산과 부모님 명의의 채권까지 다 합친 게 겨우 이것뿐이야?!"도진은 목을 죄어오는 듯한 답답함에 거친 손길로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단추가 튕겨 나갔지만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남미 에메랄드 광산 지분을 매입하고 현지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들어간 비용도 천문학적이었지만,
찰스가 병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한 회개 영상과, 그와 동시에 인터넷 전역에 터져 나온 강도진과의 최후 통화 음성 녹음 파일은 전국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첫 번째 공개되었던 파일이 도진도 찰스의 표절을 사전에 알고 방조했다는 증거였다면, 이번에 공개된 파일은 찰스를 사지로 몰아넣은 도진의 가혹한 꼬리 자르기가 그대로 담긴 결정타였다. "죽으려면 혼자 죽어. 네가 다 뒤집어쓰고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라고!" 스피커 너머로 울려 퍼지는 강도진의 잔혹한 목소리는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와 메인 뉴스 헤드라인을 순식간에 도배했고, 중립을 지키며 관망하던 대중의 민심은 완벽하게 뒤흔들렸다. [단독] '구치소 자살 시도' 찰스 CP, 병실 바닥 무릎 꿇고 사죄… "모든 죄는 내게, 하지만 강도진을 용서 못 해" [사회] 찰스 2차 통화 폭로… "죽으려면 혼자 죽어, 네가 다 뒤집어써" 강도진 폭언 정황
CB 그룹이 전 세계 언론에 사내 조사 결과와 함께 공개한 남미 광산의 1차 채굴 결과서는 시장을 크게 흔들었다. 영롱한 초록빛 원석 수십 킬로그램의 사진과 지질팀의 서명은 자극적이었다. 대중의 시선은 순식간에 찰스의 피투성이 이송 소동에서 희귀 에메랄드 노다지로 쏠렸고, 자사주 매입과 맞물려 주가는 10만 원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고지전을 이어갔다.그러나 사내 조사 보고서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뒤, 패션 및 디자인계 내부의 분위기는 서늘하기만 했다. 수십 년간 수많은 명품 라인을 배출했던 총괄 디자이너가 구치소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고, 그 뒤에 대표의 표절 방조 음성이 얽혀 있다는 사실은 디자이너 커뮤니티와 명품업계 내부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다. 업계 관계자들은 CB가 발표한 '찰스 개인의 일탈'이라는 사내 조사 보고서를 보며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어쩜 이런 깜찍한 생각을 했을까."지수의 사무실 맞은편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진우는 차분하게 커피를 마시며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지수는 CB의 에메랄드 컬렉션 [Imperial Emerald: 왕좌의 빛] 정식 사전 예약 개시일에 맞춰, 법원에서 완전히
A국 중앙지방법원에서 직접 판결문을 확인하고 돌아온 제이아우라 대표실에는 정적과 함께 승자의 서늘한 여유가 감돌고 있었다.이지수는 앤티크 프레임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판결문 원본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법정에서 강도진의 핏기 없는 얼굴과 이를 악물던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지만, 지수의 표정에는 격정적인 환희 대신 당연한 이치를 확인했을 때의 담담함만이 서려 있었다."당연한 결과입니다."지수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소파 건너편에 앉아 있던 박성재 변호사와 법무팀 팀원들이 감격 어린 얼굴로 지수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이 당연한 결과를 법정에서 깔끔하게 입증해 주신 건 박성재 변호사님과 법무팀 여러분이죠. 그동안 CB의 치졸한 법적 공작을 막아내느라 다들 정말 애쓰셨습니다."지수는 책상 위 서류함에서 사전에 준비해 둔 봉투들을 꺼내 법무팀원들에게 일일이 건넸다. 그 안에는 당초 약속했던 성과금보다 훨씬 넉넉한 액수의 수표가 들어 있었다.
전날 시어머니에게 수모를 당하고 돌아온 지수는 K국에 있는 오빠 이지현에게 연락을 했다. " 오빠~ 잘 지내? 너무 오랫만에 연락했지? 실은 나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서 ...." 지금 K국은 아침 6시였다. 지현은 시차도 잊은 채 걸려온 동생의 목소리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우리 공주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 줘야지. 무슨 일인데. 말만해. 오빠가 다 처리해 줄께."여전히 자신을 아껴주는 오빠의 음성이 지수는 목이 메었지만, 간신히 감정을 억눌렀다. " 오빠 나 아이가 생기면 혼자서 회사를 운영하기
3일간 안정을 취한 지수는 외출준비를 서둘렀다.거울 앞에 선 지수의 차림새는 단조로웠다. 연한 하슬색 원피스에 검은색 C사의 핸드백이 전부였다. 초췌해진 얼굴은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ㅇ낳았고 푸석해진 머릿결과 여전희 볼록하게 남아있는 복부는 지수를 실제보다 훨씬 지쳐보이게 했다.누가 이모습을 보고 스물여덟의 꽃다운 나이라 할까. K국의 공주님으로 불리던 지수는 이제 A국의 가정부보다 못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지수는 거울 속 낯선 여자를 뒤로 한채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집을 나섰다.그녀의 차는 도진이 3년전 결혼 기념으로 사준
7일간 입원 치료를 마치고 영양제로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지수는 배아 이식을 끝내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도진에게서는 단 한통의 연락도 없었다.지숙 역시 먼저 손을 내밀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적막하고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거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지수의 귓가에 가정부의 은밀한 전화 통화 소리가 드려왔다."네 사모님 진짜라니까요. 그 여자가 일주일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분명 다른 남자가 생긴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사장님은 방치할수는 없는 거죠 . 네 ,맞아요 제가 어떻게 사모님께 거짓말을 할
도진과 전화를 마친 지수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휴대폰을 조작했다. 익숙한 번호가 아닌, 철저히 숨겨두었던 가른 번호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실장인 혹시 오늘 CB 그룹과 투자 회의가 잡혀 있나요? "라고 물었다. " 네 사장님. 오늘 오후에 미팅이예정되어 있습니다. 혹시 변동사랑이 있으신가요?지수의 입가에 서늘안 미소가 번졌다. 도진이 그토록 화를 내며 중요하도고 외쳤던 미팅은 역시나 지수의 RV인벤스먼트와의 미팅이었다. " 네 변동 사항이 있습니다. 미팅은 그대로 진행해 주세요. 대신 계약서에 싸인은 하지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