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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희망은 실망으로

Author: 릴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3 13:30:10

슬비를 만나고 잠시 RV에서 현재까지 도진의 회사에 투자된 내역을 훝어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지수는 아랫쪽의 축축한 감각에 번쩍 눈을 떳다.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한 것이다. 

임신이라는 희망이 이내 절망으로 뒤바뀌는 이 지독한 상실감은, 몇번을 겪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일찍 돌아온 도진은 지수를 찾으며 방문을 열었을때 무기력하게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는 지수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 시술은 유난히 지수를 갉아먹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된 지수를 보며, 힘들었을 순간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도진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진은 한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가 이내 지수의 곁에 앉아 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네 번의 시술이 실패할때마다 반복된 광경이었다.  지수를 향한 애정은 이미 빛바랜 지 오래였으나, 그 또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매 번 희망이 사라질때의 절망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도진도 이런 상황에서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지만 지수를 혼자 남겨둘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병원 같이 못다녀줬었잖아. 미안해. 다음에는 꼭 같이 다니자. 내가 조금 더 신경쓸게"

도진의 작은 속삭임에 지수는 본능적으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비극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었기에. 

하지만 그 온기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수진에게 역락이 왔다. 도진은 지수의 젖은 속눈썹을 잠시 살피다, 진동이 울리는 주머니를 움켜줘었다. 그는 지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정리해준 뒤 이마에 가벼운 입무춤을 남긴 그는 서둘러 전화를 받으러 방을 나섰다.

"도진씨 나 이사 끝났어. 아이들 데릴러 갈 껀데 같이 가면 안될까? 오늘 큰애 생일이야. 같이 저녁 먹고 싶어"

수진의 말에 눈살일 찌푸리던 도진은 닫힌 방문을 보며 대답했다.

"오늘은 안 돼. 지수 옆에 있어야해."

" 정말 안 돼는 거야? 나 당신한테 할 이야기도 있는데. 중요한 말이야"

도진은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전화를 끊으며 집을 나섰다.

도진과 수진은 수진의 아이들과 함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갔다.

"현수야, 아저씨가 사준 케이크 진짜 맛있지? 아저씨는 우리 현수가 원하는 건 다 해줄 수 있는 분이야. 그치?"

수지은 현수에게 '도진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세뇌하듯 속삭였다. 평범한 은행원인 남편 진우와 이혼하고 도진의 곁으로 

옮겨가기 위해선, 아이가 도진을 아빠보다 더 좋아한다는 명분이 필요했고 이는 양육권을 가져오는 중요한 열쇠였다.

하지만 현수는 딸기를 씹다 말고 도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아이 특유의 맑은 눈동자로 물었다.

"근데 엄마, 아빠는 퇴근하면 나랑 공놀이도 해주고 같이 웃어주는데... 이 아져씨는 왜 계속 시계만 봐요? 우리랑 있는거 재미없나 봐요."

도진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평범한 은행원 따위와 비교당하는 것도 불쾌했지만, 다섯 살 아이의 눈이 자신의 위선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이 더 역겨웠다.

수진은 당황황하며 현수의 입에 스테이크를 밀어 넣었다.

"현수야! 아저씨 바쁜 분이라 그랬지?  아빠처럼 맨날 은행에만 있는 분이 아니야."

"그리고 아저씨 덕분에 이렇게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도 먹을수 있는거야. 아빠랑 함께했으면 작년처럼 집에서 생일 보냈을텐데. 현수는

그런게 좋아? 아저씨는 이렇게 멋진 장난감도 사주는 데 아빠는 이런거 못해주잖아."

수진의 날카로운 비교에 현수는 손에 든 화려한 장난감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짧은 고민 끝에 돌아온 대답은 잔인했다. 현수는 화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아빠는 맨날 다음에 사준다고만 해요. 전 그런 거짓말쟁이 아빠는 싫어요."

현수의 말 한마디에 도진의 굳어있던 미간이 스르르 풀렸다. 

자신을 향한 아이의 거부감이 돈과 권력 앞에 굴복하는 것을 확인하자, 묘한 정복감마져 느껴졌다. 

수진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안심하며 아이들을 챙겼다.

도진은 그 모습을 보다 '지수도 아이가 있었다면 저런 모습이었겠지?' 하며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지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씁쓸한 미소로 지워내며 수진의 모습을 지켜봤다.

"오늘 중요한 이야기 있다고 안 했어?"

수진은 멈짓 하더니 가방에서 임신테스트기를 꺼냈다. 아이들의 해막은 웃음소리 사이로 수진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현수야, 현지야. 너희 이제 예쁜 동생 생길거야."

수진이 아이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준 뒤 시건을 돌려 도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진씨, 나 당신 아이 가졌어."

스테이크를 자르던 도진의 손이 멈추었다. 접시위로 나이프가 긁는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지수가 시술을 실패해 무너졌던 바로 오늘, 결코 원하지 않았던 곳에서 새로운 생명일 싹을 틔우고 있었다. 도진의 눈빛은 형용할 수 없는 혼란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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