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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D-5

作者: 릴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3 13:29:57

아침에 일어난 지수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옆자리를 보았다. 몇일 집에 잘 들어오던 도진은 어젯밤 들어오지 않았다.

생리가 시작하기 전에 느껴지는 익숙한 배의 묵직한 불편감에 불안감이 든 지수는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만지며 제발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과 

편하게 강도진을 떠나기 위해 이번에도 실패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양가적인 생각에 웃음이 났다.

잠시 후 오랫만에 슬비를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던 중 가정부의 통화소리가 들렸다.

"사모님 이번에는 사장님께서 가출하신 것 같아요. 집에  안들어 오시네요. 아마 작은사모님께 정이 떨어지신것 같아요."

가정부의 통화 내용에 웃음을 지으며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고 집을 나왔다.

오랫만에 만난 슬비는 예전의 상큼함을 간직하면서 직장인의 당당함을 가지고 있었다. 왜인지 지수는 눈물이 났다.

'도진과 결혼만 하지 않았어도 나도 저렇게 당당하고 멋진 모습을 하고 있을까?' 

괜한 생각을 떨치며 슬비를 안았다.

"너무 보고 싶었어" 

둘은 점심으로 샤브샤브를 먹고 가까운 카페에서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밀린 이야기를 했다. 

그 안에는 지수와 도진의 결혼생활 및 도진이 바람핀 이야기도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난 수진은 가만히 조심스럽게 지수를 안아주며 말했다.

"수고했어... 고생했어... 니가 잘못한건 없어..." 

누구나 할 수있는 작은 위로였지만 그 안에는 그 외엔 어떤 말도 위로가 될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슬비의 작은 배려였다. 그 따스한 배려에 지수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렸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큰 보상이 아닌 이런 작은 위로 하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제 좀 시원해?"

슬비가 건넨 손수건은 이미 지수의 눈물로 푹 젖어 있었다. 지수는 민망한 듯 코를 훌쩍였지만,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맑게 빛났다.

"응. 신기해. 슬비 너를 만나서 실컷 울고나니까, 마음속을 꽉 채우고 있던 돌덩이 하나가 사라진 것 같아."

지수는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그 숨에는 오랫동안 묵혀왔던 도진에 대한 미련과 시댁의 압박 그리고 스스로를 가뒀던 자책이 섞여 있었다.

"사실... 첫 아이 떠나보냈을 때도 나 못 울었거든. 시댁 눈치 보느라, 그리고 나보다 더 상처받은처럼 서럽게 울던 도진씨 때문에...  나까지 울면 주위 모두가 무너져 내릴것 같아서 억지로 삼켰던 눈물들이었더, 근데 오늘 그게 다 씻겨 내려간 기분이야."

지수의 얼굴에 옅은, 하지만 진심 어린 미소가 번졌다. 지독했던 사랑을 끝내고 얻은, 비로소 자유로워진 여자의 얼굴이었다.

반면,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슬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신을 갉아먹었을 친구의 세월이 짐작되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고작 이 정도 위로 한맏이가 듣고 싶어서 그 지옥 같은 시간은 버틴 거야, 너는.'

슬비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삼키며 지수의 차가운 손을 꼭 맞잡았다.

안타까움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지금 지수에게 필요한 건 동정이 아닌 연대임을 알기에 슬비는 짐짓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네가 부탁했던 RV를 맡아줄 적임자 리포트야."

슬비가 담담하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지수는 눈가를 닦아내며 숨을 골랐다. 이제 사적인 감정은 뒤로하고 비지니스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지현 오빠랑 내가 정말 꼼꼼하게 골랐어. 지금 RV의 망가진 포트폴리오를 단번에 살려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 뿐이더라고. 다만, 설득하기 꽤 까다로울 꺼야."

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 안의 서류를 꺼냈다. 화려한 이력과 압도적인 수익률 지표들이 나열된 페이지를 넘기던 지수의 손길이, 마지막 인적 사항과 함께 첨부된

사진 한장에 얼어붙듯 멈췄다.

"어...?"

지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낯설지 않은 얼굴. 아니,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수진의 SNS 구석에서, 행복한 가정의 표본처럼 웃고 있던 그 남자가 서류 속에서 모표정한 얼굴로 지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슬비야, 이 사람.... 혹시 하수진 남편이야?"

지수의 떨리는 목소리에 오히려 당황한 건 슬비였다. 슬비는 급히 서류를 훏어보더니 미처 볼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박진우... 하수진? 세상에, 지수야. 정말이야? 우린 오로지 실력으로만 후보를 추린 건데, 이 사람이 하필 그 여자의 남편이라고?"

지수는 멍하니 사진 속 진우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수많은 인재 중 하필 이 사람이 최적의 카드로 선별되었다는 사실.  이건 단순한 우연이라기엔 너무나도 정교한 운명의 장난 같았다.

지수는 소름이 돋는 팔을 감싸 쥐며, 이내 낮게 읇조렸다.

"아니, 우연이 아니야. 이건 기회야."

지수는 사진 위로 서류 봉투를 덮으며, 슬비를 향해 단호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지수의 눈물은 완전히 말라 있었다.

"슬비야. 이 사람,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사람으로 만들게. 강도진과 하수진이 쌓아올린 그 가식적인 성을 무너뜨릴 가장 날카로운 칼로 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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